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gger Warning : 유혈
태형의 할머니가 가졌던 밭은 천 평이었다. 그 중 태형과 여주는 자급자족이 가능할 정도로만 밭을 가지고 나머지는 소작을 냈다. 소작 받은 데는 강 건너 완 할머니네였는데, 할머니는 여주가 일모자를 쓰고, 토시를 끼고, 일바지를 입고, 나올 때면 나란히 밭일 보는 걸 좋아했다. 할아버지는 여주네 밭과 가까운 쪽에만 일을 본다고 잔소리하시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태형이 저녁 술 약속을 넌지시 건네면 쉬이 걸려들곤 했다.
“일찍 왔네?”
“할아버지가 오늘 심하게 달리시더라고.”
“건강검진 전 만찬이신가.”
“이미 검진 끝나고 결과도 받으셨던데?”
태형이 셔츠를 벗으며 말했다. 완 할머니네서 저녁술을 얻어 마시고 오는 길이었다. 보통 저녁밥을 먹고 느즈막이 술자리를 가져 열 시는 되어야 돌아오는데, 오늘은 한 시간이나 일찍 돌아왔다.
“간이 아주 깨끗하시대. 결과가 너무 좋아서 더 열심히 마실 거라던데.”
“할머니 속 터지는 소리 여기까지 들린다.”
“오늘 밭일은 안 힘들었어?”
“응. 나 이제 너 없어도 잘 해.”
“나 없어도 되면 안 되는데…….”
“참나. 자기는 맨날 나 없이 일 막 하면서.”
“자기? 나보고 자기라고 한 거야?”
“어이없어…….”
태형은 읍내 철공소에서 일했다. 재주가 탁월해 목수 일도 겸하다보니 일이 많이 들어왔다. 가끔은 출장식으로 타지에 가기까지 했다. 한 달에 몇 번 있는 일이라, 태형은 사장에게 떼를 써 일을 줄였다. 여주와 조금 더 오래 있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떼를 쓸 때 비음을 섞어 신혼임을 어필했었다. 딱밤을 맞기는 했지만 이제 태형은 없으면 안 되는 직원이었기에, 가끔 마음대로 휴일을 받아올 만큼 여유부릴 수 있었다.
“근데 나 오늘 뭐 먹었는지 알아?”
“뭐 먹었는데? 나는 오늘 된장찌개 다 처리했어. 이제 다른 국 먹어도 된다!”
“장어 먹었다?”
“그거 맛있어? 난 고등어가 훨씬 낫던데.”
“응? 여주야. 나 장어 먹었다구.”
“저번에 산 간고등어는 너무 짜더라. 소금을 좀 덜어내고 굽는 게 나을 것 같아.”
“할아버지가 꼬리는 나한테 양보하셨어. 대박이지?”
“아니면 석쇠에다 구워서 기름을 좀 뺄까? 그럼 덜 짜려나?”
“아, 여주야아.”
태형이 앓는 소리를 내며 여주를 안았다. 알면서 모른 척 하는 게 뻔히 보였지만 그래서 더 애가 닳았다. 여주는 놀리는 건 이쯤하기로 했다. 요즘 부쩍 용희 이름을 들이밀 때마다 예전 말투가 나오는 것이나 철공소에 있는 날이 줄어드는 걸 보아 무언가 불안한 게 분명했다. 웃음이 나려는 걸 참고서 태형을 마주 안았다. 그리고 속삭였다.
“씻고 오기나 하셔.”
쏜살같이 욕실로 향하는 태형에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밤새 울게 될 줄도 모르고.
밤은 길었다. 같은 침대를 쓰고 같은 이불을 덮고 잔 시간도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아직 아팠던 날이 더 많았지만 그 기억을 상쇄시킬 만큼 열심히 사랑할 거라는 다짐을 가지고 왔으니. 긴 밤을 유용히 써야 할 것이었다. 여주는 가끔 이런 시간을 보내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었다. 평범하디 평범한 일상들을 보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던가. 제가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동안 밤마다 칼을 잡고, 제가 미국에서 논문을 쓰는 동안 총을 잡던 그 순간들은 얼마나 소모적이었던가. 내 삶을 가져가고 네 삶을 앗아가고. 그런데도 서로를 놓지 못해 아등바등 했던 나날들은 결국 우리의 삶이었음을. 여주는 눈 뜨면 제 옆에 온기를 가지고 누워 있는 태형을 볼 때마다 실감하곤 했다. 그리고 거울에 얼룩덜룩한 목덜미를 비춰볼 때마다 후회했다. 버릇을 잘못 들였어. 그날 허락하는 게 아니었는데.
“태형아.”
“응.”
“왜 이렇게 남기는 거야.”
“너두 남기잖아…….”
태형은 탓을 떠넘기면서도 제가 남긴 자국들이 너무 적나라한지 말끝을 흐렸다. 여주는 잠옷을 걸쳐 입고 구급상자를 들고 와 앉았다. 그리고 태형을 일으키고는 다 까진 등에 살살 연고를 발랐다. 밤의 잔상이 서로의 몸에 진득히 남아 있을 때면 옛날 생각이 더욱 났다. 태형은 그저 이 시간을 즐겼다. 어젯밤의 일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의례쯤으로 생각됐다.
그 의례의 처음을 따라가 보자면, 여주가 모든 것의 정체를 알았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농촌 느와르
2부: 개는 주인을 물지 않는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
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해서는 경영을 해야 한다. 여주는 헛소리를 들은 것 마냥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지금껏 아무 소리 않다가 대학 이야기를 할 때가 돼서야 통보식으로 늘어놓는 게 우습기도 했다.
“싫어요.”
꿈같은 건 없었다. 하고 싶은 공부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가 말하는 건 하고 싶지 않았다. 양지가 아니라 음지에 있어야 할 집안인 걸 천천히 깨달아가는 중이었다. 합당한 양지에서의 활동을 위해 저를 이용해 먹으려는 게 눈에 보이니 기가 찼다. 그래서 인생 최초의 반항을 했다. 그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는 모든 말을 내던지며 거부를 표했다. 결정적으로 태형도 모르는 친구 집에서 외박까지 했다.
“너한테 말 안 한 건 미안해. 아빠랑 내 일에 너까지 끼어들게 하고 싶진 않았어.”
“휴대폰은.”
“일부러 꺼놨었어. 미안해.”
그런데 그 품에 안겨있자니 의심의 씨앗이 시각을 넓게 만들었다. 태형의 존재. 너무도 당연해서 고민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너는 왜.
“괜찮아, 괜찮아. 왔으니까 괜찮아.”
왜 여기에 있는 거니.
의문은 빠르게 해결되었다. 태형의 손을 맞잡을 때마다 느껴지는 굳은살의 출처를 알아냈다. 이 넓은 집에서 유일하게 가보지 않은 창고 별채. 말이 창고 별채지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 늦은 밤 태형의 뒤를 밟기 전까지는 말이다.
훈련이라는 명목으로 태형이 칼을 잡는다는 걸 알았을 때, 여주는 제 혀를 베어내 아버지께 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래도록 예쁘게 피라며 쓰다듬던 손은 사실 잘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이의 피를 묻힌 손이고, 누군가는 그 일을 물려받아야 한다. 그제야 태형이 왜 제 옆에 있는지 깨달았다.
여주는 그게 싫었다. 태형은 자기 옆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 김태형으로 있었음 했다. 그래서 일을 벌였다. 영화를 보러 가거나 카페를 가거나, 가끔은 땡땡이를 치고 학교 앞 분식집서 죽치거나, 지극히도 평범한 일들. 너무나도 평범해서 쉬이 일상에 녹아드는 그런. 여주는 태형이 인간 김태형으로 보일 때가 좋았다. 스크린에 번뜩이는 섬광이 그대로 비치는 눈이나,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잔뜩 찌푸리는 미간이나, 어묵보다 떡을 많이 먹거나 하는 취향들. 저와 같은 또래임을 증명하게 하는 지극함을 추구했다.
그날도 그랬다. 땡볕에서 공차는 모습이 영락없는 고등학생이었다. 운동장은 모래바닥에서 잔디바닥으로 바뀐 지 꽤 되었는데도 먼지가 풀풀 날렸다. 세워놓은 천막은 해의 위치가 바뀌자 그늘을 좁게 잡았다. 체육대회라고 한껏 올려 묶은 머리를 도로 풀어 볕을 가릴까 고민됐다.
“이거 덮어.”
태형이 체육복을 건네자 주위에서 시선을 던졌다. 체육복 주인이 어느 정도 멀어져 다시 운동장으로 뛰어들고 나서야 아이들이 입을 열었다.
“이건 찐이다.”
“뭐?”
“레알. 찐이다 이건.”
“뭐가 찐인데?”
“너 쟤랑 무슨 사이야?”
“어어?”
“김태형이 너 좋아하는 것 같아.”
“맞아 맞아. 안 좋아하는데 이러면 에바임.”
여주는 쿵 하고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태형이 집에서 어떤 존재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 눈치 챈 줄 알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겁부터 먹었다.
“잘생겨서 말 걸어 보면 존나 단답이라 아무도 말 안 걸잖아.”
“단답이라도 받으면 다행이지. 쟤 목소리 들은 사람 거의 없을 걸.”
“잘생긴 애들은 존재 자체가 복지라 괜찮음.”
“근데 바로 옆에서 일대 일 복지 서비스를 해주시잖아.”
“그래 여주야. 그러니까 잘해봐라. 마음 없어도 잘해봐라. 내가 볼 때 쟤는 너한테 마음 있다. 백퍼다.”
남들은 이미 너를 인간 김태형으로 보고 있었구나. 그래서 내가 안심을 했구나. 나는 진작에 너를 인간 김태형으로 보고 있어서. 그래서. 그래서 내가 너를.
“태형아. 시험도 끝났는데, 우리 가출할까?”
“아버지랑 싸웠어?”
“아니.”
“어디로 가출할 건지 말은 하고 가. 걱정되니까.”
“태형아. 내 말 뜻 이해 못 했지.”
나는 너를.
“데이트 하자는 거잖아.”
이미 사랑하고 있었구나.
“그 아이 때문이냐.”
네. 라고 대답하면 안 된다는 걸 여주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겨울도 아닌데 바닥이 차가웠다. 매번 이곳에 가족이 아닌 이름으로 서면서 태형이 느꼈을 것들을 떠올리니 가슴이 미어졌다. 그러면서도 그 감정을 오롯이 느끼기 위해 눈을 똑바로 떴다. 더 이상 가출 같이 아이 같은 방법은 통하지 않는다. 제가 그런 방법을 쓸 수 있는 것은 밀려오는 썩은 파도를 제대로 인식하기 전까지였다. 언제까지고 태형이 방파제 역할을 하게 둘 수는 없다.
“다시 물으마. 경영권을 물려받지 않겠다는 게 김태형 때문이냐.”
눈앞에 들이밀어진 사진 속에는 태형과 여주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게중에는 누가 봐도 연인 사이인 듯 다정한 모습도 있었다. 여주는 경악했다. 집안의 정체를 알았던 당시보다 더욱 피부로 와닿았다. 여기는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딸한테 파파라치를 붙이는 아빠가 세상에 어디 있어요.”
“다 너를 위해서야.”
“뭐라고요?”
“너는 공부만 해. 그리고 경영권을 물려받아. 그러기만 하면 남은 일들은 그 놈에게 맡길 거다.”
“그놈이라뇨. 아빠. 무슨 말을 하는 건데요, 지금.”
“마음 정리 해. 그놈은 이미 우리 집의 개다. 그러려고 데려왔고 그러기 위해 태어난 놈이야. 네가 마음 줄 만큼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금 어디 있어요.”
어디 있냐고요! 할 말은 이게 끝이라는 듯 일어서는 뒷모습에다 소리쳤다.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주는 맨발로 뛰어다녔다. 넓디넓은 집을 헤매며 창고 별채로 갔다. 문은 밖에서 잠겨 있었다. 여기가 아니면 어디란 말인가.
“아가씨. 늦었는데……”
마주친 실장의 손이 피투성이었다. 여주를 보자마자 뒤로 숨기는 게, 여주는 직감적으로 그 피의 주인을 알아야 한다고 느꼈다.
“어디 다녀오세요.”
“잠깐 일이 있어서 회장님을 뵈고 왔습니다.”
거짓말.
“아빠 지금 어디 계세요?”
“지금…… 침실에 계십니다.”
실장이 나온 방향에는 지하 창고밖에 없었다. 그곳에 숨겨야 할 게 있는 것이다. 여주가 실장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아저씨. 열쇠 주세요.”
“예?”
“창고 열쇠요. 아저씨 방금 지하 창고에서 나왔잖아요.”
“아가씨. 그게.”
“주시라고요.”
“안 됩니다.”
“왜 안 되는데요?”
“회장님의 지시입니다.”
태형은 어디까지 막아주고 있었던 걸까. 여주가 시린 발을 느끼지 않도록 어디까지 감춰두고 있었던 걸까. 여주는 무너지려는 다리에 힘을 주고 꼿꼿이 섰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들이 죄스러워졌다.
“아저씨. 아저씨는 이 일, 계속 하고 싶으세요?”
“…….”
“내가 경영권 물려받으면, 다 나한테 넘어오는데.”
지금 나를 애새끼 취급 하지 않는 게 나중을 위한 일 아닐까요.
“아저씨가 언제 이 일을 그만두고 싶게 될지 모르잖아요.”
놈. 개. 아버지는 태형을 그렇게 표현했지만 실은 여주를 제외한 모두가 그의 개였다. 여주는 그 점을 이용했다. 목줄을 넘겨받을 때를 운운하며 열쇠를 갈취했다. 실장의 표정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하 창고에 다다랐을 때는 떨리는 손으로 구멍을 맞췄다. 피 묻은 열쇠가 제자리에 들어가고, 급하게 열린 문 사이로 축축한 냄새가 풍겼다.
그 다음은 아주 순식간에 지나갔다. 정신 차리라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이 번갈아가며 나왔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지만 태형이 쏟은 피보다는 덜할 것이었다. 유모에게 전화하고, 태형을 제 방으로 옮기고, 주치의를 부르고. 와중에 이 모든 게 집안에서 붙여준 것이라 환멸을 느끼고서.
급하게 유학을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일이 진행되는 동안 도저히 태형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며칠간 호텔에 머물렀다. 출국할 때는 이륙하는 비행기 아래로 모든 게 떨어졌으면 했다. 그렇게 하면 제가 쥐고 있는 모든 것들이 떨어질 것 같았다. 심지어 그게 개 목줄이라 해도.
목줄이 사라져도 개는 그 자리에 있는데.
“태형아.”
그걸 몰라서, 여주는 돌아가기도 버거웠다. 그래서 일부러 한국 시간에 맞춰 새해를 앞두고 돌아왔다. 고작 스물이지만. 이제야 성년이 되겠지만.
“나 돌아왔어.”
미흡했던 지난날을 마주하기 위해서.
“안 반겨줄 거야?”
사실은 그냥 네가 보고 싶어서.
안 반갑다는 대답을 각오하고 물음을 던졌다. 네가 내 목을 물어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기 위해 준비하고 또 준비했는데. 눈물바람에 묻혀 다 망가졌다. 전처럼 안아주는 품이 따뜻했다. 한겨울인데도 타버릴 것 같았다. 등 뒤로 닿는 팔과 손이 한껏 불을 품었다.
“괜찮아. 괜찮아. 왔으니까 괜찮아.”
태형은 아직 여주의 개였다.
둘은 그날 서로의 처음을 나눴다. 새해를 알리는 종소리가 맞닿은 살갗으로 느껴졌다. 그간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메여있고 얼마나 변치 않았나를 밤새 표현하며 날의 시간과 서로의 온기를 알렸다. 어찌나 서툴던지 다음 날 약을 사오지 않을 수 없었다. 네가 내 목을 물어도 사랑한다는 뜻이 그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아직 짐이 도착하지 않아 태형의 티셔츠를 걸치듯 입고서는 그의 등에 살살 약을 발랐다.
그들의 의례는 거기서부터 시작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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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육일삼입니다.
이 정도도 불마크 달아야 하면 말씀해주십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