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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전체글ll조회 2092l 6

이전에 올린 애첩과 이어집니다.

전하가 새로 들인 후궁에 미쳐서 안 하던 짓까지 하는 걸 알고 싶지 않아도 듣게 되는 중전마마 강태현. 처음부터 철저히 전하가 손익만을 계산해서 올린 국혼이라 초야 때만 얼굴 한 번 보고 그 뒤로 제대로 본 적도 없음. 합방일 잡히면 방 안에서 혼자 이불 안으로 들어가서 자. 어차피 전하는 또 갖은 이유를 대면서 안 올게 뻔하거든. 기다려봤자 비참해질 게 눈에 훤히 보이는데 굳이 기다리고 싶지 않아. 태현이도 자기가 소중해. 사실 태현이는 중전 이딴 거 되고 싶은 마음 정말 요만큼도 없었는데 눈 떠보니까 중전마마 소리 듣고 있으니까. 태현이 집안 대대로 엄청난 부와 권력을 손에 넣고 있는 뼈대 있는 양반가에서 커서 자존감이며 자존심이며 하늘을 찔렀는데 어쩌다 이러나 몰라. 다 이게 그 빌어먹을 그날 때문이라고 생각함. 태현이네 집이 워낙 크다 보니까 왕들은 대대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함. 선왕도 예외는 없지. 강 씨네 자식들이 몇몇 공주와 왕자, 심지어 세자하고 비슷한 또래인데다 학식도 출중하다고 소문이 자자하게 난 걸 듣고 그냥 바로 배동으로 삼아버림. 태현이는 세자의 배동으로 누이는 전하의 배동이 되어서 자주 궁을 드나들게 됨.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태현이는 공주마마 그러니까 지금의 전하를 볼 일이 꽤 많았던 거야. 그날 누이와 같이 퇴궐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작은 기합소리와 함께 무언가 베는 소리가 나길래 누가 이곳에서 칼을 휘두르나 하고 봤더니 공주마마야. 그리고 공주마마랑 눈이 딱 마주침. 태현이는 당황했고 공주마마는 그러니까 전하는 눈 하나도 깜짝 안 하고 태현이에게 그 칼을 그대로 겨눔. 그리고 딱 한 마디 했지. 앞으로 입을 조심하시오. 그러곤 절대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고 땅에 아무렇게 떨어뜨려놨던 물건을 들고 태현이를 스쳐 지나가는데 그 뒷모습을 따라 태현이도 같이 뒤를 돌아보게 됐어. 태현이의 코를 스치고 갔던 그 향. 아마 주웠던 물건이 향낭이었던 것 같은데 그 향낭이 뭐라고. 태현이는 그 뒤로 의도적으로 공주마마를 보러 갔음. 그때마다 공주마마는 태현이의 누이가 알아채지 못하게 은밀하게 태현이에게 섬뜩한 경고를 하곤 했지만 태현이는 사실 그 경고를 들으러 가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음. 건수 잡힌 것도 있고 집안으로 보나 뭐로 보나 딱히 손해 볼게 없으니 태현이를 중전으로 들인 거지. 태현이는 전하가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함. 이미 승은을 입은 후궁들은 차고 넘쳐나서 이제 웬만하면 쉬쉬하는 정도까지 왔음. 임금이 아니었다면 개망나니 소리 들을 사람이었으니까. 그저 가끔 있는 궁중 행사에서 얼굴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는데, 근데 갑자기 어떤 궁녀가 톡 튀어나와서 궁궐을 장악해버림. 태현이는 그 풍문을 듣고도 별 개의치 않았어. 그저 서책이나 읽으며 어차피 지나갈 바람이겠거니 했는데 웬걸. 전하가 그자에게 코가 꿰였다네. 심지어 그자가 말하니 전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던 조강, 주강, 석강 심지어 어전회의까지 나와. 태현이가 아차 싶은 찰나 그자는 무서울 정도로 태현이의 자리를 위협했어. 태현이도 여럿 마주한 경험이 있는 광증까지 막아 세웠다는 얘기가 들리자마자 그자는 빈에 봉해졌어. 태현이는 이제 밤에 잠도 잘 못 자. 자못 연모하고 있는 전하가 교태전의 문을 전부 부수고 들어와 그날 미처 베어버리지 못했던 자신의 목을 베어내고 그자를 중전의 자리에 올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꿈으로까지 번져 점점 생생해지고 있거든. 근데 어느 날 생각해. 전하의 손에 죽는 거 나쁘지만은 않은 일 같다고. 그때부터 돈도 잘 안 쓰고 먹는 것도 잘 안 먹고 육체적인 부분은 물론이고 정신적인 부분까지 점점 말라가.

전하가 태현이를 불렀어. 태현이의 모습을 한 번 쓱 훑더니 정치적인 얘기만 쭉 늘어놔. 태현이는 전하의 얘기를 가만 듣다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식의 대화 패턴이 반복돼. 그러더니 불쑥 전하가 그 얘기를 꺼내. 과인이 아무리 며느리라고는 하나 시아버님에게까지 잠자리 사정을 공유하고 싶지는 않소. 태현이는 차를 마시다 멈칫했지. 그리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어. 제가 제 아비에게 잘 일러두도록 하겠습니다. 태현이는 전하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한 번에 알아들었거든. 너가 중전이고 정실인 것도 알겠는데 내가 지금 빈이랑 잘 지내고 있으니까 너랑 합방을 강요하지 말아라라고 얘기하는 거잖아. 그렇게 오늘도 적절한 조언과 상의를 통해 국정을 논하는 자리가 끝나고 전하가 먼저 일어나는데 그 자리를 뜨다 말고 태현이에게 이렇게 얘기했음. 교태전을 시끄럽게 만드는 자가 있다면 내 궁인들을 바꿔주리다. 어인 일인지 점점 말라가는 걸 보고만 있는 게 그닥 유쾌하진 않으니. 그리고 그 공간에서 금방 사라졌지. 태현이는 믿을 수가 없었어. 전하가... 나를 걱정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지. 물론 중간에 아버지에게 전하의 말을 전하느라 잠깐 힘들었던 때도 있었지만 뭐 어때 전하가 나를 걱정하고 신경 써 주시는데. 전하도 태현이를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거 아니야. 그렇게 며칠을, 몇 주를, 몇 달을 그 말만 곱씹었어.

어느 날 상선 영감이 태현이를 찾아와서 전하의 말을 전했어. 빈 마마 사이에서 후사를 볼 생각이니 그 아이들이 태어나면 중전의 아이로 입적시킬 것을 알아두라고. 상선 영감은 금방 교태전을 나갔고 태현이는 상선 영감이 있던 자리만 멍하니 바라봤어. 난 전하의 말씀 하나에 이리 요동치는데 이건 그냥 그분이 부부로써 갖추는 최소한의 예에 불과했구나. 태현이의 얼굴에 점점 금이 가더니 이내 완전히 산산조각 나고 말았어. 그러더니 웃음인지 한숨인지 분간할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밀려오는 화와 눈물을 삼켰어. 난 정말 그분께 아무것도 아니야. 태현이가 모든 걸 놓고 있을 무렵, 전하께서 용종을 품으셨다는 걸 알게 됐음. 그 소식을 듣고 태현이는 앓아누웠어. 그리고 병상에서 일어났다 다시 앓기를 반복하면서 몸을 추스르고 있는데 저 멀리서 아이 울음소리가 들려와. 그것도 두 개나. 아아. 태현이 자리에 누운 채로 눈물을 흘렸어. 눈물이 태현의 얼굴을 짧게 타고 흐르다 바로 바닥에 떨어졌지. 하루 뒤쯤 태현이가 며칠 만에 자리에서 일어나 요 근래 몸이 좋지 않아 소홀했던 내명부 일을 하고 있던 때 전하의 명을 받아 심부름꾼이 왔어. 아무 말 없이 큰 한자만 서너 자 적인 서신이었어. 태현이는 바로 알았지. 아이들 이름이구나. 아름다운 흔적이라는 뜻을 가진 공주와 높다는 뜻을 가진 원자. 태현이는 그 이름을 감히 입에 올렸어. 嘉痕가흔 그리고 隆륭. 호적 상 이제 태현이의 아이들이지. 전하의 필체로 힘 있게 쓰인 그 한자. 그 글자 하나하나를 태현이 만졌어. 이렇게라도 닿을 수 있는 게 벅찼어. 얼마 뒤에 전하가 다시 정무에 복귀했다는 소식을 들은 태현이 전하가 계신 곳을 바라봤어. 빈이 전하를 잘 뫼신 모양이야. 별 탈 없으셔서 참으로 다행이다.

태현이 아침부터 한껏 긴장을 한 채로 자리에 앉아 있었어. 잔뜩 긴장을 한 모양인지 입술을 마구 짓이기다 상궁에게 한 소리를 듣기도 했어. 그래도 초조한지 손가락을 가만히 두질 못했어.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는데 드디어 태현이 그렇게 듣고 싶었던 소리가 들렸어. 중전마마- 빈 마마께서 오셨사옵니다. 태현이 숨을 크게 내쉬였어. 들라 하라. 문이 열리고 범규와 유모가 태현의 앞에 예를 갖춘 뒤에 앉았어. 범규와 유모의 품에는 아이가 한 명씩 안겨있었지. 살이 통통하게 오른 아이들이 포대기에 둘둘 쌓여 새근새근 자고 있었어. 태현이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서 범규의 품에 안긴 아이만 바라봤어. 결국 범규가 먼저 말을 꺼냈지. 안아... 보시겠습니까? 태현이가 고개를 끄덕였어. 전하와 빈 사이에서 태어난 원자가 태현에게 안겨 있었어. 태현이는 그렇게 원자와 공주를 오래도록 안아보고 그만 돌려보냈지. 물론 아주 많은 선물과 같이. 정말 아주 많은 선물을. 태현이는 품에 안았던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었어. 기분 좋은 아기 냄새와 조금만 힘을 잘못 주어도 잘못될 것 같은 그 아이들이 눈앞에 어른거렸지. 아무래도 원자보다는 공주가 전하를 좀 더 닮은 모양이야.

태현이가 화원을 둘러보는데 갑자기 어린아이가 엉엉 우는소리가 들리는 거야. 흠칫 놀라 주변을 둘러보니 저 멀리서 공주가 뛰어오고 있었어. 태현이를 모시고 있는 궁인들은 무슨 저런 망측한 경우가 다 있냐며 숨을 삼켰지만 태현이만 태연했어. 공주가 태현이를 발견하고 태현이에게로 갔어. 태현이가 주기적으로 아이들을 찾아갔거든. 처음에 태현이가 아이들을 찾아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전하가 얼씬도 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는데 해가 바뀌고 아이들이 아무 문제 없이 잘 크는 걸 보고 만나는 걸 공식적으로 허락해 줬어. 아이들도 태현이를 아바마마, 아바마마 하며 잘 따랐지. 태현이가 아이들을 꽤 예뻐했거든. 공주가 태현이에게 달려와 다리를 덥석 안았어. 눈물 범벅이 된 공주의 얼굴을 본 태현이가 깜짝 놀라 이유를 묻자 공주는 태현이의 옷에 얼굴을 묻은 채 보여주지 않았어. 태현이 살살 어르고 달래자 그제서야 울망울망한 목소리로 어마마마가 어디 계시는지 알고 계세요? 하고 말했어. 태현이 상궁들을 막아 가며 공주의 얼굴을 비단 한복으로 조심조심 닦았어. 어디 계시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제일 자주 가시는 곳은 압니다. 공주가 태현의 말을 듣고 낑낑거리다 태현의 손을 답싹 잡았어. 아바마마와 같이 가고 싶사와요... 공주가 못내 귀여워 그 작은 손을 꼭 잡았어. 그래요. 같이 가도록 하지요. 공주는 태현의 손을 잡고 규장각으로 가는 내내 조잘조잘 얘기했어. 아버지가 원자만 무등을 태워주고 저는 태워주지 않아 섭섭하다는 말에 태현이 냉큼 말했어. 공주 이 아비가 태워주는 건 싫은가요? 공주는 정말이요? 하며 눈을 반짝였어. 태현이 어깨 위에 공주를 태웠어. 와아 너무 재밌습니다 아바마마-!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 같은 공주의 웃음소리에 태현이 활짝 웃었어. 규장각 앞에 공주를 내려주자 공주가 태현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어. 공주가 규장각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지켜본 태현이 입구를 지키고 있는 호위에게 단단히 일렀어. 한 시진이 지나도 전하께서 오시지 않으시면 공주를 처소로 데려가라고.

태현의 아버지는 공주와 원자가 태어난 이후 후사에 대한 얘기를 더 많이 더 강력하게 얘기하기 시작했어. 태현이는 아버지의 행보에 머리를 짚었어. 그러다 결국 전하의 광증을 불러일으켰다는 얘기를 듣고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어. 그 광증 때문에 빈이 다쳤다는 소식에 홀로 지낼 아이들을 태현이 내내 데리고 있었어. 그 시발점이 태현의 아비이니 태현이가 책임을 지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거지. 빈의 건강이 점점 차도를 보이기 시작할 때 바로 아이들을 다시 빈의 곁으로 돌려보냈어. 그리고 빈이 깨끗이 털고 일어났다는 말에 잘 된 일이구나 하고 넘겼는데 전하가 직접 교태전을 찾을 줄은 몰랐지. 태현은 버선발로 전하를 맞았어. 전하는 대뜸 이런 말을 했어. 그대의 아비 말이 옳아. 그대의 지위를 위해서라도 그대와 과인 사이에 후사가 있어야 하지. 여인이면 좋은 곳에 시집도 보내줄 것이고 사내이면 바로 세자로 책봉하겠다고 약조하겠소. 대신 중전에게서 볼 후사는 단 한 명일 것이오. 합방 일은 추후에 전달하리다. 전하가 돌아가고 태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어. 원체 울지를 않는데. 참을 수가 없었어. 생각도 않고 있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어. 전하와 나 사이에 아이라니. 그저 공주와 원자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말도 안 돼...

몇 번의 합방이 있었지. 그때마다 태현은 어쩔 줄 몰라 했어. 눈앞에 있는 여인을 갖고 싶지만 욕심내서는 안됐지. 조금 더 싶은 마음이 들수록 더 멀어지는 기분이라 늘 갈증이 차올라도 참아야 했어. 이것도 과분해.라고 몇 번이나 되뇌었어. 합방 후에 내의원이 산맥을 짚자 전하는 잠시 교태전으로 거처를 옮겼어. 태교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 궁인들을 통해 빈과 절절한 이별을 했다는 걸 들었을 때 마음이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태현은 그 생각을 다시 고쳐먹었어. 빈은 이 시기만 제외하면 전하의 옆에 있겠지만 본인은 아니거든. 얼마 안 되는 이 기간만이라도 저 혼자 전하를 차지하고 싶었으니까. 태현이는 전하와 나름 잘 지냈어. 이런저런 대화도 두런두런 나눴고 아이는 건강했으니까. 태현은 아이가 전하의 뱃속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전하를 독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틀린 생각이라는 걸 알았어. 하루 중 침수에 들기 직전 전하의 방에서 매일 궁인 하나가 서신을 들고나갔으니까. 씁쓸했지. 원치 않았는데 눈물도 태현이 모르는 사이에 흘렀어. 조심해야 할 시기가 지나고 태현은 공주와 원자를 교태전으로 불렀어. 아이들은 오랜만에 보는 어머니에 반가워하다가도 낯선 모습에 뜻하지 않게 낯을 가렸어. 원자는 태현의 다리 안으로 쏙 들어갔고 공주는 태현의 어깨를 잡고 등 뒤로 숨었지. 태현의 차분한 설명에 귀를 기울이며 조심히 부른 배에 손을 올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전하가 눈에 담았어. 쌍둥이가 정말로 태현이의 아이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무섭게 스쳐 지나갔지.

태현이는 아이들을 자주 교태전으로 불렀는데 전하의 산달이 점점 다가올수록 원자가 전하에게 매달리는 일이 잦아졌어. 아이가 다칠 수도 있기에 원자를 떼어내는 전하에 원자는 충격을 받고 전하와 거리를 뒀어. 그때마다 태현이는 곧 태어날 동생에 그저 좋아하는 공주를 전하의 옆에 붙이고 원자를 안아올렸어. 다행히 공주가 어두운 전하의 옆에서 기운을 잘 북돋아주었지. 원자는 태현이에게 동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얘기했어. 태현은 원자의 마음이 이해가 가 그저 원자의 투정을 가만 들으며 등을 토닥였어. 원자의 투정이 서서히 가라앉을 때 원자를 무릎에 앉혀두고 이런 얘기를 꺼냈지. 원자 그거 아세요? 전하의 뱃속에 아이가 열이 나 들어 있다 해도 전하는 원자와 공주를 가장 아끼실 거예요. 원자와 공주가 전하께는 늘 첫 번 째랍니다. 지금 전하의 뱃속에 있는 아이는 참으로, 불쌍한 아이이지요. 태현의 말이 원자에게 통하기라도 한 건지 이 날 이후로 의젓해졌어. 그런 원자의 모습에 태현은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었어.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전하는 한 번 안아보지도 않았어. 오히려 태어난 원자의 모습을 확인하러 온 공주와 왕자가(왕의 적장자를 원자로 봉하는데 이제 왕위를 이을 적장자가 바뀌었으니 호칭도 왕자로 바뀜. 이제부터 태현이의 아들이 원자로 불림.) 더 난리였지. 어마마마 이걸 보십시오 너무 작습니다! 하는 소리에도 전하는 공주와 원자를 더 염려하고 있었어. 태현이 불쌍한 제 아이를 안았어. 공주와 왕자가 태현의 양옆에 딱 붙었어. 원자가 움직일 때마다 양옆에서 들리는 호들갑이 여간 큰 게 아니었지. 전하는 다시 그 장면을 눈에 새겼어. 실로, 아름다운 장면이로다.

전하는 좀처럼 원자에게 정을 붙이질 못했어. 전하는 산후조리가 끝나자마자 다시 빈을 보러 떠나서 원자의 곁에는 태현과 전하가 붙여준 유모만 남아있었어. 태현은 예상한 일이라는 듯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어. 이름도 태현 혼자 지었어. 원자가 태어나는 그날 그 시각 서글플 만큼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어. 태현이 옹알옹알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웃는 원자와 이마를 맞추며 말했어. 불쌍한 아가, 전하께서는 네가 태어난 날 배꽃이 피었다는 걸 아실까?

전하가 심부름꾼이 가져온 서신을 펼쳤어. 정갈한 서체로 쓰여있는 두 글자. 梨花이화. 전하는 그 서신을 반듯하게 접었어. 원자가 태어났을 때가 배꽃이 만개한 날이기에 이리 지은 것인가.

태현이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원자를 데리고 가벼운 나들이를 나갔어. 그러다 볕이 좋아 가벼운 산책을 나온 범규, 쌍둥이와 마주쳤지. 거의 매일 찾아와 원자와 지내는 쌍둥이와 달리 범규는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았어. 유모들이 아이들의 곁에 있을 동안 태현과 범규는 바로 옆에 있는 정자에 앉았어. 둘 사이에선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어. 아이들만 바라보고 있던 둘 중 범규가 먼저 입을 떼었어. 더 이상은 마주칠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태현이 쓰게 웃었지. 지금 중전인 내가 비인 자네의 위치까지 미리 알아가며 피하라는 뜻인가. 태현의 말은 틀린 게 없었지. 범규도 그걸 잘 알고 있었고. 태현의 말에 입안의 여린 속살만 씹었어. 태현이 다시 말문을 이었어. 자네는 원자가 싫겠지. 하지만 난 공주와 왕자를 아끼고 있어. 이게 자네와 내가 전하를 연모하는 방식이겠지. 자네는 전하를 연모하기에 나와 전하 사이에서 태어난 원자가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난 전하를 연모하기 때문에 전하의 아이인 공주와 왕자마저 내 안에 들였지. 자네를 탓할 생각은 없어. 그저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가슴에서 받아들이기 힘들 뿐이야. 태현의 말이 끝나고 다시 정적이 흘렀어. 그리고 이 정적은 왕자가 넘어져 울면서 끝이 났어. 범규가 왕자의 손을 잡고 태현에게 인사를 올렸어.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태현이 원자를 안아올렸어. 범규가 가려는데 공주가 범규를 불렀어. 공주가 범규에게 무어라 속삭이는 모습을 그저 보고 있던 태현에게 공주가 다가왔어. 저는 원자와 조금 더 있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어요? 태현이 웃으며 공주의 어깨를 감쌌어. 바람이 찹니다. 얼른 들어가지요. 그 모습을 이번에는 범규가 바라봤어. 왕자가 칭얼거리지만 않았다면 하염없이 바라봤겠지.

전하는 태현이 원자를 데려왔을 때만 얼굴을 확인했어. 그저 일정 시간을 보내기 위해 찾아온 태현을 알기에 앞에는 태현을 앉혀두고 기어 다니거나 어설프게 걸어 다니는 원자를 모르는 채 하며 상소문을 읽는 게 대부분이었는데 그날따라 원자가 기분이 좋았던 건지 태현이 자리에 앉자마자 전하에게로 뒤뚱뒤뚱 걸어가 상소를 보고 있던 전하를 안았어. 전하가 놀라 원자를 돌아보자 원자가 웃으며 전하를 보며 옹알이를 했어. 전하는 그걸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봤어. 상선영감은 그런 전하에 원자 아기씨를 안아주시지 싶었지만 태현이 조용히 시켰어. 태현은 상선 영감을 비롯한 이 방에 있는 모든 궁인에게 말소리를 내지 말라고 했어. 전하의 생각을 만들고 강요하고 싶지 않았어. 원자가 전하의 총애를 받지 못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지. 태현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지겠지만 태현은 전하에게 따지거나 진지하게 말할 생각이 없어. 어차피 전하는 나를 연모하지 않으시기에 바랄 수도 없는 일이니까.

요즘 들어 부쩍 원자가 어미를 찾았어. 유모와 태현만 진땀을 뺐지. 전하를 만나러 가는 그날도 마찬가지야. 너무 울길래 방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서 안아가며 달래는데 전하가 그 울음소리에 걸음을 빨리해 태현의 앞에 섰어. 원자를 어미에게 넘기시오. 전하의 말에 태현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지. 원자를 안은 채 그저 망부석이 된 태현에 전하가 원자를 태현의 품에서 빼냈어. 전하가 안고 몇 번 등을 토닥이니 원자의 울음이 멈췄어. 태현은 기가 막혔지. 어미인 건 어찌 알고. 원자가 전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에 들자 전하가 원자를 다시 태현에게로 돌려보냈어. 그리고 자리를 떴지.

전하가 좀 바뀌었어. 원자가 울면 달래주시기도 하시고 원자를 품에 넣고 상소를 읽으시도 하고 원자에게 선물도 내리셨어. 태현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지. 게다가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원자를 찾아오기도 했어. 태현은 영문을 모르겠지만 원자를 안고 아무 일 아닌 척했어. 그렇게 지내다 일이 터졌지. 다시 시작된 거야 전하의 광증이. 그것도 태현이 원자를 데리고 왔을 때. 전하가 칼을 빼들었고 이리저리 휘둘렀어. 많이 다친 이들이 있었지만 죽은 자는 하나도 없었어. 태현은 겁에 질린 원자를 안고 전하의 광증을 재우는 범규를 봤어. 그래. 무슨 일이 생기겠어. 이렇게 다시 돌아오고 마는걸.

광증이 기승을 부린 날 이후로 원자가 전하를 거부했어. 전하가 먼저 안아주겠다 했는데도 온 힘을 다해 거부하고 태현이의 품에 들어갔지. 태현이는 그런 원자를 데리고 돌아왔어. 이제 찾아가지도 못하겠구나. 원자를 재우고 앞머리를 쓸어넘기는데 배나무에 열린 꽃망울들이 보였어. 이제 곧 원자의 탄신일이 다가오겠구나 싶었지.

태현은 원자를 데리고 전하를 찾아가지 않았어. 그렇게 만남을 취소한지 얼마나 됐을까 원자를 재우고 배꽃이 언제쯤 열릴까 배나무를 살피는데 전하가 교태전 안으로 들어왔어. 배나무인가. 전하가 태현의 옆에 섰어. 예 전하. 태현은 꽃망울을 보며 대답했어. 원자가 태어났을 때 배꽃이 얼마나 탐스러웠으면 이 꽃으로 이름을 지었는지 궁금하게 만들어. 전하의 말에 태현이 깜짝 놀랐어. 태현의 반응에 전하가 오히려 쓰게 웃었지. 이런 말이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 베 아파 낳은 원자이네. 둘은 한참을 말없이 배나무만 보다 원자를 보러 왔다는 전하의 말에 자고 있는 원자를 보였지. 전하가 원자를 쓰다듬었어. 어째 원자한테만 못난 어미가 되는 느낌이구나. 그렇게 중얼거리다 자조적으로 웃었지. 못난 어미가 맞지. 이보다 더한 짐승도 없을 것이야. 손과 눈은 원자에게 고정한 전하가 태현에게 말했어. 그대와 원자만 보면 과인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어. 원자를 아껴도 되는지조차 확신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 구는 걸 보면 피가 끌리는 게 맞는 게지. 피는 진한데 머리와 마음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어. 그저 아껴주고만 싶어도 그것만 해주기가 힘들어. 공주와 왕자는 그리해주었는데 왜 원자에게는 해주지 못하는 건지... 태현의 눈빛이 혼란스러워 보였어. 내가 도대체 그대와 원자에게 어떤 마음을 품어야 할까...
























소재를 주신 우리 익명깅에게 무한한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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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회원64.183
우아아다ㅏㄱㄱ각ㄱㄱ!!!!!!!! 미쳐따!!!!!!!!! 그저 욕망의 항아리를 떠들었을 뿐인데 작가님 최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흐뮤븁뷰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하,, 지금 당장 집밖으로 나가면 여기가 바로 경복궁일듯,,^^*
3년 전
42
경복궁 나가면 범규가 어딜 가냐고 왼쪽에 가흔이 끼고 오른쪽이 륭이 매달고 쫓아옵니다 절대 궁 안에만 계셔야 해요 그러다 이제 어쩔 수 없이 나갈 일 생기면 법도 상 제일 먼저 인사하는 건 태현이랑 이화일텐데 그러면 또 기분이 밍숭맹숭,,
3년 전
비회원14.71
사랑해요 중전 텬....... 진짜 불쌍한데 너무 좋아ㅠㅠ 범규 질투해서 우울해하는 것도 보고......싶네여..ㅎㅎ
3년 전
42
접수
3년 전
독자1
너무재밌어서지금머리박박뜯어요
3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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