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e: 새로 고침 필수 :)
별이 떨어진다면 당신이 있는 공간으로
- 성동혁, 1226456
강원도 일대에 벚꽃이 피었습니다. 기상청에 따르면 공식적인 관측을 시작한 1973년 이후 가장 기온이 낮은 11월이라고 하는데요.
이 벚나무는 늦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추위를 이겨내며 꽃을 틔우는 특별한 품종으로, 올해는 인공 수목원 밖에서도 볼 수 있는 진귀한 광경이 펼쳐질 거라 전문가들은 예측하고 있습니다.
올겨울, 여러분들의 지친 마음을 달래 줄 강원도 눈꽃 여행은 어떨까요? 테이크아웃 컵 대신 텀블러에 따뜻한 커피를 담는 것도 잊지 마세요. 환경을 돕는 건 늘 우리의 일이니까요.
조슈아의 New Falling In Music, 오늘 밤 ‘사연 읽어주는 남자’는 게시판 공지대로 카스테라의 통통 튀는 DJ 승관 씨와 함께합니다. 지금 폴인뮤 스튜디오 바깥에서 꺾기 춤을 열심히 추고 계시는데요. 저도 개편 후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무척 반갑네요. 때가 되면 알아서 멈추는 분이니 작가님들은 옆에서 박수만 쳐주시면 됩니다. 승관 씨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구요.
여러분들의 사연은 코너가 끝날 때까지 실시간으로도 받고 있으니까요, 지금부터 문자나 댓글 또는 콩앱으로 보내주세요. 문자는 오십 원, 장문은 백 원, 콩앱은 무료입니다.
1366님의 신청곡입니다.
싱어송라이터의 반란, 센스 넘치는 가사로 리스너들의 귀를 사로잡은 곡이죠. 깐깐한 음악 평론가들조차 곡의 반전 멜로디와 독특한 가사에 흠뻑 빠져 있다고 합니다. 아직 듣지 못한 청취자분이 계시다면 이번 기회에 같이 음미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오늘의 오프닝과도 어울리는 곡입니다.
석민의 ‘겨울에 봄꽃이 핀다면’ 듣고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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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그 사람이 님이야. 남이지.’
……
― ‘사랑도 남이랑 하는 게 아닌데.’
……
― ‘그러니까 님이든 사랑이든 너도 나하고만 해.’
현재 시각 오후 11시 25분. 제6차 중간보고를 위해 외박 중인 집주인과 생이별당한 지 나흘째 되는 밤이었다. 회의가 끝나면 연락하겠다던 훈팡이는 반나절이 지나도 카톡에서 빵댕이만 빵실대고 있었다. 접착력 약한 키스킨 위로 움직이는 손가락이 단박에 머리카락을 쥐어뜯는다. 부족한 꼭지고 나발이고 중요한 건 따로 있단 말입니다.
― ‘님이랑 하는 사랑은 어떤데? 해봤어?’
……
― ‘하고 있잖아, 너랑.’
― “하,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먼저 덮쳤어야 하는 건데.”
라이프지 편집실 문 앞에서 옆구리 운동을 하던 박이 하얗게 질려 달려왔다.
뭘 겹쳤어야 했는데요? 뭘 후회하고 계신 거예요? 렉 걸렸어요? 다 날렸어요? 커맨드 제트 안 돼요? 오늘 집에 못 가요? 특별 호 못 내요? 영영 돌이킬 수가 없는 거예요?
박의 시퍼런 한 마디에 앞자리, 뒷자리, 옆자리, 대각선, 건너편 3시 방향 데스크 팀원들까지 튀어 올라 내 자리에 모였다. 3초의 기적이었다. 잡지사 건물 테라스에서 담배를 태우고 돌아온 팀장의 반응 속도 또한 마찬가지. 무려 30년 내공 모 대기업 직장인이 큰맘 먹고 개발한 리미티드 에디션 지압 슬리퍼 한 짝을 문밖으로 날리며 안으로 돌진했다.
― “뭐야? 왜? 날렸어? 백업했어?”
― “파일은 괜찮은데 집에 가고 싶어요.”
― “그래? 집에 가고 싶어? 오늘 영원히 갈래?”
― “팀장님이 아끼시는 펭수 슬리퍼 문밖에 있어요.”
― “집에 간다면서 아직도 안 갔니?”
― “특별 호 이지훈 씨 담당자 전데요.”
― “결론은?”
― “그린 에이지 이즈 마이 스위트 홈.”
― “다들 들었지? 해산.”
팀장은 편집실 밖 뒤집힌 슬리퍼를 품에 안았다. 아연실색한 다른 팀원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제자리를 찾았다. 막귀가 당연한 한밤중의 편집실에서는 반복적인 불멸의 타자질이 다시금 쏟아졌다.
거북목을 퇴치 못 한 팀장은 괴로운 표정으로 스트레칭을 했다. 다음 주 수요일 스케줄 픽스된 거 없지? 양손으로 승모근을 누르며 팀장이 묻는다. 그날은 보고서 말고는 없어요.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회사 게시판 내 사직서 폼을 괜히 기웃거렸다. 팀장이 말했다.
― “이지훈 씨 홍보 영상 스케줄 잡혔어. 다음 주 수요일. 미스 캐나다도 같이 갔다 와.”
― “제가요?”
― “K건설 측 공문 받았는데 그쪽에서 담당자를 원하더라구. 말 그대로 미스 캐나다 동행하라는 소리지. 일 터지면 뒤집어씌우겠다는 의지가 돋보이는 강한 색채와 글꼴이었어.”
― “우호적인 파란색이었나요?”
― “적대적인 시뻘건 색이었지.”
― “안 가는 게 아니라 못 가는 걸로 할게요.”
― “방문 신청서 정정해서 미스 캐나다 이름 넣어버렸는데?”
― “누가요?”
― “쟤도 양반은 못 돼.”
박이 과도한 옆구리 운동으로 절뚝거리며 편집실 안으로 들어왔다. 선제골은 내 스케줄을 거진 다 꿰고 있는 김 팀장. 도움은 자신만 희생당할 수 없다는 물귀신 작전의 박이. 완벽한 팀워크를 자랑하는 라이프지 식구들을 정답게 노려본다. 박은 반대쪽 옆구리 운동을 시작했다.
20년 전에 명왕성 퇴출 당할 거라고 예언한 무속인이 이번엔 10년 안으로 목성 고리가 부러질 거라고 본인 유튜브에 올렸대요. 조회 수만 백만이래요. 그분 취재 때문에 촬영팀 부족해서 저도 강제 참여하게 됐어요. 강참. 강인한 참기름. 마지막 헛소리 덕분에 콧물이 주륵 흘렀다.
― “지훈 씨 잘 지내세요?”
― “그럼요.”
― “아까부터 머리 쥐 파먹을 듯이 뜯고 계셨잖아요.”
― “제가 못 지내서요.”
― “지훈 씨 바쁘신가 보구나.”
― “제 마음이 들려요?”
― “법이 없다면 교통위반과 불법주차는 물론, 자두야 놀자 수면 바지 차림으로 K건설에 달려가고도 남았다는 표정이세요.”
― “전 프로입니다.”
― “프로도 인간이니까요.”
― “요즘도 앞뒤가 오묘하게 맞는 대화가 유행인가요?”
― “꼭 기억하세요. 프로도 인간이다.”
블루투스 라디오에서 조슈아와 승관의 왁자지껄한 웃음이 들린다. 허나 편집실 어디에도 쉽게 강냉이를 보이는 자가 없다. 단 1.2프로 간발의 차로 경쟁사 우위를 점한 그린 에이지 코리아의 연말 목표는 4분기 종합 매출 선두. 팀장이 쏘아 올린 공에 골든 티켓 지훈을 앉혀 날아가는 밤, 같은 천장 아래 모두가 악바리 정신으로 버티는 중이었다.
한 시간 뒤 노량진 수산 시장 동태 눈깔로 내려온 교정팀이 부록에 실릴 박과 최의 원고를 체크했다. 전날 아트팀이 만든 대지 위로 붉은 펜이 죽죽 나갔다.
거침없는 새벽을 달리는 가운데, 어둠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린 마피아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 “팀장님, 밴쿠버 본사에서 왔는데요.”
― “그런데요?”
― “본사 파견직을 위한 야간 수당은 없나요?”
― “대한민국에 노동자를 위한 추가 수당이 있냐구요?”
― “대한민국은 다른 세계인가요?”
― “미스 캐나다 세상 물정 몰라서 큰일이네.”
팀장은 화장실로 사라졌다. 자리에서 오금 방지 운동을 시작한 박이 말했다. 사람 갈아서 초고속 성장한 대한민국에 4대 보험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죠. 랩탑을 들고 소파에 비스듬히 누운 최도 거들었다.
그린 에이지 정말 사랑해요. 사랑한 만큼 망했으면 좋겠어요. 내년엔 제발 망해라. 꼭 망해버려라....... 최는 코를 골았다. 안타깝게도 눈은 감지 못했다.
[아직 회사야?]
사장님 나이스 샷.
― “카페인 필요하신 분?”
대량 주문 적힌 노란 포스트잇과 차 키를 들고 건물을 빠져나갔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광기 어린 활기를 띠는 빌딩 사이로 달빛이 밴다. 교차로 갓길에 브레이크 등을 걸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지훈은 연결음 두 번 만에 전화를 받았다. 속도는 LTE보다 시대에 발맞춘 5G가 더 적절하겠다.
어, 나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사람들 눈 붙이고 있어서 비상구로 잠깐 나왔어.
목소리 많이 울리나.
잠겨서 형편없긴 하겠다.
지훈에게서 잇챠, 하는 방언이 터졌다. 앉거나 일어설 때 나오는 자신만의 귀여운 기합이었다. 계단 차갑다. 투명 의자 강제로 되겠는데. 실제로 버티는 듯 꾹 참다가 폭 꺼지는 한숨. 안 되겠다. 일어서 있자. 그리고는 다시 이챠챠.
― “넌 어디야.”
― “나는 따땃한 내부.”
― “사무실?”
― “조금 더 좁아.”
― “화장실?”
― “뭐야? 변태.”
― “얘기가 어떻게 그렇게 흐르지?”
휴대폰 너머 실소가 흐른다. 아마 벽에 기대 한 손으로 얼굴 반절을 가리며 날 듣고 있겠지. 안 봐도 고화질HD 왓ㅊ ㅑ라니까.
― “이제 출발할게.”
― “어디를.”
― “15분 뒤에 너희 회사 앞 카페 도착 예정.”
― “에이, 거짓말하지 마.”
― “24시 맞지?”
― “이건 진심 거짓말이다.”
― “전화 끊을게. 이따가 봐.”
― “지금 시간이 몇 신데.”
― “새벽 한 시.”
― “다 늦은 시간에 거기서 여기까지 어떻게 와.”
― “우리 지훈이 잘 있나 보려고.”
― “아니, 진짜 온다고?”
― “가짜면 너무 슬프지 않을까?”
비상등을 해제한 라이트가 본격적인 질주를 시작한다. 서울의 밤은 꺼지지 않고, 24시 카페는 많고, 어디든 최대 왕복 40분을 넘지 않지. 하여 11월을 장식할 서프라이즈. 이른바 새벽 비밀 데이트 되시겠다.
― “뭐야, 진짜네?”
지훈의 말끝이 올라갔다는 건 그만큼 신이 났다는 것. 매끈한 턱선을 들어 바 테이블에서 장마철 와이퍼처럼 손을 흔드는 내게 놀란 듯 입을 벌린다. 상기된 지훈은 아랫입술을 다셨다. 주차 어디에 했어? 우리 건물에 댔어? 아, 지하 2층도 괜찮아. 음료 다 나오면 가야 돼? 몇 시까지? 그가 소맷자락에 숨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윽고 내 손마디를 잡고 좌우로 작게 흔들었다.
― “우리 초면이야? 부끄러워?”
― “막, 갑자기 이런 곳에서 보니까 마음이 이상하다는 얘기지. 각자 일하다가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잖아.”
― “이게 바로 비밀 데이트의 묘미야.”
― “이미 타이틀을 정했네.”
― “부제는 뭐게?”
― “죄짓는 기분인데 설레요.”
― “완전 정확해.”
― “널 파악했어.”
지훈이 턱을 들어 의기양양한 입술을 내민다. 근데 뽀- 는 여기서 말고. 나중에. 빈틈을 노리는 돌발 수까지 읽어내리는 통찰력을 보라. 그는 깍지를 낀 내 손등에 자신의 뺨을 댔다. 시간이 길다. 적당한 속뜻과 적정한 온기에 두 눈은 반달이 된다.
― “오길 잘했지?”
― “응, 같은 처지라는 걸 딱 느꼈어 방금.”
― “그러니까 밤낮없는 건축을 왜 해?”
― “넌 낮밤없는 잡지사를 왜 다녀.”
― “젊음을 낭비하는 중이야.”
― “나이치곤 씀씀이가 꽤 크다.”
― “어릴수록 낭비벽이 심해야 성공한다는 명언도 있잖아.”
― “어떤 바보지.”
― “카샤포 어쩌구.”
― “지어냈네.”
― “자세히 묻진 말아줘.”
― “어려운 건 아니니까.”
거리를 좁혀 지훈을 슬며시 안았다. 작은 고개가 목덜미에 닿았다. 일 분만. 피곤한데 잠이 안 와. 유리창에 비친 넓은 어깨가 축 처진다. 최근 수면제를 제외한 약물을 끊은 지훈은 미미한 후유증을 겪는 상태였다. 잦은 피로감과 두통, 더 나아가 심한 발열 증상이 동반된다면 지체없이 내원하라는 정한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뻐근한 손바닥으로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지훈의 등을 매만지는 것뿐. 일 분은 따로 세지 않았다.
― “내일 아침에는 와?”
― “응.”
― “주말이니까 같이 푹 자자.”
― “응.”
― “양치랑 세수도 같이하고.”
― “그건 따로 해도 되지 않나.”
― “따로 하면 무슨 재미야?”
― “세면을 재미로 하는 사람은 없지.”
― “난 그런 것 같아.”
― “치약 짜서 기다릴게.”
순순히 져 주는 것이 그리 싫지 않은 모양이다. 그는 장난스레 고개를 꾸벅이며 조는 시늉을 하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거리 횡단보도 옆에서 거하게 취해 토악질을 하는 남자를 가리키면서.
― “저거 어디서 봤는데.”
― “뒤통수 너무 익숙하지?”
칼바람에 흔들리는 포슬포슬한 뒤통수. 남자 앞에 멈춘 노오란 택시가 붉은 라이트 등을 켰다. 택시 기사는 도움이 필요한 남자의 등을 퍽퍽 후갈겼다. 이내 어두운 골목길에서 기타 가방을 맨 석민이 가로등 안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 “승관아! 뱉으면 안 돼! 이거 숭어야! 제주도 자연산 숭어라고!”
― “야이, 씨.......”
― “비싼 바다를 육지에 다 토하게 생겼어!”
두꺼운 유리창을 뚫는 인간 확성기 석민 덕분에 다 지난 명절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서울 한복판에서 해물전을 부치는 남자가 승관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 저 포슬포슬한 뒤통수. 서울 정말 좁다. 내 웬수 이름도 막 듣고.
― “라디오 끝나고 석민이 1위 축하주 마신다더니 이제 가나 보네.”
― “부승관 쟤는 무슨 술을 저렇게 많이 마셨어?”
― “열에 아홉은 방송국 놈들 때문이지 뭐.”
지구가 나노 단위로 쪼개져도 마신 술은 게워내지 않는 것이 본디 인간의 도리라던 녀석은 하수구를 쟁반 삼아 광란의 전 파티를 벌였다. 그야말로 만취 상태였다.
석민은 승관을 택시 뒷자리에 던졌다. 지지대가 되어 줄 기타 가방은 녀석의 다리 사이에. 문이 닫히자 택시는 갓길을 그대로 벗어났다. 불과 삼 분도 채 되지 않는 승관의 광취 스캔들이었다.
― “무슨 일 있었어?”
― “일하다 보면 다 그렇잖아.”
― “싸웠대?”
― “비슷해.”
지훈은 물방울 맺힌 음료 잔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채근하는 물음에 그는 무거운 입을 뗐다. 한 마디로 야생에 던져진 랫서팬더가 호된 신고식을 치르는 중이라고.
라디오국 임원진이 엎었다는 승관의 아이디어 (라디오는 사랑을 싣고)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일이 시발점이었다. 국장의 인맥으로 황금 시간대를 꿰찬 낙하산은 승관의 알뜰살뜰 알짜배기 7첩 반상을 금수저로 무자비하게 퍼먹었다.
녀석이 국장실로 달려가 항의했지만 별다른 사과나 정정은 없었다. 이 바닥이 원래 다 그런 거란다. 제 밥그릇은 뺏기지 않게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30년 전 첫사랑에게 대차게 까인 국장이 승관을 비릿하게 훈계했다.
당일 저녁 녀석에게 떨어진 건 직장 판 반성문. 국장실을 약속도 없이 찾아온 기막힌 대가였다.
― “말하지 말라고 했었어. 네가 어떻게 준 기회인데 이런 걸로 찌질한 모습 보이기 싫다고.”
……
― “분명히 속으로 이 갈고 있을 거야. 네가 기억해준 꿈 어떻게든 이뤄보겠다고 지금까지 악착같이 했었는데 이제 발 하나 삐끗했다고 쉽게 포기할 성격 아니잖아. 부승관 이름값 어디 안 가.”
7년의 부재로 이로운 점이 하나 있다면 바로 지훈과 승관의 진한 유대감이었다. 남일 관심 없는 지훈의 정성 어린 위로라. 내일 아침 머리에 까치 집을 짓고 해장 숭늉 한 사발 원샷 때릴 명예 아버지 승관은 배를 벅벅 긁으며 이렇게 말하겠지.
이지훈, 너 이놈 아주 자-알- 컸다, 라고.
FM 89.9 부승관의 카스테라.
작명 죽이지.
다음 주가 3주년.
자신의 잘못이 아니더라도 때에 따라 머리를 조아려야 하고, 이기는 법보다 지는 법에 익숙해야 할 사회에서 승관은 제 방식대로 묵묵히 견디고 있었다.
어른이 되어가는 것.
참아내는 것.
그 모든 과정에는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상처들이 너무 많다. 그것도 모르고 조슈아 사인받게 해달라 녀석에게 문자 테러 보낸 손가락을 저주한다. 바보 같은 게 누굴 속이려고. 카톡창 가득 뽀큐만 보낸다고 기분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었으면서.
― “부승관 입사하자마자 네 이름으로 조슈아 사인받았다고 자랑했었어. 너 오면 밀당 좀 하겠다고 작전 짜던데 아직도 못 받았어?”
― “해장국 하루에 한 번 일 년 동안 먹으면 얼마야?”
― “그렇게 먹어보질 않아서 모르겠다.”
― “부 단골 국밥집에 신용카드 걸어놓으려고.”
― “걔 꽂히면 하루에 세 그릇도 먹어.”
― “한도를 늘릴까?”
명예 뿌랄친구의 식사만큼은 앞으로 내버려 두지 않기로 했다. 부속 맛집에서 한우 대창만 6인분을 시켜도, 셀프바에 없는 금귤 샐러드를 만들어 오라 주문해도, 후식 냉면 두 그릇을 몰래 먹어 치워도 저번처럼 분노하지 않을 테다.
― “그냥 내 카드 써.”
……
― “너 살 거 있으면 사도 되고.”
지훈은 스스럼없이 자신의 크레딧 카드를 건넸다. 남다른 묵직함이 느껴지는 뒷면에는 멋지게 날려 쓴 지훈의 필체가. 이제야 난 확실히 알겠어. 한도 걱정 없는 신용을 통해 그가 말하고 싶은 건 바로 이런 거지.
― “네 마음을 다 준 거야?”
― “그래.”
― “꾀돌이 사 먹어도 돼?”
― “많이 먹어.”
― “데칼코마니 후후 불어펜도?”
― “원하면 사.”
― “대왕 요플레 단품 사서 뚜껑 안 먹고 버려야지.”
― “늘 그런 걸 꿈꿔 왔잖아.”
― “남친 만나서 싸우다가 울면서 치즈 볼 바닥에 던질 거야.”
― “나 말고 또 누구 만나는데.”
지훈의 집착은 오늘도 맑음. 진동벨을 들고 카운터로 향하는 짧은 시간에도 그는 ‘남친’ 3인칭의 정의가 자신인지 재차 확인했다. 스무디를 포함한 대량 주문을 소화한 창백한 알바생이 힘겹게 웃는다. 팁은 2만 원. 이 겨울에 망고 스무디 네 잔은 너무했으니까. 지훈이 음료 캐리어를 양손에 들었다. 알바생은 무료 쿠폰 3장을 매장 CCTV를 피해 내 주머니 속으로 몰래 찔렀다.
― “주차장 이쪽.”
― “잠을 못 자서 헤모수가 모자랄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 “헤모수가 아니라 헤모글로빈.”
― “어원이 약간 글로리모닝쪽인가?”
― “모닝글로리. 이건 음식.”
― “한글 너무 어렵다.”
― “영어야.”
― “뼈 아파.”
― “요즘은 순살 됐다고.”
― “이천 원 인상?”
― “아무리 들어도 그건 너무 갔어.”
지훈은 앞 좌석에 음료를 고정하고 문을 닫았다. 아쉬운 작별의 손은 내가 먼저 흔든다. 우리 이제 헤어질 시간이야. 내일 또 만나. 먼저 오는 사람이 낮잠 자고 일어나서 밥하기. 둥근 미소로 답하는 그가 주머니에서 자동차 펍 키를 꺼냈다. 대각선 방향에서 경쾌한 소리를 내며 주인에게 윙크하는 까만 벤츠.
― “너도 한숨도 못 잤을 거 아냐.”
……
― “조금만 있다 가.”
조수석에 앉은 그는 버튼을 눌러 시트를 최대한 뒤로 뺐다. 넓은 공간에 비스듬히 앉아 자신의 무릎 위를 치며 두 팔을 벌린다. 어서 안기라는 뜻이었다.
꽉 붙든 허리에 빈틈은 없다. 처음부터 이런 걸 바라고 온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하였으니 네 맘 상처 나지 않게 배려 깊은 내가 리드할게. 그런 의미로 조금 더 밀착해도 될까.
지훈의 툭 터지는 웃음. 도달하였어? 국어책이네. 새벽반 듀오의 은밀한 사각지대 주차장 씬이라니. 하얀 셔츠 안으로 잠입한 본능이 허리선을 따라 올라간다. 이지훈, 내 마음 절도죄는 오늘부로 무죄야.
― “너무 만지는데.”
……다시 밑으로.
― “배꼽은 왜.”
― “오랜만에 안부를.”
좀 더 밑으로…….
― “뭐해.”
― “오늘의 행운 컬러는 블랙이래.”
― “그걸 여기서 확인한다고.”
― “지훈아, 내일까지 못 기다릴 것 같아.”
― “뭘?”
― “누나 믿지?”
― “네가 누나예요?”
― “손만 잡고 뽀뽀만 할게.”
― “이미 버클 풀었잖아.”
― “분위기에 대한 존중이랄까.”
― “일주일 전에도 이래놓고 키스하면서 벗기고 난리 났으면서.”
― “뽀뽀 안에 벗기기 포함인 거 몰라? 패키지같이?”
― “뽀- 아니라 키스였다고.”
― “난 입술만 빨았어.”
― “그래?”
― “혀는 네가 먼저 쓴 거야.”
― “기억 안 나니까 다시 해 봐.”
― “어?”
― “내가 어떻게 했다고?”
― “잠깐만.”
― “이렇게?”
경직된 턱을 당겨 입을 맞춘다. 들어간 숨이 나갈 틈도 없이 뒷목을 짓궂게 눌렀다. 딸린 호흡에 단단한 가슴을 밀어낸다. 지훈은 양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의 부드러운 혀가 질펀하게 섞인다. 맞닿은 입술을 오가는 말랑한 숨. 일주일 전 그날과 같이.
― “이번에도 네가 먼저 유혹한 거야.”
움찔대는 등허리를 쓸어내린다. 눈을 피하는 얼굴을 한 손으로 치켜들고 진득한 뽀뽀를 했다. 부딪혔다 떨어지는 내내 지훈은 묘하게 웃었다. 똑같은 뽀- 를 계속 주는데도 받을 때마다 처음인 것처럼 구는 내가 귀엽다고.
이상하고 즐거운 콩깍지에 씌인 지훈은 출구를 없애고 입구는 봉쇄한 내 세계에 갇혀 기뻐했다. 애초에 출구 따위 찾아보지 않은 사람처럼.
― “훈.”
― “뭐 원할 때만 꼭 그렇게 부르더라.”
― “나 꽉 안아줘.”
허리 사이는 계속해서 빈틈이 없다. 젖힌 의자에 누워 품 한가득 날 안은 지훈은 이름 모를 멜로디를 허밍 했다. 가사는 없어도 속뜻은 알았다.
― ‘너도 한숨도 못 잤을 거 아냐.’
……
― ‘조금만 있다 가.’
야매 배민 라이더를 찾는 박의 문자와 지훈을 찾는 K건설 팀장의 연락이 울렸다. 이번엔 지훈이 말한다.
― “진짜 가? 일 분 아까 안 셌잖아.”
……
― “안 돼. 문 잠겼어. 나랑 있기 싫어?”
주님, 주차장 샤따문 아침까지 열리지 않도록 저에게 힘을 주세요.
Oh My Rainbow
; The Finale
09. 주말을 드려요
침대엔 지훈이 녹아드는 중이었다. 그것도 내가 준 잠옷을 입고서. 커플룩에 외면하고, 서랍장 깊숙이 넣어버리고, 굳이 껴입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던 까칠한 이유무새 아니었던가.
새로 바꾼 침대 시트와 한 몸이 되어 고롱고롱 소리를 낸다. 바닥에 무릎을 대고 침대 위 팔을 겹쳐 턱을 괸다. 뽀얀 솜털이 보이는 가까운 거리. 일에 치여 끝내지 못한 생각을 더듬는다. 특별 호 출간 다음 날이자 지훈의 생일에 어떤 재롱을 부릴까 굴리는 돌려돌려 머리판.
― “메리 미. 나와 결혼해 줄래?”
너무 식상하다.
― “청첩장 8촌까지 돌렸어. 넌 이제 내 거야.”
이야, 쓰레기잖아?
― “널 닮은 아이를 갖고 싶어.”
아니 뭐…… 이건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 “그래서 순서가 뭐야.”
― “뭐야? 안 잤어?”
― “뭘 자꾸 갖자는데 잠이 오나.”
지훈의 큰 손바닥이 굳은 머리통을 가볍게 덮는다. 뭘 얼마나 갖고 싶은지 구체적인 숫자를 말해 봐. 턱을 괴었던 팔 안으로 얼굴을 숨긴다.
덥다. 누가 히터 틀었어. 중앙난방 믿고 과소비하면 파산은 시간 문제라고. 크리스마스 선물로 위장한 폭탄 요금 우편으로 꽂히기 전에 얼른 끄도록 해.
― “히터 안 틀었어.”
― “전기장판이 문제였구나?”
― “그것도 안 켰어.”
― “창문을 열까?”
― “그니까 얼마나 낳고 싶냐고.”
― “아이구, 바닥에 먼지가 또.”
현대판 이삭 줍는 여인은 보이지도 않는 먼지를 줍줍. 지훈은 내 뒤를 따라다니며 끈질기게 물었다.
뭘 먼저 하고 싶은데. 솔직히 세 가지 동시에 다 해도 나쁘진 않지. 뭘 그렇게 줍는 거야. 먼지가 어딨어. 넌 옷에 깃털 뭐야. 새랑 싸웠어? 네가 이겼다고? 인류의 진화가 여기서 왜 나와.
테라스를 열어 집안의 먼지를 훌훌 날려 보낸다. 두꺼운 이불과 베개도 신나게 털었다. 널브러진 이불을 개켜 한쪽으로 밀어 넣고 빈 곳에 앉는다. 침대 옆 탁자에는 캡이 덜 닫힌 수면제가.
― “약 먹었는데도 잠이 안 와?”
― “먹으려다가 말았어.”
지훈이 내 곁에 나란히 앉는다.
― “먹고 자면 네가 와도 내가 모르잖아.”
……
― “너 언제 왔는지 알 수가 없잖아.”
눈을 감고 조곤조곤 말을 잇는다.
― “자주 안 먹어도 돼.”
……
― “그때랑 지금은 다르니까.”
지훈은 옷장에서 뜯지 않은 잠옷을 침대에 던졌다. 얘가 너 많이 기다리더라. 배춧국에 이어 잠옷도 의인화가 가능해진 그는 주방으로 건너가 팔을 걷어붙였다. 냉장고를 뒤적거리는 건지, 그 안으로 들어가려는 건지 지훈의 볼록 솟은 뒤태가 꼬물거렸다.
― “아침에 장을 보긴 했거든.”
― “베이글은 왜 샀어?”
― “좋아하지 않아?”
― “내가 베이글을 좋아해?”
― “외국 브이로그 보면 저런 거 많이 먹길래.”
― “흥미도 없는 남 브이로그를 저 때문에 보셨다는 말씀이세요?”
― “이런 거 안 먹어?”
― “혹시 아보카도 같이 샀어?”
― “당연하지.”
자신만만한 그는 전자렌지 위에 둔 초록 열매를 가리켰다. 브이로그 열에 아홉은 아보카도 베이글에 후추를 뿌려 먹는단다. 작년 제 생일에 승관이 주고 간 하찮은 후추 그라인더를 요긴하게 쓸 수 있게 되어 만족한다는 실용주의 이지훈 씨.
― “베드 테이블도 필요해?”
― “유튜브 브이로거가 꿈이야?”
― “나무 수저로 블루베리 요거트 볼?”
― “내 취향은 빙그레 딸기 요플레 5개입이야.”
― “아, 그런 쪽이야?”
― “오늘은 김볶에 콜라 때리자.”
― “콜.”
― “라.”
― “불합격.”
저것 봐. 실실 웃으면서 구석에서 도마 꺼내는 거. 도대체 왜 입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잠옷을 입고 밥숟갈 계량을 시작한 겉바속촉 이지훈 씨는 재료를 넣고, 간을 맞추고, 인덕션을 끌 때까지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 “오랜만에 먹어서 잘 모르겠다. 김치볶음밥이 원래 단 편인가.”
― “요즘은 달게 먹어. 유행이야.”
― “그래?”
― “유튜브 구독자 오백만에 가까운 백종원 님도 설탕은 무조건 아낌이 없어야 한다고 하셨어.”
― “그런가.”
― “다 된 거지? 가져간다?”
국룰이라는 소파 밑은 베드 테이블보다 탐 나는 핫 스팟. 같은 잠옷을 입고 꼼도리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다. TV 채널을 돌려가며 예능을 보다가, 레슬링을 보다가, 우연히 축구 채널에서 쏜의 골이 터지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이파이브도 날렸다.
― “나만 그런지 모르겠는데 일 안 하고 쉬니까 불안해.”
― “나도 약간.”
― “심신을 위해서 노트북만 켜둘까?”
― “뭐든 밥은 다 먹고.”
원고 생각만 하는 일무새에게 김볶을 욱여넣는 밥무새.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쉴 때는 그냥 쉬자. 지금 아니면 없어. 빈 접시에는 꼼도리 숟가락 두 개. 비빔면 쉐프를 탈출한 김볶 마스터 이지훈에게 박수를.
― “우리 그냥 볶음밥 장사 때릴래?”
― “그걸 누가 다 만들어.”
― “건축 접고 자영업으로 가자.”
― “재료는 토목섬유, 혼합골재, 재생첨가재?”
― “미쳤나 봐.”
― “버무리는 건 네가 해.”
― “다음 주 촬영 안 갈래.”
― “너 그때 와?”
지훈의 얼굴이 밝아진다.
― “촬영 끝날 때까지 있어?”
― “응, 근데 우리 다시 만나는 거 K건설 사람들이 알아?”
― “말 안 해서 모를걸.”
― “절대 먼저 말하지 말자.”
― “같이 있으면 다 알아챌 것 같은데.”
― “왜? 뭐가?”
― “난 티가 안 나는데 넌 아니니까.”
― “내 별명 공과 사야. 완전 프로라고.”
― ‘꼭 기억하세요. 프로도 인간이다.’
……박의 말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난 프로다. 프로는 무엇인가? 공적, 사적 경계선이 뚜렷하고, 기본적인 업무 매너를 지킬 줄 알며, 어떤 일이든 능수능란 자유자재로 해결하는 마스터 키 아니던가. 당장 입술을 박고 싶은 상대가 앞에 있어도 그곳이 공적인 자리라면 응당 인내하는 내공의 신 말이다.
― “넌 감춰도 다 보여.”
― “벌써부터 사기를 꺾는 건가요?”
― “응원할게.”
― “반지 빼고 갈 거야.”
― “맘대로 해.”
― “진짜 딱딱하게 이지훈 ‘씨’라고 부를 거야.”
― “그래야지. 일인데.”
후식은 깔끔하게 메로나. 냉동실에 박스 째로 사재기한 상자에서 지훈은 정 없이 하나만 들고 왔다. 공과 사의 전장을 앞둔 장수는 여유롭게 아이스크림 껍질을 까는 지훈에게 선전포고했다.
네가 날 몰라서 그러는데, 내가 한번 하면 끝까지 하는 사람이야. 목표가 공과 사다? 프로다? 그날로 우리 생판 남남 되는 거지. 그때 돼서 서운하다고 울면 안 된다? 난 미리 말했다?
― “흥분하지 말고 앉아 봐.”
― “협상은 안 받아.”
― “메로나 먹고 싶은 거 아냐?”
― “……한 입만 줘.”
지훈의 옆에 달라붙어 입만 벙긋거린다. 많이 안 먹을게. 딱 한 입만. 그가 막대를 베어 문다. 내 아랫입술을 벌려 그대로 넣는다. 혀에 섞여 달달하게 녹는 멜론향.
― “녹여 먹으니까 맛있긴 하다.”
……
― “더 와 봐. 더 줄게.”
스킨십에 감흥 없어 보이는 지훈은 꼭 내 앞에서만 이런 아양을 떨었다. 키스하고 싶어, 라는 직접적인 것보다 더 주고 싶어, 라는 유혹은 넘어가지 않고 배길 순 없지. 응, 이지훈은 못 참지.
콩 한 쪽을 나눠 먹는 시대가 가고 바야흐로 메로나 분할의 시대였다. 마지막 작은 한 입에 두 사람의 입술이 겹친다. 지훈의 허벅지에 올라타 단추를 차례대로 풀어낸다. 그는 벗겨진 어깨가 훤히 보이는 속살을 급히 가리며 내 손목을 잡았다.
― “나 이러려고 만나?”
― “뭐?”
지훈이 고개를 숙인다. 허탈함을 금할 수 없다. 멱살을 잡아 쥐듯 그의 윗옷을 단단히 붙잡았다. 내가 어떻게 너를 이러려고 만나? 말도 안 돼. 난 널 지켜주는 쪽이야. 이거 봐! 지금도 딱 막아주고 있잖아!
손이 떨어진다. 두 갈래의 상의 한쪽이 지훈의 등 뒤로 넘어간다. 벌어진 어깨와 선명한 쇄골, 적당히 근육 잡힌 복근이 유혹의 소나타 인사를 하기 시작하는데 감탄 박수를 치지 않을 수가 없었지. 3대 300 실화였거든.
― “근데, 입은 거 벗길 때가 더 좋지 않아?”
……
― “오늘도 네가 누나예요?”
낮져밤이든, 낮이밤져든 자유로운 포지션이 가능한 영혼과의 일촉즉발 동거 라이프라. 지훈의 발목을 침대로 넘어트린 오늘의 누나는 나머지 단추를 끌러 어깨선부터 허리까지 미끄러져 갔다. 평소와 달리 저항 없이 당하고 있는 오늘의 연하는 두 다리로 허리를 옭아매고 입술을 찾았다. 거친 숨을 뗀 지훈의 손마디가 입안으로 들어온다. 내 아랫입술과 혀를 눌러 내린 손가락을 흥건한 타액을 묻혀 그것처럼 빨았다. 지훈의 옅은 숨이 흐른다. 위로 들린 엉덩이를 지나 벗겨낸 아래가 침대 모서리 끝에 걸렸다. 잔뜩 흐트러진 지훈이 야실스럽게 웃는다. 한 팔로 내 몸을 감고 축축하게 젖은 손가락으로 둔덕을 가로질렀다. 지탱하던 팔이 힘없이 꺾인다. 지훈의 목덜미에 엉겨 신음을 참으며 단단한 팔목을 억지로 붙든다. 그는 한 손으로 내 뺨을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신음이 터져 나온다. 제 위에서 속절없이 흔들리는 나를 유린했다.
― ‘근데, 입은 거 벗길 때가 더 좋지 않아?’
……
― ‘오늘도 네가 누나예요?’
― “누나, 나 맛있어?”
상황 역전. 공수가 뒤바뀐 순간은 무조건 도주다. 잡힌 몸을 뿌리쳐 모서리에 걸린 속옷을 집는다. 지훈은 내 발목을 강하게 당겼다. 벽과 맞붙은 안쪽으로 끌려간 두 다리가 지훈의 어깨에 걸린다. 달달 떨리는 허벅지 양옆으로 시트가 구겨진다. 천천히 고개를 든 그가 젖은 입술로 묻는다.
― “오늘 갖고 싶어?”
……
― “누나, 우리 그럴까.”
그 작은 뒤통수를 처음 때려봤다. 콘돔 케이스를 침대 밖으로 던지며 세상 응큼한 눈빛으로 달려드는 이지훈. 손바닥으로 온몸을 아프게 맞아가면서도 장난은 멈추지 않았다. 토끼를 키웠는데 늑대가 된 거예요. 묘한 허릿짓에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 그는 턱을 앞으로 잡아 쥐고 나를 감상했다. 맘만 먹으면 감당 못 할 만큼 파고드는 이지훈을 다정한 유혹에 가려 잊고 있었다. 처음부터 고의성 다분한 연약함인 줄도 모르고.
― “오늘 둘 다 못 자.”
[Web발신]
시티카드(2*9*)
이*훈님
11/06 08:23
<공식 몰 마*콘*>
승인내역 [KOR] 163,740원
누계 39,879,425원
……콘돔 사재기를 했어?
* * *
― “야, 인간적으로 집들이에 초대했으면 집 주인이 적어도 문밖에 나와봐야 하는 거 아니냐?”
― “이사를 안 했는데 뭔 집들이를 해.”
― “개퍼런 겨울왕국에 볕이 들었는데 이게 새집이 아니면 뭐냐? 아우, 눈부셔.”
― “지훈, 우리 들어가도 돼? 추워서 앞니가 얼 것 같어.”
― “튼튼해. 걱정 마.”
― “야 똥뙈지! 오빠 왔다!”
뽀큐 모양으로 족발을 담다 황급히 접시를 숨겼다. 넌 또 뭔 욕을 그렇게 정성스럽게 하냐? 가운뎃손가락으로 인사하는 승관은 평소처럼 걷어차인 엉덩이를 붙잡고 소파에 앉았다. 하루에 한 번 해장국 사주고 싶은 따뜻한 마음을 알 리 없는 녀석은 찝찝한 느낌에 뒤를 돌 때마다 자작 낚시질을 하듯 오른손으로 롤을 돌리며 왼손으로 뽀큐를 날렸다.
너도 나도 바쁜 연말이 닥치기 전에 만나야 한다던 내일이 없는 부석은 오늘 밤 술을 먹다 뒤질 심산인지 대형 마트 비닐봉지에서부터 석민의 기타 가방 안까지 온통 술병으로 차 있었다. 소파 테이블에 대형 생크림 케이크를 끼얹은 석민은 나이에 맞게 초를 센 후 둥그렇게 꽂았다.
― “오늘 누구 생일이야?”
― “지훈이 생일 앞당겨서 하려고!”
― “너희 그때 같이 못 만나?”
― “승관이랑 나는 되는데 지훈이가 안 될 것 같아서.”
― “왜?”
― “왜긴 왜야, 지 생일에 거뭇한 남자 놈들이랑 같이 술 처먹고 싶겠냐?”
― “너 오늘은 날 좀 안다.”
― “형, 그래도 다음날 밤에 우리 만나는 거지?”
― “꺼져.”
― “라부라부호텔 예약했는데 이렇게 매정하기야? 형을 위해 왁싱도 했는… 아악!”
승관의 뼈가 아스라진다. 등 뒤에서 녀석을 껴안은 지훈의 팔이 사납다. 백기를 든 승관이 테이블로 음식을 나르는 석민의 뒤로 숨는다.
지훈, 이러지 말어. 우리 좋았잖어. 취향이 맞진 않았지만 서로 맞춰가며 순수한 쾌락을 즐겼잖어. 승관이가 지훈이 네 엉덩이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어? 이번엔 석민이 눈물 콧물을 동시에 뽑는다. 3대 300의 효과를 톡톡히 보는 중이었다.
― “신환회 왔어?”
― “엄지 발가락 털까지 떨린다.”
― “아직도 너희가 스무 살 같아?”
― “사람이 네 명인데 한 짝씩은 퍼마셔야지.”
― “나가 뒤져보라는 거야.”
― “난 살살 달릴 게 얘들아.”
― “알쓰 석민이는 그러도록 해.”
― “나는?”
― “집주인은 밑장 빼기 없는디요?”
― “전 굳이 말하면 세입자 쪽이라서.”
― “오늘 공동 명의로 돌렸어.”
― “이지훈 안 닥쳐?”
― “안 마시면 3대가 망하는 거쥬?”
이로써 4인방이 또 모였다. 지훈은 눈을 감고 짧게 소원을 빌었다. 촛불을 다 불기 전에 승관의 입술이 먼저였다. 짙은 재를 마시며 눈으로 욕하는 지훈은 승관의 얼굴 반쪽에 생크림 범벅을 마치고 만족스러운 듯 내 옆에 앉았다.
밤이 무르익어 간다. 그들은 지훈의 고등학교 전학 얘기부터 지훈에게 호되게 거절당한 같은 부서 두 살 연하 신입의 고백까지 회포 하듯 이야기를 풀었다. 그중 취기가 도는 승관은 못 하는 말이 없었다.
― “작년에 K건설 앞에서 이쥰이랑 밥 먹고 있는데 어떤 여자가 와서 영화 같이 보자고 얘한테 티켓을 주는 거여. 물어보니까 같은 부서래. 딱 봐도 짝사랑이었단 말이지?”
― “야, 하지 마.”
― “얘가 뭐라고 했는 줄 아냐? 저, 만나는 사람 있어요. 커피는 제자리에 뒀어요. 가져가세요. 캬아아아.”
― “있으니까 있다고 하지.”
― “누구 만나냐고 울먹이면서 물어보니까 네가 천장 가리켰잖아. 그분은 아직도 김여주가 죽은 걸로 알고 있겠지.”
― “다른 하늘, 다른 나라에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어.”
― “그날부터 난 너를 순정남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 “승관, 무슨 일로 지훈 칭찬을 다 해?”
― “쟤 뒤에서 협박당하고 있어.”
― “이 지독한 젓가락 살인마.”
내 쇠젓가락이 승관의 옆구리를 찌른다. 야야, 다 옛날 얘기니까 하는 거지. 과몰입은 인생을 힘들게 해요. 어, 뭐야. 야! 눈깔 찌르지 마악! 지훈이 다급하게 말린다. 그래도 직계 살인은 안 된다고. 가족으로 묶인 명예 아버지가 식은땀을 닦는다. 석민과 자리를 바꾼 녀석은 가끔 쥐포 가닥을 지우개 똥처럼 내 머리 위로 던졌다.
― “그래, 다 옛날 얘기니까 하는 거지.”
지훈의 도발은 지금부터.
― “부승관 쟨 소개팅 나가서 대낮에 술 처먹고 업혀 왔잖아.”
― “오, 이렇게 보낸다고.”
― “자켓을 벗으라니까 바지 벗고 있는 놈을 어떻게 잊겠어.”
― “이자카야 사케가 약하다고 핸드백에서 안동 소주를 꺼내는데 와 나 정말 그때 골로 가는 줄 알았다니까?”
― “아, 지훈이 오피스텔 현관 앞에 쓰레기봉투처럼 버려져 있다가 진짜 쓰레기 차가 승관이 수거하려고 했던 그 날 말하는 거지?”
― “주소는 왜 또 우리 집을 불러가지고.”
― “형, 나 아직도 형 사랑해.”
― “덜 맞았냐.”
초인종이 울린다. 십 년 경력 무사고가 용한 눈이 감긴 정한이었다. 여기 다 모여 있었네. 부루마블 주사위 같다. 정신 나간 정한은 소파에 엎어져 꿀잠을 잤다. 코도 골지 않고 숨만 죽죽 쉬었다.
― “오늘 이쥰 보러 간다고 하니까 자기도 꼭 끼워 달래. 수술 마치고 바로 오겠다더니 완전 초죽음 아니냐?”
― “냅 둬. 저러다 일어나서 여기 있는 술 다 윤정한한테 갈 거니까.”
― “의사분들은 다 말술이야?”
―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고 윤정한은 그래.”
― “설마 자다가 가는 건 아니겠지?”
승관은 정한의 콧잔등 밑에 손가락을 댔다. 아직은 살아있어. 형은 죽지 말고 불로장생 하세요. 지훈은 실소했다. 거하게 취한 석민은 불그죽죽한 뺨에 손바닥을 비볐다. 소파 밑에 실신한 석민이 코를 곤다. 승관이 제 외투를 석민의 위로 던졌다. 한동안 소주잔으로 연달아 꺾어 먹기 기술을 펼친 녀석이 묻는다. 특별 호 어쩌고 그거 언제 나오냐? 소맥을 마시던 지훈이 답한다. 곧. 언젠가. 타격감 제로의 녀석이 다시 묻는다. 인터뷰 나가기 전에 많이 기대해 달라고 광고 찍던데 너희는 안 하냐? 이번엔 지훈의 소맥을 뺏어 먹던 내가 말한다. 찍을 거야. 따라가서 잘 봐야지. 녀석은 대놓고 웃었다.
― “제발 손만 잡으세요.”
― “나 프로야. 요즘 공과 사 구분 장난 아니게 물올랐어.”
― “예? 너요? 넌 눈빛부터가 틀려먹었는데요?”
― “초 치시네요?”
― “초만 치면 다행이게요? 예전에 이런 영화 제목도 있습죠. 뿌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 “얘 젓가락 들었어.”
― “쟨 무조건 들킨다에 내 손모가지를 걸어불랑게.”
― “들킬 확률은?”
― “가볍게 천백육프로?”
― “가 네가 오늘 D질 확률이다.”
― “먼저 위로 올라가 보라는 거지.”
승관은 필사의 생존을 걸고 소파 주변을 빙빙 돌았다. 고요히 엎드려 자던 정한이 인기척에 기지개를 켰다. 졸린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소파 아래로 내려왔다. 정자세를 잡은 정한은 승관과 나를 앉혀 두고 어깨동무를 했다. 지훈은 미간을 살짝 구기며 내게 손짓했다. 거기 있지 말고 본인에게 오라는 뜻이다. 슬그머니 기어가 24시 업무 중 하나인 껌딱지가 되어 그에게 달라붙는다. 졸지에 승관이 정한의 술 파트너가 됐다.
― “지훈이는 나 안 보고 싶었어?”
― “오늘 다들 왜 그러지?”
― “석민이는 벌써 뻗었네? 승관이는 내가 눈 감을 때 같이 눈 감는 거야.”
― “형, 잘못했어요.”
정한의 잔이 수시로 비워진다. 초점이 나간 승관은 정한과 건배를 외친 후 한 모금 마시다가 곧바로 다른 컵에 술을 뱉었다. 일 분에 소맥이 몇 잔이나 들어가는 거냐. 승관은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지훈에게 복화술로 도움을 청했다. 지훈은 선물로 받은 고량주를 꺼냈다.
― “넷 중 하나 뒤지라는 거냐.”
― “그게 너일 것 같다는 거야.”
― “김여주 흑장미.”
― “내 거야.”
― “미친 새끼. 개소름.”
― “형, 잔 바꿔줘?”
― “소맥 잔에 고량주 좋지.”
― “미친.”
― “승관이 뭐라구?”
― “형, 안 졸려요?”
― “너 눈 감니?”
― “아니요?”
― “다 같이 건배! 짠짠짠!”
보드카와 위스키로 해외에서 굴러먹다 온 나도 얼굴이 벌게져 나오지도 않는 코를 여러 번 훔쳤다. 자꾸 떨궈지는 고개를 지훈이 품으로 받친다.
― “애정행각은 둘만 있을 때 하지?”
― “토할까 봐 막는 거야.”
― “나 안 취했어.”
― “알아.”
― “취했네.”
― “안 취했어.”
― “육 곱하기 삼.”
― “십팔.”
― “올.”
― “십팔놈.”
― “뭐 인마?”
제주도의 자랑 삼다수가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지훈의 재빠른 해결이었다. 승관의 허리춤을 잡고 마지막까지 원샷 때린 정한이 승관의 어깨를 두른다.
― “우리 승관이, 지훈이는 맨날 여주한테 관심 없는 척하면서 해줄 건 다 해주고, 맞을 거 다 맞아주고, 사줄 건 다-아- 사주고 뒤에서 흐뭇흐뭇 일기 쓴다며?”
― “윤정한 나와.”
― “죄송한데 윤정한 진짜 나와 봐.”
정한이 배를 잡고 꺄르륵거렸다.
― “지훈이는 여주를 고등학생 때부터 알았으니까 그 전은 승관이만 알고 있겠네?”
― “당연하죠. 전 다 알고 있죠.”
― “뭘 다 알고 있는데.”
― “맨입으로?”
― “관심 없어. 딱히 신경 안 써.”
― “그래? 우리 목욕탕도 같이 갔는데?”
지훈의 급발진 버튼을 누르는 승관의 요염한 눈빛.
― “난 목욕탕까지 안 가도 되는데?”
― “그게 뭔 말… 야 이 또라이야.”
승관의 얼굴이 붉어진다. 명예 아버지 안장을 건 녀석이 눈만 끔뻑거리는 내게 다가와 팔을 잡아 쥔다. 제 눈에 별사탕이 들어가기 전까지 절대 지훈에게 보낼 수 없다는 거다. 죽마고우의 팔을 뿌리치고 지훈의 품을 끌어안는다. 지훈은 브이. 허탈한 승관을 정한이 위로했다.
― “야, 뜨자.”
― “초딩이냐.”
― “누가 더 똥뙈지 잘 아는지 한판 붙자고.”
게슴츠레한 석민이 승관 옆에 붙는다. 그들은 크로스를 외치며 팀을 꾸렸다. 정한은 소맥 잔을 들고 슬그머니 지훈 뒤에 앉았다. 크로스 대신 대화로 조지는 ㅇㅈㅎ들.
― “오랜만에 피를 보네.”
― “실습 참관 가능하지?”
― “어디서 오셨죠?”
― “해부학이요.”
― “정확히 세로로 반 가르는 겁니다.”
― “연희동 칼잡이라.”
― “명의시군요.”
― “돌팔이 7주년 내일인데 올래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주말을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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