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사랑했어
인사해 형, 이쪽은 내 애인. 한솔이 웃으며 승철에게 말했다.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승철을 올려다 본 승관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부승관입니다. 승철이 멍하니 승관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 한솔이 형 최승철입니다. 승철의 말에 옅게 웃음을 지은 승관이 곧 한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 영화 볼 건데 형도 같이 볼래? 한솔의 물음에 승철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 먼저 갈게. 그래 그럼 집에 서 봐. 한솔이 손을 흔들고선 승관의 손을 잡은 채 영화관 안으로 사라졌다. 승철이 멍하니 둘의 뒷모습을 보다 힘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애인, 한솔의.. 애인이라. 몸에 힘이 쭉 빠졌다.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졌다.
"세상, 진짜 좁다"
허탈한 미소가 퍼졌다. 4년, 그래 4년이었다. 승관을 몰래 바라본 지도. 그 4년 동안 말 한마디 걸지 못하고 뒤에서 빌빌 돌았던 제 자신이 한심해질 만큼 지금의 상황은 너무 많은 아픔을 끌고 왔다. 한 번도,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을 못 했다. 승관이, 제 동생과 연인이라는 생각을. 승철이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 저물어가는 해와 승철을 지나쳐가는 수많은 사람들. 그 사이에서 홀로 멍하니 걷고 또 걸었다. 목적지를 정해둔 것도 아니고 그저 발 걸음이 이끄는 대로 천천히 또 천천히.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공원에 승철이 픽 웃음을 흘렸다. 와도 여기를 오냐. 제 자신을 책망하는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4년 전 그날, 제가 승관을 처음 봤던 그 공원이었다. 제가 처음 승관에게 반했었던.
"아직 그대로네"
분수대 앞 벤치에 앉아 두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린 승철이 눈을 감았다. 그날도 오늘처럼 해가 지는 저녁이었지. 아이들이 한참 공원을 뛰어다녔고 한 아이가 넘어져 울음을 터뜨렸을 때였다. 바쁘게 스케치하던 손을 멈추고 아이에게 걸어가려 했을 때 승관이 그 아이를 안아 세워 무릎을 털어주며 말했었다. 조심해야지, 아가. 너무 생생해서, 그 말과 그 표정과 행동들이 너무도 생생해서. 지금도 눈을 뜨면 제 눈앞에서 아이와 환하게 웃고 있을 것만 같아서. 승철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대로 울어버릴까 봐.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공원에서 그냥 펑펑 울어버릴 것 같아서.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요란한 진동을 만들었다. 손을 뻗어 주머니를 뒤적거린 승철이 핸드폰을 꺼내들어 전화를 받았다. 어, 무슨 일이야. 승관이 애인.. 알아. ....어? 안다고, 부승관애인. .... 지수의 한숨소리가 울렸다. 승철이 눈을 떴다. 밝아진 시야로 급하게 들어온 노을에 승철이 입술을 깨물었다. 지수야, 나 어떡하지. 승철의 물기 어린 목소리에 지수가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나, 나는 그 애가 아직도 너무 좋은데"
-....
"놓을 수가 없는데"
-....
"나는, 그니까, 나는"
눈물이 한번 툭 떨어지자 참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승철을 힐끔거리며 지나가기 바빴고 고개를 푹 숙이며 입술을 깨물고 울음을 터뜨리는 승철의 소리에 지수가 작게 욕을 중얼댔다. Shit.. 너 어디야. 지수의 말에 승철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 여기, 우리 과 옆에 공원. 지수가 기다리라는 말을 남긴 채 전화를 끊었고 핸드폰을 힘없이 떨군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승철이 펑펑 울음을 터뜨렸다. 찢어지는 것 같았다. 심장이 꼭 이리저리 찢기는 것만 같았다. 짝사랑은 결국 짝사랑으로 끝을 내야 한다는 게. 자신은, 승관의 옆에 설 수 없다는 게. 너무도, 너무도 많이.
"최승철"
"...."
"승철아"
"지수야"
"...."
"지수야, 나, 나 아파"
"...."
"아파, 너무 아파서. 죽을 거 같아"
지수를 올려다 본 승철의 얼굴이 눈물로 뒤 덮였다. 승철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지수의 표정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그렇게나 혼자 설레하던 아이였다. 그렇게나 많이 혼자서, 승관을 사랑했던. 지수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며 옆자리에 앉아 승철의 손을 꽉 잡았다. 울지 마, 승철. 응? 나 진짜, 진짜 어떡하냐. 갑자기 갈 길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앞으로 잘 가던 배가 빙산에 부딪힌 것만 같았다. 자꾸만, 저 아래서 자신을 끌어당기고 또 당기는 것만 같았다. 지수가 말없이 승철의 등을 토닥이고 한참을 울던 승철이 곧 소매로 눈가를 다으며 웅얼거렸다. 이제 정말로 끝내야겠지. .... 진작, 네 말 들을걸. 승철의 시선이 지수에게로 향했다. 저를 한심하다는 표정과 안쓰럽다는 표정 그 어딘가를 지으며 보고 있는 지수에게 웃어주었다. 고백이라도 해봤으면, 그랬으면 이렇게까지 아프진 않았을 텐데. 승철이 속으로 생각하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수가 말없이 승철을 바라봤다. 한 걸음씩 걸음을 옮겨 분수대 가까이 다가온 승철이 주머니 속 명찰을 꺼내 분수 가운데 작은 통으로 던져 넣었다. 쨍, 소리를 내며 떨어진 명찰이 동전 사이에 자리했다. 여기다, 다 버릴게. 승관아, 이제 정말로 그만할게. 고마웠어, 그동안 나의 사람이 되어주어서. 그동안, 내 상상 속 나의 사람이 너여서 너무 고마웠어. 맺지 못한 말들이 가슴속에 응어리져 사라졌고 지수를 돌아 본 승철이 말했다. 가자, 이제. 지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승철과 지수가 사라진 그 공원에, 분수는 여전히 형형의 물의 모양을 만들어 냈고 동전 속 부승관이라 적혀있는 명찰은 물 안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 흐릿해지고 있었다.
전시회가 열렸다, 승철의 졸작들과 그동안의 작품들이 벽을 차지해 걸려있었다. 승관과 한솔이 이리저리 구경하며 걸음을 옮겼고 잠시 전화를 받으러 나간 한솔을 보던 승관이 시선을 돌렸을 때 눈에 들어온 그림에 멍해졌다. 어느, 봄날에. 제목을 읊조리고 다시 그림을 바라보면 그림 속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환하게 아이를 안고 있었다. 생각나지 않을 만큼 오래된 일인 것 같다가도 눈앞에 그려질 만큼 생생했다. 이거.. 승관이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서있는 승철을 바라봤다. 승철이 옅은 웃음을 짓다 승관과 시선을 마주했고 허공에서 시선이 얽혀들어갔다. 나는, 너를, 많이, 사랑했어. 따뜻한 바람이 열어둔 창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