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모여서 술을 까고 있던 중이었다. 모두가 술의 기운을 빌려 전에 말하지 못한 비밀들을 웃으면서 털어놓고있었다. 그 중에서 과하게 취한 것처럼 보이던 한 친구는 오버되는 행동으로 나와 어깨동무를 하더니 어울리지도 않는 훈계라는 걸 했다. 잠시동안 바보처럼 웃다가, 너에 대한 험담을 구구절절 읊기 시작했다. 들리지도않는 장애인이랑 사귀어서 뭐가 그렇게 재미있냐고, 세상에 여자는 넘쳐나니 그런 여자는 넘치도록 많으니 그런 여자는 적당히 놀고 적당한 곳에다가 팔아버리라며. 지 딴에서는 멋진척 한다고 격하게 말했을 것인 터인데 그걸 듣고있던 나는 나대로 화가 머리 끝까지 끓어올라서 주먹으로 그놈의 얼굴을 후려쳤다. 한참 있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미 경찰소로 불려나가 있었다. 옆에서 상스러운 육두문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토해내는 그놈의 면상을 한번 더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나또한 적지않게 주먹을 맛봤던 참이었으므로, 일분일초 더 빨리 집에가기 위해 가벼운 설교를 듣고 나와 따갑게 상처를 스쳐가는 바람을 느끼며 어두운 길을 걸었다. 집에 도착하고나서는, 아무도 없이 시계초침 지나가는 소리밖에 들리지않는 거실 소파에 옷도 제대로 벗지않은채로 너가 언제 올까, 무슨일은 없을까 하며 오직 너에 대한 걱정을 머릿속에 채웠다. '너'로 시작된 내 생각은 길을 새고 또 새 결국 술집에서 있었던 일을 다시금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분노케 하였다. 속에서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일렁이던 감정을 또 참지 못하고 횡포를 부리는 것으로 표출해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소리치고, 악을 질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흐느꼈다. 얼마되지않아, 도어락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아, 너구나. 꼭 폭풍이라도 지나간듯이 엉망인 집안꼴을 보고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짓던 너는 주저앉아있던 내 앞으로 곧장 달려와 혹여나 어디가 다치기라도 했을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살폈다. 기운이 빠져서 헛웃음을 지으니 너는 따라 웃으며 바로 내 옆에 있는 액자로부터 튀어나온 유리조각을 줍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너가 마지막으로 손에 집었던 건, 미소짓고 있는 우리가 찍혀있는 사진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때만큼 웃을 수 있을까. 먼 곳으로가서 우리 둘이서, 서로의 존재만을 각인시키며 살아볼까. 내가 화를내는 이유는 항상 너가 관련되어 있었다. 너를 욕하는 다른 사람들, 너를 꺼려하는 다른 사람들. 내가 화내는 이유를 밝히면 너는 항상 고사리같은 손으로 연필을 잡아 노트에 적곤 했다. '난 괜찮아'. 너는 괜찮을지 몰라도, 나는 전혀 괜찮지 않았 다. 물론 지금도. 무릎을 꿇어앉아 내앞에 있는 너를 으스러질듯 안고서 울듯한 목소리로 조그맣게 속삭인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려주고 싶어." 너는 이유를 불문하고 내 등을 토닥여준다. 어깨가 떨렸다. "같이 밥 먹자고, 잘 자라고도 말해주고 싶어." 언제까지고 전해지지 않을 내 평생의 소원 "내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어." 이젠 다 지쳤다. 니가 날 달래주는 것도, 내가 집안을 휘저어놓은 것도. 너를 이해해주지 않는 병신같은 새끼들을 니가 이해할 필요가 있기는 한걸까.내 인생에 지독한 권태가 느껴진다. 그래도 나는 너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아.
분노조절장애 미도리마와 청각장애인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