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민윤기
FOREVER
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나는 남자친구가 있다.
첫 만남은 그랬다. 치열한 입시 경쟁을 뚫고 설레는 마음으로 입학한 대학교는 내 환상을 다 무너지게 만들어 주겠다 하는 사람들만 모인 건지 하나같이 나에게 너무하고도 또 너무했다. 드라마나 인터넷 썰로만 보았던 전설의 조별과제 무임승차를 내가 겪게 될 줄 몰랐고, 일주일이 뭐야 한 달 내내 과제에 치여 사는 좀비인간이 내가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알았으면 대학 안 왔지. 연애는 무슨 그 흔한 썸, 짝사랑도 없이 대학교 새내기 로망을 박살을 내고 있었을까 그날도 어김없이 다음 강의 시간까지 잠이나 잘까 싶어 아무도 안 쓴다고 한 선배가 내게 소개해 줬던 동방ㅡ이라 쓰고 수면실이라 부른다.ㅡ로 가는 중이었다. 그래, 분명 평소처럼 아무도 없어야 정상인데,
"......"
"......"
"...... 아, 안녕하세요."
"어... 안녕."
"그럼 안녕히 계세요......"
하필이면 그날 웬 하얀 선배가 그곳에 있었냔 말이다. 그것도 애인으로 추정되는 사람과 함께. 괜히 머쓱해서 모르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인사를 했다가 아차, 싶어서 1초 만에 작별인사를 하곤 도망치듯 문을 닫고 나와버렸다. 좋은 시간 방해한 건가 싶어 다시 사과를 할까 했지만 그것도 괜히 오지랖 같아 그냥 카페나 가자, 하고 뒤를 돌아선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저기, 하고 나를 부르는 듯한 아까 그 머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 저요?"
"어, 너."
"저 왜... 아, 혹시 제가 좋은 시간 방해한 거면 죄송해요.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그래도 방해는 한 거니까... 다음부턴 여기 안 올게요."
"아니, 그게 아니라."
"죄송한데 용건 다 끝나셨으면 저 가 볼게요. 아까는 진짜 죄송했어요!"
"아니,"
"그럼, 안녕히 계세요."
민망해서 그런 거 맞았다. 나도 사람인지라 아까 그 상황이 자꾸 생각나는 걸 어떡해. 혹시라도 나를 붙잡을까 봐 그렇게 도망치듯 나는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러고 나서 그 선배를 다시 만난 건 정말 뜬금없는 술자리에서였다. 친한 언니가 밥을 사 준다길래 따라나왔다가 어찌저찌 술자리까지 끌려 왔는데 글쎄 이 언니가 취해서 아무한테나 막 전화를 하더니 기어코 자기랑 되게 친한 친구를 불렀다 하더니 그 친한 친구로 그 선배가 온 게 아닌가. 상황이 뭐 이래. 뭐가 이렇게 소설 같아.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이 상황에 언니는 친구를 불러놓고 뻗어 테이블에다 인사만 열심히 하고 있고 결국 나랑 그 선배는 또 뻘쭘하게 서로 마주보고 앉아있는 상황이 돼버렸다. 길어지는 침묵을 먼저 깬 건 그 선배였다.
"얘 많이 마셨어?"
"네, 뭐. 한 소주 두 병?"
"혼자? 술도 못 마시면서 또 무리했네."
"죄송해요. 제가 말렸어야..."
"너는 맨날 뭐가 그렇게 죄송해."
당황했다. 죄송해서 죄송하다 한 건데 왜 죄송하냐 묻다니. 그럼 내가 뭐라 말해. 그래, 그래서 아무 말도 못했다.
"너 그날도 나한테 무작정 죄송하다 하고 가버렸잖아."
"아, 그건... 민망해서."
"뭐가. 오히려 민망한 건 네가 아니라 나 아닌가?"
듣고보니 맞는 말이라 더 아무 말도 못했다. 괜히 억울해 앞에 놓인 맥주만 들이키니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며 웃는 건지 썩소인지 알 수 없는 미소로 내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뭐지, 싶어 뭐냐는 표정으로 쳐다보니까 번호. 라고 짧게 말하곤 핸드폰을 내 앞에 내려놨다. 그러니까... 번호를 왜?
"번호는 왜요? 혹시..."
"혹시?"
"저 지금 찍힌 거?"
"야. 아, 얘 진짜 웃기는 애네. 나 그렇게 무서운 사람 아니야."
"맞는 거 같은데..."
"아니, 아 그래. 나 무서운 사람 맞아. 그러니까 빨리 번호 좀 주지?"
지금 당장 번호를 안 찍었다간 큰일이 날 것만 같아 주섬주섬 핸드폰을 들어 번호를 찍은 후 건네주자 그 선배는 핸드폰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나 뻗은 언니를 챙겼다. 가시게요? 내가 물으니 어, 난 용건 끝났거든. 이라는 요상한 말만 남기고 익숙하게 언니를 일으켜 뒤를 돌았다. 멍하니 그 둘을 쳐다보고 있자 그 선배는 대뜸 뒤를 돌더니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소를 지으며,
"나 지금 작업 건 거야, 너 마음에 들어서."
라고 말하곤 떠났다. 내가, 내가 지금 무슨 소릴 들은 거야? 누군가 관심을 표한 것도 처음인데 그 처음이 이렇게 돌직구로 날라오니 정신을 못 차리겠어서 일어날 생각도 안 하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물잔을 내려놓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은 처음 보는 번호, 내용은.
[그리고 그때 걔 내 애인 아니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오해하는 건 싫어서.]
[나 저장해. 민윤기.]
그게 민윤기와의 시작이었다.
그 이후 민윤기랑 나는 남들이 흔히들 타는 썸도 타고 연애도 했다. 겁나 진하게. 민윤기는 건축학과였고, 나는 경영학과라 그리 자주 마주치진 못했지만 시간이 빌 때마다 꼬박꼬박 만나 사랑을 키워나갔다. 정말 말 그대로 사랑을 했다. 나는 민윤기의 웃음을 사랑했고 작업하는 모습을 사랑했고 민윤기랑 하는 모든 일들이 즐겁고 기뻤다. 민윤기도 나를 사랑했고 나와 함께 하는 모든 일들을 즐거워하고 기뻐했다. 서로의 대학 시절 그 자체가 되었던 우리는 대학교 졸업 시즌이 다가옴과 함께 헤어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서로보다 중요한 게 생겼고, 취업 준비로 인해 만나지 못했고, 만난다 해도 서로 감추는 게 많아져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이 식었고 졸업과 함께 결혼하자는 약속은 지키지 못한 채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남자친구가 있었다. 민윤기라는.
그렇게 3년 정도 지났나. 나도 이제 어엿한 사회인이 되었을 때,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눈 앞에 펼쳐졌다.
"여주씨 인사해. 우리랑 함께 작업할 팀이야."
그러니까,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이.
"잘 부탁드립니다. 민윤기입니다."
민윤기다.
"...... 네. 김여주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민윤기를 다시 만났다.
-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