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아 - 유리
반복재생 부탁드립니다.
불나비
01
삶은 끝없는 절망과의 필연적인 투쟁이다. 절망은 언제나 그랬듯 나를 시험한다. 수렁은 또 다른 수렁을 동반한다. 이 또한 인간의 필연적인 존재 법칙이다. 내게 있어 가장 두려운 적의 이름은 내면의 절망이다. 그것은 자주 제 이름을 바꾸어 감히 나와 직면한다. 때로는 고뇌, 어떤 날은 착각. 그리고 아주 사사로운 감정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나는 그런 적에 겁 없이 달려들기도 하고, 무참히 나가떨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자꾸만 제 모습을 바꾸는 절망에 나는 근원지조차 찾지 못한다. 언젠가는 나를 집어삼킬 것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망은 언제나 굶주려 있다. 절망은 또 다른 절망으로 배를 불린다. 마지막 만찬은 바로 나다. 나는 절망과 함께 나뒹굴며 필연적인 상처를 얻는다. 필연적인 상처의 이름은 환상통. 절망과 나로 배를 채운 절망 속에서 나는 잠식되어 간다. 이제 나의 이름은, 절망이다.
연화는 전신거울과 겨우 한 뼘 거리를 두고 섰다. 손에 땀이 맺혀 자꾸만 귀걸이의 침이 미끄러졌다. 연신 침으로 찔러댄 탓에 오른쪽 귓불이 붉었다. 귓불 중간까지만 파고 들어간 침이 반복적으로 상처를 건드렸다. 다시 귀걸이를 빼 들었다. 반동에 귀걸이의 둥근 장식이 공중에서 흔들거렸다. 그와 동시에 어깨 언저리 너머로 문 앞에 서 있던 지민의 실루엣이 거울에 비쳤다. 거울 속에서 흔들거리는 귀걸이 장식에서 지민으로 초점이 맞춰졌다. 잔상처럼 아른거리던 그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 찰나에 손끝에서 미끄러진 귀걸이가 바닥을 향해 추락했다. 허리를 굽힌 지민이 바닥에서 그것을 주워들었다.
“언제까지 준비만 하려고?”
“곧. 줘, 빨리 할게.”
이번에는 거울을 등지고 돌아섰다. 지민이 전등을 가리고 선 탓에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검은색의 얇은 선글라스 사이로 그의 눈이 비쳤다. 재촉에 불만을 담은 것은 아니었는지 가늘게 뜬 그의 눈 아래로 애교살이 두툼하게 차오른 채였다. 가르마를 탄 왼쪽 머리칼은 왁스를 이용해 귀 뒤로 깔끔하게 넘겨져 있었다. 반대쪽은 결을 살려 내린 채라, 이마와 짙은 눈썹이 훤히 드러났다. 분홍색 머리칼과 짙은 눈썹이 대조적이었다. 윤기가 흐르는 게 결도 좋아 보였다. 평소대로면 잦은 염색으로 약간은 까슬한 그의 분홍색 앞머리가 짙은 눈썹을 가리고 있었을 테지만.
그대로 왼손을 들어 손끝으로 흘러내리는 지민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자연스레 머리칼을 타고 흐르는 손끝에 지민의 고개도 따라 낮아졌다. 그대로 그에게 손을 들이밀었다.
“줘야 빨리 끼우지.”
“됐어, 기다려봐요.”
지민이 왼손으로 허리께까지 길게 늘어진 연화의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붉은 귓불이 드러났다. 그가 엄지와 검지로 달아오른 살덩이를 문질렀다. 찬기가 흐르는 순간,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이 몸을 타고 흘렀다. 그가 반대쪽 손으로 자신의 선글라스를 조금 더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러자 그의 맨눈이 그대로 드러났다. 귓불에 고정된 시선이 간지러움을 가증시켰다. 그의 입술이 동그랗게 말리더니, 찬기를 식히려는 듯 그가 바람을 불어대었다.
“뜨겁다.”
“괜찮으니까 그만하고, 빨리. 늦겠다.”
말이 마치자마자 그의 얼굴이 한층 더 가까워졌다. 오랜 시간 준비한 것은 저였으나, 일부러 그를 재촉했다. 그의 손에서 귀걸이가 달랑거렸다. 그리고 침이 상처를 건드리는 순간, 따끔함에 눈을 찌푸렸다. 그 찰나에도 그는 여전히 바람을 불어 넣고 있었다.
“됐다.”
혼자 수십 분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 무색하게 오른쪽 귀에서 귀걸이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괜스레 고개를 흔들어 보이니, 귀걸이도 따라 흔들렸다. 여태껏 제 앞에 서서 얼굴을 내려다보던 지민의 옷자락을 어깨로 스치며 책장 앞으로 걸어갔다. 거대한 책장 앞에는 넓적한 원목 책상이 있었다. 연화가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기도 했다. 걸을 때마다 길게 늘어진 새하얀 치맛자락이 발목께를 간질였다. 지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움직임을 따라갔다. 연화가 의자를 밀어내고 책상 아래로 손을 뻗어 오른쪽 서랍을 열었다.
“지민아.”
“네.”
“경호팀에 연락해. 곧 나간다고.”
지민이 인이어에 대고 무어라 지시를 내렸다. 여전히 시선은 연화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열린 서랍 사이로 권총과 소형 칼 여럿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닥에 깔린 카페트가 지민의 구두 소리를 집어삼켰다. 어느새 소리도 없이 다가온 지민이 책상 너머에 서 있었다. 연화는 습관처럼 칼을 집어 들면서도 권총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지민은 부러 고개를 돌렸으나, 전신거울이 그대로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좀처럼 옮기지 못하는 연화의 시선처럼.
연화가 긴 치맛자락을 허벅지까지 끌어 올렸다. 오른 허벅지를 두르고 있는 가터벨트에 칼집을 단단히 고정했다.
“급할 때 칼은 언제 꺼내려고, 항상.”
“괜찮아. 내 옆에 지민이, 네가 있는 거잖아? 난 느긋하게 꺼내도 돼.”
나무라는 말투에도 한결같은 억양으로 돌아온 대답에 지민은 가만 입을 다물었다.
“머리 색이 많이 빠졌네? 얼마 전까지는 형광색이었잖아. 뭐, 이것도 나름대로 예쁘긴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끌어 올렸던 치마를 다시 잡아 내렸다. 적절히 도톰한 원단이 아코디언처럼 접혀있는 제 모양을 되찾았다. 지민은 어쩐 일로 검은 정장 차림이었다. 셔츠까지 검었으나, 셔츠에는 빛을 반사하고 있는 작은 보석이 수많은 별이 밤하늘을 수놓듯 놓여 있었다. 각이 잡히지 않는 셔츠의 재질 탓에 고작 잠그지 않은 단추 하나, 그 사이로 흰 목을 다 드러내고 있었다. 목의 빈자리를 나비 펜던트가 걸린 목걸이가 채우고 있었다. 채워진 벨트 아래로 보이는 바지와 구두 역시 모두 검었다. 색을 가진 것은 오직 그의 머리뿐이었다. 얼마 전까지는 조금 더 화려했던, 지금은 아주 약간 물이 빠진 분홍색 머리칼, 다시 맞게 쓴 선글라스.
“지민아, 너 되게 튄다.”
“그래서, 싫어요?”
“아니. 그래서 마음에 든다고.”
지민의 취향을 감히 단순히 묘사하자면, 화려했다. 사람 자체가 가진 화려함은 물론이었고, 차림새는 더욱 그랬다. 반지도 하나만 착용하는 법이 없었다. 팔찌도, 목걸이도, 피어싱도. 하지만 한 번도 그것이 과하다 느낀 적은 없었다. 언제나 제 것을 모두 소화해내니. 그것은 연화도 마찬가지였다. 제 몸에 무언가 치장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같았다. 지민을 다시 훑어본 연화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레이스 자수가 돋보이는 흰 장갑을 집어 들었다. 왼손부터 조심히 끼워 넣었다. 오늘 입은 단정한 투피스에 어울릴 만한 것으로 일부러 장만한 것이었다. 손목 위로 올라오는 길이감 있는 장갑이었으므로 손목을 살짝 덮는 자켓을 위로 끌어올려야만 했다.
도움을 청하려 부르기도 전에 지민은 이미 다가와 자켓 소매를 걷어 올리고 있었다. 지민의 왼쪽 손등에서 팔목으로 이어지는 피부 위에는 파란 나비 두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언제 새긴 것인지는 모른다. 흰 손등에 잘 어울리는 타투라고 생각해왔다. 제 모습처럼 우아했다. 연화가 지민의 손등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지민은 소매를 끌어올리는 일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소매를 끌어 올리는 순간, 손등 끝자락부터 팔뚝까지 길게 이어진 화상 자국이 드러났다. 지민은 눈을 살짝 감았다. 길게 드러난 흉터 위로, 흰 장갑을 씌웠다.
“오늘 아주 대사를 치르나 봐? 일꾼들 많이 나가네. 연화 옆에 아가도 오랜만이야?”
로비로 나가자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옥경과 마주쳤다. 연화의 옆에 선 지민을 보곤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지민이 짧게 묵례했다. 옥경은 대략 십 년이 넘도록 자신을 마흔둘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여자였다. 그것을 문제 삼을 이는 당연하게도 없을뿐더러, 십 년 전과 다른 것이라곤 제 몸을 덮고 있는 옷자락뿐이었다. 전보다 운동을 일상으로 삼는가 싶더니 근래에는 섯다 판에서 며칠은 꼬박 지새우고 오는 것이었다. 가끔 돈을 잃고 분노에 차오른 그녀를 데리고 오는 것도 연화의 몫이 될 때도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연화의 곁을 지키는 지민의 몫이었지만.
한때 그녀의 슬하에 딸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예양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딸이 있었던 것은 맞지만, 예양이 친딸인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입양 절차를 거친 적도 없었으므로 예양이 옥경의 친딸이라는 명제는 애초에 거짓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부정하는 이 없었다.
“네. 오늘 작품 경매가 있어서요. 예양은요?”
“뤠이양은 검수 갔어. 미리.”
그렇게 말하며 옥경은 코로 무언가를 빨아들이는 제스쳐를 취했다. 얼마 뒤 있을 마약 거래를 의미하는 듯했다. 어차피 큰 거래가 성사될 때는 연화가 동행해야 했으므로, 자신도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이번에는 며칠이나 화투패를 들고 있었던 것인지 검게 번진 옥경의 눈가를 보며 으레 형식상 던진 질문이었다.
“화투는 적당히. 아시죠? 다녀올게요. 가자, 지민아.”
“그래그래. 잔소리는 가만 보면 연화 네가 제일이다.”
제 옆에 선 지민 뒤로 검은 정장을 입은 남성 여섯 명이 기차처럼 따라붙었다. 옥경의 옆을 지날 때는 담배 냄새가 역하게 코를 찔렀다. 뤠이양은 가만 보면 잔소리를 참 안 해. 옥경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가 공중에서 흩어졌다. 이미 19층으로 도착해있던 엘리베이터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 경호팀이 연화와 지민을 둘러싸고 섰다. 유일하게 18층과 19층을 오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로, 출입 가능한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중간에 설 일은 만무했다. 1층까지 무사히 도착한 엘리베이터는 맑은 도착음을 울리며 문을 열었다.
경호가 붙지 않는 때에는 지민이 운전석에, 연화가 조수석에 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항상 상석을 두고 연화는 지민의 옆자리를 고수했다. 지민이 제 아랫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어찌 되었건, 경호원이 먼저 달려가 정차된 검은 세단의 문을 열었다. 연화가 올라타고, 그 뒤를 따라 지민이 탔다. 문이 닫혔다. 지민이 연화의 어깨 너머로 손을 뻗었다. 너무 가까웠던 탓에 얼굴 위로 그의 숨결이 짧게 스쳐 지나갔다. 지민의 왼손에는 안전벨트가 쥐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바로 채우지 않았다. 아직 연화가 안전벨트를 하지 않았으므로, 차 역시도 출발하지 않았다. 묘한 긴장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의 눈동자를 가만 바라보고 있으면, 그 역시도 제 두 눈을 번갈아 보았다. 볼에 그의 입술이 살짝 스치고, 안전벨트가 채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지민 역시 안전벨트를 하고서야 차가 출발했다.
“귀엽기는.”
지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리안화 갤러리’였다. 연화가 대표로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때마침 오늘, 미술품 경매가 이루어질 것이다. 경매는 지하 2층에서 진행된다. 오직 경매장만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었으므로, 최소한의 벽만 남겨 훤히 트인 공간으로 만들었다. 사각지대를 최소화했다. 계단을 내려가면 경매장으로 향하는 대문이 있으며, 경매가 열리는 날에는 경호원이 자리를 지킨다. 대문과 경매장은 연화가 대표 자리를 위임받은 후, 가장 중요시하는 곳이었다. 거대한 대문을 둘러싸는 구조물은 돌을 조각한 것이며, 이는 주로 연꽃의 모양을 하고 있다. 대문은 흰색으로, 이 역시 유사하게 조각되어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장 밝은 조명은 바닥이다. 바닥은 전면이 유리로 제작되어 있으며, 유리 아래로는 연둣빛을 띤 물이 흐른다. 물 위로는 연꽃과 같은 수상 식물들이 떠다니나, 이는 생화가 아니다. 연꽃잎 사이로는 숨은 비단잉어 몇 마리가 조각되어 있기도 하다. 백색의 메인 샹들리에는 소등되어 있다. 경매가 없는 날이면 바닥 조명과 주황빛을 띠는 샹들리에만 점화한다. 그러나 경매가 진행될 예정이었으므로, 바닥 조명은 제외되었으며 백색의 메인 샹들리에까지 점화되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연화 대표님. 이제부터 리안화 갤러리의 경매를 전담하게 된 한예진 경매사입니다.”
갤러리에 들어서자 보이는 것은 단정한 정장 차림의 경매사였다. 그녀는 양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지민은 연화가 오른손잡이인 것을 고려해 항상 왼쪽에 서 있었다.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연화보다 한 발짝 앞선 상태였다. 왼팔을 들어 지민의 팔을 잡았다. 그러자 그가 자연스럽게 뒤로 한 발짝 옮겨, 연화와 같은 선상에 섰다.
“반가워요. 경매는, 처음?”
“아닙니다. 경매 회사에서 경매사로 짧게 일했습니다.”
일순간 장내에는 묘한 정적이 맴돌았다. 따라붙은 경호원이 순식간에 연화의 앞을 제외한 세 면을 둘러쌌다. 연화가 입을 떼지 않으면 몇 시간이고 이어질 정적이었다. 경호팀이 긴장을 곤두세우고 있던 그 찰나에 지민이 오른팔로 연화의 허리를 가볍게 감쌌다. 왼손으로는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살짝 끌어 내렸다.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럼, 어디가 먼저죠?”
“네?”
정적을 깬 것은 어김없이 연화였다. 물음을 던짐과 동시에 지민이 더 강한 힘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아끌었다. 경매사는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반문했다. 연화의 작은 웃음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지민이 오른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아직 잘 모르시나? 리안화랑 경매 회사, 둘 중 어디에 먼저 있었냐구요.”
“아, 죄송합니다. 열여덟 살부터 리안화 소속으로, 임무 지시를 받고 작년 경매 회사에서 8개월 근무했습니다.”
“소개 고마워요. 내가 아직 서류를 못 봐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여자의 긴 대답에 흐르던 긴장감이 느슨해졌다. 가죠. 짤막한 연화의 말에 모두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경매 시작은 오후 6시. 현재 시각은 5시 30분으로, 30분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연화는 경매장에 참석해서 갤러리 대표로서의 인사를 전하고, 정리된 장부를 챙기기만 하면 되었다.
“지민아.”
“네.”
“우리 끝나고 저녁 맛있는 거 먹을까?”
늦은 저녁이겠네. 여전히 허리에 팔을 감은 채로 걷던 지민이 말했다. 지민의 말이 맞았다. 정해진 일이 마무리되려면 족히 8시까지는 갤러리에 있어야 했다. 그래서 싫어? 연화가 말했다. 지민이 그녀의 얼굴을 살짝 내려다보았다. 아니, 좋아.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통역사 리오슈입니다.”
“오랜만이네요. 오늘도 맡아줘서 고마워요.”
경매장은 사전에 작성된 입찰 가능 명단에 한해서만 입장 가능하다. 경매에 참여하는 인물에는 경매 대리자도 포함되어 있다. 경매에 이용되는 미술품은 측정 가격의 대략 3배 가격부터 호가한다. 낙찰가의 80%는 리안화가 갖는다. 그리고 20%는 다시 낙찰자의 몫이다. 즉, 청구서에는 낙찰가의 전부를 작성하고 그중 20%는 다시 낙찰자에게 돌아간다. 그때에는 낙찰자에게 나머지 금액을 한꺼번에 송금하거나 현금 거래를 하지 않는다. 여러 은행의, 여러 차명 계좌에 소액씩 입금한다. 간단히 말해, 돈세탁을 하는 것이다. 낙찰자는 미술품을 가지고 있다가 다시 되팔아 깨끗한 돈을 얻는다.
“뭐 먹고 싶은데.”
“대표님, 입장 부탁드려요.”
“초밥 먹자.”
입장 순서가 됨과 동시에 지민이 착용하고 있던 선글라스를 빼서 셔츠에 걸었다. 셔츠가 죽 늘어져 흰 피부가 드러났다. 연화가 드러난 피부를 장갑 낀 손으로 훑었다. 너무 드러내는 거 아냐? 작게 말하며 경매장으로 들어섰다. 구두 소리가 유난히도 컸다. 지민이 왼쪽에서 걸어가고, 나머지 경호원이 사방에서 연화를 경호했다. 경매사가 마이크 앞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안녕하십니까. 리안화 갤러리의 대표 연화입니다. 바쁘신 중에도 저희 리안화 갤러리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제가 아끼는 작품이 많이 출품되었습니다. 부디 작품을 살처럼, 피처럼 아껴주시길 바랍니다.”
연화가 말을 마치자 잠깐의 박수가 이어졌다. 짧게 묵례를 하곤 정해진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니, 길게 늘어진 치마가 바닥에 끌렸다. 경매사가 단상 위에 올랐다. 큰 스크린에서는 작품과 함께 작가의 약력이 소개되어 있었다. 지민과 연화도 말을 잃고 스크린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경매사 한예진입니다. 1번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절망’으로, 이경복 작가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이경복 작가의 유년기부터 노년기를 관통하고 있는 세계라 일컬어집니다. 죽음 이전 경험한 환각이 녹아 들어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1985년도의 작품이며, 사망 두 달 전에 그려진 유작입니다.”
경매사의 옆에서 라오슈가 중국어로 동시 통역을 진행 중이었다. 화면에는 추정 금액이 띄워졌다. 지민이 제 검지에 끼워진 반지를 돌리고 있었다. 연화가 그런 지민의 손 위로 제 손을 덮어 올렸다. 그의 손장난이 멈추었다. 손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연화의 엄지를 지민이 제 오른손을 이용해 조심스럽게 잡았다. 마치 갓난아이가 제 손안에 들어온 손가락을 잡듯. 모로반사 마냥.
“25억 원부터 3억 원씩 호가합니다.”
첫 경매가 시작되었다. 지민은 습관처럼 연화의 엄지를 손가락으로 살살 쓰다듬었으나, 장갑의 표면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연화 역시도 그의 손길을 느낄 수 없었음은 마찬가지였다. 경매의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마른 침을 삼켰다. 목적이 동일한 이들이 모여 만들어 내는 일종의 연극이라고 보아도 무방했고, 그에 당연히 팔리지 않을 작품은 없었다. 심지어는 빈 캔버스를 출품해도 고가에 낙찰될 것이라는 사실은 명백했다. 그럼에도 연화는 종종 경매에서 긴장을 하곤 했다. 여태껏 많은 자리를 거쳤고, 지금의 갤러리 대표라는 자리 역시도 스쳐 지나갈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지민아, 너도 그냥 나를 스쳐 지나갈래. 연화는 말을 내뱉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 말도 그저 연화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그 문장을 제가 완결지어 뱉어 버리면, 그것이 제게 영영 묶여 있을 것만 같았다. 시끄러운 경매장, 내뱉어도 들을 수 있을 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128번 28억 원, 53번 31억 원, 34억 원. 37억 원. 숫자는 끊임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모니터에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숫자도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대상이 자꾸만 바뀌어 가고 있었다. 마치 제 자리처럼. 연화는 가만 지민의 옆태를 보고만 있었다. 지민은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으나, 그 시선을 느끼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연화에게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래서 지민을 더 마음껏 볼 수 있었다. 제가 앉아 있는 이 자리, 지민이 앉아 있는 자리. 언젠가는 누군가가 대체하지 않을까.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외치지 않으면, 바람처럼 나는 날려가지 않을까.
문득, 허벅지에 달린 칼의 무게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매일 제 몸처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무게를 실감하는 순간이 있다. 간혹 간지럽기도 했고, 제 몸을 처지게 만들기도 했다. 제가 주로 쓰던 무기는 칼이 아니었다. 다만, 이제는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55억 원, 더 없습니까? 55억 원, 55억 원. 낙찰되었습니다.”
그 순간, 경매사가 경매대에 낙찰봉을 두드렸다. 찰나의 소리가 연화의 상념을 함께 깨었다. 연화가 꿈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듯, 몸을 흠칫 떨었다. 동시에 지민이 연화의 어깨를 잡았다.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 경매가 진행되고 있었다. 지민의 시선이 얼굴로 와닿고 있었지만, 애써 시선을 경매 참여자에게로 돌렸다. 쉴 새 없이 제 손에 들린 번호판을 들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가격이 올라가고 있었다. 지민은 으레 그랬듯, 길게 흘러내리는 연화의 머리칼을 정리하며 조심스럽게 귀 뒤로 넘겼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선을 돌렸다. 모르는 체했다.
“이번 작품은 30억 원부터 5억 원씩 호가합니다.”
경매는 빈틈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장내를 울리는 경매사의 목소리, 통역사의 목소리. 그런데 연화는 왜 자꾸만 제가 공허함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름의 무게를 실감했는지, 자리의 무게를 실감했는지. 지민은 그것을 알고 있는지까지. 아무래도 오늘은 밀린 잠이나 취해야 될 성싶었다. 저녁을 함께 먹자고 말했던 것은 미안하지만, 그랬다. 자꾸만 제 화상 흉터가 아직까지도 불에 타고 있는 것 마냥 고통스러웠다. 두려웠다.
“오늘은 바로 방으로 올라가는 게 좋겠다. 식사는 가져다 달라고 할게.”
옆에서 지민이 귀에 속삭였다. 덕분에 경매장에서 탈출한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지민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에는 제가 비치고 있었다. 그에게 제 속을 다 들킨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자신은 알 턱이 없었다. 알아낼 어떠한 방도도 알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에서 비치는 감정, 그 외에는 차마 알 수 없었다. 오늘은 넘긴 분홍색 머리칼, 저를 보는 눈동자, 왼손 위의 나비 타투, 목에 걸린 나비 펜던트 목걸이, 반지까지. 연화는 제 눈에 들어찬 지민의 모습에 마음을 달랬다. 연화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지민이 희미하게 웃었다.
65억원, 65억원. 마지막입니다. 65억 원. 낙찰봉을 내리쳤다. 낙찰되었습니다. 경매사의 말과 동시에 모든 작품 경매가 종료되었다. 낙찰에 실패한 사람들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안내를 받으며 경매장을 나섰다.
“오늘 열린 경매에 대해 잠시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지막 작품을 65억 원에 낙찰하셨습니다. 맞으십니까?”
“네, 맞지요.”
“청구서에는 65억 원이 청구될 겁니다. 나머지 13억은 차명 계좌로 송금합니다. 변동 사항 있으십니까?”
연화의 말에 앞에 있던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작품, 파실 겁니까?”
“뭐, 아마도 그렇지 않겠나요?”
연화는 예상했던 답변임에도 불구하고 입안의 제 여린 살을 씹었다. 그 순간 지민이 무전을 받았다. 제 한 손을 귓가로 가져다 댔다. 인이어에서는 빠른 속도로 전달 사항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제 옆에 있는 연화를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연화에게 신변의 문제가 생기거나 하는 돌발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지민은 연화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연화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남자가 그대로 등을 돌려 경매장을 빠져나갔다. 경매장이 순식간에 한산해졌다. 그러나 소음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처럼 웅웅거렸다. 제 작품들을 아껴 달라고 부탁했건만. 하지만 연화도 달리 어찌할 방도가 없으며, 돈이 순환되는 체계가 그러했기에 제가 잠시나마 정을 붙였던 작품을 잊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돌아올 것을 알고 있다. 돌고 돌아, 제 자리를 찾을 것을. 제 처지가 그러하듯.
“연화, 급한 호출인 것 같습니다. 장옥경.”
“이유는?”
“그건 말이 없습니다.”
옥경이 저를 급하게 부르는 경우는 없었다. 섯다 판에 찾아가는 것도, 하도 오지 않아 제가 찾으러 가는 것과 기껏해야 예양의 문자 몇 통에 가는 것이었으니. 그래서 두려움이 배로 느껴진 것일 수도 있다. 어떤 절망이 제게 닥칠지 모른다는 공포. 절망은 또 다른 절망을 먹고, 배를 불린다. 연화는 두려웠다. 자신도 모르게 지민의 손을 붙잡았다. 지민이 그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는 왜인지 모르게,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그에게서 꿰뚫어 볼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이었다.
절망은 이제 내 코앞에 있다. 나는 선택해야 한다. 선택은 숙명이다. 달려들 것인지, 먹힐 것인지. 내게 주어진 유예 기간은 추악한 냄새를 풍기는 절망이 내 선택을 무력화시키기 전까지이다. 나는 잠식당할 것인가, 내 이름마저 또 한 번 빼앗길 것인가.
2020.12.25
<사담>
오랜만에 찾아뵙네요. 몇 년만에 다시 인스티즈에 들어온 건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지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잘 지내셨나요?
저를 신알신 해놓으신 분들도 이제는 인스티즈를 떠나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오랜만에 새로운 글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이제는 읽어주실 분이 계실지 확신할 수도 없게 되었네요.
전에 읽어주시던 독자님들도 다시 뵙고 싶지만 바란다고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요.
남겨주셨던 소중한 댓글 감사히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인스티즈에 글 남기는 게 너무 낯설어서 수정이 잦을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불나비로 인스티즈에 돌아왔지만 꾸준히 인스티즈로 오겠다는 말씀은 못 드리겠습니다.
타사이트로 거주지를 옮길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어느새 인스티즈가 너무 낯설어졌네요.
어제는 급하게 불가항력을 재업했습니다. 소슬이란 필명은 사용하고 있지 않아 찾아오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언젠가는 저를 찾아주실 분이 있으시다면 좋겠습니다.
인스티즈를 떠나더라도 다른 공간에 둥지를 마련해 놓겠습니다.
오랜만에 찾아와 말이 길어졌네요. 부디 행복한 하루 되시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