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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소년단/박지민] 불나비 15 | 인스티즈



김윤아 - 목소리

반복재생 부탁드립니다.









불나비

15










 제게 있어서 두려움이란 학습된 것이었다. 예기치 못한 고통에 몸을 웅크리듯이,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게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눈에 띄는 것은 죽음에 몸을 내던지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 죽음 속에서 살갗이 모두 뜯겨 나갈 것을 알았다. 너덜너덜하게 남은 살점이 간신히 뼈에, 근육에 달라붙어 있을 것을 알았다.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고통이 두려웠다. 텅 비어있을 눈동자가 두려웠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도 두려워할 수 없다. 이미 모든 것은 제 의지대로 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눈에 띄고 싶지 않아서 그마저도 작은 몸뚱이를 더 작게, 둥글게 말고 있었지만 이미 눈에 띄고야 말았으니까. 저의 존재가 거대해지고야 말았으니까. 제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제이가 손끝으로 종이를 훑었다. 제 앞의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녹화된 CCTV 영상의 몇 시간 분량을 복사해 두었다. 모니터에는 영상이 빨리 감기로 재생되고 있었다. 제이의 눈동자가 그 움직임에 따라 움직였다. 제이가 한숨을 내뱉으며 제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CCTV 영상을 확인했을 때, 내린 결론은 한 가지이다. 결코 그들을 CCTV 조작만으로 완벽히 속일 수는 없다. 그들은 매시간마다 정찰을 한다. 그리고 정찰을 하는 사람은 절대 동일하지 않다. 또한 제이가 영상을 살펴본 결과, 순서 역시도 제멋대로다. 예상컨대, 시간대 별로 정찰하는 이는 정해져 있을 것이다. 다른 이가 눈에 보이면 의식하기 시작할 거다. 문서화 되어 있다면 제이가 해킹이라도 시도해 보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순번을 그렇게 만들어 두지 않았을 것이다. 고작해야 수기로 암호화해 적어놨겠지. 알아낼 방도는 없다는 것을 제이는 알았다. 


 모든 결론을 종합하자면 나오는 답은 이것이다. 저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 시간 남짓이다. 한 차례의 정찰이 끝나고 다음 정찰이 이루어지기 전, 그 한 시간. 운이 좋으면 두 시간일지도 모른다. 바꿔치기한 영상의 정찰자가 우연히 다음 정찰자와 동일한 경우. 그러나 제이는 확실하지 않은 경우는 취급하지 않는다. 낮은 확률에는 제 것을 걸지 않는다. 한 시간 내로 끝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제이는 이게 모두 예양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조차도 알고 있었다. 연화가 예양만을 위해 달려드는 게 아니라는 걸. 지민 역시도. 그들은 모두 제가 지키고 싶은 것을 위해 싸워야 할 때를 맞닥뜨린 거였다. 두양애. 제이는 한참이나 그 이름을 곱씹었다. 두양애가 아니었다면, 저는 없었다.


 연화의 머리칼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화약 냄새가 코를 찌를 것처럼 신경이 곤두섰다. 그녀가 격발이 끝난 총을 바닥을 향해 내렸다. 그녀가 연화를 보며 미소 지었다. 연화는 그제야 눈을 깜빡거렸다. 고개를 떨어뜨리자 바닥으로 잘린 머리카락이 후두둑 쏟아졌다. 연화가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연화가 왼손을 들어오른쪽 어깨 위에 남아있는 머리카락을 손등으로 털어냈다. 남은 머리카락이 떨어졌다.


  “겁 먹었니?”

 “그럴 리가요.”

 “그래. 이 정도로는 놀라지 말아야지. 뭘 준비하든, 잘 해봐. 연화.”


 그녀가 총을 다시 장식장에 넣고 문을 닫았다. 연화가 그제야 숨을 뱉어냈다. 연화의 머리카락 한 부분이 어깨 위에서 달랑거렸다. 머리카락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이 덜어졌다. 그 기분 나쁜 가벼움에 연화가 짧게 웃음을 흘렸다. 잇새로 잘근잘근 욕을 씹었다. 치마를 걷어 올려 왼쪽 허벅다리에 있는 칼을 꺼내 들었다. 보란 듯 그녀와 눈을 맞춘 채로 오른손 검지와 중지 새로 칼을 끼우고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하나로 올려 묶듯 쓸어 모았다. 왼손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오른손에 들린 칼로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서걱이는 소리와 함께 잘려나간 머리카락이 연화의 손에 남았다. 연화가 왼손으로 쥐고 있는 머리카락을 바닥을 향해 던지듯 놓았다. 머리카락이 바닥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연화가 고개를 크게 두어 번 흔들었다. 어깨 위에서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머리카락이 어깨를 간질이지도 못할 길이였다.


 “하나라도 지킬 수 있을까, 연화?”

 “무엇 하나라도 지켜야죠.”


 그대로 연화가 다시 칼을 칼집에 집어넣었다. 걷어 올린 탓에 헤집어져 있는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연화가 등을 돌려 문 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문이 열리자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연화는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바람결에 드러낸 목이 시렸다. 그러나 연화는 몸을 움츠리지 않았다. 멈추지 않고 걸었다. 걸어가면서 아직 어깨 위에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머리카락을 털어내기 위해 손으로 어깨를 털었다. 부정을 털어내듯이.


 “연화, 무슨 일이야?”


 지민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크게 들렸다. 그가 크게 말한 것인지, 연화의 신경이 예민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지민은 멀리서 가까워지는 인영을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찌푸렸다. 분명 연화임이 틀림없었으나, 갑작스레 머리 길이가 짧아져 있었다. 분명 제 옆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허리를 간질이는 길이였는데, 이제는 어깨 위에서 떨어져 있었다. 지민이 조수석 문을 열어주고, 연화가 올라타고. 다시 지민이 운전석에 앉을 때까지도 지민은 연화의 머리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지민이 내뱉은 말에 담긴 놀란 마음이 연화에게 가닿지 않길 바랐다. 어떠한 동요도 연화를 흔들리게 둘 수 없었다. 지민은 제가 태연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설령 연화가 답하지 않는대도 더 묻지 않을 참이었다. 지민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손을 뻗어 버릇처럼 연화의 뒤통수를 다정스럽게 쓸어내리는 일뿐이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지민아, 아무래도 제이까지 자정 전까지 와야 할 것 같은데.”

 “결정된 게 있어? 어떻게 하면 될까.”


 지민이 핸들을 돌리며 말했다. 연화가 짧아진 머리칼에 대해서는 지금 현재로서는 더 대답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러나 지민은 서운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연화가 제 마음을 토로할 밤이 있을 것이다. 제가 연화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은 밤이 있듯이.


 “당장 내일 동이 트기 전이 될 거야. 리안화가 두양애를, 칠 거거든. 그 전에 예양만 데려올 거야. 우리는.”

 “…그래요. 그렇게 해요.”


 지민은 제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 두려움인지, 절망인지. 두양애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안다. 리안화에 대적해보겠다고 힘을 키웠으니 쉬이 사그라들 수 있을 리 없다. 지민조차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구태여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고단한 싸움이 되리라는 것은. 연화 자신도 이제는 제가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불분명해져가는 것만 같아 두려웠다. 무엇을 위한 싸움인지. 빠르게 바뀌는 바깥 풍경에 연화는 문득 부산에서의 공기를 떠올리고야 말았다. 잔잔한 웃음소리. 그래, 연화는 이를 위해 싸우려는 것이었다. 제가 지키고 싶은 것을 위해서. 제 일상을, 그들의 일상을 되찾기 위해서.


 “옥경은요.”

 “이제 말 해줘야겠지. 제이한테는 갤러리 경매장으로 와 달라고 해줘. CCTV도 손 좀 보고. 너희 둘 다 있어야 하니까.”

 “알겠어, 연화. 옥경…, 만나고 올래?”

 “응. 잠시만 기다려.”


 연화의 목소리에 지민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느새 연화는 옥경의 방문 앞에 가만히 서 있는 중이었다. 옥경이 밥은 제때 먹었을까? 예양이 사라진 지 어언 4일째 되는 날이었다. 연화는 언제부터 옥경이 방에 들어와 있었는지, 또 언제부터 밖으로 나오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다. 연화는 문에 가만 귀를 가져다 대었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쉽사리 문을 두드릴 수 없었다. 옥경에게 무어라고 전해야 할지 몰라서 그랬다. 예양이 두양애라는 것, 옥경을 내내 속여오고 있었다는 것. 연화는 이 중 무엇도 옥경에게 전할 수 없었다. 연화가 문에 가져다 댄 귀를 떼어냈다. 숨을 한 번 내쉬곤 문을 두드리기 위해 한 손을 말아쥐어 허공으로 올렸다. 그러나 그 주먹이 문에 닿기도 전에 문이 덜컥 열렸다.


 “…옥경. 밥은 먹었어요?”


 그러나 어떠한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열린 문틈 새로 보이는 옥경의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잔뜩 부어오른 눈두덩이, 열 오른 살갗. 건조하게 피어오른 그 살갗. 연화는 함부로 그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지 않았다. 그때 멀어졌던 그 거리감, 딱 그만큼 떨어져 옥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옥경이 아무 말 없이 가만 연화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옥경이 뒤늦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연화가 비집고 들어올 틈을 만들었다. 연화 왔구나. 연화가 그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방 안에서는 담배 냄새가 짙게 났다. 곳곳에 냄새가 배어 있지 않은 곳이 없을 것만 같았다. 목구멍이 칼칼하게 아파왔다.


 “예양, 데리고 올 거예요.”

 “예양을 찾았어? 어디 있어, 아니, 아니…. 예양은 잘 있는 거니?”


 옥경이 눈에 띄게 허둥대기 시작했다. 동아줄이라도 붙잡듯 양손으로 연화의 손을 잡았다. 까슬한 촉감이 연화의 손등을 간질였다. 연화는 감히 옥경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을 심산이었다. 거짓을 고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연화는 옥경의 간절한 마음을 모두 알지는 못한다. 연화는 옥경이 아니다. 그렇기에 모두 이해할 수 없다. 연화는 최대한 말을 아낄 것이다. 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옥경을, 그리고 옥경을 속여온 예양을 위한 것이었다. 연화는 옥경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침대 앞까지 걸어갔다. 우선 앉아요, 옥경. 그런 연화의 말에 옥경은 어떤 말도 덧붙이지 못하고 침대 끄트머리에 가만 앉아 연화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하고픈 말이 많은 사람처럼 입을 달싹이면서도 정작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최대한 안전하게 데려올 거예요. 옥경 앞으로, 내가. 내일 아침이 오기 전에 예양을 데려올 거예요. 그러니까 옥경도 준비하고 있어요. 이런 모습으로 예양을 어떻게 반기려고 그래요. 예양 놀라요.”

 “……그래, 그래. 예양이 돌아오겠지. 연화가 데려온다고 했으니까. 얼른 준비해놓고 있어야지.”

 “담배 냄새에 파묻혀 있는 건 알아요? 그때까지 씻고, 밥도 먹고. 기다려요. 내가 예양을 데려올 때까지.”


 연화가 그렇게 말하면서 흘러내린 옥경의 잔머리를 쓸어올렸다. 옥경의 붉게 충혈된 눈 위로 촉촉하게 눈물이 차올랐다. 옥경은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눈을 깜빡이지 않는 쪽을 택했다. 붉어진 눈으로 연화를 응시했다. 연화는 그런 옥경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보았다. 그 눈가를 손으로 한 번 쓸어주려다 말았다. 연화가 손을 거두었다. 옥경이 그 거두어지는 손에 시선을 두었다.


 “연화, 연화. 정말로…”


 옥경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연화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옥경은 연화를 오래 보아왔으니까. 심지어는 예양보다도 더 오래.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더욱 할 수 없었다. 옥경은 제가 젖어 있던 연화를 알아채지 못했던 밤을 기억한다. 피에 얼룩져 지친 얼굴을 하고 있던 연화에게서 예양을 찾았던 자신을 기억한다. 옥경은 연화의 걱정을 하지 못했다. 그 기억을 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섣불리 옥경은 연화에게 그 어떠한 말도 꺼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때 미처 하지 못했던 걱정을 지금까지도 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옥경은 시선을 돌려 연화가 피를 흘리고 있었던 옆구리 부근을 가만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걱정 한 마디 건넬 수 없었다. 연화는 옥경이 상처가 아물고 있을 그 자리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나 지레 모르는 척 손을 들어 다시 옥경의 머리칼을 한 번 더 정돈하곤 등을 돌려 방에서 나왔다. 옥경은 그저 멀어지는 연화의 뒷모습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감히 손을 뻗어 쥐어보려고도 하지 못한 채로.


 지민과 함께 경매장으로 들어서자 이미 제이가 도착해 있는 채였다. 연화는 처음으로 제이를 눈치챘던 그 날을 떠올렸다. 그러다 문득 제 옆에 서 있는 지민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어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지민과 연화는 서로의 눈을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제이는 그런 둘의 모습을 응시할 뿐이었다. 제이는 헛기침이라도 해서 제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가, 다시 그 마음이 빠르게 사그라들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지민은 연화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차라리 이대로 모든 게 멈춰버렸으면 했다. 어쩌면 이게 제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일지도 몰랐다. 이 순간이 가장 큰 행복으로 기억될지도 몰랐다. 연화에게는 어떻게 기억될지 모르겠지만. 지민에게는 그랬다. 제가 털어놓고 싶은 비밀을 알아버린 연화와, 이 조용한 공간에서 가만 눈을 맞추고 있는 게 퍽 행복했다.


 “그래서 제이. 넌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

 “한 시간 내에 끝내야 돼요. 정각에 교대로 정찰을 하거든요. CCTV 영상을 바꿔 틀어도 벌 수 있는 시간은 한 시간이에요.”

 “내가 다녀올게.”

 “아니, 박지민. 나도 갈 거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사람의 시선이 연화의 얼굴에 꽂혔다. 그러나 연화는 태연한 표정으로 어깨를 들썩일 뿐이었다. 지민은 연화를 말리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언제나 지민은 연화를 따랐으니까. 이를 제지할 수 있는 것은 제이뿐이었다. 지민이 제이를 향해 시선을 던졌으나 제이는 가만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제이는 아무런 말 없이 비에 젖었던 그 밤을 떠올렸다. 지민은 제이의 입에서 만류의 대답이 터져나오길 바랐다. 그러나 그런 지민의 바람과는 다르게 제이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요. 제이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지민이 짧게 숨을 뱉었다. 다시 연화를 바라보았다. 연화의 굳건한 얼굴이 보였다. 그제야 지민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연화는 절대로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당연한 소리겠지만 정문으로는 못 들어가요. 로프 걸고 4층으로 바로 진입하는 게 빨라요.”

 “로프는?”

 “제가 내릴게요.”

 “너는 무슨 수로 건물에 들어갈 건데?”


 연화의 물음에 지민의 시선까지도 제이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제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겨우 미소만 띠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입을 겨우 뗐다. 무슨 수를 써서든요. 지민이 제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고개를 꺾어 천장에 시선을 고정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연화는 자연스럽게 제이에게로 시선을 돌려 으레 지민을 보던 것처럼 제이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보았다. 연화가 지민의 눈동자를 읽을 수 있었던 것처럼 제이를 읽을 수 있을 리는 만무했지만 연화는 모두 읽어낼 것처럼 가만 보았다. 그러다 문득 저보고 도망가라던 제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물기에 젖은 그 목소리가. 연화는 그런 제이의 말에 의심을 하지 않기로 했다.


 “당장 오늘 새벽 내로 다 끝내야 해. 자정이 지나고 해가 뜨기 전까지야. 우리한테 주어진 시간은.”

 “어차피 그 건물에서는 한 시간 내로 끝내야 해요. 나올 땐 몰라도 들어갈 땐 무조건 들키지 말아야 해요. 그렇게 되면 그냥, 다 죽이고 나오는 수밖에는 없어요.”

 “그럼 그렇게 해야지. 연화, 정말로 괜찮겠어?”

 “그럼. 예양을 데리고 나오려면 문으로 나와야겠지. 제이, 들어갈 땐 어떻게 들어가든 상관은 없는데 나올 때는 최대한 멀쩡하게 나오고 싶거든. 다 맞서 싸울 각오를 하고서라도. 예양이 우리처럼 멀쩡하게 있겠어?”


 연화의 말에 제이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략을 짜는 건, 제이가 맡게 될 것이었다. 아무래도 연화는 직접 맞설 생각을 하고있는 듯했다. 한동안 침대에 묶여 약물 주입이나 당했을 예양의 모습을 생각하면, 다른 방법은 없었다.


 “어디로 돌아올 거야?”

 “여기. 리안화 갤러리로. 내가 있을 곳이 여기밖에 더 있겠어? 그래서 말인데, 옥경한테도 여기에서 기다리라고 해야겠어.”

 “4시. 그때 들어갈 거야.”


 지민의 물음에 연화가 대답했다. 그리고 뒤이어 제이가 말했다. 제이가 무언가를 찾는 사람처럼 시선이 곳곳을 훑었다. 연화가 손목을 들어 시계를 한 번 확인했다. 시간이 자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하지 않았지만 배고픔을 느낄 여유따위는 없었다. 제이가 제 앞에 놓여있던 노트북을 닫았다. 제이는 다시 두양애로 돌아가 작전대로 준비한 후 돌아올 것이다. 그때까지 지민과 연화는 두양애로 들어갈 준비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 긴장 상태에 빠져있었다. 단순히 예양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지민과 제이에게는 저들을 옥죄고 있던 족쇄로부터 벗어날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족쇄가 채워진 그 순간부터 아주 고대하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성공한 적 없었던 일이기도 했다. 지민과 제이는 이 뜀박질의 결말이 절벽인지, 결승선인지 알지 못한다. 절망으로 뛰어들게 될 뿐인지, 절망에서 벗어나게 될 것인지. 감히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었다. 어떤 결말이 그들을 맞이할지라도 그들은 뛰어들 것이었다. 그것이 그들의 선택이었고, 숙명이었다. 피할 수 없는.


 제이는 먼저 두양애로 향했고, 지민과 연화는 호텔로 올라왔다. 연화는 제 방으로 들어서기 전에 옥경의 방으로 향했다. 지민은 그런 연화의 발길이 향하는 곳을 보다가 먼저 들어가라는 연화의 말에 시선을 거두곤 제 방으로 들어갔다. 연화는 몇 시간 전처럼 옥경의 방문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망설임의 시간이 길지 않았다. 문을 두드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환기라도 시킨 모양인지 찬 바람 냄새가 났다. 담배 냄새가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아까보다는 옅어져 있었다.


 “연화.”


 반기는 옥경의 얼굴 낯도 아까보다 환해져 있었다. 목소리가 잔뜩 들떠 있었다. 억지로 그 기분을 끌어올린 것만 같기도 했다. 연화가 손을 뻗어 옥경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연화의 손 아래로 매끄러운 크림이 쓸려 내려갔다. 연화는 옥경의 부름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양을 안전하게 데려올 수 있을까. 연화는 제 자신에게 두려움이 침범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함부로 고민을 뱉지 않았다. 그게 현실이 되기라도 할까봐.


 “새벽 다섯 시. 그쯤에 리안화 갤러리로 예양을 데리고 올 거예요.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 수 있죠?”

 “당연하지, 연화. 나는 연화를 믿으니까, 누구보다도 더 잘 기다릴 수 있지. 그런데 연화. …연화는 괜찮은 거니?”


 옥경이 결국 걱정을 입 밖으로 꺼내고야 말았다. 옥경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연화의 표정을 살폈다. 연화의 표정이 조금 풀어진 것을 보더니 그제야 옥경이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다치지 말고. 조심히 돌아와라, 응?”

 “알겠어요. 그럴게요.”


 연화는 지키지 못할 약속에 함부로 대답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제게 말하는 옥경의 표정이 너무나도 간절했기에 그렇다고 대답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런 옥경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저 역시도 예양을 너무나도 구하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지민과, …제이를.


 연화는 제가 제이에게 가진 감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지민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지민에게 가진 감정과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를 믿기 시작한 것도 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지민인 척 저를 찾아와 슬픈 눈으로 저에게 입을 맞췄던 그날부터? 아니, 그건 아니었다. 저를 두고 도망가라고 말하던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부터? 연화는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 절망하는 눈이 저와 같은 것이어서? 그 절망으로, 환상통으로 지민과 저를 한 데 묶었는데. 제이 역시도 절망하는 눈을 해서? 연화는 알 수 없었으나, 알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연화가 서랍을 열어 권총을 집어들 무렵, 연화의 방문이 열렸다. 연화가 고개를 들자 보이는 것은 지민의 얼굴이었다. 지민과 연화 모두 활동하기에 적합한 검은색 슈트 차림이었다. 지민이 연화의 손에 들린 권총을 가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차없이 연화에게로 성큼 걸어와 연화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연화는 그런 지민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지민의 눈가가 붉었다. 눈동자 역시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연화는 지민이 제 얼굴을 쳐다보는 게, 저의 얼굴을 오래 담아두기 위한 것임을 알았다. 저 역시도 그랬기 때문이었다. 연화가 총을 들지 않은 왼손으로 지민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곤 고개를 더 들어올려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지민은 입술에서 느껴지는 그 온기에 그만 눈물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지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무엇도 연화를 동요시킬 수는 없었으므로.


 “괜찮을 거야, 연화.”

 “그럼. 내 옆에 지민이, 네가 있는데.”


 시간이 세 시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시침이 가리키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그들은 알 수 없었다. 그것이 설령 절망일지라도 그들은 뛰어들 것이었으므로.


 제이는 마지막으로 제 계획에 오차는 없는지 돌아보고 있었다. 제이의 습관이었다. 제가 세운 계획에 오차란 없을 것임을 알면서도 다시 확인하는 것은. 제이는 다른 종류의 무전기를 하나 더 챙겼다. 한 종류는 지민과 연화를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저를 위한 것이었다. 제이가 누군가의 모니터 앞에 섰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제이는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고작 몇 번 있었을 뿐인데, 익숙한 풍경이라니. 제이는 눈물을 쏟고 싶었다.


 “리안화 갤러리 CCTV입니다. 아시잖아요. 디아바이오 정보를 가져온 게 누군지. 그리고 그 사람이 관리하는 게 어디인지.”

 “그래, 제이. 역시 믿을 건 제이뿐이지. 그런데 지금, 어딜 가려는 거지?”

 “…박지민을. 처리하려고요.”


 제이가 말했다. 제이가 손을 동그랗게 말아 쥐었다. 말아쥔 손가락 사이로 땀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제이가 침을 한 번 삼켰다. 목구멍이 까끌했다. 울음을 삼킨 것 같기도 했다. 드디어 고대하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절망은 코앞에서 입을 벌리고 있다. 저는 절망의 이름을 갖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의 유예는 없다. 두려움마저 재가 되어 사라졌다. 감히 눈에 띈 이상 살아남아야만 한다. 저의 존재는 이제 거대하니까. 이 뜀박질의 끝이 절벽이래도 멈출 수 없다. 계속 달려야만 한다. 멈추는 것이 가장 어리석은 짓이니까. 제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쉼 없이 달리는 일뿐이다. 숨이 목 끝까지 차올라 정신이 아득할지라도. 감히 까무룩 정신을 잃을 때까지.



2021.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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