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亂) 그리고 난(暖)
01
♬ 이 노래를 들으면 좋아요 " 거미 - 구르미 그린 달빛 "
“자신을 귀하게 여기십시오. 마음만은 따뜻한 낭자 아니십니까.”
처음이었다. 나에게 따뜻하게 대해준 사람. 이미 기울어져 버린 가문, 누구도 봐주지 않는 가문의 여자였다. 아버지는 지병으로 돌아가시고 남은 건 오라버니 둘뿐이었다. 오라버니는 나에게 다정했다. 첫째 오라버니는 예전에 아버지에게 배운 서예 실력으로 아이들에게 글자를 가르쳤고 둘째 오라버니는 활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 어릴 적부터 무예에 관심이 많아 아이들에게 무예를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했다. 이에 영향을 받아 나는 글과 무술 둘 다 능숙했다. 그래서 진시(아침 7시~9시)부터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까지는 햇볕 아래에서 책을 읽었고 그 후에는 둘째 오라버니와 함께 사냥을 가거나 산 속에서 무예 연습을 했다. 어느 날은 둘째 오라버니와 사냥을 갔다가 길을 잃어버렸을 때 사나운 짐승 한 마리를 마주쳤을 때가 있었다. 나는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그저 짐승을 잡아 오늘 배부른 식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밖엔. 그래서 짐승에게 달려들었지만 내 다리로 오는 빠른 짐승을 막을 길이 없었다. 결국 나는 다리에 큰 상처를 입었고 도망가려는 찰나 뒤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고운 비단 옷을 입은 누군가가 짐승을 잡고 나에게로 와 손을 내밀었다.
“잡으시지요.”
익숙한 목소리였다. 나에게 손을 내민 그 사람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고 손은 컸지만 매우 부드러웠다. 손을 잡고 일어서자 내 다리의 상처를 보고선 자신의 말에 태워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낭월대군, 맑고 밝은 달이라는 의미처럼 항상 나에겐 맑은 웃음과 밝은 정신을 가져다 주었던 사람. 어릴 적에는 우리 가문의 사람들과 낭월대군의 가문도 그리 나쁜 사이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가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기 전까지는 우리도 같은 마을 동무로서 책도 같이 읽고 무예도 함께 배웠다. 그의 형제들인 백월대군과 화월대군도 우리에겐 따뜻했던 사람이었다. 백월대군은 그의 아버지가 조선을 세운 뒤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화월대군은 백월대군을 보좌하는 큰 권력자가 되었다. 낭월대군은 그 둘과 달리 조선이라는 나라에서도 우리 가문을 잘 챙겨주는 유일한 궁궐의 사람이었다. 낭월대군의 집에 들어서자 나의 집과는 다른 풍경에 눈을 가만히 두지 못 했다. 식량은 남아나는 듯 하였고 그 곳에서 일하는 천민들도 많아보였다. 낭월대군은 의원을 불러 나를 치료하는 동안 한 마디를 하지 않다가 내가 대문을 넘는 순간 입을 뗐다.
“자신을 귀하게 여기십시오. 마음만은 따뜻한 낭자 아니십니까.”
고마웠다. 항상 챙겨주는 낭월대군이. 그래서 더 마음이 갔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낭월대군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고 나의 두근거림이 낭월대군에게까지 전달되는 듯 쿵쾅거렸다. 낭월대군은 내 연심을 모르겠지만 나는 어릴 적에 나를 잘 챙겨주는 모습에 낭월대군에게 시집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릴 적에는 나의 첫째 오라버니인 영훈 오라버니와 화월대군은 둘도 없는 벗이었다. 매일 붙어 있었고 매일 같이 놀았고 매일 같이 밥을 먹었다. 둘의 가문이 원수지간이 되기 전까지는 실과 바늘처럼 뗄레야 뗄 수 없었다. 하지만 조선이 건국되고 나서 화월대군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영훈 오라버니를 버렸고 영훈 오라버니는 항상 그것을 마음에 품고 살고 있었다. 그래서 나를 잘 챙겨주는 낭월대군을 아니꼽게 보기도 했다.
“오늘도 낭월대군 집에 간 것이냐.”
“그것이.. 다리를 다쳐서..”
“사냥은 꼭 선우랑 같이 다니도록 해라. 길을 잃으면 소리를 지르도록 해. 넌 여자다.”
“예. 알겠습니다.”
“미안하다. 연희야. 내가 더 잘 챙겼어야 했는데. 그래도 형님이 낭월대군은 그렇게 미워하지 않으시니 걱정하지 말거라.”
“아니에요, 오라버니. 다음엔 제가 더 잘 따라갈게요. 얼른 밥 드시고 주무셔야죠.”
“그래, 고맙다. 내일은 장이 서는 날이니 조심히 갔다오거라.”
“알았어요.”
-
다음 날, 먹을 것을 사기 위해 장터에 갔다. 곡물들과 채소들을 사고 돌아오던 중 저 멀리서 말 한 마리가 조심스럽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머리를 조아렸고 자세히 보니 그 말의 주인은 화월대군이었다. 나도 조심스럽게 머리를 땅에 대고 있었는데 말발굽이 내 머리 앞에서 멈추었다.
“연희가 맞느냐.”
“예..? 예..”
“일어나보거라.”
조심스럽게 일어나 화월대군의 눈을 바라보자 어릴 적 화월대군의 눈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영훈 오라버니에게는 그렇게 매몰찼던 그 화월대군이 나에겐 환하게 웃으며 고운 비단 옷 하나를 나에게 주었다. 장터에서 날 보고 급히 비단 옷을 사 가지고 왔다는 화월대군의 말에 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화월대군은 5년만에 보았지만 그의 아름다운 눈은 그대로였다. 화월대군, 꽃처럼 아름다운 달이라는 뜻이다. 아마 조선 땅에서 그리 고운 얼굴을 가진 사람은 화월대군밖에 없을 것이다. 여자들의 눈빛뿐만 아니라 권력에도 욕심이 많아 궁궐에서는 이미 화월대군의 편이 반 이상일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나에게 비단 옷을 주니 몹시 당황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연희야, 미안하구나. 너에게는 상처를 줄 생각이 없었는데.. 그렇게 되었구나.”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소녀는 이걸로 되었습니다.”
“자주 보자꾸나.”
자주 보자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 사라진 화월대군의 뒤를 바라보며 나는 무언가 내 마음을 쿡쿡 찌르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릴 적 화월대군은 낭월대군과 달리 나에게 대하는 모든 행동이 장난이었고 즐거움을 위한 것이었다. 자신을 봐달라는 표현이라고 변명하였지만 그 때의 나는 화월대군이 미웠다. 나에게 콩으로 만든 메주라고 부르며 장난치고 항상 놀이에서도 나를 이겼던 화월대군이었다. 그랬던 화월대군이 이리 달라진 것을 보고 바로 영훈 오라버니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무슨 속셈인게냐..”
“재현 형님이 왜 그러신답니까.”
“형님이라니. 이젠 대군이다.”
“죄송합니다.”
“연희, 요새 밖에서 궁궐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거 보니 별로 기분이 좋지 않구나. 내일부터는 집에서만 있도록 해.”
“예? 저.. 저도 사냥을 갈 것인데..”
“내일만이라도. 하루만이라도 가지 말거라.”
“예..”
참고해주세욥 |
난 그리고 난, 각각 어지러울 난, 그리고 따뜻할 난 입니다. 대군들의 이름, 사건들은 모두 허구입니다. 선우가 광산 김씨인 것은 알지만 권문세족이라는 설정을 위해 언양 김씨로 설정을 해두었고 대군들은 이성계 후손으로 설정을 해 두었습니다. 전에 써두었던 것이 맘에 들지 않아 다시 써서 재업로드합니다:) 모든 사진의 출처는 사진 안에 있습니다. 느리게 흘러가요. 삘 받을 때 찾아옵니다. 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