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도면 되려나. 필요한거 다 샀어?"
머쓱하게 말해오는 윤기에 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못산거 있으면 내일 나 퇴근할 때 연락하던지, 아니면 집에서 줬던 카드로 나가서 사던지 해."
어린 신부. 03
차에 올라타는 윤기를 빤히 보는 여주에 윤기는 시동을 걸려다 말고 고개를 돌려 여주를 바라보았다.
"할 말 많은 표정인데."
"...아."
"아님 말고. 안전밸트 매."
윤기는 누가봐도 불편한 티를 잔뜩 내며 옆자리에 앉아 안전밸트가 동앗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붙든 채로 손장난이나 치고 있는 여주가 여간 신경쓰이는 게 아니였다.
할 말도 많고, 궁금한 것도 가득인 얼굴이였는데 입을 열지 않는 것도 신경이 쓰였다.
그렇다고 해서 윤기가 여주에게 캐물은 것은 아니였다.
갑자기 낯선곳에 와서 저러는 것은 당연했거니와 제가 이 집에 입양왔을 당시의 모습과 겹쳐보였다.
그 때의 윤기는 아무도 제게 무언가를 묻지 않아주는 게 좋았고,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는 날에는 제가 입을 떼곤 했다. 여주도 스스로 입을 열 때까지 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여주는 궁금한 게 많았다. 저야 집에 잔뜩 쌓인 빚과 바꿔치기 당해 발목이 잡힌 신세라고는 하지만 윤기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책잡힌게 아니라면 굳이 저같은 아이와 결혼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집을 둘러싸고 있던 검은 양복의 사람들이 윤기의 주변에 있는 것부터 그 사람들보다 더 무거운 분위기를 풍기는 것까지 윤기가 그리 낮은 위치가 아니라는 것 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입을 뗄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여주가 기억하는 검은 양복을 입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찾아오는 그 사람들은 꽤나 위협적이였고, 간혹 집 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가기도 했다.
와중에 제게 연민이라도 느꼈는지 어린 저를 건들지 않았던 것 정도는 기억하지만 그게 감사하지는 않았다. 그냥 그런 줄로만 알았다.
말이야 결혼이라고 하지만 팔려온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윤기의 집에서는 무엇을 해야하는 지도 묻고 싶었다.
그냥 가만히 집이나 지키라고 부르지는 않았을 터이니 가정부 노릇이라도 해야하는 건지 아니, 그 지옥에서 구해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먼저 전해야 하는 건지, 그것도 아님 왜 제 가족이 저를 버리게 두었냐고 악이라도 쓰면서 울어야 할 지 감이 오질 않았다.
그저 아무 말없이 그와의 사이에서 찾아낸 정적을 만끽하며 언제 봤는 지도 모를 창밖 세상 구경이나 하며 따라갈 뿐이였다.
"내려."
"...자나?"
윤기는 여주를 확인하지도 않고 문을 열려다 움직임도 답변도 들려오질 않아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곤히 잠든 것 같은 여주를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 머뭇거리기만 했다.
깨우고 싶지는 않아 손잡이에 가져다 대었던 손을 치워냈다.
제 옆에서 누가 잠든 것을 처음 보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여주 방향으로 몸을 기울이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제 집 문 앞에서 들어가지도 못한 채로 차에서 이러고 있는 꼴이 퍽 우스웠다.
다른 사람이 보기라도 한다면 꽤나 쪽팔린 상황이 연출될 것 같기도 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뱉으며 깨지도 않고 자는 여주가 뒤척이는 걸 보자 그제서야 차에서 내렸다.
여주 쪽 문을 열고 쪼그려 앉아 그 앞에서 바람에 여주의 솜털까지 일렁이는 걸 바라보다 아직도 꼭 쥐고있는 안전밸트를 풀어냈다.
윤기는 많이 피곤했는지 잠을 쫓아내지 못하는 여주를 안아들었다. 그게 이상한 줄도 모르고 꼭 영화에서나 보던 자세로 여주를 안아들어 방에 눕혀두었다.
생각할 일이 많았다. 하루가 꼭 일주일 같았다.
미리 알고있던 일이긴 했어도 이런 분위기일 줄은 몰랐다. 종일 여주가 신경쓰이는 것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윤기가 방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여주는 감았던 눈을 떴다. 윤기가 여주를 안아들어 집 안으로 들어올 때 쯤, 잠에서 깼다.
윤기의 품에 안겨 방으로 들어가 눕혀질 때까지 얌전히 안겨있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래야 할 것도 같았다. 눈을 뜨면 다시 찾아올 것 같은 어색한 분위기를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행여 일어나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갈까 발 뒤꿈치를 든 채로 조심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이 집에 오자마자 받은 지갑을 들어 그제야 자세히 보았다. 별 거 없는 가죽지갑이였지만 여주에게는 꽤 오랜만에 받아보는 선물이였다.
주는 사람이 어떤 심정이였는 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만져보지도 못했던 가죽 지갑을 들어 살펴보다 제 주머니에 들어있던 낡은 지갑을 꺼내었다.
이렇게나 쉽게 저를 버릴 수 있던 부모였는데, 뭐가 그리 소중했던 건지 낡은 지갑 한 켠에 들어있는 가족사진을 꺼내보았다.
웃고있는 모습을 언제 본 건지 선명히 기억도 나질 않는 추억을 바라보다 고이 접어 다시 넣어두었다.
옮길 것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저 사진보관용으로만 쓰이던 지갑에는 카드도, 현금도 없었다.
새 지갑에는 윤기가 넣어둔 카드만 자리하고 있었다.
여주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거실에도 윤기는 없었고, 윤기의 방문도 활짝 열린 걸 보니 아마 방에도 없는 것 같았다.
여주는 조심스레 발걸음을 내딛어 집안을 둘러보았다. 문이 활짝 열린 윤기의 방은 힐끗 보고 지나갔다. 부모까지 저를 버린 마당에 윤기의 눈 밖에 나는 날에는 여기서도 내쫓길 것 같았다. 더이상 갈 곳 없는 신세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거실에 놓인 깔끔한 장식품들이 꼭 윤기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온 집안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모습이였다.
함부로 손을 댈 생각도 못하고 전시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눈으로만 바라보다 열려있는 방들은 고개만 내밀어 눈동자를 굴리며 살펴보았다.
꽉채워진 드레스룸은 온통 무채색의 옷들 뿐이라 절로 으, 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불빛이 새어나오는 문 틈 사이로 시선을 돌려 바라보니 하얀 손으로 서류를 넘기고 있는 윤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주는 그제야 입가에 미소를 띄며 방 문을 두드리곤 문을 열어 고개만 내밀어 눈을 굴렸다.
"아저씨. 바빠요?"
"이제 깬 건가. 들어와."
"들어가도 돼요?"
입은 허락을 구하면서도 발은 서재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방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윤기는 한참을 읽던 서류 파일을 내려놓았다.
"깼어? 배 고프면 뭐라도 해줄게. 그거 아님 다시 가서 자고."
"그런 건 아닌데... 아저씨는요? 저녁 안 먹어도 되나..."
"어. 괜찮아."
"저도 그냥 안 먹을래요. 아저씨 일 하는 거, 방해한 거에요?"
"아냐. 다 했어. 뭐 필요해?"
"아뇨. 그냥... 혼자 방에 있으니까 심심해서, 그래서 왔어요."
"저 쪽 가보면 책 많이 있어. 그거라도 읽든가."
여주가 어색하게 웃으며 서재 안으로 발을 들인 순간부터 윤기의 시선은 여주를 따라다니느라 다른 건 손에 잡히지 않았다.툭 건들면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것만 같은 여주가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였다.
차라리 눈 앞에 보이지 않는 게 나을 것도 같았다. 아직 여주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 하나 없었다. 여주가 자는 동안 윤기는 여주의 서류를 훑어보았다. 받자마자 신경질적으로 구석에 박아뒀던 터라 이제와서 읽어보니 연민이라도 가지고 데리고 살라는 건가 싶었다. 아무리 양아들이라고는 해도 이렇게 팔려오듯 제게 넘어온 아이와 결혼까지 시켜서 제 아버지가 얻을 수 있는 게 있긴 한 지도 의문이였다. 정리되지 않는 복잡한 머릿속에 습관처럼 담배를 입에 물려다 여주의 뒷모습을 보곤 한숨을 내쉬며 내려놓았다.
김여주, 21살. 결혼 할 사람이랍시고 윤기의 보스에게서 내려온 서류를 대충 보니 어릴 때부터 이곳 저곳에서 아르바이트라도 한 것 같았다. 그거 말곤 딱히 볼 것도 없었다. 제가 막 이 일을 시작했을 때 쯤 자주 보던 집들과 비슷했다. 사채를 끌어다쓰고, 불어나는 돈을 감당하지 못하는. 그저 그런 능력없는 집안의 아이. 제가 알던 아이와 눈망울이 겹쳐보이는 것 빼고는 거슬리는 것도, 궁금한 것도 없었다. 그럴 줄로만 알았다.
BARAKA |
분량이 말도 안되게 짧아서 염치가 없습니다만 빠른 전개를 위해서..!! 둘이 좀 자기소개라도 하는 시간을 제대로 가져줘야되나 싶네요.. 제가 다 어색한 이 분위기... 부족한 이번 글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남겨주시는 댓글들 잘 읽고 있어요. 정말 많은 힘이 됩니다! 그럼 다음 화에서 뵐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