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우림 - 청춘예찬
반복재생 부탁드립니다.
불나비
12
청춘이 무기력하게 지고야 만다. 지금까지 손에 쥐었던 것은 모두 허상이었다는 듯 저를 비웃는다. 정신을 차리고 남은 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는다. 손에 쥐었던 그 열기, 촉감, 그 순간만의 제 감정까지 모든 게 생생한데 남아있는 것은 없다. 저를 바라보던 눈동자, 말간 웃음, 부드러운 살결,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만 같은 그 목소리. 함부로 손에 쥐면 깨질 것만 같아 두려워 애지중지했던 모든 것. 나는 무엇을 보고 있던 걸까? 환상이었나, 바람이었나. 너무 간곡히 바란 나머지 나타난 환상이었나. 바람처럼 쉬이 날려와 제 갈 길을 찾아 떠났나.
시체가 남은 도로를 뒤로하고 지민의 차 뒷좌석에는 제이와 연화가 올라탔다. 지민은 다시 운전을 시작했다. 지민의 팔목에서는 피가 흘렀다. 연화는 그것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제이의 상처부터 지혈하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는 없었다. 제이는 반쯤 정신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단지 상처 때문만은 아닐 것이었다. 닥친 상황이 그러했다. 연화는 자꾸만 룸미러로 지민과 눈이 마주쳤다. 지민은 자꾸만 손이 떨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가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둘의 안위는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다른 선택을 해야만 한다. 둘 모두를 져버릴 수는 없다. 지민이 말을 꺼내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늦어서 미안해, 연화.”
여전히 빗소리가 차 내부를 울리고 있었다.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 때문인지 비를 맞은 양 축축하게 젖은 음절 때문인지 그 목소리가 연화의 귓가에 생생히 맴돌았다. 연화의 머리칼에서 얼굴로 빗물이 흘렀다. 연화가 오른손을 들어 흐르는 빗물을 훔쳐내었다. 연화의 침묵이 이어질수록 지민은 가슴이 먹먹해져 감을 느꼈다. 연화의 심장은 여전히 두근거리고 있었다. 제 손에 들려있었던 총의 무게가 자꾸만 떠올랐다. 휘몰아치는 기억이 환상처럼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모순적이게도 연화는 그 한기 가운데서 뜨거운 불의 냄새를 맡았다. 연화의 호흡이 엉망이었다. 제 기억, 공포, 모든 게 연화를 한순간에 덮쳤다. 그 순간 다시 룸미러로 지민과 시선이 얽혔다. 그제야 연화는 다시 숨을 내쉬었다. 기억 속의 그 날처럼.
“…고마워, 박지민.”
연화가 그대로 두려움을 꾹 눌러 삼켰다. 두려움이 목을 억세게 긁고 내려갔다. 피비린내가 입안을 맴돌았다. 지민은 별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핸들을 돌렸다. 지민과 제이 모두 리안화로 갈 수는 없었다. 우선 상처가 심한 제이가 리안화로 돌아가 치료를 받기로 했다. 지민은 리안화로 돌아갈 수 없었다. 둘은 하나가 되어야만 하는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지민은 주차된 차에서 내릴 수 없었다. 운전석에 앉아있었다.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다시 돌아올 테니까. 연화가 지민에게 말했다. 지민이 연화의 말을 거스를 수 있을 리 없었다. 지민은 핸들에 제 고개를 박고 가만 앉아있었다. 제 손등의 벌어진 상처가 따끔거렸다. 지민이 굳어가는 피를 옷으로 눌렀다. 피가 새어나왔다.
그러는 동안 연화가 제이를 부축해 호텔로 올라갔다. 우선 제이의 상처를 치료받게 하곤 지민에게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지민은 두양애로도, 리안화로도 갈 수 없었다. 연화는 또 다시 청에게 부탁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연화의 어깨에 팔을 두른 제이가 제 몸을 가누려고 애를 썼다. 비를 맞은 탓인지 온몸이 늘어졌다. 제이가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연화의 향이 났다. 제이는 울고 싶었으나, 더 이상 비를 맞고 있지 않아 울지 못했다. 제가 팔을 두르고 있는 대상이 연화라는 사실, 그 사실에 가슴이 벅차오르다가도 이내 제 이름을 곱씹으면 그 마음은 금방 타올라 재가 되고 말았다.
“연화, 고마워요.”
“누워서 조금만 기다려. 네 상처 보러 와주실 거야.”
“…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벗어나지 마. 회복부터 해. 난 지민한테 가볼게.”
그렇게 말하며 연화가 뒤돌아섰다. 제이는 지민의 방 침대에 누워있었다. 침대 시트가 축축하게 비로 젖어 들어갔다. 제이의 시야에 보이는 연화가 점점 작아졌다. 흐려졌다. 제이가 작아지는 연화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뻗었다. 더 뚜렷하게 보이는 것은 제 손이었다. 허공에 가만 제 손을 펼쳐보고 있다가 이내 주먹을 쥐었다. 연화가 잡힐 리 없었다. 그대로 허공에 머물던 팔을 내렸다. 제 손에는 찬 기운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제이가 시선을 천장으로 옮겼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다시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제이가 눈을 감았다. 이제 이 공간에 연화는 없었다. 제이는 제 정신을 붙잡고 또 잡았다. 연화를 향한 욕심이 자꾸만 차올라서 괴로웠다. 차라리 연화를 그리워하던 지난 시간이 나았다. 가까이 있으면 더 가까워지고 싶어졌으니까.
“연화, 연화!”
“옥경, 무슨 일이에요?”
방문을 열고 나온 연화를 맞이한 것은 옥경이었다. 옥경의 얼굴이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어쩌면 피곤으로 물들어 있는 연화의 얼굴보다 어두워 보였다. 옥경의 시야에는 연화조차도 제대로 들어차지 않는 것만 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로 젖어 걸음마다 흔적이 남고, 옆구리는 베여 피로 번져 있음에도 옥경은 그것을 몰랐다. 연화가 우선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테다. 연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팔뚝을 잡는 옥경의 얼굴을 가만 바라보았다. 손을 뻗어 옥경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까지도 닦아주었다.
“뤠이양이 없어졌어. 연락도 안 되고, 이상해. 뤠이양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 같아.”
“언제부터요?”
“모르겠어. 차에 타는 것까지 확인했어야 했는데. 연화, 뤠이양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진 않겠지? 내가 같이 갔어야 했는데, 그렇게 보내면 안 됐는데.”
옥경이 계속해서 말을 중얼거렸다. 연화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이 없었다. 옥경이 제 손에 얼굴을 묻었다. 옥경은 연화처럼 행사에 참여했던 옷 그대로였다. 연화는 대강 예상이 갔다. 예양은 두양애가 데려갔다.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제 추측으로는 그랬다. 그래서 예양이 사라졌다는 말에 크게 반응하지 않을 수 있었다. 걱정되는 것은 옥경의 말처럼 예양의 안위였다. 두양애는 예양을 마약 거래책, 그 이상 그 이하로도 생각하지 않는다. 일전의 예양이 달고 온 상처를 보면 그랬다. 예양은 리안화에 있는 게 더 나을 거라는 제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예양을 빨리 찾아 데려오는 게 최선이었다.
“알겠어요, 진정해요. 옥경. 예양을 찾으라고 지시 내릴 테니까 옥경은 잠시 쉬어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예양은 괜찮을 거예요.”
“뤠이양은. 아니, 아니. …잠시만, 연화. 상태가 왜 그래. 다쳤어? 무슨 일이야?”
“저는 괜찮아요. 그러니까 옥경도 진정하고 있어요. 옥경이 정신을 차려야 같이 예양을 찾죠.”
뒤늦게 옥경의 시야에 연화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옥경이 제 얼굴을 덮고 있던 손을 떼어내곤 연화의 상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연화가 뒷걸음질 쳤다. 옥경의 손이 허공에 멈추어 있었다. 그래, 이 정도가 연화와 옥경의 거리였다. 연화가 옥경을 달래기 위해 말을 꺼냈다. 예양이 괜찮을 수 있을까? 연화는 안타깝게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최선책은 빨리 예양을 찾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옥경을 달래기 위해 꺼낸 말이었다. 연화가 엘리베이터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아직 지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연화와 옥경은 머릿속에 다른 이름을 떠올렸다. 우선순위가 다른 탓이었다.
연화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예양을 찾으라는 긴급한 지시를 내렸다. 분명 준비된 차도 타지 않았을 것이다. 예상했을 때부터 찾기 시작했어야 했다. 다른 데에 집중한 탓에 예양의 일을 뒷전으로 미뤄두고 있었다. 후회가 밀려들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자 여전히 지민이 운전석에 앉아있었다. 연화는 조수석으로 바로 가지 않고 운전석 문으로 가 창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창문이 내려갔다. 검은 머리칼 아래로 지민의 얼굴이 드러났다.
“왜 타지 않고.”
“내가 운전할게.”
“무슨 소리야, 연화. 다친 건 내가 아니고 연화야.”
지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연화는 그런 지민의 목소리에 더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실상 다친 상처로만 보면 연화가 더 심각했다. 지민에게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연화는 리안화에서 치료를 받으면 되었다. 그런데 다친 지민이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아서 치료받지 않고 돌아온 것이었다. 연화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곤 조수석에 앉았다. 그러자 지민이 다친 연화의 옆구리를 살펴보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다친 데는 괜찮아? 늦어서 미안해. 미안해, 내가 곁을 지키지 못해서.”
“난 괜찮아. 다시 왔잖아. 그거면 됐어.”
연화는 제가 지민을 곁에 둔 이유를 떠올렸다. 저를 향해 시선을 돌리기 위해 다시 등을 돌린 박지민. 지민이 리안화에만 소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연화, 제게로 돌아올 것을 알았을 연화. 그리고 그것을 몰랐을 지민. 둘은 이해의 정도가 달랐다. 지민은 연화라면 불구덩이라도 다시 뛰어들 것이었고, 연화는 그런 지민을 알았다. 그래서 지민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연화가 청에게 연락을 했다.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청에게서 예양에 대해 알아차린 게 있는지 겸사겸사 들을 참이었다. 제이에게 물어보는 게 가장 빠를 수도 있었으나, 제이도 예양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듯했다. 또한 두양애가 지민과 연화를 해하려고 했던 걸 보면, 제이가 두양애로 돌아가 예양을 조사하는 것도 의심을 사기 쉬웠다. 연화도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 것이다.
“대체 어디서 다쳐온 거야?”
“두양애. 더 물어도 답 해주기는 어려워.”
연화가 말했다. 청이 실소를 흘렸다. 어색하게 청의 사무실에 들어와 소파에 앉은 지민이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손등의 상처 위에는 이미 거즈가 붙어 있었다. 연화의 옆구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소처럼 행동했다. 연화는 오랜만이긴 했지만, 이전까지는 늘상 있었던 일이었다. 지민은 여전히 일상과도 같았다. 청은 연화의 태도에 어깨만 으쓱거렸다.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연화와 지민의 앞으로 따뜻한 녹차가 한 잔씩 놓였다. 연화와 지민의 옷은 아주 천천히, 또 적당히 축축하게 말라가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예양이 사라졌어. 이미 예양에 대해 더 알아봤지?”
“그럴 리가.”
청이 짧게 대답했다. 청의 눈동자가 잠시 지민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손등 위에 새겨진 나비 타투로 시선이 향했다. 그것을 보곤 무언가 생각나기라도 한 듯 혼자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애가 제작을 부탁했던 총의 개머리 부분에 새겨져 있던 나비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연화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겠네. 청이 말했다. 아무도 그 의중을 알지는 못했다. 청의 혼잣말이었기 때문이다. 청은 연화만 보면 숨이 가빴다. 그 애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애는 그날 살려달라고 말했다. 제가 아니라 차기의 연화를.
“그럴 성격 아닌 거 알고 있어. 지금 다쳐온 걸 보고도 농담이 나오나봐, 청은.”
“그냥 한 번씩 던져보는 거지. 나이 들어봐, 이런 것도 나름 재미야.”
“그래서, 예양은?”
청은 그 애가 아니라 지금의 연화를 살린 걸 후회할까? 모든 선택에는 결국 후회라는 잔여가 남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의 대답은 ‘아니’다. 그 애가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 후회하지 않는다. 제 어떻게 감히 그 애의 선택에 후회를 할까. 제가 지금의 연화를 살린 건 저의 선택이 아니라 그 애의 선택이다. 그래서 청은 연화의 뜻에 따를 것이다. 그 애가 살린 사람이라서. 청은 다시 연화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연화의 눈동자를 보았다. 그 애와 닮아 있었다. 굳건해서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은. 그 애는 리안화를 위해 저를 희생했다. 그리고 그 애는 연화가 리안화를 위해 희생하길 바라지 않는다. 청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한참이나 정적을 유지하던 청이 제 입을 뗐다.
“두양애 소속이야, 맞아. 저번에 말했듯, 크라톰을 들여온 곳도 계속 거래 중인 곳이었고. 그러다가 거래 일정이 한 번 꼬였던 모양이지? 그날 개처럼 맞았을 거고.”
“문제는 리안화인 걸 알면서 어떻게? 리안화에서 눈치채면 두양애에도 분명 타격이 갈 텐데.”
옆에 있던 지민은 시선을 돌렸다. 연화는 그를 보며 짧게 웃음 지었다. 아무래도 대화 주제가 지민이 함께 듣기에는 불편한 감이 있었다. 청은 그 사실을 모를 테고, 아는 것은 지민과 연화 둘뿐이었다. 그러나 구태여 연화는 지민에게 차에 가 있을래? 따위의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차보다는 사무실이 쉬기에는 제격이었다. 여름에서 초가을로 넘어가는 시점과 잔뜩 내린 비탓에 바깥 날씨는 쌀쌀했다. 또 결정적으로 연화와 지민이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 있어 사무실 공기를 일부러 미지근하게 유지하는 중이었다. 청의 배려는 그랬다. 말로는 하지 않으나, 행동으로 보여주는 식의.
“리안화에서 거래나 대강 따라가는 줄 알더라고. 그러니까 리안화에서 별로 신경 안 쓴다고 생각했겠지. 애초에 그렇게 말을 해둔 모양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예양이 리안화에 들어온 건, 계획된 게 아니었다는 말이겠지.”
연화가 인상을 찌푸렸다. 예양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몸에 멍이나 바늘 자국 따위가 남아 있던 것밖에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리안화에 들어온 게 계획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두양애 내에서의 예양의 입지가 높지 않다고 가정했을 때, 리안화에서도 그럴 것이라고 판단한 걸까. 그게 아니면 예양을 지민처럼 감시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일까. 예양이 리안화에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지? 연화는 그것부터 거슬러 올라가야만 했다. 리안화는 연화나 지민이 그랬던 것처럼 아주 어린 시절부터 데려와 그들이 원하는 인물로 길러내니까. 예양을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예양이 스물하나, 연화가 스물둘인 그날이었다.
“리안화에는 어떻게 들어온 거지?”
“…옥경.”
“옥경?”
“그래. 근데 옥경은 두양애랑 아무 관련이 없어. 예양이 두양애인 것도 모를 거야. 재밌지. 장장 십 년을 속여온 거야. 옥경이 예양을 데려온 지 십 년이야. 제 새끼처럼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옥경은 예양한테 청춘을 다 바친 거나 다름없는데.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된 거지.”
청이 소파 등받이에 제 몸을 기댔다. 연화는 옥경과 예양의 자세한 관계는 알지 못한다. 저와의 거리가 그랬다. 십 년, 적어도 저를 만나기 전 3년은 옥경이 예양을 데리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제야 그들과 조화될 수 없었던 자신의 모습이 이해가 갔다. 가족과도 같은 모습이지 않을까, 추측뿐이었다. 그들은 정말 가족이 되려고 했을까? 옥경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를까. 예양은 처음부터 옥경을 속이려던 것일까. 옥경과 예양의 생각을 속단할 수 없었다. 지민은 소파에 기대앉아 가만 눈을 감고 있었다. 피곤하면 저쪽 소파에 누워서 쉬는 건 어때. 청이 지민에게 말했다. 눈을 뜬 지민이 청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러자 청은 상관없다는 듯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래, 옥경 친딸 대신 들어온 게 예양이야. 친딸은 어떻게 됐는지 말 안 해도 알지?”
“…알지.”
“옥경이야 데리고 오고 싶었겠어? 어쩔 수 없었겠지. 윗선에서 시키니까. 리안화에서도 길거리 돌아다니는 애 뒤를 캐봐야 나오는 게 없지. 두양애인 줄 알았겠어? 꼬리 자르기를 얼마나 자주 하는데. 예양도 리안화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거기서 맞아 죽었든지, 내쫓겼든지. 둘 중 하나야.”
리안화 소속이 됐다니까 뭐라도 더 얻어보려고 남겨둔 거지. 청이 덧붙였다. 연화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예양에게 저를 설득시키라던 저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울렸다. 연화가 머리칼을 한 번 쓸어넘겼다. 비를 맞아 그런지 열이라도 오르는 듯 더웠다. 머리칼을 다시 어깨 뒤로 넘기자 옆에 있던 지민이 그 움직임에 눈을 떴다. 제 거즈가 붙은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연화의 볼을 부드럽게 쓸었다. 괜찮아? 지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청은 그 모습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연화가 조심스럽게 지민의 손을 잡아 내렸다. 아직 괜찮아. 연화가 시선을 내려 지민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보이는 것은 나비 한 마리뿐이었다.
“그럼, 지금 예양은.”
“두양애에 있겠지.”
“데려오려면 쳐야겠네.”
뭐를, 두양애를? 청이 물었다. 연화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아직 미지근한 온도가 남아 있었다. 한 모금 넘겼다. 연화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민이 연화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에 연화는 데일 것만 같아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청의 웃음소리가 사무실을 메웠다. 지민이 연화의 손목을 잡았다. 대단한 발언을 해놓고도 연화는 혼자 태연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리안화를 지키겠다는 명목이야, 아니면….”
“그냥, 개인적인 원한 정도.”
겸사겸사. 연화가 말했다. 리안화를 위해 희생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저는 연화의 이름을 이용할 것이다. 저를 연화로 만들어 이용했던 리안화처럼. 말은 태연하게 했지만 연화는 확신할 수 없었다. 제가 빼내오고 싶은 인물이 셋이나 됐다. 하나라도 제대로 도망칠 수 있을까. 연화는 그것이 두려웠다. 이미 리안화는 두양애에 연화를 잃었던 적이 있다. 연화는 자꾸만 메마르는 입을 축이려 녹차를 들이킬 뿐이다. 예양은 안전할까? 예양은 지금쯤, 대체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연화의 머릿속이 예양으로 가득 찼다.
예양은 제 기억의 시작이 어디부터인지 알지 못한다. 정신이 온전하게 있었던 게 언제인지조차도. 예양은 옥경의 손을 잡았던 그 날을 아주 조금, 후회한다. 저는 그 저녁 이후로 제대로 발을 뻗고 잘 수가 없었다. 온기에 익숙해졌다. 저는 익숙해지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애초부터 그렇게 태어나 자랐으니까. 온기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다시는 온기를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의미였다. 그 온기는 저를 숨 쉬게 하고, 숨죽여 울게 만들었다. 옥경이 저를 그렇게 만들었다. 예양은 무정을 바랐다. 아무도 저에게 손 내밀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 저에게 옥경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닿은 온기. 이 모든 후회는 무정을 바라던 예양이 무심코 다정의 발목을 붙잡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뤠이양. 나를 따라온 걸 후회하니?”
“……옥경.”
“아니다, 대답 하지 마라. 무슨 대답이든 좋으니까 대답하지 마라.”
그래서 예양은 대답을 삼켰다. 모든 것은 저의 잘못이었다. 다정을 알아버린 죄였다. 옥경의 손을 잡은 날도 마찬가지였다. 약을 구하려다 눈에 띄었다. 그래서 맞았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제가 사는 삶이 그랬다. 그들은 그냥 그렇게 저를 대했다. 약을 주고 잡일을 시켰다. 그 근방에서 거래하는 마약상을 알아 온다든지. 특별한 하루가 아니었다. 아주 평범한 하루였다. 그 하루에 옥경이 끼어든 거였다. 제 인생에 끼어든 거였다, 옥경이. 예고도 없이 불필요한 친절을 가득 안고는. 아주 제멋대로. 제가 왜 그 손을 잡았는지는 알지 못한다. 바닥에 닿은 엉덩이는 시렸고, 소리는 멍멍하게 들렸다. 그런 새에 손이 뻗어진 거였다. 다른 것도 아닌, 오직 저를 향해. 다시 돌아가도 나는 그 손을 잡을까?
“리안화로 가야 할 것 같다. 내가 최대한 막아보려고는 했는데, 벌써 네 존재를 알아버려서….”
“저는 괜찮아요, 옥경.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볼게요.”
“리안화에는 연화가 있어.”
옥경은 제가 이미 소속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알 수 없었으면 했다. 옥경의 얼굴을 볼 때마다 말하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뤠이양이라고 저를 부르는 목소리, 저를 향한 다정 어린 시선. 그것이 퍽 두려웠다. 제 진짜 존재를 알아차릴까 두려웠다. 감추고 싶었다. 저를 향해 손을 내민 유일한 사람, 옥경만큼은 몰랐으면 했다. 옥경이 아는 뤠이양으로 남고 싶었다. 옥경을 볼 때면 가슴이 답답했다. 숨을 쉬고 있는데, 숨이 막혔다. 이게 다 저의 잘못 때문이었다.
옥경은 리안화와 연화에 대해서 설명했다. 리안화의 절대자, 연화. 그 이전의 연화들은 한 명을 남기고 모두 죽었다고 했다. 예양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괜히 소름이 끼쳐 팔뚝을 손으로 수차례 쓸었다. 다 죽었어. 다 죽고, 죽인 거야. 옥경이 말했다. 예양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두려운 표정을 구태여 드러내지는 않았다. 연화, 벌써부터 두려운 존재였다. 옥경이 연화와 함께 일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공포심이 먼저 들었다. 그런 연화가 저의 소속을 알게 되면. 저는 바로 죽은 목숨이 아닐까?
“그래도 그 애가 연화라 다행이야. 너무 걱정 마라. 내가 본 가장, 다정한 사람이니까.”
옥경이 그렇게 말했다. 예양은 그 다정함조차도 두려웠다. 다정함은 저를 질식시켜 죽일 것만 같았으니까. 옥경이 주는 다정함만으로도 족히 그랬다. 반가워요, 연화예요. 그렇게 말하며 내밀어진 손을 기억한다. 그게 제게 두 번째로 내밀어진 손이었다. 맞잡은 두 손에 예양은 그만 좌절할 수밖에는 없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거였다. 예양은 그냥, 하루하루 털어놓을 수조차 없는 진실을 품에 안고 살아야 했다. 그 진실은 제 품 안에서 크기를 키웠다. 저를 넘어설 만큼 아주 크게. 저를 짓밟고 설 만큼.
“예양은 이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마음에 들어?”
연화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예양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고 웃을 수밖에는 없었다. 부러 그 앞에서는 불필요한 말까지 늘어놓는 버릇까지 생겨났다. 옥경의 말대로 연화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연화가 제 진실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저를 죽이려고 할까? 예양은 차라리 죽고만 싶었다. 안고 있는 진실의 무게가 너무나도 거대했다. 연화, 연화. 예양이 자꾸만 그 이름을 곱씹었다. 리안화의 절대자, 연화. 그녀가 차라리 제 진실을 알아버렸으면 했다.
크라톰 거래 문제로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은 날이었다. 옥경을 처음 만났던 날처럼 어느 골목길에 쓰레기처럼 나뒹굴었다. 혼자였다. 혼자 남겨진 게 낯설다고 느껴졌다. 온기에 익숙해진 탓이었다.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 자신은 원래 이렇게 있는 게 처지에 들어맞을지도 몰랐다. 그동안 헛된 꿈을 꾼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아무도 저를 찾지 말았으면 했다. 이대로 죽어가고 싶었다. 제가 원래 살아왔던 삶에 맞게, 제 진실을 꾹 안고. 말하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았으므로. 그러던 순간 골목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시야에 낯선 인영이 끼어들었다. 제 앞에 무릎을 접어 앉았다.
“여기서 뭐해.”
“……지민?”
검은 모자 아래로 보이는 얼굴이 익숙했다. 연화의 곁을 지키던 그 얼굴이었다. 온통 검은 옷을 입고 있어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그의 머리칼이 원래 검었던가. 그러나 그런 사소한 것을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저를 향해 던지는 시선이 무정했다. 그래, 예양은 그것을 바랐다. 다정은 저를 죽일 것이었다. 예양은 제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주 오래전부터 제 목을 긁고 있는 문장을 내뱉고 싶었다. 그러나 그 문장은 차마 뱉을 수 없었다. 연화에게 제 진실을 알려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예양은 제가 울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앞에 선 그가 핸드폰을 들어 문자를 보내는 듯했다. 그렇게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려는 그를 붙잡은 것은 예양의 목소리였다.
“크라톰이에요.”
“뭐가요.”
“제가 맞은 이유요. 차라리 저 대신 연화에게 알려줘요, 저는 못해요. 저는, 저는….”
예양은 그렇게 말하면서 눈이 감겨오는 것을 느꼈다. 흐릿해지는 시야 사이로 그가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가 연화에게 전할까, 그게 아니라면 제가 여기서 죽는 걸까. 그 순간 은퇴하면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 살자는 옥경의 말이 떠올랐다. 눈을 감고 버석한 웃음을 흘렸다. 미안해요, 옥경. 저는 못 할 것 같아요. 차마 할 수 없었던 대답이 뒤늦게야 목을 간질인다. 입안에서 문장이 쓰게 굴러다닌다. 입안에 잔뜩 생채기를 내고야 만다. 몸이 차게 식어가는 것만 같았다. 연화, 연화. 저를 어디까지 이해해 줄 수 있어요? 이래서 다정함에 익숙해지면 안 되는 거였다. 혼자 남은 공기가 더 차갑게 느껴졌다.
“무엇이 되었든. 내게 그 일을 납득시켜야 할 거야.”
“…알겠어요, 연화.”
“그게 안 되면 날 설득하기라도 해.”
연화가 알았다. 연화가 제 진실을 모두 알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까. 연화의 말에 더는 대답할 수 없었다. 연화, 저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어요? 저를 어디까지 이해해 줄 수 있어요? 리안화의 절대자, 연화. 저에게까지 다정했던 연화. 유일하게 진실을 알아줬으면 하는 사람, 그게 연화였다. 옥경도 아니고 연화였다. 옥경은 진실을 영원히 몰랐으면 했고, 연화는 진실을 알아차려 주길 바랐다. 그깟 온기가, 다정함이 저를 이렇게 만들고야 말았다. 예양은 제가 딱 죽고 싶었던 만큼, 살고 싶었다. 진실에 대한 걱정 없이, 이렇게 다정함 속에 파묻혀서. 연화, 저 좀 살려주세요. 예양은 말하지 못했다.
아니야. 옥경, 당신을 만난 걸 후회하지 않아요. 당신에게 남길 상처를 미리 후회해요. 그래서 영원히 내 진실을 몰랐으면 좋겠어요. 나는 다시 돌아가도 당신 손을 잡아요.
무정한 청춘. 청춘은 지키지 못할 약속만을 남긴다. 돌아본 청춘은 부질없다. 제 크기를 넘어선 진실을 떠안고 추락한다. 끝이 어딘지도 모른 채로 멀어지기만 한다. 언제 손에 쥐었냐는 듯. 잡힌 적 없던 것마냥. 떠날 테면 기억마저도 도려가 버리면 좋으련만, 기억은 고이 남겨둔다. 떠올릴 수 있는 여지는 남겨두는 것일까. 잔인한 청춘은 대답이 없다. 무엇을 말하든 뜻대로 해줄 터인데, 보내 달라면 보내줄 터인데. 무정한 청춘은 이리도 마음을 모른다.
2021.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