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 배달부 소년
01
ㄴ 꼭 재생해 주세요!
가파른 숨을 내쉬며 연습실 바닥에 쓰러졌다. 기필코 에어컨을 켜달라고 항의를 할 테다. 땀이 등줄기까지 흘러내린 여주는 다짐했다. 거지같은 학원은 남아서 연습하는 학원생들은 생각 안 하고 강의 시간이 끝나면 가차없이 에어컨을 꺼버렸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연습실에서 연습해도 땀이 덜 날까 말까인데 이 무더위에 선풍기도 안 틀어주다니. 여주는 학원이 제대로 돈독이 올랐다고 생각했다. 평소 같았으면 연습을 대충 마무리하고 집에 갔겠지만 대회가 일주일도 안 남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크게 한숨을 내쉰 후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고쳐 묶었다. 음악을 틀고 눈을 감으면 음악 속에 리듬이 마치 저의 몸을 감싸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주는 그 순간을 사랑했다. 하나, 둘, 셋. 짧게 박자를 센 후 감았던 눈을 떠 눈 감고도 출 수 있는 안무를 추면 여주의 입가엔 더운 것도 까먹었는지 미소가 가득했다. 여주는 춤을 추면서 다짐했다. 꼭 우승해야지.
장장 여덟 시간에 연습 시간이 끝나고 녹초가 된 여주는 물건들을 대충 가방에 집어넣고 터덜터덜 학원을 빠져나왔다. 분명 해가 쨍쨍했을 때 들어왔던 거 같은데 나오니까 해는 안 보이고 그늘이 여주를 반겨주었다. 근래 한두 달 동안은 늘 이래왔어서 익숙한 여주는 집까지 택시를 탈까 하다가 집에 일찍 가 봤자 할 것도 없겠다는 생각에 그냥 걷기로 했다. 아, 떡볶이 먹고 싶다. 학원 옆에 위치한 분식집은 여주에겐 참 잔인한 존재였다. 애초에 분식집이 왜 댄스학원 바로 옆에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더군다나 여주는 대회에 나가는 일이 많아 체중조절을 해야 할 때가 남들에 비해 월등히 많았기 때문이다. 여주는 먹을 걸 좋아했지만 그것보다 춤을 더 사랑했기에 더 사랑한 걸 가지기 위해선 두 번째로 사랑하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남들이 보면 네가 뺄 살이 어디 있겠어, 라고 하겠지만 여주의 눈 그리고 심사위원 눈에는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살이 찌면 여주 본인도 춤출 때 힘들다는 걸 느꼈다. 대회가 꼭 끝나면 먹어 줄게. 들리진 않겠지만 떡볶이에게 텔레파시를 보내며 집으로 향했다. 그새 어둠이 하늘을 덮었다.
"다녀왔습니다."
"오셨어요?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괜찮아요. 저 방에 들어갈게요. 여주의 집은 꽤 잘 사는 편이다. 피아니스트 어머니와 영화감독 아버지. 여주의 집안은 대대적으로 예술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여주는 태어났을 때부터 친가와 외가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모두가 첼로나 바이올린 아니면 외모가 출중하니 배우를 할 거다,라고 예상했지만 여주는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고 춤에 빠졌다. 매일같이 클래식 공연을 보러 가고 어릴 때는 아버지 촬영 현장에도 몇 번 따라갔었지만 그것들은 여주의 이목을 끌기 부족했다. 여주는 우연히 길을 가다 본 버스킹 공연을 보고 춤과 완전히 사랑에 빠져버렸고 그날 집에 돌아와 여주는 한치의 고민도 없이 가족에게 선언했다. 저 춤을 출래요. 춤추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중학교 1학년 때 일이었다. 춤도 예술 쪽에 하나인데 집안 사람들은 여주가 춤의 길을 가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춤이 좋으면 무용을 하면 되잖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많이 들은 말이다. 물론 무용도 좋지만 여주는 무용과는 느낌이 다른 대중적인 춤을 하고 싶었다. 어릴 때 그냥 잠깐 취미로 하는 거겠지. 냅둬. 어머니는 그리 말하며 댄스학원을 등록해 줬고 그 잠깐이 3년이 되자 불안해하는 기색이 요새 많이 보였다. 그래서 같이 밥을 먹지 않았다. 밥 먹으면 자꾸 무용학원 얘기를 꺼내니까. 가정부 아주머니께 짧게 목례를 한 후 계단을 올라가 방 안에 들어왔다. 가방을 대충 집어던지고 침대에 몸을 눕히자 그제야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아, 배고파... 그와 동시에 감겨오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배고픔을 참기 위해 잠이 들었다.
"아, 미친..."
여주가 눈을 떴을 땐 새벽 네 시였다.대회기간이라 요새 잠을 잘 못 잤더니 몰아서 잤나. 일어나서 핸드폰으로 시계를 확인한 여주는 짧게 탄식하며 일어나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2층에는 자기의 방밖에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가끔 올라오는 부모님들을 지금은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을 조금 열고 틈새로 확인하니 다행히 아무도 없는듯 싶어 여주는 방문을 활짝 열고 화장실로 향했다. 땀에 쩔어서 왔는데 씻지도 않고 잠들어 땀냄새가 진동을 했다. 혹시라도 물소리에 부모님이 깰까 짧게 샤워를 마친 후 개운해진 상태로 나오자 이제 배에서 난리가 났다. 어제 닭가슴살이라도 먹고 잤어야 했는데 아무것도 안 먹고 잤으니 뭐 당연한 거다. 뭐라도 먹어야 되겠다 싶어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가 고요함을 깨지 않게 최대한 까치발을 들어 주방으로 향했다. 무슨 방에서 주방 오는 게 이렇게 힘들어, 더럽게 넓네. 세 가족이 살기엔 커도 너무 큰 집을 한탄하며 냉장고를 열었는데 요리를 할 때 필요한 재료들만 가득하고 간단히 먹을만한 건 하나도 없었다. 아차, 하고 며칠 전 가정부 아주머니 말이 생각났다.
'닭가슴살이 다 떨어졌어요. 새로 주문하셔야 될 거 같아요.'
바보. 대신 주문 넣어주겠다는 거 거절해놓고 그걸 까먹어? 여주는 미리 주문해두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워 머리를 쥐어뜯었디.그렇게 한참을 원망하다 배에서 또 꼬르륵 소리가 나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배를 필사적으로 가렸다. 아... 진짜 배고픈데. 짧게 한숨을 내쉰 여주는 순간 어제 아침 물을 사러 간 편의점에서 닭가슴살을 파는 것을 본 기억이 났다. 유레카! 방금 전까지 원망만 하던 자기 자신에게 기억을 해내서 잘했다고 칭찬을 하며 방으로 올라가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어제 던져두었던 가방을 챙겼다. 일찍 일어난 김에 미리 연습을 하고 있을 셈이었다. 학원 문이 안 열려 있으려나. 그런 건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문이 안 열려있으면 길거리에서 하지 뭐. 뭐라도 먹을 생각에 들떠 헤실헤실 웃으며 현관문을 열었고 그와 동시에 여주는 순간 소리를 지를 뻔했다.
"......"
웬 커다랗고 눈이 겁나 큰 남자가 앞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비명을 지를 뻔한 입을 손으로 막은 여주는 손을 천천히 내리며 물었다.
"누구...세요?"
"아... 저,"
우유 배달 왔는데요. 남자는 자신을 우유 배달부라고 소개하며 들고 있던 우유를 내게 들이밀었다. 아... 우유... 그제서야 여주는 남자의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흰 반팔티에 초록조끼를 입었는데 그 초록조끼에는〈한국우유>라고 써져 있었다. 여주는 될 수 있다면 빨리 이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첫 째로 성실히 일하러 온 사람을 강도 취급한 것 같아 미안했고 둘 째로 우유배달부란 사람이 생기긴 겁나 잘생겼기 때문이었다.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고만 있자 남자가 조심스레 말했다.
"우유... 안 받아가세요?"
"... 네? 아, 네. 네! 받아야죠. 어. 그게. 그,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그럼. 남자에게 받은 우유를 가만히 손에 쥐고 유유히 등을 돌려 걸어가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남자는 대문을 열고 나가 앞에 세워 둔 자전거를 타고 떠났다. 남자가 눈 앞에서 사라지자 여주는 그제서야 자각했다. 아, 나 또 바보짓 했다. 바보같이 쳐다보고 말이나 더듬은 게 생각나 여주는 급 창피해졌다. 당장이라도 그 우유 배달부에게 저 그렇게 바보 아니에요, 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좌절하며 손에 든 우유를 바라보다 손목에 있는 시계를 보고 곧 부모님이 기상하실 시간이라는 걸 깨달아 급하게 집안으로 들어가 냉장고에 우유를 집어넣곤 후다닥 빠져나왔다. 그나저나 되게 어려보이던데. 고등학생인가?
-
대회가 끝났다. 여주는 당당하게 우승을 차지했고 우승의 기쁨을 누릴 겨를도 없이 학교는 개학을 했다. 여름방학 내내 연습만 한 것 같아 살짝 억울해지긴 했지만 그 성과가 좋으니 어찌 됐든 여주는 기분이 좋았다. 부모님은 요 며칠 바쁘신지 보이지 않았다. 기사님께 말해 뒀으니 차 타고 학교 가라는 엄마의 문자를 받았고 네, 라고 대답도 했지만 그러지 않을 예정이다. 여주는 어릴 때부터 차를 타고 어딘가를 많이 이동해 차 타는 건 그리 선호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아침 먹고 가라는 아주머니의 말을 정중히 거절하며 기사님께 차 안 타고 간 거 부모님에게 거짓말이라는 말을 전해 달라고 하곤 서둘로 집을 나섰다. 참새들이 짹짹 우는 소리와 등교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조금씩 보였다. 개학이라는 게 실감났다.
개학날 학교는 정신이 없다. 여주의 반 아이들도 오래 못 본 친구들이 그리웠다는 듯 서로서로 모여 방학 때 학원 다녔다, 휴가 다녀왔다, 와 같은 이야기들을 펼치고 있었다. 여주는 무리지어 다니는 것을 싫어했다. 많이 모여 있으면 자주 싸운다는 게 그 이유였다. 여주의 반 친구는 중학교 때부터 같이 다닌 지원이가 유일했다. 물론 여주의 입장에서는 지원이가 유일한 친구이겠지만 여주와 말 몇 번 섞어봤다고 친구라고 생각하는 애들은 이 반에서도 아마 족히 20명은 될 거다. 여주는 자기 자신은 모르지만 꽤 유명한 편이었다. 집안 자체도 소문이 날 수밖에 없는 집안이었고 가끔 기사님에게 붙잡혀 차를 타고 오는 날들 때문에 전교생 중 여주를 모르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여주에 대해서 항상 이렇게 말한다. 아, 김여주? 그 예쁜 애? 맞다. 여주는 예쁜 애로 더 유명했다. 여주도 예쁜 걸 모르진 않았다. 어릴 때부터 많이 들어왔던 얘기였으니까. 그냥 조금 많이 예쁘장한 편이구나, 라고만 생각했다.
"야 김여주!"
"어. 왔어?"
"말도 마라. 늦잠 자서 지각할 뻔했잖아. 야 근데 너 뭐야? 살이 더 빠졌다?"
신나게 떠드는 반 애들을 구경하고 가끔 말을 붙여오는 애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지원이가 등교했다. 지원이는 잠이 많아 늦잠을 안 자는 날이 더 어색할 정도로 매일 늦잠을 자는데 어김없이 오늘도 잤나 보다.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머리가 쑥스럽다는 듯 만지던 지원이는 여주의 옆자리에 앉으며 머리를 묶었다. 아직 온 지 1분도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시끄러웠다. 지원이는 행동이 활발하고 말하는 걸 좋아해 지원이와 함께 있으면 여주는 한 마디도 못할 정도로 지원이의 얘기를 들어주기 바빴다. 개학날도 바삐 움직이는 지원이의 입이 여주는 정말 너무도 신기했다. 여주도 조용한 성격은 아닌데 지원이는 진짜 넘볼 수가 없었다. 신나게 방학에 뭘 했는지 떠들던 지원이는 소재가 고갈됐는지 다른 주제로 바꾸었다.
"야. 너 근데 축구부에 잘생긴 애 있는 거 알았어?"
"그래? 한 번도 못 봤는데."
"나도 오늘 오다가 처음 봤잖아. 아침부터 축구부 애들 운동장에 있더라고. 근데 진짜 잘생긴 애 한 명 있어."
진짜 왜 이제 알았지? 개잘생겼어 진짜! 손까지 모으며 말하는 지원이는 얼핏 보니 뺨이 발그레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잘생겼나. 웬만하면 잘생겼다고 인정하지 않는 지원이의 입에서 잘생겼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면 엄청 잘생겼겠네. 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일주일 전에 본 우유 배달부가 생각났다. 아, 그분도 진짜 잘생겼었는데. 아빠 촬영장을 들락날락 하며 잘생긴 사람들은 많이 봐왔지만 비연예인 중에 그렇게 잘생긴 사람은 다소 생소했다. 눈 크고 피부 하얀 게 꼭...
"토끼 같았어."
"완전 토끼상이야."
응? 지원이와 눈이 마주쳤다. 나 뭐래니. 방금 속으로 생각한 게 밖으로 튀어나온 것 같은데. 근데 지원이는 뭐가 토끼상이라는 거지?
"뭐야. 너도 걔 봤어?"
"어? 누구...?"
"그 축구부. 걔 토끼상이라는 얘기하고 있었잖아. 뭐야, 넌 그 얘기한 거 아니었어?"
어... 잠깐 다른 생각했어. 미안. 미안하다며 눈을 살짝 찡긋하자 지원이는 자기 말에 집중하라며 귀여운 투정을 부렸다. 그나저나 축구부도 토끼상이라니. 요즘은 토끼상이 잘생겼나.
"아니, 그래서 내가... 헐."
"응? 왜 그래?"
"야, 쟤야 쟤. 내가 말한 걔."
그 축구부. 토끼. 아, 근데 내가 쟤 이름 말했었나? 지원이의 시선이 향하는 앞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 빨간색 축구복, 그리고 저 눈...
전정국이래. 이름도 잘생겼지 않냐? 지원이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러니까... 축구부 잘생긴 애가, 우유 배달부 걔라고?!
-
1. 완결 꼭 했으면 합니다 ㅠㅠ
2. 정국이가 우유 배달을 하는 이유는 뭘까요?
3.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