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이 다툼을 할때에는 큰 이유가 필요치 않다.
오히려 사소하고 일상적인 이유로 서로를 물어뜯는 이유가 종종 생기곤 하는데, 싸움의 가장 큰 이유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 할수있다.
왜 나를 이해못해줘, 이런것도 이해 못해? 왜 내마음을 몰라? 등등. 모든 싸움의 시작은 서로에 대한 이해부족.
그 예로, 한 커플을 살펴보자.
"아, 진짜 짜증나!!"
전화를 끊은 준면이 드물게 큰소리를 냈다. 준면의 앞에 앉아 저녁을 먹던 세훈은 조금 놀란 얼굴로 준면을 바라봤다.
전화가 끊긴 핸드폰을 보며 한참을 씨근덕 대던 준면이 크게 숨을 내쉬고는 입안에 밥을 퍼넣었다.
꾸역꾸역 음식을 퍼먹는 준면의 눈치를 보던 세훈이 수저를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데?"
입안에 가득찬 밥을 격정적으로 씹어삼킨 준면이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말하는 내내 식탁을 쾅쾅 내리쳐 가며 하얀 얼굴이 상기될 정도로 흥분한채 말한 자초지종은 대충 이러했다.
얼마전 교양과목 조별과제를 시작했는데 준면의 조는 비교적 괜찮은 조원들로 구성되었다고 했다.
나이가 제일 많은 준면이 조장이 되었고, 다른 조원들도 다른조에 비하면 비교적 수월하게 준면을 도와주웠다.
문제는, 조원들중 한명인 홍혜란이라는 아이였다.
조별모임은 펑크내기 일쑤, 자료라도 조사해서 메일로 보내라해도 무시,
며칠전엔 잠수까지 타버려 준면과 조원들을 애태우다 과제발표가 3일뒤로 다가온 지금에서야 연락을 해온것이다.
그러지 마라, 조별과제인데 이렇게 잠수를 타는것은 예의가 아니다, 조곤조곤 혜란을 타이르던 준면에게 돌아온 말은 이것이었다.
'선배, 왜이렇게 구질구질 해요?'
구질구질? 구질구지일?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혜란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준면의 말을 듣던 세훈이 준면에게 질문했다. 그래서 과제는?
"과제는 다 했지. 혜란이 걔가 늦게나마 자료는 보내줬어. 발표만 하면 끝나."
"그럼 된거네."
"뭐가?"
"과제 다 했다며, 그럼 된거 아니야?"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그럼 뭐가 문젠데? 과제했으면 된거 아니야?"
심드렁한 세훈의 말에 준면이 기가찬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젓고는 손가락을 하나씩 펼쳐가며 자신이 혜란에게 화를 내야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장황하게 이어지는 준면의 설명을 듣고난 후에도 세훈의 반응은 같았다.
"그정도는 형이 이해해. 1학년이라며."
"아니 세훈아. 생각을 해봐. 너같으면 화 안나겠어?"
"과제는 잘 끝났다며. 그럼 된거지. 과제가 망한것도 아니고."
계속 빙빙 돌기만 하는 대화를 견뎌내지 못한 준면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래, 너 잘났다. 나는 나이먹고도 속이 좁아서 홍혜란 싫어 죽겠어. 마음넓은 오세훈씨, 조별과제할때 홍혜란 같은 애나 만나버려!
쾅, 하고 숟가락을 내려놓은 준면이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세훈의 집을 뛰쳐나왔다.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세훈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무시하기로 했다.
자신의 집을 향해 달리는 길, 눈에서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내가, 뭐, 많은거 바랬어? 그냥 맞장구나 좀 쳐주면 되는거지."
함께 혜란을 욕해주는것? 그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냥 제 말에 맞장구나 쳐주고, 많이 힘들었겠네, 혜란이라는애 영 못쓰겠네, 하는 등의 다정한 위로가 필요했을 뿐인데.
평소엔 넘치도록 다정한 세훈은 왜 이런것은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것일까. 세훈은 준면이 혜란에게 화난 포인트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준면은 혜란의 태도에 화가 난것인데, 세훈은 준면이 과제때문에 화를 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의 차이는 결국 다툼을 불러왔다. 연애를 시작한 이래 깨만 쏟아내던 커플의 첫 싸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김민석."
핸드폰에 고개를 박고 루한과 카톡을 하며 히히덕 대던 민석이 고개를 들고 준면을 올려다봤다.
항상 방실방실 웃음을 뿌리고 다니던 준면이 오늘은 어쩐일인지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탓이었다.
이마에 '나 우울해요' 를 써붙인 듯한 준면의 얼굴에 민석이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일이지?
"어, 어?"
"오늘 나랑 저녁먹자. 내가 사줄께."
"어, 있잖아 나 오늘 루ㅎ… 아니, 아니다. 먹자!"
루한이랑 밥 먹기로 했는데, 라는 말을 꿀꺽 삼킨 민석이 어색하게 웃으며 준면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루, 라는 부분에서 부터 급격히 어두워지는 얼굴을 보니 차마 거절을 할수가 없었다.
루한에게는 미안하지만 점심약속을 취소해야할것같다는 생각에 카톡을 보내려 창을 열자 이미 루한에게 카톡이 와 있었다.
[민석, 미안한데]
[나 오늘 세훈이랑 밥 먹을것 같아]
[정말 미안ㅠㅠㅠㅠㅠㅠㅠㅠ]
괜찮다며 루한에게 답장을 보낸 민석이 자신의 옆에 서서는 힘없이 터덜터덜 걷는 준면을 힐끔댔다.
루한도 갑작스레 세훈과 밥을 먹어야 한다는것을 보니, 두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것 같았다.
이런 방면엔 쓸데없이 눈치가 좋은 민석이 준면의 어깨를 두드렸다.
힘없이 고개를 들고 자신을 바라보는 준면에게 다시한번 웃어보인 민석이 준면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자, 우울할땐 매운게 최고지!
우울할땐 매운게 최고라는 민석에 손에 이끌려 온곳은 대학로 골목에 위치한 불닭발 집이었다.
노릇노릇 하게 구워진 닭발을 구운후 위생장갑 한짝을 준면에게 건넨 민석이 준면의 손에 닭발을 쥐어주었다.
손에 쥔 닭발을 멀뚱히 바라보던 준면이 닭발을 입에넣었다.
"맵다…."
"그러니까 맛있는거지."
"매워…."
그래, 그래. 대충 맞장구를 치며 닭발을 뜯던 민석이 준면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손에 쥔 닭발을 떨어뜨렸다. 준면의 얼굴이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있었다.
매운 양념탓에 입술은 퉁퉁 부어있었고 빨개진 얼굴로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흘리면서도 입안에 닭발을 우겨넣던 준면이 결국 콜록거리며 닭발을 내려놓았다.
훌쩍이며 먹은 닭발 양념이 목에 걸렸는지 한참을 콜록대던 준면이 민석이 건넨 휴지를 들고는 얼굴을 닦아냈다.
"무슨일인데."
"세훈이랑 싸웠어."
주먹으로 눈물을 쓱쓱 닦아내는 준면을 보며 민석이 한숨을 쉬었다. 역시, 사랑싸움.
"왜 싸웠는데."
"그러니까…"
준면의 사정을 들은 민석이 닭발을 집어던지며 세훈을 욕했다.
이런 미친, 지 애인편하나 못들어줘? 어? 그러고도 애인이라 할수있어?
숟가락으로 테이블을 탕탕 쳐대며 준면을 달래주던 민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일어나.
"어?"
"오세훈같은거, 버려버려! 이참에 새 남자 만나자."
"어?"
"따라와!"
얼빠진 얼굴로 민석에게 질질 끌려간 준면의 도착지는 클럽이었다.
저기, 이, 이건좀 아니지 않을까… 클럽입구에 서서 망설이는 준면을 보며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친 민석이 준면을 이끌고 클럽안으로 들어섰다.
시끄럽게 울리는 음악, 쿵쿵대는 비트, 몸을 부벼대는 남녀들.
클럽안은 그야말로 '불타는 금요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려주고 있었다.
낯선 클럽 풍경에 눈을 굴려대며 민석에 뒤에 딱 붙어있던 준면은 스테이지에서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야 김민석… 저거…"
준면이 가르키는 손가락 끝에는, 세훈이 있었다.
준면이 제일 좋아하는 남색 남방을 입어 팔부분을 반틈정도 접어 올리고 자신에게 부벼대는 여자의 허리를 자연스럽게 감싼채 리듬을 타는 남자는, 분명 세훈이었다.
하 좆됬다… 고개를 숙인채 말이 없는 준면을 보며 민석이 머리를 쓸어올렸다.
준면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데려온것이 오히려 기분을 더 안좋게 한것 같았다. 덤으로 사랑싸움의 악화도.
"저기, 나. 갈게."
몸을 되돌려 빠르게 걸어나가는 준면을 붙잡으려 손을 뻗은 민석의 손은, 클럽안에 가득한 사람들에게 치여 준면에게 닿지 못했다. 야, 야!! 김준면!!
애타게 부르는 민석의 목소리는 클럽안의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묻혀 사라졌고,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겨우 빠져나와 준면을 쫒아나가던 민석은 또 하나의 난관에 봉착했다.
"민석이형?"
뒷통수에 꽂히는 목소리에 민석의 표정이 일그러 졌다. 오늘 무슨 날이냐… 소리없이 뻐끔뻐끔 욕을 내뱉은 민석이 어색하게 웃으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 세훈이네?"
"형이 여기 왜 있어요?"
"어? 나? 어, 나는 그냥 좀.. 놀려고?"
아아, 그렇구나. 루한형한테는 비밀로 해 줄께요. 시니컬하게 말한 세훈이 민석에게서 돌아섰다.
안도의 한숨을 쉰 민석이 세훈이 자신에게 다시 말을 걸기전에 빠져나가려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어딘가에서 튀어나온 준면이 민석의 손을 붙잡았다.
"나가는 길을 못찾겠어!"
시끄럽게 울리는 음악을 뚫고 자신의 목소리를 전하려는듯 준면의 목소리는 한껏 높았고, 그 목소리는 민석에게 뿐만 아니라 세훈에게도 전해졌다.
당황한 민석이 준면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때는 늦었고, 세훈은 두사람 앞에 서있었다.
"준면이형. 형이 여기 왜 있어요?"
갑작스런 세훈의 등장에 당황한 준면이 민석에게 눈빛을 쏴댔다.
야, 뭐야. 세훈이가 왜 여기 있어. 아, 몰라. 준면의 눈빛을 외면한 민석이 슬그머니 준면의 뒤로 숨었다.
자신보다 어린 세훈이었지만 위에서 내리찍어대는 '형이 준면이형 데리고 왔어요? 네?' 같은 눈빛은 받아내기가 힘들었다.
자신의 뒤에 숨는 민석을 기가찬다는 표정으로 바라본 준면이 입을 열었다.
"민석이랑 기분전환겸 왔어."
"기분전환하러 클럽을 와요?"
"너도 왔잖아."
준면의 말에 말문이 막힌 세훈이 잠시 말을 멈춘사이 준면이 민석의 손을 붙잡고 돌아섰다. 재밌게 놀다가. 아까 그 여자 예쁘더라.
점점 멀어지는 준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세훈이 욕지기를 내뱉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좆같네 진짜…"
*
클럽에서 뛰쳐나온 준면이 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묻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울어대는 준면의 곁에 어정쩡하게 선 민석이 준면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세훈 나쁜놈."
"그래, 정말 나쁜놈이지."
"개새끼."
"그렇지. 개만도 못한 새끼."
"야, 그건 좀 심하잖아!"
준면의 말에 맞장구 쳐주던 민석이 준면의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뭐, 무슨 장단에 맞춰 춤을 추라는 거야…
얼빠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민석을 흘겨본 준면이 눈물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간다.
그, 그래. 잘가라. 기계적으로 손을 흔드는 민석을 뒤로 한채로 걷던 준면이 갑자기 뒤를 돌아 민석을 향해 소리쳤다.
"너, 세훈이 욕하지 마라. 욕해도 내가한다!"
뭐 씨발 나보고 뭐 어쩌라는거야… 저절로 튀어나오는 욕을 중얼거리던 민석이 준면이 사라진 방향으로 가운데 손가락을 펼쳐들었다.
커플, 다 좆까라 그래! 엿!! 엿!!
손가락을 펼쳐들고 폴짝폴짝 뛰던 민석이 주머니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벨소리에 화들짝 놀라 손을 내렸다.
도둑이 제발을 저려 버둥거리던 제 모습이 조금 민망했던 건지 민석이 헛기침을 하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어, 그래 세훈아."
-준면이형 집에 갔어요?
"어, 들어갔어."
-택시 타고 갔어요?
"몰라."
-집에 안데려다 줬어요?
"다 큰 사내새끼를 왜 데려다줘."
-아 진짜. 안그래도 요새 위험한데.
"이런 씨…"
발 까지 나오려는것을 꾹 참아낸 민석이 숨을 고르고 다시 통화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걱정되면 직접 찾아가보시던가요."
-아 그게 안되니까 형한테 연락한거잖아요.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 준면이형좀 잘 챙겨줘요. 끊어요.
뚝 하고 끊긴 전화를 쥔 민석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신 무슨 죄로 이 둘사이에 끼어서는 루한도 못만나고 이따위 개고생을 하는지 정말로 의문스러웠다.
남의 사랑싸움에는 끼는게 아니란 말은 하나 틀린것이 없었다.
둘사이에 끼어 피곤한 저녁을 보낸 민석이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 피곤한 몸을 침대에 뉘이고 싶었다.
"다시는 오지랖 안떨어야지…"
굳게 다짐한 민석의 어깨가 오늘따라 유난히 아래로 쳐져있었다.
:) 저번편에 어떤 독자님이 얘들은 싸운적 없다그래서 한번 써봤어요 ㅇㅇ
그래그래, 어떻게 사랑이 늘 달달하기만 하겠니
:)비오는뒤에 땅이 굳겠지 뭐 (무책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