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gger Warning : 폭력
트럭 시동 거는 소리가 유난하게 드릉댔다. 운전석에는 여주가, 조수석에는 태형이 앉아 논밭 드라이브를 하고 있었다. 실은 밭일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이었지만, 드라이브라는 이름을 붙이면 그럴싸했다. 이제 꽤나 익어 고개를 숙이는 벼들 사이로 푸른 트럭이 달린다고 생각해보라. 안에서나 밖에서나 그 풍경은 장관이었다. 벼농사는 엄두도 못 내지만 여주는 그 광경을 좋아했다. 태형은 그런 여주를 보고 있다 다른 길로 들어서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우리 지금 어디 가?”
“용희 씨네 사과박스 접으러 가야 돼.”
“나 걔 싫어…….”
“왜애. 그쪽 고모네가 우리한테 얼마나 도움 주셨는데.”
“너한테 너무 친절하잖아.”
차마 좆같다고 표현하지 못 한 태형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불친절한 것보단 낫지.”
“그건 그런데……. 그냥 안 가면 안 돼?”
“태형아.”
“알았어…….”
여주가 낮게 말하자 태형은 시무룩해져선 입을 내밀었다. 용희가 보면 기겁할 광경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그의 고모가 여주를 부른 것부터가 시작이었는데.
다행히 작업장에 용희는 없었다. 사과밭에서 조금 더 일하다 올 예정이라고 했다. 고모가 먹을 걸 가지러 간 사이에 둘은 작업을 시작했다. 이제는 손에 익어 둘이 분업까지 해가며 박스를 접었다. 흰 바탕에 빨간 사과모양이 눈앞에서 왔다갔다했다.
작업을 도와주는 날이면 항상 용희네와 함께 식사를 했다. 결국에 용희와 있는 시간이 적어졌을 뿐 아예 안 보는 게 아닌 것이다. 태형이 시무룩한 얼굴로 박스를 접는 둥 마는 둥 하자 여주는 잠시 박스더미를 치워놓고 바싹 붙었다.
“태형아. 팍팍 좀 접어.”
“빨리 하고 집 가고 싶어.”
“용희 씨 때문에 그래?”
“응.”
“참나. 이제 우린 부부인데 그런 질투는 왜 하는 거야?”
“이게 마음대로 되는 거였으면 진작 그만뒀어.”
“그럼 이렇게 하자. 박스 예쁘게 잘 접고 끝나면 같이 저녁 먹는 거야.”
“근데 고모님이랑 같이 먹잖아. 김용희도 껴서.”
“아니. 나가서 너랑 나랑만 먹을 거야.”
“진짜? 너랑 나만?”
“응, 우리 같이.”
“같이?”
“같이.”
여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태형이 짧게 눈을 빛냈다. 일련의 신호라도 받은 듯, 여주의 눈을 진득하게 쳐다보다가도 작업을 마저 시작했다. 태형의 작업 속도는 배로 빨라졌다. 면장갑도 집어던지고 맨손으로 열심히도 접었다. 둘은 고모가 오기 전에 할당량을 끝내고 일어섰다. 태형이 짧게 메모를 남겼다.
‘고모님 저희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용! 저녁 맛있게 드셔요^ㅁ^’
메모를 먼저 발견한 사람은 용희였다. 동네 친구를 만나 수다 떠느라 늦은 고모 덕이었다. 용희는 여주가 쓴 것인 줄 알았다. 벽걸이 보드판에 아직 남아 있는 글씨체(여주는 메모를 할 때면 항상 보드판에 해두고 간다)가 종이쪼가리에 쓰인 것과 다르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메모의 주인을 알고 보니 눈웃음 사이에 있는 귀여운 네모 입에 기겁의 기겁의 기겁을 했다. 일을 더 하다 와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 남자의 이중성은 도대체가 적응이 잘 안 되어서.
농촌 느와르
3부: 같이
나가자, 태형아. 여기서 나가자.
바뀐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여주가 돌아오자 태형이 다시 여주 옆으로 간 게 다였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으니 경영권을 받을 차례였다. 하지만 여주에게 목표는 단 하나였다. 태형을 인간 김태형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더해서, 그 인간 김태형 옆에 인간 김여주도 함께 하는 것. 그러나 당장에 둘 모두를 충족하는 방법은 없다. 태형도 그걸 알았다.
“잘 들어 여주야.”
이 집에 있는 한 태형은 여주 옆에 있고, 여주 옆에는 태형이 있다. 여주가 잘못되면 태형은 축축한 곳에서 밤을 보내야 한다는 규칙은 여전히 존재했다. 태형은 이 때문에 여주가 속박되지 않기를 바랐다. 무엇보다 여주의 손이 저처럼 더럽지 않았으면 했다. 저를 쓰다듬어 주다가 제 얼굴에 튄 것을 실수로라도 묻히지 않았으면 했다.
“나는 나갈 거야.”
처음으로 원망의 싹이 피어났다. 왜 우리를 평범한 행복 속에 두지를 못 하나요.
“하지만 그러려면 네가 먼저 나가야 해.”
왜 내가 이 아이 곁에 있으면 이 아이는 불행해지나요. 왜. 왜.
“곧 갈게. 먼저 가 있어.”
나는 이곳에 남아 너를 찾을 수 없게 손 쓸 테니, 너는 이 칠흑 같은 아귀에서 벗어나 훨훨 날라고 비는 수밖에 없었다. 겨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처음을 나누었지만 그런 것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태형은 여주의 안위가 중요했다.
비오는 밤이었다. 그날은 그래도 날이 맑아 달빛이 우리를 비춰줬는데 말이야.
“놓칠 걸, 놓쳐야지. 두 번이나, 놓쳐? 네가 그러고도, 이 집에 남을 수 있을 것, 같아?!”
기억은 안 나지만 네가 나를 끌어안고 엉엉 내뱉었던 말들은 어렴풋이 들은 것 같아. 나는 네가 없던 매일 밤 그 말이 사랑이었기를 바라며 쇠붙이들을 잡고, 누군가의 매를 맞았다.
여주를 보낸 뒤로도 반복될 밤임에도 불구하고 태형은 기꺼이 비를 맞았다. 추적추적 소리가 걷어차이는 발길질을 죄다 삼켜서. 도리어 고통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잘못 했어요…….”
그래서 거짓을 뱉었다.
“잘못…… 했어요…….”
실은 하나도 잘못한 건 없다고. 잘못된 건 당신뿐이라고. 당신만 없으면 여주가 얼마나 편안해질지, 내 목줄은 얼마나 완연하게 그 애 손에 쥐어져 있을지. 피워진 원망의 싹은 자라고 자라서 그 사실을 각인처럼 머릿속에 새겼다. 그렇게 뱉는 거짓이었다.
“회장님…… 제가, 제가 하겠습니다.”
여주 말고 제가 하겠습니다. 그 애는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아요. 아시잖습니까. 유약하고 여린 것들은 보스의 약점이 될 뿐이라고, 회장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잖습니까. 그러니 제가,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하게 해주세요. 도망치는 아이를 붙잡아둬 봤자 보스의 길만 어지럽힐 뿐입니다.
“제가 하게 해주세요…….”
야망을 뱉으면서 속삭였다. 이에 눈이 멀어 사랑을 버린 사람처럼 행동했다. 병기처럼 자라나 원래 하고자 했던 일을 충직히 해냈다. 태형이 배운 것은 방해되는 것을 없애는 것이었으니, 여주의 안위에 방해되는 것들에게 이를 실천해왔다. 노쇠해가는 회장의 눈을 피해 제 몸집을 불리면서 그의 오른팔을 꿰차고. 몸뿐 아니라 머리를 써가며 그의 시야를 좁혀갔다. 그래, 그날도 비오는 밤이었다.
“회장님.”
“여주는 찾았느냐.”
여주가 사라진 지 꼭 6년이 되는 날 밤. 이제 손등에 바늘을 꽂지 않으면 기력도 쓰지 못하는 보스. 그의 아버지. 내 모든 걸 앗아가고 동시에 모든 걸 쥐어준 아버지. 그날따라 여주의 행방을 묻는 목소리가 거슬렸다. 잘못했다며, 제가 하게 해달라며 빌던 소년은 이제 없다. 우위가 바뀐 것은 한참 전이었다.
“왜요. 또 그 애 손을 더럽히려고 그러십니까? 제가 그러려고 회장님 곁에 남은 게 아닌데 말이에요.”
방해물이 사라질수록 여주에게 가까워짐을 느끼며 비를 맞아왔다. 추적추적 소리가 언젠가처럼 지천을 뚫는 듯했다. 그 소리는 저의 야망, 희망, 소망을 모조리 삼켜 흔적을 지워줄 것이다.
“회장님.”
“너……너……!”
“내 목줄은 원래부터 당신 게 아니었어.”
“이 자식이……!”
“그러니 다시는 태어나지 마십시오.”
영영 멸해버려 우리가 몇 번이고 환생할 동안 마주치지 않도록.
그렇게, 죽으세요.
밤. 비오는 밤. 여주가 사라진 지 6년이 되는 날 밤. 태형을 머금었던 비는 그를 뱉어내고 한 사람의 생을 삼켜 치워냈다. 노쇠한 회장의 죽음은 심심하게 치러졌다. 여주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모두에게 준비되지 않은 것들이니까. 언젠가 저를 원망하게 된다면, 다른 게 아니라 이것으로 저를 원망하기를 바라면서.
형식적인 장례식에는 오직 태형의 사람들만이 왔고, 태형은 그의 영정 앞에서 보란 듯이 그들과 악수했다. 죽어서도 편치 못하게. 멸하기 전에 이것부터 보라면서. 죽음의 묵념이 아닌 줄타기의 결과가 판치는 이곳을 보라면서.
여주 대신 꿰찬 자리였으나 이는 여주가 원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영원히 봄이 오지 않을 것 같던 자리에 앉은 대가는 그랬다. 내내 여주 생각에 잠을 못 이뤘다. 하지만 태형은 해야 할 일을 차근차근 해나가며 때를 기다렸다.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계속해서 기다렸다. 기다림이 그에 대한 집착을 키워나가는 것도 모르고.
“어디 있는지 알아와.”
“잡아 올까요?”
여주가 사라진 지 8년이 되었다. 정확히는 태형이 그를 놓아준 지 8년. 찾으려면 찾을 수 있지만 참았던 시간을 떠올리며, 태형은 그녀의 생일을 맞을 준비를 했다.
“말조심 해. 네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윤 비서는 태형이 조직을 먹기 직전 회장이 붙어준 사람으로, 여주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알아도 그가 건넨 자료들이 전 회장 딸의 자료라는 걸 알 리가 만무했다. 따라서 한 번은 넘어갔지만 다음이란 없을 것이다. 태형의 눈빛에 윤 비서가 고개를 숙였다. 자동적으로 어떤 사람인지 알 것만 같았다. 그래서 여주를 모시러 갔을 때도 고개를 숙였다. 조아렸다는 표현이 맞을 만큼. 태형의 위상은 그만큼 드높아져 있었다. 한 번의 경고만으로 누가 그의 사람이고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게끔 하는.
“올 거라며.”
“…….”
“온다고 했잖아. 나 먼저 가 있으라고 했잖아. 그런데 지금, 네가 날 어디로 부른 건지 알아?”
여주는 그때처럼 웃어주지 않았다. 8년 만에 보는 얼굴이 무표정도 아니라 찡그린 얼굴이라니, 그것도 저를 보고 그런 얼굴이라니. 쓰리는 마음과 다르게 표정도 말투도 차갑게 나갔다. 여주가 없는 공백이 태형을 그렇게 만들었다.
“뭐가 됐든 네가 원한 결과는 이거였잖아.”
“결과. 너는 결과가 중요해서 이렇게 된 거니.”
“…….”
“내가, 내가 너 이런 모습 보자고 그때 그렇게 도망친 줄 알아?”
“그럼 내가 어떤 모습이길 바랐는데?”
“뭐?”
“궁금하네. 네가 상상한 내 모습이 어땠을지.”
구겨진 교복과 터진 입술이 아닌 빳빳한 정장과 멀끔한 얼굴로 마주하는 자리였지만 고운 말이라고는 오가질 않았다. 대화보다 정적이 더 오래 일었다. 서로를 그리며 담아둔 것을 표출하기도 전에 겉봉에 상처를 입히고, 입었다. 잘못한 이는 따로 있는 걸 알면서도 감정이 엇나갔다. 태형은 태연히 차를 마시면서도 차가 아닌 정적을 음미해야 했다. 제 몫의 찻잔에는 손도 대지 않고 노려보는 여주를 쳐다보며.
“당분간 여기서 지내.”
“내가 왜.”
“너를 위해서야.”
“뭐라고…….”
태형이 버튼 하나로 사람을 부르고, 태형의 턱짓 하나에 여주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간다. 발악하는 여주가 당도한 곳은 방이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방. 여주의 옆 방. 태형의 방. 벽지부터 가구까지 안 바뀐 곳이 없었지만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방. 왜인지, 그날도 비가 왔다. 창문을 적시는 소리에 여주가 베갯잇을 적셨다. 태형은 방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빗소리에 삼켜 들어간 울음을 알 수 있었다. 함께이지만 함께 할 수 없는 감정이 진정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것도. 그래서 골방에 부러 제 몸을 구겨 넣고 숨죽였다. 8년의 공백을 빗물과 눈물이 채워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 밤은 같이 눈물을 쏟던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