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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소년단/박지민] 불나비 02 | 인스티즈




자우림 -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반복재생 부탁드립니다.





불나비

02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할 수는 없는가. 우리는 어째서 시공간에 얽매여 짜인 각본에 맞게 줄 맞춰 서고 음절을 뱉어내는가. 실존의 증거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를 관통하는 두려움뿐이다. 조명이 나를 비추지 않는 찰나, 각본에서는 찾을 수 없는 빈틈. 실존하는 나는 어둠 아래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는 것일까. 나를 포기하려던 그 순간에도 내가 포기하고 싶었던 것은 정녕 ‘나’였나. 존재의 증거를 두려움이 아닌 다른 감정에서 찾고 싶다. 아니, 다른 이에게서 발견해 내고 싶다. 썰물에 쓸려갔다가, 전혀 모르는 존재로 밀물에 다시 내뱉어져도 아무도 모르지 않도록. 휩쓸려 갔음을 알아채도록. 나를 알아주었으면 하고.


 차를 타고 바로 향한 곳은 이전에 옥경이 있던 호텔이었다. 어차피 앞으로도 몇 달, 아니 어쩌면 몇 년을 한국에 있으면서 그곳에 머물러야 할지도 몰랐다. 리안화 계열사가 경영하는 호텔이었으므로, 18층과 19층은 애초에 리안화 소속을 위해 제공되고 있기도 했다. 그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연화는 제가 돌아갈 집이라고 해야 그곳밖에 없다는 사실이 못내 홧홧한 감정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익숙하다. 하지만 익숙한 것이 제 안락함이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옥경은 로비에 없었다. 그녀의 흔적만 겨우 남아있을 뿐이었다. 재떨이에 수북이 쌓인 꽁초, 테이블 위에 떨어진 검은 재와 같은 것들이. 지민의 안내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1902호, 예양이 머무는 방이었다. 문은 완전히 닫히지 않은 채였다. 그 좁은 틈 사이로 옥경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번에는 지민보다 연화가 앞섰다. 지민은 그저 그녀의 뒤를 한 발짝 늦게 따랐다.


 “연, 화….”


 옥경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음절이 축축했다. 시선을 돌린 곳에는 침대 위에 누워있는 예양이 있었다. 옆에는 수액이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침대 위로 올라가지도 못하고 바닥에 무릎만 겨우 꿇고 앉아 손으로 연신 예양의 팔만 쓰다듬고 있는 옥경이 있었다. 예양의 얼굴이 피투성이였다. 아니, 정정하자면 그렇게 보였다. 수액이 있는 것을 보면 의사가 방문했던 것은 당연했으므로 얼굴의 피 역시 치료하며 닦아냈을 거란 걸 아는데도 온통 붉었다. 조명이 켜지지 않아 어두운 터라 더 그랬다.


 “옥경. 저 안 죽어요.”


 그리고 이어 들려오는 것은 예양의 목소리였다. 연화가 주변부터 살폈다. 방 안에 있는 것은 방의 주인인 예양, 옥경, 그리고 연화와 지민뿐이었다. 뒤를 돌아볼 것도 없이 등에서는 지민의 가슴팍이 느껴졌다. 지민아. 그 둘에게 다가가기 전에 그의 이름부터 작게 불렀다. 속삭인 탓에 그가 듣지 못한 것인지 들려오는 답은 없었다. 그대로 연화는 뒤를 돌았다. 어쩐지 지민의 기분이 표정에 녹아 들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부터 아주 가끔, 그리고 근래 들어 자주 보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항상 그런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시선의 끝은 연화였다. 항상 그녀가 걸렸다. 자꾸만 시선에 걸렸다. 지민은 그런 연화에 자꾸만 걸려 넘어졌다.


 “지민아. 먼저 쉬고 있을래?”

 “…그래야겠다. 필요하면 불러요.”


 지민이 사뭇 다정하게 연화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가 내렸다. 그리고는 남은 이들에게 먼저 가보겠다는 인사를 한 뒤, 그대로 등을 돌려 방에서 빠져나갔다. 유난히도 그의 구두 소리가 크게 들렸다. 쓸쓸함이 감돌았다. 아직도 어깨에 그의 온기가 그대로 남아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불부터 켤게요. 여기 있다간 건강한 사람도 환자 되겠어.”


 부러 농담처럼 말을 던진 연화가 바로 전등을 환하게 켰다. 상처를 유심히 보기 위함이기도 했다. 얼굴에 눈물을 범벅하고 있는 옥경에게는 미안하지만, 허기가 맴돌았다. 단순히 배가 고픈 것이기도 했고, 헛헛한 감정이 저를 맴돌았다. 지민과 먹지 못한 저녁이 생각났다. 지민은 식사를 하러 갔으면 좋겠다고 연화는 생각했다. 드러난 예양의 얼굴은 잔뜩 부어 있었다. 잔뜩 맞은 것 같아 보였다. 임무에 나갔다가 제 몸을 다치고 돌아오는 일은 익숙했다만, 현재의 위치로서는 아니었다. 제 몸 하나 겨우 나갔다가 들어오는 일은 애진작에 끝맺었다. 


 연화나 예양이 임무를 나갈 때는 경호가 붙었다. 실상은 경호라는 이름으로 몸 쓰던 조직원들을 보내는 것이지만. 그들에게 주어지는 대우는 그것이 더 나을 것이다. 지민은 조금 특수한 경우였다. 연화를 전담으로 경호했다. 연화의 수족이었다. 연화는 리안화에서 그만한 자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고, 지민은 그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지민은 전투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자랑했다.


 “무슨 일이야?”

 “…….”

 “예양이 설명할 수 없으면, 옥경이 해요. 어떻게 된 일인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예양에서, 여전히 손만 잡고 있는 옥경으로 시선을 옮겼다. 미묘한 분위기가 뿜어져 나왔다. 연화는 문득 예감이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를 가만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입을 떼지 못하는 예양의 표정이 딱 그랬다. 얼굴에는 상처뿐만 아니라, 피멍 역시도 가득했다. 보이는 얼굴에 저만한 상해가 있다면, 이불로 가려놓은 몸은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설명, 안 해?”


 예양에게로 걸어간 연화가 그대로 이불을 걷어 내렸다. 예상대로 몸에는 피멍이 가득했다. 일방적으로 맞은 것 같았다. 그것도 둔기를 이용해서. 일정한 모양으로 남아있는 멍이 그러한 추측을 가능하게 했다. 연화가 미간을 찌푸렸다. 옥경이 옆에서 연화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에 찬기가 흘렀다. 춥다, 추워…. 그렇게 말하며 이불을 다시 덮어 올렸다.


 “제가 설명할게요, 연화. 화내지 말아요…. 오늘 내 임무는 아이스 거래를 위해서였어요. 거래 수량을 미리 확인했어요. 그리고 품질을 확인하려고 했어요. 아이스는 고체 형태이지만, 잘 부서져요. 알고 있어요, 연화?”


 본격적인 거래는 다음 주에나 있을 예정이었다. 예양은 마약을 전담하고 있어, 직접적인 거래 성사에 연화와 동행하기도 했고, 그 이전에 존재하는 품질 검사는 예외 없이 예양의 몫이었다. 그리고 오늘, 예양이 제 몸을 다쳐온 것은 품질 검사에서였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따지자면 불가능한 일이다. 미리 품질을 검사하는 것도 ‘리안화’라는 이름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거래도 전에 리안화의 조직원과의 마찰이 생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연화는 예양을 추궁하듯 몰아세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이스에서는 신맛이 나요. 강도가 세면, 비릿한 향도 난다구요. 그 뭐라 하더라…. 아, 암모니아 향. 그게 나요.”


 예양이 자꾸만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도움이 되지 않을 이야기임에도. 그럴수록 연화의 표정이 굳었다. 그럼에도 미소를 띠었다. 예양은 그런 연화에게서 압박감을 느꼈다. 되려 더 긴장한 옥경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건데? 예양. 식사도 거르고 온 사람한테 설명이 너무 장황하네. 안 그래?”

 “연화, 조금만 진정을 하고…. 뤠이양도 많이 놀랐을 거다, 응? 부탁이다, 너무 몰아세우지 마라….”

 “그게 문제였어요. 너무 비릿했다구요. 아이스의 순도가 지나치게 높았어요, 연화. 보통은 그렇게 하지 않아요. 근데 너무, 너무 높았다구요. 한 번에 0.03g밖에 사용하지 않아요. 그런데 순도가 높으면 말이 달라져요. 아니, 그렇다고 거래에 차질이 생길 거란 말은 아녜요. 거래에 문제는 없을 거예요, 연화.”


 예양의 설명을 듣던 연화가 지쳤다는 듯, 침대로부터 여섯 발자국쯤 떨어진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았다. 예양의 화법은 항상 그랬다. 주제와 관련된 제 이야기는 모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제 생각이든, 행동이든 가리지 않고. 어린아이가 제 일상을 보고하듯이. 또한 목소리는 가녀렸고, 작았고, 아주 조금의 떨림을 가지고 있었다. 옥경은 그것을 옥구슬이 굴러가는 소리라고 말했다. 


 “계속 해.”

 “순도가 너무 높았어요.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어요. 검사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손이 떨리기 시작했어요. 여기까지는 괜찮았어요, 저는 익숙했으니까요. 그런데 무서웠어요. 무섭기 시작했어요.”

 “무서웠다고?”


 묻는 연화의 말에 예양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게 약의 부작용이에요, 연화. 무서워져요. 다 날 죽이려고 드는 것 같았어요. 참을 수 없이 무서워져서…. 리안화로부터 도망을 쳤어요. 날 지키려는지, 죽이려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랬는데, 정신을 차리니 나는 맞고 있었어요. 너무 아팠어요, 연화. 그래서 계속 소리를 질렀어요.”

 “누구한테.”


 옥경이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이미 연고로 범벅이 된 예양의 팔을 자꾸만 만졌다. 옥경은 애처럼 울었다. 차라리 제가 아팠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옥경. 예양이 말했다. 연화는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숨이 막혀오는 것만 같았다. 


 “그게…, 잘 모르겠어요. 미안해요, 연화.”

 “모르겠다고?”

 “정말 정신이 없었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연화.”


 옥경은 연화더러 이제 그만 두라는 듯 손을 허공에 휘저어 보였다. 연화, 제발 뤠이양은 지금 아프니까…. 연화는 제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더 물어도 들을 답이 없을 것을 알았다. 지민이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그를 내보냈지만, 그런 정작 자신은 의지할 곳이 있을 리 만무했다. 공허함이 밀려 들어왔다. 이미 어깨에 머물렀던 온기는 차게 식고 없었다. 


 결국 알아내는 것은 제 일이 될 터였다. 아니, 지민에게 전달을 부탁할 테니 그에게 일이 늘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를 귀찮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만, 경호에 문제가 있었던 거라면 지민을 거쳐야 했다. 연화가 입술을 씹었다. 예양의 방에서 혼자 빠져나온 뒤에도 갑갑한 기분은 가시지를 않았다. 


 예양은 중국 출생이다. 현재 18층과 19층에 머무르고 있는 리안화 소속 중에서는 유일한 중국인이다. 옥경이 중국과 한국의 혼혈이기는 했다. 그래서 저들끼리 감싸고 도는 것인지도 몰랐다. 연화는 그녀를 예양이라고 불렀지만, 옥경은 그녀를 뤠이양이라고 불렀다. 뤠이양은 중국식 발음이었다. 가끔 보면 정말로 가족이 저런 형태를 하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게도 했다. 연화는 항상 저 안에서 소외되는 감정을 느꼈다. 어디서나 느끼는 감정이기는 했지만, 그랬다. 연화는 쓸쓸했다. 


 예양에게서는 언제나 풀 향이 났다. 그게 다 대마초 때문이었다. 느린 말투는 약에 취해있는 탓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마초가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지라도 그녀는 예민하지는 않았다. 모두를 친절하게 대했다. 말투와는 잘 어우러졌다. 리안화에 오기까지 예양은 항상 약에 취해 살았다고 들었다. 이것도 다 그녀가 직접 이야기 한 것이었다. 제 과거도 모두 스스럼없이 이야기 해버리는 그녀가. 물론 지금도 항상 약에 취해 있었지만 그 정도가 달랐다고 그녀는 말했다. 연화가 오늘처럼 예양을 몰아세우는 날은 흔하지 않았다. 연화도 예양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민처럼 아끼는 것은 아니었으나, 따지자면 좋아하는 편에 가까운 것 같기도 했다. 예양과 체형이 비슷한 탓에, 제가 아끼는 옷들을 빌려주는 일들도 더러 있었다. 예양은 언제나 단발을 유지했고, 연화는 언제나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를 고수했으니 같은 옷을 입으면 머리카락의 길이로 구분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지민아, 자?”


 연화가 지민의 방문을 두드렸다. 지민의 방은 연화의 방 맞은편에 있었다. 제 방보다 먼저 지민의 방에 온 것이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그의 방문이 열렸다. 그동안 샤워를 한 모양인지 고정되어 있던 머리칼은 다시 전처럼 내려와 있었고, 아직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흰 피부가 유난히 더 흰빛을 띠고 있었다. 문을 여는 순간 그가 쓰는 바디샴푸의 향이 끼쳐 나왔다. 이상하게도 연화는 거기서 안정감을 느꼈다. 


 “들어와요.”

 “실례할게.”


 그가 열어준 문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앞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직 머리칼이 물에 젖어 있었다. 지민이 연화보고 앉으라는 듯 테이블에 놓인 의자를 잡아끌었다.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앉았다. 지민이 반대편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반지가 여럿 올려져 있었다. 지민은 그것을 들곤 제 손에 익숙하게 끼우며 물었다. 


 “내가 뭘 하면 돼?”

 “예양. 너도 내가 뭐를 부탁할지 대충 눈치로는 알겠지만…. 누구한테 습격당한 건지, 뭔지는 알아봐야겠지. 예양은 약을 과다복용한 상태였어. 정확히 말하자면 그냥 순도가 높았대.”


 지민이 반지를 모두 끼웠다. 이제는 습관처럼 그것을 손끝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좀처럼 올라오지 않았다. 자꾸만 테이블 위에서 의미 없이 부유했다. 그의 손가락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끔은 테이블을 두드리기도 하면서. 그의 열 손가락에는 지문이 없었다. 고된 훈련이 남긴 흔적과도 같았다. 다 닳아버린 것이었다. 연화는 가끔씩 그런 지민의 손을 가만 바라보고 있을 때도 있었다. 제가 있던 훈련장에 들어오던 지민의 모습, 이제는 까마득했다. 연화의 말에 가만히 앉아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었다. 연화가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장갑을 끼고 있던 탓에 소음은 생겨나지 않았다. 천천히 지민이 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부서질 것 같은 머리칼 사이로 연화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아이스 부작용이 나타난 모양이야. 맥박 증가에, 편집증적 망상까지. 도망을 쳤다고 해. 그게 어디로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을 차리니….”

 “정신을 차리니까 저 상태였다?”

 “뭐, 그런 맥락이지.”


 지민이 냉소를 지었다. 테이블을 두드리던 연화의 손길이 멈추었다. 


 “지민아, 부탁할게. 그때 예양과 움직였던 사람들부터 뒤져보면 될 거야. 내가 시킨 거니까, 그 이상으로 보고하지 말고 내 선에서 끝낼 수 있도록 하라고도 해. 지민이 네가 힘들면 바로 관둬. 이건 부탁이 아니야.”

 “알겠어요.”


 지민이 다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는 지민이 연화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에 제 모습이 비치는 게 보이기도 했다. 자꾸만 그의 시선이 제 마음에 걸렸다. 언제부턴가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같았다. 연화가 손끝에 걸리는 장갑을 자꾸만 만지작거렸다. 지민이 연화의 손목 위로 제 손을 덮었다. 장갑 위로 온기가 느껴졌다. 손목 위에 얹었던 제 손으로 다시 연화의 자켓을 조심히 걷어 올리고는 조심스럽게 반대편 손으로 장갑을 제 쪽으로 당겼다. 그러자 장갑이 연화의 왼손에서 벗겨져 나갔다. 오른손도 마찬가지로 벗겨 냈다. 


 “연화.”

 “응.”

 “나 말고, 연화부터 챙겨. 이건 부탁이에요.”


 나는 연화에게 부탁밖에는 할 수 없지만. 지민이 말했다. 고요한 방안을 그의 목소리가 채웠다. 지민은 왜인지 허공에서 나부끼는 것만 같은 감정을 느꼈다. 연화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민이 테이블 위에 장갑을 가지런히 올려 두었다. 


 “나 말고 다른 지시 있었어?”

 “…응. 그때는 아주 잠깐 여기 없을 거야, 연화. 그런 일은 반드시 없도록 할 테지만, 다치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그래, 너도. 다치지 말고 돌아와.”


 연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소리 없이 뒤로 밀려났다. 그에 지민의 고개도 따라 올라갔다. 그럼 쉬어. 연화가 테이블 위에 있던 장갑을 손에 쥐었다. 지민은 대답 없이 입을 꾹 다물곤 그것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연화가 지민에게서 등을 돌렸다. 지민이 테이블에 손을 짚고 급하게 일어섰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의자가 잠깐 뒤로 기울었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연화가 문을 향해 걸어가는 것보다 지민이 연화에게로 가는 것이 더 빨랐다. 지민이 연화의 손목을 애처롭게 붙잡았다. 연화가 뒤를 돌았다. 그녀의 머리칼이 흩날렸다. 지민이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역시나 아까와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무엇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곧 저를 먹어 삼킬지도 모르는 절망을 떠안은 사람처럼. 


 “연화, 조금만 더 있어. 가지 말고.”


 눈동자에 담긴 것은 온전한 저 자신이었다고 연화는 생각했다. 지민은 타는 갈증을 느꼈다. 속에서는 무언가가 자꾸 달아올랐다. 제 안에서 아우성이 들려오는 것만 같은 착각이 생겨났다. 연화가 아무 말도 없이 제 눈과 마주하고 있을수록 절망이 배를 불렸다. 저는 연화만 생각하면 온종일을 앓았다. 고통스럽지 않은 하루는 제게 없었다. 


 “그래. 그럴게.”


 연화가 입을 뗐다. 잡혀있지 않은 제 오른손을 들어 그의 턱을 조심스럽게 내렸다. 그대로 제 고개를 들어 지민에게 입을 맞췄다. 연화의 손목은 아직도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지민은 그대로 제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치약의 민트 향이 강하게 났다. 절망은 자꾸만 제 이름을 바꾸어 나타났다. 절망은 지민의 앞에서 입을 벌리고, 지민은 그것이 절망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민은 기꺼이 절망의 먹이가 되리라 다짐했다.


 지민의 방에서 나온 연화는 곧장 제 방 금고에 거래 장부를 집어넣었다. 급하게 연락을 받고 나오기 전 가장 먼저 챙겨나온 것이었다. 제가 굳이 경매장에 걸음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금고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것은 자신과 지민뿐이다. 지민이 금고를 알고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금고 안에는 거래 장부들, 그리고 제 권총이 들어있다. 권총은 대략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제가 주로 쓰던 것이었다. 이제는 다신 쓰지 않으려 금고에 넣어 두었지만.


 연화는 문득 제 앞에 타오르던 불길이 떠올랐다. 생경하고도 끔찍한 그 감각, 눈을 감아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두려움의 공포는 저의 크기를 넘어섰다. 연화, 연화. 그렇게 뇌까렸다. 돌아오는 음절은 없었다. 간혹 그 장면은 환상처럼 저를 덮친다. 생존자 없음. 다시 전한다. 전원 사망. 불길 사이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저를 죽였다. 저 자신은 그때 그렇게 죽었다. 그날, 저는 저를 잃었다.


 지민은 연화가 방에서 빠져나갈 때, 다시 잡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 충동을 참아내었다. 연화의 팔을 붙잡는 것은 제 계획에 없었다. 연화만 보면 제게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실제로도 저는 그랬다. 이상하게도 그 앞에만 서면 멍청해졌다. 숨을 쉬는 것을 잊을 만큼이나. 차라리 제가 그렇게 멍청했으면 했다. 떠나간 그녀의 뒷모습만 좇다가 문을 열고, 닫힌 그녀의 문을 가만 바라보고 있는 이유를 저는 모르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서 애절한 것이었다. 시선을 두어서는 안 되는 곳에 자꾸만 제 시선을 빼앗기는 것은, 그녀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지민은 마른 침을 한 번 삼켰다. 목이 탔다. 잔상처럼 떠오르는 환상에 더웠다. 열을 식힐 무언가가 필요했으나, 지민은 저를 타오르게 할 것밖에는 없었다. 한참이나 문고리를 잡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두려워서, 그뿐이고 싶었다.


 지민은 다시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이상하게도 쓸쓸했다. 속이 허했다. 침대 옆 탁상에 올려 둔 스마트폰의 화면이 밝아졌다. 전화가 걸려왔다. 무음이었으므로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제 숨소리만 겨우 들려올 뿐이었다. 구태여 지민은 핸드폰을 들어 수신인을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하지 않아도 알았다. 지민은 그대로 중심을 잃고 쓰러지듯 침대로 낙하했다. 실상은 제가 베개를 얼굴로 누르고 있음이 틀림없지만, 자신을 질식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베개가 제 얼굴을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민은 가만 숨을 참았다. 숨을 참으면 제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까지 울려대고 있었다. 제 안에서 구출해달라고 두드리는 것 마냥 쿵, 쿵, 쿵 하고. 안타깝지만 그것을 구출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고 지민은 생각했다. 밀폐된 공간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저의 또 다른 자아인 것 같기도 했다. 지민은 무력감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을 때처럼. 


 지민은 제 몸을 돌려 천장을 바라보고 누웠다. 전화는 끊어진 지 오래였으나, 곧 다시 울릴 것을 안다. 선택은 숙명이었으므로 지민은 자신이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때가 지금이라는 것도. 자신의 모든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드는 연화만 아니었더라도, 저 자신은 선택하지 않아도 되었을까? 모든 것은 결국 딜레마에 빠지고 만다. 다른 선택지는 제게 필연적으로 또 다른 악몽을 선사했을 것이다. 숨을 죽여도 마음은 편안하지 않았다. 지민은 눈을 감았다.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지민은 끝내 탁상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사실은 아주 오래전에 이미 선택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전화는 밤새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민은 받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연화 생각이 났다. 그래서 자지 못했다. 제 선택을 인정해 버리니, 더는 심장 박동이 제 몸을 울리지 않았다. 적막함이 찾아왔다. 저에게 예외 없이 내리는 어둠처럼. 그러는 중에도 연화가 궁금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은 사람. 그리고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사람. 저를 궁금해하지 말았으면 하고 바라다가도, 밤잠을 설치는 저처럼 저를 궁금해했으면. 그리고 저를 알아줬으면. 지민은 연화를 위해서라면 두려움의 불구덩이에 뛰어들 수 있다. 환상처럼 나타나는 기억 속의 그 불길이라고 하더라도. 실은 이 전부의 시초인 자신의 몸을 태워서라도. 저를 구원하는 것은 저가 아닐지라도….


 정교하게 짜인 각본에서 조명이 비추지 않는 틈에 숨어, 아무도 알지 못할 선택을 했다. 두려움과 함께 자신을 덮쳐 오는 감정의 이름을 정의하지 않겠다. 저 자신처럼 감정을 속박하지 않겠다. 욕심은 곧 저의 적이 될 것을 안다. 제 숨통을 끊어놓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선택의 결과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내 실존의 증거를 찾아주기만 한다면. 아니, 설령 그것이 불가능하대도. 절망의 먹잇감, 두려움의 화염. 그쯤이야.



2020.12.29

<사담>

날이 춥습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사진이 안 뜨는 것 같은데 이유를 모르겠습니다.ㅜㅜ

설정된 작가 이미지가 없어요


 
독자1
헉 소슬님ㅠㅠㅠㅠㅠㅠ왜 알람이 어제 안 뜨고 오늘 떴을까요ㅠㅠㅠㅠㅠ2년만에 오시다니 너무 반가워요ㅠㅠㅠㅠ엉엉ㅠㅠㅠㅠㅠ잘 읽을게요...!!💜💜
3년 전
소슬
독자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너무 늦게 돌아왔죠.. ㅎㅎㅜㅜ 오늘도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3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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