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문틈 사이로
w. 량군 (for. 브로)
3.
오라버니, 이제 그만 일어나시어요. 오늘은 티엔이 무얼 가지고 왔나 보시어요.
시엔은 티엔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지만 아침에 저를 깨우는 것만큼은 조금 괴로웠다. 그래도 맑은 목소리에 눈을 뜨면, 창을 열고 빛을 등진 채 저를 향해 환히 웃는 얼굴이 자신을 맞아주었다. 그 모습이 시엔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다. 시엔이 넋을 놓고 티엔을 바라보면 새삼 수줍어하며 조잘조잘 이야기를 풀어내곤 했다. 달콤한 햇살 같은 나의 누이. 그 화사함이 언제나 나를 살게 함이었거늘…. 시엔은 몇 번이고 생각했다. 현(賢)의 빛은 저가 아니라 바로 티엔, 제 누이였어야 했다고.
아침 햇살은 현(賢)이든 염국(炎國)이든 가리지 않으며 제 위용을 뽐냈다. 시엔은 디오가 열어둔 창을 보며 남은 잠을 쫓았다. 가볍게 흔든 머리에는 기억이 집착처럼 들러붙었다. 햇빛은 땅을 가리지 않고 드리우는데, 자신의 빛은 어디에도 없어 더는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 과정은 시엔에게 상당히 혹독했는데, 결과적으로 시엔이 버텨낼 수 있던 것은 미간에 주름을 그린 채 식사를 들여오는 디오의 공이 컸다.
“전하. 밤새 무탈하십니까.”
지도에 현(賢)이 지워진 뒤, 그렇게 말을 해도 디오는 단 둘이 있을 때만큼은 과거의 호칭을 불렀다. 습관과 같은 안부인사는 밤을 건너 하루 더 살아남았다는 증명이었기에 그마저 꾸짖을 수 없었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시엔은 언제나처럼 디오에게도 안부를 물었다. 그러나 시엔이 세수를 하고 옷자락을 정리할 때까지 디오에게선 언제나와 같은 답이 없었다. 시엔이 뒤를 돌아 방 중앙을 바라보자 디오는 탁상 위에 간단한 요깃거리를 준비하던 모습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디오?”
“……죄송합니다. 저 또한 괜찮습니다.”
여전히 인상이 어두운 채로 아침상을 마저 준비하는 디오를 보며 시엔은 의아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시엔은 디오가 아침부터 부루퉁했던 까닭에 대해 알 수 있었다.
*
시엔은 이 상황에 대해 몹시 당혹스러웠다. 간밤의 야시장에서 만난 사내가 어찌된 영문인지 자신들이 거(居)하고 있는 여관 앞에 불쑥 나타났다. 자신을 ‘찬’이라 소개한 남자는 서글서글한 인상으로 낯가림 없이 말붙이는 것이 아주 능숙했다. 웃는 얼굴에 면박을 주기 어려운 법이었다. 더욱이 기억의 잔상인지, 그 모습이 꼭 티엔이 웃는 것 같아 시엔은 말을 아꼈다. 웃는 눈이 낭창하게 휘어지는 것이 제법 비슷했다.
들어본즉, 새벽에 습관처럼 산책-이라는 명분하의 순찰-을 하던 디오와 마주친 뒤로 졸졸 따라다녔다는 것이다. 정정하자면 본인 말로는 가는 길이 우연히 같았을 뿐이란다. 디오가 떼어내려고 길을 트는 방향마다 발걸음을 같이하며 그 중간, 중간 사람을 만나 공예품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야시장에서 부탁받았던 물건을 배달하는 길이라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시엔은 객실에서의 디오를 떠올리곤 그 때의 행동에 대해 납득했다.
낭창하게 휘는 것은 눈만이 아니었다. 간밤에 급작스레 나타난 그는 자연스레 녹아났다. 찬은 시엔과 디오의 경계를 손쉽게 뭉그러뜨리고 그들을 이끌고 야시장을 휩쓸었다. 유리를 다루는 공방에서 일한다는 남자는 거리의 인기인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찬을 반겼고, 꼭 무언가를 한 아름 안겨주었다. 찬은 그들에게 상냥하게 웃어주며 답했다. 그 낭창한 언변에 반박할 여지를 찾지 못했다. 시엔은 그가 어째서 사랑받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디오마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 끌려다녔고 시엔은 별천지를 보았다. 유랑악단의 공연, 곡예단의 기예, 기이한 광채의 보석과 궁에서도 본 적 없던 황금시대의 유산이라는 진귀한 서책까지. 염국(炎國)의 야시장은 귀로 듣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이 천지차이였다. 자신들의 이름조차 묻지 않은 사내는 동이 터오자 그저 곧 보자는 말만 남긴 채 꾸벅 인사를 하고 물건을 나르는 상인들 사이로 사라졌다. 그랬던 남자가 당연하다는 듯 제 앞에 있으니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찬은 당연하다는 듯 여관주인과 안부를 나누고 있었다.
“무얼 그리 골똘히 생각하세요?”
튀어나온 물음은 멀건 눈동자와 함께 자신에게 향했다. 시엔은 급습에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여관주인을 찾았으나, 이미 그는 다른 객(客)에게 찬이 준 공예품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날도 좋은 것이 푸른 불길이 볼만 하겠습니다.”
“푸른 불길?”
“혹시 아직도 염국(炎國) 제일의 자랑이라는 화연(火淵)을 본 적 없단 말씀은 아니겠죠?”
“…….”
“허, 아무리 그래도 염국(炎國)에 왔다하면 너도 나도 당장에 화연(火淵)으로 향하는데…. 보름이면 벌써 서너번은 갔을 겁니다.”
찬의 얼굴은 서너번도 더 가는 것이 옳다는 표정이었다. 시엔은 야시장에서 나눈 대화 중에는 자신들이 외국인이라는 것과 염국(炎國)에 온지 보름정도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화연(火淵)이라면 왕궁 내에 있다는 연못이 아닙니까.”
침묵하던 디오가 무슨 수로 왕궁 내에 들어서냐는 듯 시엔을 대변하듯 말했다.
“아이고, 아직도 화연(火淵)을 보시지 못했단 말씀이십니까? 그건 말도 안됩니다요.”
“그렇죠. 말도 안돼요.”
“그러지 마시고 함께 다녀오시지 그러십니까. 예까지 오셔서 화연(火淵)을 못보고 가시면 아니 되시고말고요. 찬…이라면 화주(염국의 수도)에서 모르는 길이 없습지요.”
“그럼요. 화주는 제 손바닥 안인걸요.”
“자, 이러지들 마시고 말 나온 김에 다녀오십시오. 이런 날씨에까지 보시지 않으면 새끼불이 쫓아올 겁니다.”
“그래요. 그럼, 어르신. 다녀오겠습니다.”
꿈벅, 배꼽인사까지 하고 찬은 귀신처럼 나타난 여관 주인과 찬의 만담 같은 대화에 넋을 놓고 구경하던 시엔의 팔을 덥썩 잡았다.
“아니, 잠—!”
당혹감에 눈을 돌리자 옆에선 디오가 말을 맺기도 전에 주인장의 손길에 떠밀려 대로로 나서고 있었다. 백발을 한 주인장은 나이가 제법 되어보였는데 풍채 좋은 덩치가 장식용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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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 님 감사합니다.암호닉
너무 늦게 온건 아닌지 죄송해요 ㅠ
조금 더 나은 진행을 위해 고치고 고치고 하다보니 느려지네요
이번편은 개인적으로 쓰기 제일 힘들어서 ㅠㅠ
댓글은 언제나 힘이 됩니다 !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