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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소년단/박지민] 불나비 03 | 인스티즈




자우림 - Only One

반복재생 부탁드립니다.




불나비

03





 절망의 심연에는 깊이가 없다. 들려오는 메아리는 오직 나의 것뿐이다. 다른 이가 내 외침을 들었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인가. 나는 아직 나의 목소리를 숨겨야 하는가. 나는 계속 추락한다. 진실과 거짓 사이의 방황을 반복한다. 어느 것을 선택한대도 바뀌지 않을 진심. 가 닿지 못한대도 족하다. 정착하지 못하는 처지는 쓰라리다. 나는 절망에라도 정착하겠다. 그러나 누군가는 절망에 정착하게 두지 않겠다. 끝없는 추락이 이어지더라도, 더는 메아리가 돌아오지 않더라도. 진실과 거짓, 어느 것이 수면 위로 제 고개를 들이밀더라도 나는.


 경매 이후 지민을 못 본 지 어언 사흘이 넘어가고 있었다. 지민은 바빴다. 연화는 구태여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지민의 모습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에게 내려지는 일만으로도 바빴다. 그랬는데 제가 일을 더한 격이니 연화는 괜스레 죄책감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예양은 금방 기운을 되찾았다. 그래도 아직은 멍이 온몸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옥경은 사흘 내내 예양의 방에서 예양을 간호했다. 심지어는 멍이 잘 빠지는 연고라며 어디선가 들고 온 약을 예양의 온몸에 덧발랐다고도 했다. 예양의 방을 찾아갈 때마다 예양은 연화를 웃으며 맞이했다. 연화, 옥경이 저를 너무 걱정해요. 연화가 봐도 나 괜찮죠? 어서 옥경한테 말해줘요, 그만 가도 나 괜찮다구요. 옆에 옥경을 세워두고 예양이 한 말이었다. 연화가 옥경에게 흘리는 말이 아니라 지시를 내렸으면, 옥경은 정말로 제 방으로 돌아가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연화는 그러지 않았다. 


 연화는 곧 있을 거래에 예양이 갈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을 했다. 그녀가 다쳐온 것은 글쎄, 거래와는 관련이 없을 것이라고 연화는 예상했다. 무엇보다도 마약 거래에는 예양이 빠지면 곤란했다. 일이 어찌 되었건 간에, 연화는 우선하여 갈 곳이 있었다. 당연한 수순으로 지민이 동행할 예정이었다. 지민의 방은 연화의 방과 바로 마주보고 있지만, 연화는 지민을 마주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지민은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연화는 그랬다. 그렇다고 직접 찾아갈 생각은 없었다. 용기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굳이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필시 지민일 것이다. 연화가 방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지민이 서 있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지민의 얼굴이 보였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니 그가 자연스럽게 방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흰 티에 검은 자켓을 걸친 채였다. 연화는 습관적으로 지민의 모습을 훑었다. 나비 펜던트 목걸이부터 손목에 있는 타투들까지. 그리고 풍겨오는 익숙한 향수 냄새에 연화는 안정감을 느꼈다. 연화는 그제야 제가 집에 돌아온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물론 제가 서 있는 이 자리가 저의 집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얼굴 보는 것 같네.”

 “그러게. 너무 바빴어서, 미안.”


 먼저 건넨 연화의 인사에 지민이 사뭇 다정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며 지민이 제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고개를 잠깐 옆으로 기울이더니 그대로 연화의 머리칼을 제 손으로 흘러내리듯이 쓰다듬었다. 이어지는 동작이 퍽 자연스러웠다. 연화는 제가 지민보다 나이가 많은 것은 틀림없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자꾸만 그보다 어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게 싫다는 것이 아니었다. 편안하고 익숙해서 좋았다.


 지민이 바빴던 근래, 연화도 바빴다. 예고 없이 안내받은 행사부터 시작해서 거래까지 모든 일정을 다시 확인해야 했다. 또한 거래 장부에 실수가 없는지 다시 검토해야 했으며, 예정된 거래에 차질이 생길 가능성을 따져보아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은 이례적이게도 연화에게 지시를 내리는 그녀에게 찾아가야 했다. ‘그녀’는 절대적이다. 하지만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소수의 사람들뿐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존재를 명확히 알고 있는 것도 그들뿐이다. 연화는 그 소수에 들었다. 그녀를 제외하고서는 연화가 절대적이어야만 한다. 단지 그것이 표면상에 불과하더라도. 연화는 제 이전이 누구였는지 안다. 하지만 이제는 얼굴이 흐릿하다. 모든 게 기억나는데, 애석하게도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오늘은 일찍 준비했네?”

 “내가 뭐 맨날 늦는 사람이니. 가자.”


 지민은 그런 대답을 듣고서도 가끔 늦을 연화를 떠올렸다. 사실 늦어도 자신은 상관없었다. 늦으면 늦을수록 저는 좋았다. 그 시간 동안 그녀의 뒤에 서서 가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 좋았다. 지민은 그래, 그 시간마저도 제게는 다정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연화는 지민보다도 먼저 방을 나섰다. 지민은 그런 연화의 뒷모습을 습관처럼 바라보다가 그녀를 따라나섰다. 연화는 걸음을 옮기며 건조한 나머지 곧 터버릴 것 같던 그의 입술을 떠올렸다.


 주차된 세단으로 다가간 지민은 자연스럽게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이어, 연화가 옆자리에 올라탔다. 지민이 차에 탈 동안 연화는 제 가방을 뒤졌다. 지민은 그런 연화에 개의치 않고 안전벨트부터 채웠다. 


 “지민아, 이리 와.”


 연화가 그를 불렀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지만 그대로 제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가까워진 얼굴에 연화가 지민의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잠깐 훑었다. 그리곤 가방에서 꺼낸 립밤을 그대로 입술에 펴발랐다. 지민의 시선이 낮아졌다. 제 입술에 집중한 그녀의 모습에 집중했다. 자꾸만 풍기는 향수 냄새에 지민은 울고 싶었다. 음파음파 해. 장난스러운 그녀의 말에도 시키는 것은 모두 했다. 만족한 듯 웃는 얼굴을 보며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립밤을 든 채로 허공에 머물러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중요한 날은 항상 장갑을 착용했기에, 바깥에서 잡는 그녀의 맨손은 오래간만이었다. 익숙한 손 감촉과는 달리. 지민은 사소한 행동에도 자꾸만 의미 부여를 하고 싶어졌다. 그녀의 손바닥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쓸다가, 그만두었다.


 “연화, 예양 말인데.”

 “응, 뭐 알아낸 거 있어?”


 한참을 말없이 운전하던 지민이 첫 말을 꺼냈다. 연화는 궁금한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혹여라도 그가 알아낸 것이 없을 경우를 대비해서였다. 그에게 부담을 주는 것은 원치 않는다. 지민이 운전대를 자꾸만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연화는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지민은 그렇게 한참이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이 없었다. 연화에게 할 전달할 내용을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예양은 마약 중독자예요.”

 “알고 있어.”

 “예양이 품질 검사하는 정도로는 바로 부작용이 오지 않을 거란 말이야.”


 차가 멈추면서 지민이 연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민은 제게 일에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면, 존댓말을 섞어서 사용했다. 가끔 보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제가 쓰고 싶을 때만 썼으니. 그러나 연화는 그런 지민을 그냥 두었다. 그가 제게 존댓말을 하든, 반말을 하든 상관없었다. 문득 지민이라서 상관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화는 지민이 하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지민이 연화를 보며 혀로 제 입술을 축였다. 연화는 복잡한 제 머릿속과는 다르게 미소 지었다. 연화가 차에서 내려야 할 때였다. 지민의 입술을 다시 손가락으로 쓸었다.


 “이러니까 입술이 트지. 자꾸 침 바르지 마. 트면 따갑잖아.”


 연화가 말을 마치자마자 차 문을 열고 내렸다. 그 찰나에 차에 남은 잔향과 적막이 실감났다. 지민이 따라 내려, 그녀의 길에 함께했다. 연화와 지민이 선 곳은 한국에 위치한 리안화 건물이었다. 연화는 숨을 한 번 내쉬고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들어서자마자 연화를 기다린 직원이 안내를 시작했다. 건물의 외관은 언제나 평범했다. 제가 가진 성격은 드러나지도 않게. 연화는 그런 면을 보며 실소를 흘렸다. 남의 피를 빨아다 세운 건물이라기엔 멀끔했다. 안내를 담당하는 한 직원과 연화와 지민, 총 세 명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최고층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지민은 연화를 보고 있었지만, 연화는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화, 그러니까 내 말은. 아무한테나 마음을 쉽게 내어주지 말라는 뜻이야.”

 

 지민이 말했다. 엘리베이터가 최고층에서 멈춰섰다. 순간의 고요가 찾아왔다. 연화는 지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제야 그의 시선을 눈치챘다. 지민은 웃고 있는 건가? 모르겠다. 연화는 지금의 그의 표정을 쉽게 읽을 수 없었다. 다만, 그의 눈동자만은 알았다. 저를 볼 때, 그 두려움을 담은 눈동자. 


 “알겠어.”


 연화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러나 지민은 내릴 수 없었다. 보안상의 이유였다. 지민은 연화가 고개를 돌리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좁아지는 틈 사이로 보이는 연화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하강하는 엘리베이터와 함께 지민의 마음이 추락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보이는 닫힌 문을 감싸는 대리석이 연꽃 무늬로 조각되어 있었다. 그리고 리안화莲花가 새겨져 있었다. 연화는 제 이름의 무게를 실감하며 문을 열고 들어섰다. 바로 보이는 것은 손님맞이용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마약을 유통하면서 정작 자신은 마약을 하지 않는 모습이 아이러니했다. 리안화의 본사는 중국에 뿌리내렸다. 리안화는 호텔, 갤러리 등 여러 계열을 경영하는 기업이자, 범죄 조직이다. 시작은 마약 유통이었다. 사업을 확장해 나가는 동안 끊임없는 돈세탁을 반복했으며 그 후에는 갤러리를 세워 돈세탁 경로를 만들었다. 기업을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마약 유통 등으로부터 자원을 마련하였고, 기업의 수익을 다시 조직원 양산에 투자했다. 이어 다른 기업과의 제휴 관계를 맺었다.


 “얼굴 좋네. 앉아.”

 “한국은 언제 오신 거예요?”

 “성격도 급해. 앉아서 얘기하자구.”


 그녀가 연화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럴 때마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진 담배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흩어지는 연기 사이로 붉은 손톱이 잔상처럼 아른거렸다. 연화가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담배를 물곤 깊게 빨아들였다. 숨을 내쉬면서 그대로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재떨이에 담뱃불을 지져 껐다. 연화는 제 손을 들어 허공에서 몇 번 저어 보였다.


 “그새 머리가 더 길었네?”

 “안 잘랐으니까요.”

 “잘라도 보기 좋을 텐데.”


 연화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의 거절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런 연화의 뜻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럼에도 한참이나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연화는 벽면에 전시하듯 진열되어 있는 권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절로 침이 넘어갔다. 손끝으로 오른 손목부터 이어지는 흉터를 어루만졌다. 습관이었다. 이제는 그녀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괴고 연화의 행동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연화는 그것을 알고 있었으나 구태여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래, 나중 가면 네가 알아서 잘 하겠지, 뭐.”

 “왜 부르셨어요?”

 “디아바이오. 전달은 받았겠지? 다음 달이면 자선 행사가 열릴 거야. 줄기세포를 이용한 치료제가 아주 대박을 쳤거든. 겸사겸사 선행으로 이름도 되새기고. 연화, 너는 리안화 이름으로 참석해서 이번 연구 자료를 좀 받아와. 숨길 것도 없어, 아주 조그만 USB일 뿐이니까.”

 “더 하실 말씀은요?”

 “없어. 얘, 안부도 안 묻니?”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꼬고 있던 다리를 풀더니 다시 반대 방향으로 다리를 꼬았다. 등을 소파에 쭉 기댄 채로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담배 케이스에서 담배를 꺼내어 그대로 입에 물었다. 지포 라이터의 불이 켜졌다. 연화는 시선을 돌렸다. 맑게 지포 라이터가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라이터를 내려놓고 입에 물린 담배를 빼 들며 연기를 내뿜었다.


 “매정하기는.”

 “새삼스럽게 왜 그러세요.”

 “그러니까, 왜 그런다니. 맞다, 예양. 몸 좀 괜찮다니?”


 그녀가 미소 지었다. 씁쓸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연화는 예양에 대해 보고를 올린 적이 없었으므로 그녀가 예양의 소식을 알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긴, 그녀가 모를 일이라곤 없었다. 연화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눈까지 웃어 보이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알고 계셨네요?”

 “그럼, 내가 모르는 일이 어디 있겠어. 예양 일에 너무 마음 쓰지 말고, 어? 좋게 좋게 가자구.”

 “그럼 다행이고요. 갑자기 내려온 지시 때문에 제가 더 바빠져서요. 가볼게요.”


 그나저나 나는 연화가 머리를 좀 잘랐으면 좋겠는데. 곧 여름이잖아? 그녀를 등진 연화의 어깨 너머로 목소리가 울렸다. 연화는 못 들은 척 문을 열고 나왔다. 그녀가 연화를 보아온 지 대략 16년째였다. 연화는 자신의 태도가 새삼스럽다고 이야기했지만, 그녀는 그것이 못내 씁쓸했다. 제 기억 속의 연화는 조금 달랐다. 이제는 아주 희미하게 잊혀 가지만.


 디아바이오는 11년 전에 리안화와 제휴 관계를 맺은 바이오 기업이었다. 당시에는 신생 기업이었으므로, 순손실이 막대했다. 자원이 부족한, 검증이 되지도 않은 신생 기업과 리안화가 제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꽤나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디아바이오는 필요한 자원을 리안화로부터 공급받았다. 리안화의 입장에서는 다른 의약품에 비해 비교적 적은 투자 비용으로도 바이오 약품의 가격이 높게 측정되는 면이 있으니 이득이었다. 뿐만 아니라, 리안화는 그저 그런 자원 공급에서 끝나지 않았다. 디아바이오가 리안화를 끼고 실패할 가능성은 없었다. 최근에는 유전자 치료제를 연구 중이며, 얼마 전에는 줄기세포를 이용한 신약 개발에 성공했다. 매출액과 순이익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자 보이는 것은 문 옆에 기대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지민의 모습이었다. 체감상 오랜 시간이 흐른 것만 같았다. 지민이 자신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지민은 연화를 보자 팔짱을 끼고 있던 제 팔을 풀었다. 


 “왔어?”

 “언제부터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어? 차에 가서 있었어야지.”

 “괜찮아. 바로 돌아갈 거지?”


 지민의 향수 냄새에 제 코끝에 맴돌던 담배 냄새가 지워져 나가는 것 같았다. 두통이 줄어들었다. 제가 먼저 걸음을 옮기니 지민이 따라 걸어왔다. 걸을 때마다 구두 소리가 로비에 울려 퍼졌다. 출입구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니 직원들이 허리를 숙였다. 간단히 고개만 끄덕이고서는 문을 빠져나왔다.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연화는 가만히 서서 그 바람을 맞았다. 지민은 그런 연화의 옆에서 바라만 볼 뿐이었다.


 “지민, 당분간은 바쁠 테지?”

 “응. 아마도.”

 “그럼 자주 보지 못하겠지.”


 연화의 목소리 이후로 차 안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지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운전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민은 그저 침을 한 번 삼켰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고, 듣고 싶은 말도 많았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지민은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앉은 연화를 슬쩍 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연화는 그것을 모르지 않았으나 별말 하지 않았다.


 지민은 제가 말을 얼마나 아껴야 할지 몰랐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만약 제가 아니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제 머릿속을 채우는 생각에 두통이 일었다. 지난 나흘, 몇 번이나 두드리고 싶었던 연화의 문. 눈을 감아도 그려지던 연화의 얼굴. 제가 무슨 결심을 했는지 알 턱이 없을 연화. 그리고 몰랐으면 했던 제 마음과는 상반되게 잡고 싶던 그녀의 손끝. 지민의 가슴이 절절하게 끓었다. 


 연화는 대답이 없는 지민의 얼굴을 잠시 보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른 시일 내에 이루어질 거래, 그리고 앞으로 준비해야 할 자선 행사. 예양의 상처, 옥경과 예양의 관계, 그리고 지민. 생각이 불필요하게 넘쳤다. 잠에 들고 싶었다. 창밖으로는 스쳐 지나가는 나무가 보였다. 제 처지가 우스웠다. 나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나 자신, 누군가가 기억할 리 없다. 바란 적이 없대도 씁쓸했다. 그녀를 만나고 오는 길에는 항상 그랬다. 결국 남는 것은 무엇도 없는 것을. 제가 바랐던 것은 아주 단순한 무언가뿐인 것을.


 호텔 19층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것은 예양과 옥경이었다. 옥경이 예양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고 있었다. 옥경이 예양에게 선물한 모양이었다. 한 손에 거울을 든 예양이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웃었다. 옥경도 따라 웃었다. 연화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구두 굽이 바닥과 맞부딪혀 작은 소음을 만들었다. 그러자 그들이 연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연화. 옥경이 저 목걸이 사줬어요. 3땡을 쥐었는데 내가 생각났대요.”

 “예쁘네. 잘 어울려.”


 예양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벚꽃 모양을 하고 있었다. 연화는 가만 고개를 끄덕거렸다. 옥경은 또 섯다 판에서 놀음을 하다 온 모양이었다. 예양이 기쁜 듯이 옥경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옥경도 자연스럽게 감싸 안아 등을 다독였다. 그들이 정말 가족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인가. 평범한 삶을 살았더라면. 연화는 그 이상의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지민이 제 허리에 손을 둘렀다.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자 그가 옅게 미소 지었다. 연화도 그를 따라 미소 지어 보였다.


 “아무튼, 예양. 몸조심 잘하고. 곧 일이 있으니까.”

 “그럼요, 연화.”

 “연화, 내가 연화 것도 안 사왔다고 너무 섭섭해 하지 마라, 응? 내가 연화도 얼마나 아끼는지 알잖아.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알지?”

 “전 괜찮아요. 들어가 볼게요.”


 그들은 연화를 향해 손을 흔들더니 그 뒤를 따르는 지민을 보며 잠깐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지민도 따라 고개를 숙였다. 문 앞에 선 연화가 문을 열더니 그대로 지민의 손목을 잡은 채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자 자연스레 지민도 따라 들어왔다. 문이 닫히자 지민이 연화를 품에 안았다. 연화는 들려오는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 말이 없었지만, 저는 편안했다. 이대로 멈춰있고 싶었다. 느껴지는 온기, 작게 들리는 숨소리까지. 저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 없었다.


 “지민아, 내가 요즘 잠을 통 못 자.”

 “잠에 들 때까지 내가 여기 있을게.”


 그렇게 말한 지민이 자신의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튼 입술이 따가운 모양이었다. 연화가 손을 뻗어 그의 입술을 문질렀다. 엄지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그의 입술이 따라 짓뭉개졌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건드릴수록 붉은빛이 돌았다.


 “안 되겠다. 내 립밤 가져가.”

 “알겠어.”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지민의 품에서 벗어난 연화가 그의 얼굴에 양손을 가져다 댔다. 그의 낮게 깔린 시선이 좋았다. 눈동자 안에 담긴 저의 모습, 가끔 저를 보며 파르르 떨리는 눈가. 저를 보며 이유 모를 은근한 두려움을 꾹 눌러 담은 눈. 그의 눈동자만을 보고도 그를 알아챌 수 있었다. 절망하는 눈동자, 자신의 것과 같았다.


 “자고 가. 내가 잠든 사이에 가버리지 말고.”

 “그럴게.”


 연화는 밤이면 환상통을 앓았다. 혼자 있는 공간이면 늘 그렇게 두려움이 닥쳤다. 절망하는 어둠 속 굉음과 함께 타오르던 불길. 선명한 제 목소리, 그리고 연화. 무엇 하나 저를 괴롭히지 않는 게 없었다. 쓰라리던 구역질, 솟아오르던 불꽃과는 상반되게 꺼져가던 제 보잘 것 없는 숨. 지민이 있으면 괜찮았다. 제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오직 그였다. 그리고 그런 공간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도 지민뿐이었다.


 절망은 쉽게 시간을 주지 않는다. 기다려주지 않는다. 선택은 나의 몫이었으니 따라오는 절망은 필연적인 것이다. 필연적으로 마주할 절망, 정착해버리겠다고 다짐한. 진실과 거짓 사이의 방황도 곧 끝맺을 것이다. 문득 찾아온 우연이 그렇게 만들 것이다. 숙명과도 같은 선택이 낳은 절망이 나를 삼키더라도 내가 지킬 무언가는 삼키지 못하도록. 끝없는 추락과 함께 암담한 절망의 냄새가 가까워진다. 멀지 않았다고, 곧 마주할 것이라고.


2021.01.01



<사담>

벌써 2021년입니다.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행복한 한 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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