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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고요하게 스며들어서 

매번 한 박자 느린 난, 너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느꼈던 

심장 박동의 이름을, 그땐 알 수가 없었다. 

 

 

사랑의 형태, 

 

1화 

: 세 사람의 이야기 

 

 

 

 

 

 

 

 

 

 

 

 

 

 

 

 

 

 

 

 

 

 

 

 

 

 

 

 

 

 

 

"정국아 밥 먹어." 

 

 

 

"어. 내려갈게요."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가는 엄마 뒤로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에 젖은 머리를 아무렇게나 구겨넣은 정국이 발등으로 대충 종아리 물기를 훑으며 1층으로 난 계단을 밟았다. 

 

 

 

일어났냐. 입 안에 있는 계란말이와 함께 건넨 형의 아침 인사를 가볍게 무시한 정국이 그 앞으로 보이는 익숙한 두 머리통을 향해 식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 개의 머리 중 산발이 된 뒷통수를 한 대 치며 그 옆자리에 앉자, 그 반동에 김여주가 물고 있던 햄을 놓쳤다. …아니 썅. 

 

 

 

"…이게 왜 아침부터 시비," 

"너 이번에 브라자 샀더라? 브라자." 

 

 

 

"……" 난데없는 아웃팅에 얼이 빠진 여주의 얼굴이 이내 곧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 개새끼가. 달려드는 여주를 피해 밥그릇을 들고 건너편, 형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긴 정국이 건수를 잡은 듯 입꼬리가 올라간 체 말을 이었다. "뭐야, 나 보라고 침대에 대문짝만하게 펼쳐둔 거 아니었어? 핑크 색깔로 아주 기가 막힌 거 샀던데. 어떻게 된 게 초딩때랑 취향이 똑같냐?"  

 

 

 

"여주 또 커튼 안 치고 잤구나." 

"거 버릇 좀 고치라니까." 

 

 

 

익숙한 듯 이어지는 정우의 말과 서윤의 말에도 도끼눈을 뜨고 정국을 노려보던 김여주가 씩씩거리며 밥그릇에 얼굴을 쳐 박았다. 독립을 하던가 해야지. 작게 궁시렁거리는 말을 빠짐없이 주워 들은 정국이 픽, 웃음을 흘리며 하나 남은 계란말이를 집어 그 밥그릇 속으로 던지며 서윤에게 물었다. 

 

 

 

"너네 엄마는?" 

"이모 오늘 일찍 출근하심." 

 

 

 

서윤의 오른쪽에서 들려오는 심통난 목소리에 "너한테 물어본 거 아닌데?" 하며 전정국이 끝까지 김여주의 열을 올렸다. 거칠어진 수저질 소리에 킬킬거리는 정국을 한심하게 쳐다 본 서윤이 바닥에 떨어진 밥알을 주우며 말했다. 

 

 

 

"근데 여주야." 

"왜." 

"너 오늘 1교시 실기라고 하지 않았냐?" 

 

 

 

"…아 미친." 계란말이를 뱉으며 밥그릇을 싱크대에 던지다시피 집어넣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정우가 "여주야." 부르니 돌아보는 품 속에 식탁 위에 굴러다니던 빵 봉지를 던졌다. 정신 사납게 현관으로 뛰쳐 나가는 모습을 눈으로 쫓던 정국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사람 되려면 멀었어 저건.  

 

 

 

 

 

 

 

 

 

 

 

 

 

 

 

 

 

 

 

 

 

 

"…아오 죽겠다." 

 

 

 

"수고했어." 볼에 닿는 찬 기운에 움찔거리며 눈을 뜨니 윤재 선배가 캔 음료를 들고 곁에 앉아 있었다. 몸을 천천히 일으켜 '고맙슴다.' 싸가지 없이 대충 인사를 하며 목구멍에 음료를 때려 부었다. 추한 내 모습이 웃긴건지 작게 웃음을 뱉던 선배가 이마에 약한 딱밤을 날렸다.  

 

 

 

"그러니까 아침에 일찍 좀 다녀. 맨날 너랑 뒷정리 하니까 지겨워 죽겠어. 나도 좀 다른 애들이랑 해보자."  

"다 선배를 독차지 하기 위한 저의 큰 그림인데요." 

"…말이나 못하면." 

 

 

 

한 두 마디 농담을 주고 받으며 땀을 식히니 타이밍 좋게 서윤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김여주 10분 안에 학생식당." 가차없이 끊겨버린 전화가 익숙한지 태연하게 도복을 벗은 김여주가 옆에 있던 윤재에게 인사를 건넸다. 

 

 

 

"선배 저 갈게요. 수요일날 봐요." 

"어, 그래. 수고했어." 

"……" 

"아 맞다, 여주야." 

"네?" 

 

 

 

 

"너가 전정국이랑 아는 사이던가?" 

 

 

 

 

 

 

 

 

 

 

 

 

 

 

 

 

 

 

 

 

 

 

 

 

 

"…야 한서윤." 

"왜." 

"김여주한테 전해. 그렇게 쳐다봐도 돈까스 안 줄꺼라고." 

 

 

 

"…야, 들었지?" 흥미 없이 대충 장단을 맞춰주는 서윤의 답에도 대꾸 하나 하지 않은 김여주가 전정국을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잘라놓은 고구마 치즈 돈까스를 포크로 찍어 얄밉게 눈 앞에 갖다대도 김여주의 눈은 올곧 전정국으로 향했다.  

 

 

 

"…아, 왜." 

 

 

 

"아 또 뭔데! 뭐, 왜. 뭔데. 왜 그러는데 너." 당최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빛에도 개의치 않다는 듯 행동하던 전정국이 이내 그릇에 포크를 떨어뜨리며 연기력의 바닥을 드러냈다. 오자 마자 아무 말 없이 저를 뚫어져라 쳐다 보길래 또 시작되는 장난인가 싶어 무시하던 정국이 이제서야 시선 안에 있는 속셈을 알아챘다. "뭔데, 어? 왜 그렇게 쳐다보는데." 

 

 

 

"아니야." 

 

 

 

성질이란 성질은 다 건드려 놓고 태연하게 밥을 먹기 시작하는 김여주에 정국이 허- 입을 벌렸다. 익숙한 상황에 옆에서 아무 말 없이 단무지를 집어 먹던 서윤이 식당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바라 보았다. 

 

 

 

"너네 다음 수업 있냐?" 

"…난 없어." 

 

 

 

"나도." 동의하는 목소리에 고개를 든 김여주가 또 다시 말 없이 전정국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야. 

 

 

 

"왜." 

"……" 

"……" 

"너 나한테 할 말 없냐." 

 

 

 

갑자기 튀어나온 뚱딴지 같은 질문에 할 말을 잃은 정국을 살피던 김여주가 젓가락으로 뚝배기에 담긴 당면을 뒤적거리더니 "아니다, 됐어." 옆에 있던 애꿎은 불고기를 젓가락으로 찍었다. "…뭔데, 이 분위기." 어째 갑자기 식은 기류에 당황한 서윤이 두 사람을 번갈아보며 눈만 조용히 굴렸다. 

 

 

 

"나 먼저 간다. 이따 집에서 보자." 

"…뭐? 야, 김여주!" 

 

 

 

대체 뭐 때문에 핀트가 나간건지, 부름에도 쟁반을 들고 묵묵히 갈 길을 가는 뒷 모습에 당황한 서윤이 뒷목을 만지작거리며 옆에 있는 전정국의 눈치를 살폈다. "……" 상황 파악이 안 된 자신과 다르게 아직까지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고요한 반응에 의아한 서윤이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헝클였다. 하얀 도복을 입은 이가 식당 밖으로 사라지자 그제서야 수저를 내려놓은 정국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너가 전정국이랑 아는 사이던가?' 

 

 

 

'네? 아, 예. 그런데요?' 발목을 잡는 이름에 발걸음을 멈춘 김여주가 이어진 윤재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네? 

 

 

 

'전정국 보면 수업 좀 나오라고 전해달라고.' 

'…걔 오늘 학교 왔는데요?' 

'어, 학교는 오는데 수업은 안 나오네. 걔 벌써 전공만 싹 다 결석 세 번이야. F 맞게 생겼어. 애들한테 물어보니까 전공이랑 상관없는 엉뚱한 교양들은 잘 나온다는데. 이건 뭐, 수업을 안 나오니 얼굴 봄 틈이 없어서. 연락은 무시 당하고. …아무튼 여주 니가 꼭 좀 전해줘.' 

 

 

 

"……"  

 

 

 

혼자 밖에 없는 체육관을 울리며 김여주가 매트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낮에 윤재와 나눴던 대화가 하루 내내 신경을 건드려 왔지만, 김여주가 할 수 있는건 지금처럼 그저 땀에 젖은 앞머리나 쓸어 넘기는 것 뿐이었다. 대학생이 자체 휴강을 때리는 건 제 3자가 보기엔 다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21년 동안 전정국을 지켜봐왔던 김여주에게는 이 상황은 심각성을 띈 일이 되었다. 누구보다 자신이 가고 있는 길에 열정과 확신을 가졌던 이의 계획 없는 방황이라 애꿎은 주먹만 말았다 쥘 뿐 이었다. 

 

 

 

- 언제 와? 정국이는 만났어? 

 

 

 

서윤이었다. 메세지 확인 겸 때맞춰 시간을 확인해보니 11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전정국을 만났냐니. 뚱딴지같은 소리에 김여주가 빠르게 손가락을 놀렸다. 

 

 

 

- '뭔소리래. 전정국이 왜.' 

 

 

 

전송 버튼을 누르고 띠를 풀러 도복을 벗으니 답장이 왔는지 작게 진동이 울렸다. 

 

 

 

- 엥. 정국이 너 데리러 갔는데? 연락 못 받았어? 30분 정도 됐는데. 

 

 

 

"……" 

 

 

 

'내가 연락 해볼게.' 답장을 끝으로 황급히 일어나 대충 옷을 갈아 입은 김여주가 건물 입구로 향했다. 전정국은 코빼기도 안 보이는 한산한 거리에 작게 한숨을 쉬며 휴대폰으로 번호를 골라내던 김여주의 곁으로 익숙한 온기가 끼어들었다. 

 

 

 

"무슨 훈련을 이렇게 늦게까지 해. 대회 기간도 아닌데." 

"……" 

"……" 

 

 

 

"…너 오늘 되게 거슬린다." 

 

 

 

피곤한 듯 얼굴을 쓸어내리는 김여주의 손에서 익숙하게 휴대폰을 빼앗아 그대로 후드 집업 주머니로 넣은 전정국이 한참 아래 있는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따라와, 까까 사줄게.  

"……" 

 

 

 

"…우리 해야 되는 얘기도 있고." 

 

 

 

 

 

 

 

 

 

 

 

 

 

 

 

 

 

 

 

 

 

 

 

 

 

 

 

 

 

 

 

 

"왜 말 안했냐." 

 

 

 

말 없이 툭, 툭. 기다란 과자를 2봉지나 까먹는 모습을 구경하던 전정국이 조금 풀렸는지 그제서야 본론을 토해내는 입에 몰래 헛웃음을 뱉었다. 두 봉지씩은 먹여야 열리는 구나. 정국이 음료 캔을 들었다. 뭘. 

 

 

 

"몰라서 물어?" 

 

 

 

툭. 눈빛 만큼이나 사납게 끊어지는 과자 조각에 정국이 마른 목구멍에 음료를 넘겼다. 입가에서 어색하게 멈춘 캔을 바라보던 김여주가 녹진하게 녹은 초코과자가 모래 알 인듯 힘겹게 삼켰다. 흔들리는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던 김여주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려 한산한 동네를 바라보았다. 야. …여주야. 

 

 

 

"왜." 

"넌 확신해?" 

"…뭘." 

 

 

 

"…몰라 나도 갑자기 왜 이러는건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모르겠어. 내가 진짜 뭘 좋아하는건지. …그게 과연 태권도가 맞는지." 복잡하다는 듯 정국이 플라스틱 등받이 위로 고개를 젖혀 살짝씩 흔들리는 파라솔을 눈에 담았다.  

 

 

 

"…걍 어렸을때부터 해왔던거라, 이걸 내가 좋아서 하는건지, 아니면 익숙함에 하는건지." 

"……" 

"헷갈려." 

 

 

 

입김처럼 흩어지는 진심을 주워담은 김여주의 가슴 한 켠이 괜히 무거워졌다. 아, 몰라. 몰라. 모르겠다. 큰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킨 전정국이 김여주의 손에서 과자 조각을 빼앗아 입에 넣었다. "야. 넌 태권도 왜 했냐?" 

 

 

 

"어? 왜 했냐니까?" 

"…나?" 

"어." 

 

 

 

바삭거리는 감각을 느끼던 정국이 순간 고요해진 분위기 속에서 묵묵히 답을 기다렸다.  

 

 

 

"……" 

"……" 

 

 

 

뭘 망설이는지. 한참을 기다려도 열리지 않던 입이 뻐끔 뻐끔. 기세를 보이더니 이내 툭 뱉어냈다. 

 

 

 

"뭘 물어, 너 때문에 시작 했지." 

 

 

 

답을 기다리는 동안 가루가 된 과자 조각을 씹던 턱의 움직임이 순간 멈췄다. 지금 이 순간 자신만을 담고 있는 새까만 눈을 아는지 모르는지. 쌀쌀한 날씨에 무릎을 끌어안은 김여주의 눈은 눈치도 없이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왜. 너 초등학교 3학년때, 승단 심사 떨어지고 그렇게 날라 다니던 태권도 안 한겠다고 떼 썼잖아. 자존심만 더럽게 쎄서." 

"……" 

"그때 이모가 너 설득하려고 엄청 고생하셨는데 너가 갑자기 조건 걸었다며." 

"……" 

"김여주도 같이 태권도 다니면 다시 하겠다고." 

"……" 

"너 이모가 그렇게 부탁하면 나 거절 못할거 알고 있었지? 이 영악한 새끼야." 

 

 

 

그때가 생각이 나는지 어이없는 웃음을 뱉으며 다 먹은 과자 봉지를 던지는 김여주가 속도 없는 듯 웃었다. 반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전정국의 속은 갑자기 요동치기 시작했다. "……" 아무렇지 않게 웃는 모습이 발목을 잡더니 가슴께를 뜨겁게까지 만들기 시작했다. 죄책감인가. 이름을 숨긴 체 들어오는 감정에 전정국이 옛 기억을 급하게 붙잡으며 물었다. 

 

 

 

"...너 피아노는?" 

"어?" 

"너 한창 피아노 쳤었잖아." 

 

 

 

"그건 태권도 하면서 관뒀지, 레슨비가 얼만데."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가슴께가 이유도 안 알려주고 끝없이 화끈거려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근데 피아노는 치기 싫었어. 그 피아노 친 횟수만큼 과일 칠하는게 있거든? 맨날 한 번 치고 세 개씩 색칠함." 

 

 

 

양아치네.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대꾸 해줘야 하는데. 자꾸만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그 모습이 발목을 잡아서 전정국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너는 내가 구르라면 구를꺼야? 물으면 금방이라도 구를 것 같아서. 자신을 위해 손 쉽게 무언가를 놓았던 김여주가 낯설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근데 전정국아. 

 

 

 

"내가 어쩌다가 여기까지 와보니까 알겠는데 남이 이끌어 준 길을 걷는 것도 나쁘진 않아." 

"……" 

"그니까 너도 나 봐서라도 끝까지 해봐." 

"……" 

"나도 너 때문에 시작했으니까." 

 

 

 

심장을 뜨겁게 만드는게 김여주라는 사실이 낯설어서 전정국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덜 마른 머리를 털며 방으로 들어 온 정국이 피곤한 듯 얼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아침에 그렇게 면박을 줬는데도 커튼 없이 잠들어 있는 방 위로 쏟아지는 달빛은 세상 모르도 잠들어 있는 얼굴을 향했다. 

 

 

 

"……"  

 

 

 

순하게 눈을 감은 얼굴이 시선을 붙잡았다. 천천히 침대에 앉아 창틀에 얼굴을 기대 벽에 걸려있는 도복과 그 얼굴을 번갈아 보던 정국은 그날 밤 한숨도 잠들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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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작가님 너무 재밌는데요?!?!! 다음편 기다리겠습니다ㅠㅜㅜㅜㅜ
4년 전
독자2
좋아요 좋아요 좋아요 ㅠㅠ 너무 재밌어요 ㅠㅠ
4년 전
독자3
진짜 재밌어요!!!!!!
4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작품을 읽은 후 댓글을 꼭 남겨주세요, 작가에게 큰 힘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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