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우림 - Good Morning
반복재생 부탁드립니다.
불나비
08
계기는 언제나 사소하다. 별것 아닌 것처럼 굴어도 아주 거대하게 다가오는 진실이 있다. 누군가는 그 진실에 등을 보인 채로 질주한다. 등을 보인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저 한 번의 결심이면 될 성싶다. 그러나 다시 등을 돌려 진실을 마주한다는 것은? 고작 결심 한 번으로는 등을 돌릴 수 없다. 그저 속력 높인 채로 뒤를 돌면 중심을 잃어 바닥에 뒹굴기 마련이다. 제 등 뒤에 진실이 어디까지 다가왔을지조차 알지 못한 채로 속력을 늦춰야만 한다. 마주할지 모르는 거대한 진실이 저를 언제 덮칠지 두려워하면서. 제게로 다시 시선을 돌린 그 사소한 찰나. 그 기억이 모든 것을 포용하도록 했다.
“얘, 잘 봐둬. 언젠가는 네가 해야 할 일일지도 모르니까.”
야, 너 혹은 얘, 걔. 그렇게 불렸다. 헷갈릴 때면 검지를 뻗어 저를 가리켰다. 나중에는 눈치로 알아들었다. 이름 없는 애. 그것이 저였다. 태초부터 이름이 없었을까? 사람들이 저를 뭐라고 불렀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들은 이름을 앗아갔고, 아무도 제게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이름 없이 살았다. 별로 어려울 것 없었다. 불릴 이유도 없었다. 부를 이름이 없어 아쉬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저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언젠가 붙여지기는 할까. 그저 그렇게만 생각했다.
“연화랑 아가 나가는 거야? 응, 아가도 오랜만이야.”
옥경만이 유일하게 저를 아가라고 불렀다. 이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줄곧 듣는 야, 너라는 호칭보다는 나았다. 제 이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제 옆에 서 있던 연화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연화의 머리칼이 어깨 위를 간질이며 흔들렸다. 옥경이 연화에게 잠시 시선을 던졌다가 제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웃어 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손가락 사이로 끼워진 담배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옥경의 머리칼 위에 흰 리본이 꽂혀 있었다.
연화는 바이오 기업과 잦은 왕래를 보였다. 저는 그 영문을 잘 알 수 없었으나, 그것이 연화의 담당 업무였다. 연화의 수족인 청은 그 아래서 마약 거래 검수를 했다. 청과는 자주 볼 일이 없었다. 저는 연화와 있는 시간이 꽤나 많았지만 그런 시간대에는 청이 방문하지 않았다. 연화는 고작 열넷밖에 되지 않은 저를 데리고 다녔다. 대부분은 대외적인 행사였다. 눈에 잘 띄어 습격당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연화는 언제나 웃는 얼굴을 했다. 속이 초조할지라도 얼굴에 드러내면 안 된다고 했다. 그것을 저에게 알려준 것이 그녀였다.
“절대 틈을 내어주지 마. 초조해하지 마. 여유로운 것처럼 보여야 해. 보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웃어줘.”
“…왜요?”
“내가 하는 일이 그거니까. 그게 연화의 일이야.”
연화의 말이 이해되지 않더라도 뇌리에 박아야만 한다. 그것을 제게 알려주는 영문을 모르지 않았지만 모르는 체했다. 많은 것을 아는 체하지 않았다. 알아듣지 못한 척, 이해할 수 없는 척. 그것이 제가 많은 책임을 떠안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 방법이 통하기 위해서는 권력 따위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또 많은 책임을 안아야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저는 어쩌면 저를 이곳까지 데려온 연화가 제게 이름을 붙여주지 않은 이유를 알지도 몰랐다. 이름을 빼앗아 가버린 그들에게 이름을 다시 달라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네가 그 아이구나. 나랑 가자. 너는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야.”
연화를 처음 만났던 날, 그녀가 제게 했던 말이었다. 열셋. 제가 있었던 곳, 부산에서였다. 태양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눈이 부셔서 함부로 고개를 들어 올리기 힘들었다. 한껏 눈살을 찌푸리고는 얼굴을 올려다보았지만, 빛이 번져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떠오르는 기억이지만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이제는 그녀가 어떻게 웃었는지. 알 수 없다. 연화가 제게로 손을 뻗었다. 그 손을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 내 인사부터 해야 하나? 반가워요, 연화예요.”
손을 맞잡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어차피 저는 돌아갈 곳도 없다. 얼굴을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손등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훔쳐냈다. 입안이 텁텁했다. 아까 캐러멜을 제가 먹었어야 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땀이 흥건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불쾌한 기색 하나 없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것이 제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이었다. 그렇게 리안화로 발을 내디뎠다.
저는 사격에 능했다. 연화는 제게 몸을 지킬 수 있는 수준에서 그치지 말라고 했다.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말했다. 연화는 간혹 저에게 등을 보였다. 언젠가부터 그 등이 작아 보였다. 언젠가 대체해야 할 자리. 청과 같은 위치에 서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저도 그렇게 살게 될까. 연화는 제게 권총을 하나 넘겨주었다. 저를 위해 제작한 것이니 잘 받아두라고. 받아든 권총의 개머리 부분에는 나비 두 마리가 새겨져 있었다. 제가 흘리듯 연화에게 나비를 좋아한다 말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연화가 제게 보인 호의가 나쁘지 않았다. 좋았다. 어쩌면 제게 아가라고 불러주는 옥경보다도 더.
“십 년 전에 세 명 넘겼고, 성공한 건 하나야.”
“위치 파악은 돼?”
“아무것도 몰라. 심지어는 살아있는지도. 성공했다는 기록만 넘기고 바로 폐기 처리했어. 성별은 남자가 맞는데, 투자 비용을 얻다 써먹고 있는지를 몰라. 정말로 그놈들이 살아있어서 당장 키우고 있는 건지, 우리 뒤를 쳐보려고…. 모든 결정 다 철회하고 디아바이오부터 성장시킬 거야. 헛짓거리 하는 놈들보다야 아예 모르고 시작하는 놈들이 일 시키기 쉽겠지.”
연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옆에 선 청의 얼굴이 얼마 만에 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연화가 폐공장으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분명 가동 중이랬지만, 가보면 남아있는 것은 없을 것이라고. 연화는 그것을 확인하러 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저는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연화가 저에게는 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지만, 옆에서 청이 저를 데려가야만 한다고 제 의견을 피력했다. 연화는 그것에 잠시 고민하는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청, 네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저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들만이 아는 이야기였다.
“얘. 내가 지금까지 한 말 기억하지? 사실은 네가 다 이해했다는 거 알고 있어. 잊지 마.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표정을 했는지.”
“알겠어요.”
“모든 사람 앞에서 연기하는 삶이야. 연화는 그런 거야. 두려워도 두려워하지 마. 너는 꼭, 살아남아.”
연화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연화가 저를 뒤로 밀어내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연화의 뒤로 일곱 명의 경호원이 따라붙었다. 청이 저의 팔을 낚아채었다. 강한 힘에 몸이 흔들거렸다. 청과 눈이 마주쳤다. 청은 연화의 옆에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청의 시선이 매서웠다. 고개를 돌리면 연화는 더욱 멀어지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잡힌 팔이 아렸다. 고통스러웠으나 눈을 찌푸리지는 않았다. 연화가 한 말을 기억해냈다.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피하지 말고 똑똑히 봐. 네가 감당해야 할 무게야. 이걸 이겨내지 않으면 넌 죽어.”
그렇게 말하고는 저의 팔을 끌고 폐공장 안으로 들어섰다. 걸음이 빨라서 잘못하면 바닥에 넘어질 것만 같았다. 연화의 지시에 따라 그들이 공장 곳곳을 뒤졌다. 혹여 흘리고 간 무언가라도 있을까봐. 어떤 이의 계략이라도 눈치채 보려고. 어느새 가까워진 연화와 눈이 마주쳤다. 빠른 걸음으로 연화가 걸어와 청의 어깨를 밀어냈다. 미쳤어? 언성이 높아졌다. 고개를 돌려 문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열여덟의 검은 새벽이었다. 겨울이어서 그랬는지 한기가 돌았다. 허벅다리에 둘린 권총집. 그 무게가 여실히 느껴졌다. 그 순간 무언가 바닥으로 추락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렸다. 사람이었다. 연화가 저를 뒤로 밀어냈다. 등 뒤에 쌓인 상자가 서늘하게 와 닿았다. 연화가 그대로 상자 틈으로 저를 밀어 넣어 저의 몸을 숨겼다.
“가만히 있어. 조용해지면 나가. 나갈 땐 아무도 찾지 말고, 혼자 가. 눈에 띄지 마.”
“잠시만요, 연화. 잠시만.”
“날 위해서 총을 쏘지 마. 네 몸을 지킬 때만 써.”
그대로 연화의 몸이 멀어졌다. 저의 몸을 지키기 위해서만 연습하지 말라고,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 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던 그녀. 연화가 저를 위해서만 총을 쏘라고 말하고는 등을 돌려 멀어졌다. 연화의 곁에 머물던 경호원들이 사격을 시작했다. 한둘이 아니었다. 열린 문으로는 떼거지처럼 밀고 들어왔다.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분간할 수도 없었다. 총을 꺼내야 할까? 손이 떨렸다. 권총을 꺼내어 들었다. 사격을 시작하면 저의 위치는 발각될 것이다. 저를 둘러싼 구조물은 상자밖에 없었으므로 몸을 숨길 곳 없이 온몸에 구멍이 날 것이 뻔했다. 고개를 돌려 몸을 숨겨 사격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모두 소음기를 장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려오는 총소리는 여전했다. 몇이나 살아있을까? 쓰러지는 몸이 저의 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이 모두 등을 돌린 채 리안화를 찾고 있는 찰나에 선반 뒤편으로 조용히 뛰어갔다. 발소리를 죽이는 것뿐인데도 긴장감에 땀이 흘러내렸다. 선반과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연화의 뒷모습이 보였다. 바로 연화의 앞에서 칼을 겨누고 있는 이를 향해 조준했다. 그의 이마에서 피가 터져 나와 연화의 얼굴을 적셨다. 연화가 손등으로 튄 피를 닦아내곤 뒤를 돌았다. 연화와 눈이 마주쳤다. 그 몸뚱아리가 뒤로 넘어가면서 소음을 만들어 냈다. 위험했다. 연화는 저를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대로 두면 연화는 죽을지도 모른다.
선반에서 뛰쳐나와 연화의 허리를 낚아채고는 제 쪽으로 당겼다. 찰나에 건물 벽 사이로 누군가 뛰어나왔다. 겨누던 총에서 반동이 느껴졌다. 연화가 저를 안는 듯 제 체중을 실었다. 반대편의 그가 쓰러짐과 동시에 뒤로 넘어졌다. 연화의 아래에 깔렸다. 바닥에 있을 시간이 없었다. 어서 일어나 몸을 숨겨야 했다. 바닥의 한기가 등을 타고 올라와 제 근육을 굳게 만들었다.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연화의 등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제가 연화를 방패 삼은 거나 다름없었다. 그대로 몸이 굳었다. 타이어가 바닥에 깔린 돌을 짓밟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연화, 연화. 이러면 안 돼요. 제발.”
“잊지 말라고 했지.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연화가 저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깔린 어둠 아래로 연화의 눈동자가 미약하게 빛났다. 그녀의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항상 제게 웃음을 지으라던 연화, 연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던 연화. 그녀는 오늘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을까? 제가 총을 쏘지만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연화는 총을 맞지 않았을까? 연화가 바닥에 제 몸을 의지하고 있는 모습, 감히 상상이나 한 적 없다. 떨리는 손을 이끌어 연화의 등에 포개었다. 위치가 잘못되었다. 한참이나. 연화가 얼마나 버텨줄 수 있을까. 제 손 틈새로 빠져나오는 피가 두려웠다. 연화가 숨을 헐떡였다.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지는 않았다. 또 다른 누군가가 건물 밖을 배회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연화의 몸을 끌어당겼다. 일어나지도 못하고 앉은 채로 숨을 수 있는 최대한으로. 그녀의 몸이 바닥에 끌렸다. 그 순간 건물에서 굉음이 들렸다. 무언가를 터뜨린 모양이었다. 다 죽이려고 한 게 맞구나. 연화가 저를 데려오지 않으려던 이유였던 것 같다. 연화가 손을 뻗어 총을 쥔 제 손등 위로 손을 올렸다. 두려워 손에 쥔 총을 버리듯 놓았다. 연화가 그 틈에 제 손을 잡았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은 잊어. 잊어버려. 두려워도 두려워하지 마.”
“연화, 제발. 그만 우리 나가야 해요. 도망쳐요, 제가 연화를 업을게요. 얼른.”
“이제 네가 연화야. 살아남아, 반드시. 미안하다, 연화의 삶을 안겨줘서. 미안해. 살아야만 해. 네가 모두를 등져서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 리안화를 위해 희생하지 마. 네가 지키고 싶은 것을 위해 살아, …연화.”
그녀의 말이 끝난 순간 열기가 피부로 느껴졌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제 손을 잡은 그녀의 힘이 빠져가고 있었다. 연화, 연화. 불러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불길이 가까워졌다. 연화가 제 허벅지에 고개를 묻었다. 타오르는 불꽃이 눈동자에 새겨졌다. 구조물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말이 없었다. 미동도 없었다. 이마에 땀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손을 처음 맞잡던 날을 떠올렸다. 그녀는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저의 손을 잡았을까? 저에게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을 때부터, 처음부터. 연화의 자리를 넘겨주려고 했던 것일까. 부산에서의 여름날, 그날의 열기가 느껴졌다. 제 이마에 흐르는 땀까지. 왜 이렇게 많은 것이 변한 것인지. 저에게 왜 이런 두려움이 닥쳐야만 했는지. 흐르는 것이 땀인지 눈물인지 몰랐다. 타오르는 불길에 저도 그만 타오르고 싶었다.
“전원 사망. 다시 전한다. 생존자 없음.”
들려오는 그 소리에 저는 숨을 참고야 말았다. 남은 것은 정말 저뿐일까? 이것이 저의 마지막일까. 그녀가 제게 살아남으라고 말했는데, 그럴 수 있을까.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허공에서 시선이 자꾸만 방황했다. 타오르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두려웠다. 빠져나갈 길이 있을까? 연화를 데리고 나갈 수 있을까.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가 있던가. 구조물이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에게 살아있다는 사실을 들키면 곧바로 사살이다. 그러나 총을 손에 쥘 수 없었다. 그녀의 손을 놓을 수 없었다. 다시는 총을 들 수 없을 것이다. 고개를 돌렸다. 어떤 인영이 구조물을 헤치고 다가오고 있었다. 눈물에 앞이 흐렸으나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리고 나니 앞이 트였다. 그럼에도 연기가 시야를 방해했다. 아, 누구인지 알 것만 같다. 제가 자주 지켜보던 이.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있음에도 알 수 있었다.
“…박지민.”
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던 때를 떠올렸다. 너, 리안화에 그냥 들어온 것이 아니구나. 그대로 벽에 등을 기댔다. 그는 저를 죽일까? 이제는 제가 알려준 대로 총을 쏠 수 있을까. 숨을 참으라고 그리 말했는데. 매캐한 연기에 목구멍이 따가웠다. 화상이라도 입는 중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자꾸만 가까워졌다. 가까워지지 말지. 이곳은 절망뿐인데. 고개를 숙여 여전히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연화, 저 아이는 왜 내게 오는 걸까요. 대답은 없었다. 두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제가 그의 존재를 인식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을지 몰랐다. 그는 저의 이름을 궁금해한 적이 있을까? 알려주지 않은 저의 이름, 저조차도 모르는.
그래, 등을 지는 것은 쉽다. 다시 등을 돌리는 것은 어렵다. 저는 그제야 알았다. 그 시선의 종착지, 그것이 저라면 그 어떠한 것도 상관이 없다고. 저를 속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따위 것은 아무런 필요가 없다. 연화의 말처럼, 저를 위해 살겠다. 두려움을 가득 담은 눈으로 저에게 가까워지는 그를 보며 다짐했다. 살아나가면, 그를 제 곁에 두겠다고. 그러나 그가 어서 이 절망을 빠져나가기를 바랐다. 저는 살아나가지 않아도 되니까. 저를 그런 눈으로 바라본 것은 그가 처음이어서. 그 눈을 차마 잊지 못할 것 같아서. 지민은 아마 모를 사실. 저는 이미 모두 알고 있었다. 지민이 리안화만을 위해 일하지 않을 것을, 언젠가는 그가 제게서 등을 돌려야 할 날이 올 수도 있음을. 그리고 그 두려움의 화염, 저를 구하러 오던 이가 그라는 사실을.
그 순간 틈새로 젖은 수건이 비집고 들어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누군가의 외침이 들리더니 그가 억지로 채여 끌려나가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자꾸만 제게로 닿았다. 눈을 마주하지 않았다. 떨어진 수건을 향해 손을 뻗었다. 펼친 손바닥에서 그녀의 피가 떨어졌다. 손끝에 닿은 수건이 미지근했다. 그대로 들어 제 얼굴에 덮었다. 살고 싶어졌다. 뜨겁던 숨을 몰아쉬었다. 연화의 손을 잡은 제 오른팔 위로 떨어진 구조물이 피부를 모두 달구고 갔다. 박지민, 박지민. 이제는 그의 이름을 뇌까렸다. 제가 부르는 이름들은 지금 당장 제게로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꾸만 정신이 흐려졌다. 자신을 소개하며 웃어 보이던 연화. 제 사격 실력에 박수를 치던 연화. 저에게 울지 말라던 연화. 제 표정을 잊지 말라던 연화. 나비가 새겨진 권총을 선물이라며 건네던 연화. 그리고 오늘을 잊으라던, 눈물짓던 연화. 5년의 기억에는 연화가 가득했다. 두려웠다. 얼굴이 기억나지 않을 것만 같아서.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 나올 생각을 해야지. 빨리 나와, 곧 무너져.”
“…그치만 연화가.”
수건에 얼굴을 묻고 겨우 숨을 쉬고 있을 때였다. 지민이 헤치고 갔을 그 사이를 비집고 청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의 말에 청이 제 허벅지에 얼굴을 묻고 있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잠깐이나 말이 없었다. 청이 손을 뻗어 그녀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그녀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더니 그녀의 상체를 들어 바닥에 눕혀놓았다. 허벅지로 열기가 느껴졌다.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빨리 나가. 앞장 서, 내가 온 대로 나가기만 해.”
“연화는, 연화는요.”
“어쩔 수 없어. 틈을 비집고 나가려면 못 데리고 나가. 이대로 죽고 싶어? 잊지 마. 이제 네가 연화라는 걸. 감당하지 못하면 죽음뿐이야.”
청이 자꾸만 등을 떠밀었다. 바닥에 떨어진 총을 집어 들었다. 다시는 쓸 수 없을 터였다. 손이 뜨거웠다. 고개를 돌려 바닥에 누운 그녀를 바라보았다. 청이 그새를 못 참고 강한 힘으로 등을 밀었다. 억지로 걸음을 옮겼다. 열기에 온몸이 타버릴 것만 같았다. 얼굴을 수건에 묻었다. 지민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건물 밖으로 빠져나오자마자 더 강해진 불길이 입구로 뿜어져 나왔다. 건물로 가까워지려는 저를 청이 막아 세웠다.
“청, 청이 이러면 안 되잖아요.”
“연화의 뜻이야. 난 지시를 따른 것뿐이고.”
청의 목소리가 열기와는 다르게 차가웠다. 내려다보는 시선이 너무나 따가워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제가 총을 쏘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연화와 탈출할 수 있었을까. 손에 들린 수건을 꽉 쥐었다. 팔이 바르르 떨렸다. 청이 저의 팔을 아까처럼 낚아채 차에 태웠다. 그녀가 타오르고 있을 거였다. 제게 모든 것을 남기고 떠나간 그녀가. 토기가 밀려왔다. 허벅지에는 무엇도 남아 있지 않았다. 수건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잊으라 했지만, 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제게 말을 건네던 그녀의 목소리, 불길 사이로 보이던 지민의 얼굴. 하나도 빠짐없이.
“연화. 이제 네가 연화야.”
사람들은 저를 연화라고 불렀다. 저는 몇 번째 연화일까. 제가 대체한 이 자리, 얼마나 많은 이들이 스쳐 지나갔을까. 그리고 저의 다음은 누구일까. 그녀도 저처럼 이름이 없었나. 제게 연화라는 이름을 넘겨주기 위하여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나. 결국 제가 연화가 될 것을 알아서 그리도 저의 표정을 보여주었나. 연화의 삶을 넘겨주어 미안하다고 말하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살아남으라고 말하던 울음 가득한 목소리를 기억해냈다. 지키고 싶은 것을 위해 살라던 말을. 그와 동시에 지민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격장에서 처음 마주했던 흰 얼굴, 검은 새벽 환상처럼 드러낸 얼굴. 제 옆에 두고 싶었다. 모든 것을 뒤로한 채라도. 설령 언젠가는 저를 등질 수도 있대도.
“갤러리를 맡아. 그 애가 너한테 넘긴 건 그거야. 마약 검수도 다른 애한테 맡길 거야. 바이오 산업도, 맡을 필요 없어. 넌 얼굴만 비춰. 그게 할 일이야.”
“알겠어요.”
“제가 불쌍하다고 데려와 놓고는, 피할 수도 없는 운명을 줘버렸네. 그래도 넌 별일 없을 거야. 그 애가 그렇게 만들어 놓고 갔으니까. 잊지는 마, 이제 네가 연화라는 사실을.”
고개를 끄덕거렸다. 절대적인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저를 연화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녀를 그 애라고 불렀다. 죽음과 동시에 이름 역시 앗아가 버리곤 저에게 다시 그 이름을 붙였다. 연화, 그 이름이 낯설었다. 모두가 잊지 말라고 말했다. 제가 연화라고. 순응해야 하는 것일까? 입안이 썼다. 눈을 감으면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는데도, 그녀를 연화라고 부르던 제 목소리가 생생한데도.
다시는 사격장에 가지 않았다. 그녀가 제게 주었던 총은 더 이상 쓸 수 없었다. 저는 더 이상 조준을 할 수 없었다. 총을 들면 그녀가 저를 안던 그 감촉, 느껴지던 반동이 떠오른다. 뒤로 넘어지던 그 찰나, 등허리를 타고 올라오던 한기와 상반되게 손끝에서 느껴지던 피의 온기까지. 지민에게 숨을 참으라고 말하던 저의 모습이 떠오른다. 저는 이제 그렇게 하지 못한다. 조준하려고만 하면 호흡이 엉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오른쪽 손등부터 이어지는 화상 자국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만두었다. 할 수 없었다. 대신 칼을 쓰는 법을 연습했다. 쓰지 않던 근육을 단련시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야만 했다. 저를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그를 제 곁에 두기 위해서라도.
“반가워요, 연화예요.”
제가 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저에게 처음으로 건넨 말이기도 했다. 저는 그녀의 말대로 무엇도 잊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데 자꾸만 기억에서 그녀의 얼굴이 흐려졌다. 제가 연화가 되어가고 있는데, 그녀는 자꾸만 사라져갔다. 이제는 안다. 연화라는 자리가 무엇을 연기해야 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지를. 리안화의 절대자. 그것을 연기해야 하는 거였다. 대외적으로 얼굴을 노출하기도 해야 하는. 그만두고 싶다고 그만둘 수 없는 것. 그녀처럼 목숨을 내어주어야 할 수도 있는 것이 연화의 자리였다. 공석으로 남겨둘 수 없이 누군가는 계속 대체해야만 한다. 그래서 출신도 불분명한 제가 적격이었을지 모른다. 죽어야만 한다면 그것은 저의 몫. 리안화를 위해 희생하지 말라던 그녀의 목소리가 제 곁을 떠다닌다. 정해진 운명에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 살아남으려면 그래야만 한다.
그녀가 죽고 청도 제 자취를 감추었다. 연화의 수족이었으므로 그녀가 죽은 뒤 그 자리에 있지 않는 것이 맞았다. 스물이 되기 전까지는 대외적으로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더 이상 모르는 척 앉아 있기를 그만두었다. 빈틈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쉽게 표적이 되고 만다. 그렇게 두지 않겠다. 감히 저를 대적하도록 두지 않겠다. 희생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남기고 간 자료들부터 확인했다. 그녀가 일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보고가 이루어지는 체계, 그리고 리안화와 거래가 이루어지는 기업. 마지막으로 갤러리 사업. 제가 할 일은 얼굴을 비추고 장부를 정리해 보관했다가 넘기는 것이다. 그녀가 왜 제게 갤러리의 대표로 있게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눈에 띄게 피 튀길 일 없어 그랬다.
“연화, 오랜만이야? 이쪽은 뤠이양이야. 아, 예양. 이제 우리랑 같이 일하게 될 거야.”
“안녕하세요, 연화. 한예양입니다.”
“…연화예요.”
제가 스물둘, 예양이 스물 하나의 일이다. 저를 아가라고 부르던 옥경은 저를 연화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아가, 이제 그 호칭은 없었다. 연화라는 이름만이 남아 저를 옥죄었다. 옥경의 옆에 선 예양의 얼굴을 보았다. 얼굴에는 미약하게 멍 자국이 남아있었다. 입가에는 딱지가 앉아 있었다. 시선을 조용히 내렸다. 팔에는 주사 바늘이 꿰뚫고 간 자리가 많았다. 멀쩡한 부분을 찾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녀가 말하던 마약 검수, 이 아이에게 맡길 작정인가 생각했다. 이상하게 그들은 나이 어린 이들을 앞세웠다. 목숨 걸고 하는 일, 모두 쉽게 넘겼다. 어려서부터 교육 시켜 그렇게 하게 만들었다. 옥경이 예양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민은 여전히 사격장에서 자주 훈련을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의 사격 실력이 날이 갈수록 무섭게 성장한다는 말도 들었다. 누군가에게 시키면 모든 일이 저에게로 새어 들어왔다. 그러나 사격장에 직접 방문하지는 않았다. 저는 이제 그곳에 갈 수 없었다. 그렇다고 따로 그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매일 같이 떠오르는 불꽃, 두려움의 화염이 저를 괴롭혔다. 잠을 제대로 잔 것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절망스러운 꿈에 갇혀 죽을 것만 같을 때는 어김없이 지민이 나타났다. 저를 향해 다가오던 그림자, 애타던 눈동자. 내던져진 젖은 수건. 저는 그것이 참 제게 내려진 단 하나의 동아줄 같았다. 그제야 꿈에서 깰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그날에 있을까. 저는 그날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저를 향한 시선이 저를 덮쳐 오던 불길보다 뜨거웠다.
“그래서 말인데, 누가 네 곁에 있었으면 좋겠니?”
“박지민. 그 사람이 좋겠네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 대답에 그녀가 의문을 갖는 듯 했지만 별다른 말 없이 수긍했다. 그의 이름은 꽤나 유명했다. 월등한 신체적 능력을 보인다고. 그런 그를 욕심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저는 단지 그러한 이유만으로 그를 욕심내는 것이 아니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느낄 수 있었다. 저를 향해 던지는 시선, 내딛는 걸음. 제가 모든 것을 등지고서라도 다시 보고 싶었다. 언젠가는 저를 등질 순간이 온대도. 그 찰나가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지민이라면 저는 그 어떠한 사실도 눈 감을 수 있다. 이제는 그런 권력도, 책임도 가졌다. 리안화를 위해 희생하지 않겠다.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을 위해, 희생하겠다. 박지민, 오직 그를 위해 제가 가진 그 어떠한 것도 모두 등질 각오를 하고서.
“반가워요, 연화예요.”
“……박지민입니다.”
스물이 된 박지민을 마주했다. 그가 저를 기억할까. 설령 기억하지 못한대도 상관이 없다. 그는 저의 이름을 몰랐다. 저는 이름이 없었으므로. 저는 여전히 제가 죽어버린 그 불꽃 속에서 있지만. 남겨진 것은 이제 연화이다. 마주한 그의 얼굴이 반가웠다. 5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제법 골격이 달라져 있었으나 그 눈동자만은 같았다. 저를 보는 그 눈동자. 먼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시선이 길게 새겨진 손등 위 화상 자국으로 향했다. 그가 숨을 참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분명 저를 기억하고 있었다. 손을 맞잡았다.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려 다시 눈을 마주했다.
그들이 희생하라고 만들어 놓은 연화의 자리. 저는 그것을 이용해 먹을 생각이다. 저는 그렇게 대단한 책임감과 영웅 정신을 가진 사람이 되지 못한다. 언제가 되었든 제 것을 지켜야만 하는 날이 온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저를 이용할 생각인 그들을, 제가 이용하지 않을 이유. 그런 것 따위는 없었다. 그러니 박지민, 오직 그만 제게서 등을 돌리지 않으면 된다. 등을 돌린대도, 시선의 종착지가 저라면 얼마든지. 그라면 저를 이용해 먹어도 모른 척할 수 있다. 부디 그가 제게로 정착할 수 있었으면 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저에게로 다시 손을 내밀어준다면 제가 못할 일은 없었다. 그는 저를 살고 싶게 했으므로, 그가 죽음 따위를 안겨 준대도 기꺼이 믿어주리라.
타오르는 절망의 기억에 집어 삼켜진다. 함부로 눈을 감으면 재로 남고 만다. 그 기억 속 자꾸만 저를 깨우는 순간이 눈을 뜨게 만든다. 그 순간은 영원이 되어 남는다. 저를 향해 뻗어진 손을 이제는 놓치지 않을 것을. 두 번의 절망은 없어야만 한다. 덮쳐 오는 거대한 진실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지라도.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눈을 감지 말아야 한다. 두렵지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저의 숙명이다. 모든 사실을 포용할 것이라는 다짐. 그것뿐이면 된다. 이름의 무게 따위에 짓눌리지 않을 것이다. 제가 모든 것을 집어삼킬지언정.
2021.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