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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나비
07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고 말한다. 불행히도 그랬다. 저는 그 누군가였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을까, 의구심이 들어도 어쩔 수 없었다. 저는 정해진 일을 수행하기 위해 길러졌다. 바람이 불면 감히 날려가고 싶었다. 가벼운 존재의 무게에 맞게. 존재의 이유가 고작 이런 것이라니.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 종착지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머무를 수 있는 곳, 저를 안아줄 수 있는 곳. 마음 놓고 숨 쉴 수 있는 곳. 그런 곳 따위 제게 존재할 리 없었다. 그래서 그냥 살았다. 도망치지 않았다. 울지도 않았다. 불행에 순응하면 두려울 것도 없었다. 그날의 공기에 저항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제이가 처음으로 제 몸에 타투를 박았던 날을 떠올렸다. 열여섯, 혹은 열일곱. 나이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어느 날 지민이 제 손등 위에 나비 두 마리를 그려왔기 때문이다. 제이는 다른 이들에게 반강제적으로 끌려가 지민과 같은 자리에, 같은 모양의 나비를 새겨야 했다. 지민이 하지 않았더라면 저도 하지 않았을 거였다. 그러나 저와 지민은 구별할 수 없어야만 했다. 둘은 불행히도 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다짜고짜 상의도 없이 몸에 나비를 새긴 그에게 영문을 물었으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얼굴을 보아하니 앞으로도 이유를 알려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래서 제이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기로 했다. 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 제가 지민이 되어야 하는 것. 제이는 지민의 이름에서 따온 것뿐이라는 사실조차도. 지민이 열셋 무렵에 리안화에 속하게 되었을 때도, 저는 지민과 함께 있던 자리에 남아 다른 훈련을 받았다. 처음 시작한 훈련은 기억력, 그리고 이어 사고력. 제게 쏟아지는 문제에 지쳐 혼절한 기억도 있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다. 제 기억이 쉽게 사라질 리 없었다. 지민은 자주 볼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이 그립기도 했으나, 그럴 때면 거울을 봤다. 지민이라면 이렇게 웃었지, 이렇게 울었지. 거울을 보며 말을 건네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저는 지민이기도 했고, 제이이기도 했다. 거울에 부딪혀 돌아오는 말은 사실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이 저를 비참하게 만들었을지라도 그만두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저는 버틸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지민 대신 리안화에 발을 디뎠던 것은 스물둘 무렵이었다. 제 기억 속의 지민은 언제라도 홀연히 사라질 것만 같은 모습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러지 않았다. 제 앞에서 입을 굳게 다물었고, 전하지 않을 말이 있어 보였다. 저만이 알 수 있었다. 더는 흔들리지 않을 사람처럼 굳건하게 서 있었다. 저는 지민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자꾸만 지민이 멀어지는 것 같았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돌아올 때면 멍이 들다 못해 검게 물든 그의 손, 그의 상처, 대체 무엇이. 제이가 리안화에 가기 전에 가장 먼저 한 일은 탈색이었다. 지민의 머리칼이 금발이기 때문이었다. 지민은 항상 화려한 모습을 드러내고 다녔다. 임무에 나가서 돌아오는 표정, 무거움 그 모든 것은 화려함에 가려졌다. 페르소나, 일종의 가면인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화려한 지민에 제가 숨어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민은 오직 지민의 화려한 모습으로 존재하니, 그 모습을 따라하면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어코 저를 만들어 낸 그들도 제가 지민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면, 제이가 아니라 지민이라고 불렀다.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다.
“이름이 연화 맞지?”
“…어. 근데 제이.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뭔데.”
“아니야, 됐어. 최대한 조용히 있어. 마주치지 말고.”
지민이 하려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변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제가 지민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던 것은 열다섯부터였다.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생각했던 지민을 이제는 알 수 없었다. 저를 향한 지민의 시선이 반갑지 않았다. 그는 제가 리안화에 가는 것에 반대했다. 그렇지만 의견을 피력한다고 받아들여질 리는 없었다. 지금 당장 그들은 지민을 필요로 했고, 지민은 리안화에서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상황. 제가 지민을 대신할 시점이었다. 지민은 제가 그 이름을 입에 올렸을 때 현실을 회피하려 들었다. 그제야 알았다. 그를 변하게 한 이유를.
“지민아.”
그녀가 저에게 지민이라고 불렀다. 침을 한 번 삼켰다. 연화, 연화. 그 이름을 뇌까렸다. 지난 닷새 정도. 지민을 도청했다. 지민이 그녀를 부를 때, 그녀가 지민을 부를 때. 그의 어조를 알았다. 그리고 마침내 제게 모습을 드러낸 연화가 있었다. 전파를 통해 흘려들은 목소리, 사뭇 달랐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아, 제이는 연화를 만난 적이 있었다. 아주 짤막한 대화를 나눈 적도 있었다. 지민이 아닌, 제이의 이름으로. 문득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제 기억 속에 뚜렷한 얼굴이 코앞에 서 있었다. 갑작스레 닥쳐온 우연이 제이를 덮치고야 말았다. 조금은 달라졌지만, 알아볼 수 없을 리 없었다. 제이가 한 번쯤, 언젠가는 다시 보고 싶었던 그 얼굴이었다.
“지민아. 무슨 일 있어?”
“…아니야.”
고작 한 마디에 섞인 다정함이 달았다. 이상하게도 저는 그 다정함이 반가웠다. 제가 보고 싶어 하던 이에게서 나오는 말이어서 그랬는지, 정말로 다정함이 섞여 있었는지 제가 알 리 없었다. 제 앞으로 걸어온 그녀가 손을 뻗어 이마에 손을 짚었다. 가만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제 고개를 기울였다. 열은 없는데. 그렇게 말했다. 누군가의 걱정이 낯설었다. 그 감정과 비례하게 제 심장이 뛰었다. 그녀와 마주치지 말라던 지민의 말이 떠올랐다. 입안이 씁쓸했다. 지민이 제게서 숨기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 그랬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제 앞에 있는 이상 그럴 수 없었다. 제 욕심이 자꾸만 차올랐다. 제가 하지 못하는 만큼 지민이 얼마나 숱하게 흙바닥을 굴렀는지 안다. 제가 맞을 만큼을 대신해 맞았다는 사실도 안다. 그리고 유일하게 제가 제이라는 사실을 알아줄 것도 그라는 것을. 지민을 생각하면 욕심마저도 지독하게 잘못되었다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왜 이리 구는지, 알 턱이 없었다.
“안 되겠다. 지민아, 오늘은 들어가서 쉬어. 나는 괜찮으니까.”
고개를 끄덕거렸다. 반가움에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다정함을 보이는 대상. 그것은 제가 아니었다. 박지민, 그였다. 제가 지민이 아니어서 아쉬웠던 기억이 있었나? 그런 것은 없었다. 그런데 제가 지민이 아니라는 사실이 왜 이리도 크게 다가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 연화가 바라보고 있는 대상은 제이가 아니다. 박지민이다. 감히 다정함이 제 것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다정함의 주인은 지민이다. 단순히 흘리는 미소마저도 저를 향한 것이 아니다. 나는 지민이어야 하지만, 지민일 수 없다. 하지만 제이만으로 남을 수도 없다.
지민은 화를 냈다. 제가 멋대로 연화를 만나서 그런 것이었겠지만 그렇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저 그런 짐작일 뿐이었다. 지민을 아는 제이가 하는 그런 것. 그래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알아서, 그리고 앞으로 이런 일이 없을 수는 없다는 절망스러운 사실을 알아서. 알 수 있었다. 지민이 지키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이지, 제가 욕심내지 말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에게 희생된 우리가 이미 정해진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사실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지민이 무슨 결심을 할지, 숙명과도 같은 선택의 길에 오를 것이라는 것도.
“제이, 빨리 숨어.”
“그렇지만.”
“빨리. 시간 없어. 어서 들어가, 소리 내지 말고 있어.”
열 살 무렵부터 어쩌면 지금까지도. 지민이 제이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이었다. 지민이 급하게 옷장 문을 열었다. 걸린 옷 사이로 제이를 밀어 넣었다. 급하게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제이가 숨을 참았다. 들어오는 빛을 등진 지민의 얼굴 위로 그늘이 졌다. 지민이 옅은 미소를 띤 채로 검지를 자신의 입 앞에 가져다 놓았다. 쉿. 제이가 두려운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데도 지민은 두려운 표정 하나 없었다. 문이 열리기 전, 옷장 문이 먼저 닫혔다. 열린 문틈 새로 시선을 던졌다. 눈물이 비죽 새어나올 것만 같았다.
“제이, 나와.”
그 부름에 지민이 열린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제이는 옷장 안에서 숨을 참았다. 지민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금방이라도 혼절할 것만 같았지만 저 대신 맞고 있을 지민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었다. 지민은 제이를 대신해 바닥에서 구르고 있을 것이었다. 제이가 그들이 가져온 문제를 틀렸기 때문에. 제이는 밖에서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귀를 기울였다. 지민일까.
“제이. 이제 나와도 돼.”
“…박지민.”
지민이 옷장 문을 열었다. 제이가 갑작스레 밝아진 시야에 눈을 찌푸렸다. 웅크리고 있던 다리가 저렸으나 내색할 수 없었다. 저 대신 얼굴과 몸에 상처를 달고 돌아온 그의 앞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지민이 옷장 문을 닫을 때처럼 저를 보며 미소 지었다. 터진 입술 위로 피가 흘렀다. 얼굴에 피멍이 가득했다. 웃으며 접히는 눈이, 잔뜩 부어 있었다. 아직까지도 일어나지 못한 저를 향해 지민이 손을 내밀었다. 핏자국이 가득했는데도, 제가 옷장에서 나오려 그의 손을 힘껏 잡았는데도 그는 눈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저를 향해 웃는 얼굴, 거울에서 비치는 모습과는 참 달랐다.
“아프지. 그러게 내가 그러지 말라고.”
“난 괜찮아. 안 아파. 내가 하는 일이 이런 건데, 고작 이 정도로는 아프지도 않지.”
지민이 입술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손등으로 훔쳐냈다. 피가 얼굴 위로 번져 붉게 물들었는데도 그는 그것으로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의 고통을 아는 체하지 않았다. 지민이 저는 괜찮다고, 습관처럼 되뇌는데도. 그리고 정말로 그게 습관이 되어버린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지민은 제 고통에는 참으로 무심했다. 그 상처가 눈에 보이는데도 숨기기에 급급했다. 아무렇지 않다고 말해, 그런 줄로만 알았다. 지민은 그렇게 누군가를 위해 제 몸을 희생하는 데에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제가 리안화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연화를 만난 날로부터 4년이 지난 어느 새벽. 끝끝내 연결되지 않던 통화. 제이는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지민이 결정을 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새벽은 지민에게 아주 고통스러운 시간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또 지민은 저를 희생하려 들 것이다. 제이는 지민의 고통스러운 습관을 이제는 모르지 않았다.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이어진 연화와의 만남. 그리고 또 한 번. 제이는 이제 저를 지워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연화의 모든 음절은 지민을 향해 있었으니까. 4년 전 그날과 다름없이, 아니 비교할 수도 없이 더욱 다정한 모습이 지민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리고 연화는 지민과 제이를 구분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지민은 유난히도 사격에 약했다. 제 나름대로 이 바닥에서 구르고 굴렀다는 사람들 아래서 따라 굴렀고, 그대로 리안화에서 이름 좀 알렸다.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 같던 상대는 이제 제게 상대도 되지 않았다. 눈을 뜨면 훈련장에 나가서 손에 쥔 단도를 셀 수도 없이 휘둘렀고, 권총을 들었다. 수도 없이 자세를 교정했고 목표를 겨냥했는데도 사격 실력이 일정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제 성에 차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 과녁은 원형 과녁에만 머물러 있었다. 정 가운데를 뚫지 못하는 것이 싫었다. 열셋, 열넷 그 어딘가쯤의 일이었다. 사격장에 가면 꽤 낯이 익은 얼굴이 있었다. 매일 사격장에서 마주치는 얼굴이었다. 하나로 묶어 올린 머리칼이 길게 흔들거렸다. 지민은 꽤나 오래, 그녀의 사격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탄환은 언제나 과녁의 중간을 꿰뚫었다.
언제쯤 그녀만큼 사격을 잘할 수 있을까. 지민은 생각했다. 지민이 매일같이 그녀의 사격을 훔쳐보았다. 문득 그녀의 이름이 궁금했다. 누구도 그녀와 대화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지민이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는 제가 사격을 지켜본다는 사실도 모를 터였다. 지민은 잠에 들기 전 그녀의 사격 자세를 떠올렸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름은 알지 못해 떠오르지 못했다. 지민은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총을 들면 떠오르는 그녀의 모습을 흉내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알은 제 과녁의 정 중앙을 자꾸만 빗나갔다. 지민이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을 때였다.
“숨을 참아야지. 조준할 때는.”
“……아.”
“이렇게. 알겠지, 박지민?”
제 머릿속에서 부유하던 그녀였다. 지민은 제가 이제 환상이라도 보는 줄로만 알았다. 제 옆으로 다가온 그녀가 그대로 총을 들어 저의 과녁에 겨눴다. 그녀의 사격을 이렇게나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가 저의 과녁의 중앙을 뚫었다. 뚫린 것은 저의 과녁일 뿐인데도 지민의 가슴이 얼얼했다. 알려주지도 않은 저의 이름을 부르고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서 버린 그녀가 시야에 걸렸다. 지민은 그 장면을 잊을 수 없었다. 제 이름은 알고 있으면서 왜 이름은 알려주지 않는지. 제 꿈에서조차 그녀는 이름 없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 것인지. 지민이 가만 입을 다물고 사격장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뒷모습만 눈으로 좇았다. 지민은 꿈이라도 꾸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지나 맞이한 열다섯의 겨울이었다. 제이는 자꾸만 지민의 발목을 잡고 싶어 했다. 이번 일은 네가 다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민은 별로 개의치 않아 했다. 제 목숨의 무게는 원래 그 정도이니까. 그들이 지민을 봉고차에 태웠다. 제이는 건물에 남아 건물 내부도와 감시카메라, 그리고 동선을 확인해야 했다. 동이 트기 전의 새벽이었다. 하늘이 검었다. 그들의 대화 사이로 리안화라는 단어가 흘러나왔다. 지민이 고개를 돌려 그들의 얼굴을 보았으나, 그들의 대화는 끊임이 없었다. 이내 지민은 그들의 대화를 알아듣는 것을 포기했다. 창밖으로는 주황빛 가로등이 스쳐 지나갔다. 지민은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여전히 사격장에 있을까. 아직도 지민은 그녀의 이름을 알 수 없었다.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다.
“성질 급한 놈들. 벌써 상황 끝난 모양이다. 박지민, 너는 여기서 살아나가는 새끼 하나라도 있나 보고 있어. 쥐새끼 한 마리도 살아서는 못 빠져나가게 해.”
지민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들이 지민을 차에 홀로 남겨두고 떠났다. 차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굉음과 함께 건물 위로 불길이 치솟았다. 순식간에 겨울의 한기가 불꽃에 사그라들었다. 더운 공기가 피부를 덮쳤다. 숨이 막혀왔다. 지민이 손등을 들어 이마 위로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차 안에 있던 수건에 차가운 생수를 들이부었다. 수건이 젖어 들어갔다. 건물이 타오르고 있었다. 저 안에 사람이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오늘 지민이 직접 처리해야 할 사람일 수도 있었다. 불길이 올라 하늘로 솟는 모습이 뇌리에 박혔다. 지민은 그 불을 잊을 수 없었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불꽃이 아른거렸다. 눈을 감지 않았다. 눈이 매웠다. 지민은 한참이나 그곳에 서 있었다.
지민이 건물 입구에 가까워졌을 시점이었다. 작은 말소리가 들렸다. 울음이 잔뜩 섞여 있었다. 애타는 부름인 것 같기도 했다. 지민은 홀린 것처럼 건물 안으로 들어서려고 했다. 건물 안쪽에서 다시 한번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귀가 얼얼하다 못해 아렸다. 그 후로는 정적이 찾아왔다. 지민은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건물 안에 사람 형체가 보였다. 시체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상하게 지민은 그 형체를 확인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피부로 느껴지는 열기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지민은 숨을 참았다. 손에 들린 물에 젖은 수건으로 제 코와 입을 가렸다. 그 순간이었다. 제 꿈에 자주 등장하는. 눈을 감으면 자꾸만 아른거리는 순간이.
“생존자 없음. 다시 전한다. 전원 사망.”
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들렸다. 지민은 무너져가는 건물 틈새로 사람을 보았다. 시체가 아니었다. 아, 너무나도 익숙한 인영이라 죽고만 싶었다. 하나로 묶어 길게 흘러내리는 머리칼. 제게 사격 자세를 보이던. 밤이면 눈을 감고 허공에 손끝으로 따라 그리던 얼굴. 저의 이름을 알면서도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 그녀. 이 순간 지민은 그녀의 이름이 너무나도 알고 싶었다.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지민이 그녀를 발견하면, 그들이 그녀를 발견하면 그녀는 죽고 말 것이다.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그녀의 두 눈이 허공을 배회했다. 지민에게는 닿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녀의 무릎 위에 한 여자가 얼굴을 묻고 있었다. 팔이 죽 늘어진 채로.
그녀는 자꾸만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뜨인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지민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이름을 알았더라면 속으로라도 되뇌었을 텐데. 그럴 수조차 없었다. 지민은 무작정 무너져가는 건물에서 떨어진 구조물을 몸으로 헤치고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가까워질수록 몸이 뜨거워졌다. 제발 눈길이라도 부딪히기를 바랐다. 그녀를 구하지 못한다면, 저는. 그리고 그 순간이 지민에게는 영원이 되었다. 잊을 수 없는, 불길이었다.
“이 새끼야, 빨리 나와! 금방 무너진다고!”
지민을 향한 외침이 미약하게 들렸다. 지민은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지금 보이는 눈물 자국 가득한 그녀의 얼굴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저는 죽더라도 그녀는 살아줬으면 했다. 부디 그녀가 고개를 돌려 저를 보았으면 했다. 제가 헤치고 들어온 길을 따라 도망치기를 바랐다. 그녀를 놓친 대가로 제게 돌아올 어떠한 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제발, 제발. 지민은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입을 열어도 어떠한 소리가 빠져나오지 않았다. 그녀에게 가까워졌을 무렵 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수건을 벌어진 틈새로 밀어 넣었다.
“뭐하는 거야, 뒤지려고 나왔어?”
그와 동시에 바로 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지민은 이미 몸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정신이 흐려질 것만 같았다. 그녀를 구해야만 하는데, 저 안에 있다는 걸 아는데. 물에 적신 저의 수건이 그녀에게 닿았을까. 제발, 그녀가 살아주었으면. 지민은 허리가 채여 억지로 바깥으로 끌려나가고 있었다. 그녀와 멀어질수록 죽고 싶었다. 그 안에 그녀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가까워지는 출구처럼 지민의 마음이 절망에 가까워졌다. 까무룩 정신을 잃을 것 같았지만 지민은 그럴 수 없었다. 감히 제 정신을 놓을 수 없었다. 멀어질수록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에게 닿고 싶었다. 그녀에게 제 숨을 주고만 싶었다.
돌아온 지민은 저에게 말을 걸어대는 제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민의 세계에는 오직 그녀의 말소리만이 가득했다. 지민이 눈을 감았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그녀가 살아있을까?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었다. 그녀가 살아있다면 그들은 그녀를 죽일 것이었다. 그녀가 살아있었으면 했다. 눈을 감아 그녀의 얼굴을 그렸다.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녀의 얼굴이 언젠가 흐릿해져 버리면 어떡하지. 제가 그녀를 저버렸다. 지민은 죄책감에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숨을 헐떡거렸다. 어쩌면 지민은 그녀의 이름을 평생토록 알지 못한 채로 울부짖어야 할지도 몰랐다.
지민은 사격장에 발길을 끊지 않았다. 언제든 그곳에 있었다. 언젠가는 올 수도 있을 그녀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지민은 그녀의 인영조차도 볼 수 없었다. 그녀의 이름을 몰랐기 때문에 물어볼 수조차도 없었다. 지민은 그저 그녀가 있던 자리에 서서 조준을 했다. 어느 날은 떠오르는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도 흐릿했고, 어느 날은 그녀의 향기까지도 뚜렷했다. 그리고 열일곱, 떠오르던 그녀의 모습이 생생하던 어느 겨울날. 지민은 제 손등에 나비 두 마리를 새겼다. 그녀의 손에 갇힌 권총에 새겨져 있던 나비 두 마리. 기억이 흐릿해지기 전에 잡아두고 싶었다. 저도 그녀의 손아귀에 갇히고 싶었다. 그날, 지민의 탄환은 과녁의 정중앙을 뚫었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도 지민은 그녀의 머리카락조차 볼 수 없었다. 지민은 매일같이 그녀의 꿈을 꿨다. 이제는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지민은 허공에 제 몸을 던져버리고만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지민은 리안화에서의 호출에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손에 닿는 문고리가 차가웠다. 제 마음도 그랬다. 문고리가 돌아갔다. 문이 열렸다. 지민이 걸음을 옮겼다. 들어서자마자 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상체를 들어 올렸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지민이 바닥에 떨어뜨려 놓았던 제 시선을 위로 옮겼다. 지민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이제부터 네가 연화로 모실 사람이야. 연화의 수족이 되어 살아.”
“반가워요, 연화예요.”
“……박지민입니다.”
지민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만 눈을 감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제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녀가 맞았다. 밤마다 그리던 얼굴, 죄책감에 눈물짓게 만들던 목소리. 그녀가 악수하려는 듯 제게로 손을 뻗었다. 지민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내민 손등을 화상 자국이 덮고 있었다. 지민은 그날의 불길을 다시 떠올렸다. 검게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로 비치던 하얀 얼굴. 저를 잠 못 들게 하던. 차갑게 내려앉았던 지민의 심장이 다시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살아주어서 고마웠다. 떠오르는 감정과는 반대로 두려움을 느꼈다. 아아, 결국. 그녀는 연화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하지만 지민은 침을 꾹 삼켜내고는 그 손을 맞잡았다. 전율이 이는 것만 같았다. 지민은 다짐할 수밖에 없었다. 평생 그녀의 수족이 되어 살겠다고. 제 목숨을 바쳐, 그녀를 지키겠다고. 두려움의 화염 따위, 두 번은 좌절하지 않겠다고.
무언가에 순응하는 삶에 저항할 것이다. 두려움과 절망 따위가 저를 좀먹더라도, 숨이 모자라더라도. 손에 잡히지 않을 것을 손에 쥐어버린 자는 그래야만 했다. 그것이 덮쳐 오는 숙명이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들어 발버둥을 쳐야만 한대도 그렇게 할 것이다. 제게 다시 찾아온 기회, 두 번은 없을. 다시는 손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제 손이 뜨거워 타버린대도. 재로 남아야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저의 몫이다. 모든 것을 바쳐 구할 수만 있다면. 저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2021.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