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e: 대량 움짤 / 새로 고침 필수 :D
별이 떨어진다면 당신이 있는 공간으로
- 성동혁, 1226456
촬영 팀 세팅 마무리 됐구요, 저흰 올라가서 바로 진행하면 될 것 같아요. 박은 K건설 데스크에서 받은 방문증을 걸었다. 저분, 지훈 씨 아버님 맞죠? 박의 손가락이 로비 스크린에 등장한 한 중년의 남자를 가리켰다. 세계 미래에 K건설이 함께한다는 장엄한 타이틀과 어울리는 아우라였다.
어제 뉴스 보셨어요? 싱가폴에서 글로벌 콤팩트 협약 맺고 아시아 대표로 인사까지 하셨잖아요. 일선 경영도 바쁘실 텐데 사회적 책임까지 강하신 걸 보면 역시 롱런하는 기업은 이유가 다 있다니까요? 나중에 지훈 씨도 저 자리에 있겠죠?
박은 휴대용 반사판을 돌리며 눈을 떼지 못했다. 먼저 고개를 돌린 건 나였다. 오피스와 현장 인력, 해외 부지의 돈 목숨을 거머쥔 먹이사슬의 최상위를 화면으로 마주한 것만으로도 압도된 상태였다. 지훈과 닮은 분위기와 입매에 다소 긴장감이 흐르기도 했다.
K건설은 코스피 시가 총액 TOP5 기업 중 국내 낙후 지역 발전과 해외 기부 사업에 적극 참여하는 유일한 기업이었다. 더불어 지훈이 입사한 시점부터 건축 설계 실적과 평판 지수가 증가했고 이는 2030 세대가 선망하는 직장 부동의 1위로 매년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누구나 바라는 그곳, 그러나 내게는 Y코스메틱과 동일 선상에 있는 거대한 해일과도 같았다.
지훈의 옆을 지키겠다고 다짐한 그날부터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으며, 언제든 형체도 없이 나를 집어삼킬 광대한 재난이었다. 희미한 뺨 흉터가 순간 따끔거렸다.
― “지훈 씨 아버님 만나보신 적 있으세요?”
― “아니요, 아직.”
― “상견례 하실 거죠?”
― “기적처럼 이뤄진다면요.”
― “기적이요? 아아, 많이 바쁘셔서?”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박의 궁금증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 “Y코스메틱 회장님이랑은 요즘 어떠세요? 저번에 담당자 교체 안 하면 지훈 씨 인터뷰 중단하겠다고 엄포까지 놓으셨잖아요.”
― “아드님 일엔 예민하세요. 나쁘신 분은 아니에요.”
― “고부간의 갈등 이런 건 아니죠?”
― “전혀요.”
― “지금은 돈독하신가 봐요?”
돈독이라…….
― ‘어리석은 건 타고난 팔자라지만 제 분수 하나 지금껏 감당하지도 못하면서 누굴 또 망치려고 달려들어?’
― “그럼요. 너그러우신 분이라 제가 늘 감사하죠.”
― ‘회사에서 직책 좀 던져주니까 갑자기 뭐라도 되는 것 같아? 잘난 줄 평생 타봤자 고작 십 년이고 나이도 거꾸러지는 마당에 누구 발목 잡으려고 자꾸 나타나서 이 지경까지 만드니?’
― “불안정한 고용도 딸처럼 걱정해주시고.”
― ‘네가 할 수 있는 게 뭔 줄은 아니? 포기. 포기라구. 가진 게 없으면 포기를 할 줄 알아야 한다구 몇 번을 말하니?’
― “그럼에도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응원도 아끼지 않으세요.”
래퍼도 아닌데 포장을 잘했다. 웃고 있는 건지 울고 있는 건지 모호한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 “응원을 받았는데 왜 저주 걸린 라푼젤처럼 서 계세요?”
― “원래 주인공은 행복 속에서도 헤쳐 나갈 챕터가 많잖아요.”
― “지금은 어떤 챕터인데요?”
― “막간을 이용한 100번 보면 100번 재밌는 해피러브?”
― “그렇다기엔 당장 하고 계신 비밀 연애가 너무 살 떨리는데요?”
― “그만큼 어떤 미래가 올지 설레지 않으세요?”
― “Hut 소리 같은데 얼렁뚱땅 긍정의 힘이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겠죠?”
― “훈팡국 건축 왕자님과 무지개 마을 전문직 라푼젤의 두근두근 비밀 연애로 가보실까요?”
― “직업병 아니랄까 봐 키워드 완벽하시네요.”
― “맞다, 영어 에세이 숙제 도와준 값 언제 줘요? 홍삼 비싸게 다려준다면서요?”
― “어! 훈팡…… 아니! 지훈 씨다!”
박은 스크래치 난 눈썹을 씰룩거렸다. 엘리베이터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지훈은 정장 주머니에 손을 꽂고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팀장님 주차장에서 올라오실 거예요. 같이 가요. 홈그라운드에 입성한 선수는 태부터 달랐다. 각 잡힌 사원증을 걸고 메탈 시계를 확인하는 것마저 품위가 남달랐다. 박은 반사판을 내려놓고 장시간 촬영을 위한 오금 방지 무릎 운동을 시작했다. 기회는 지금이다.
― “샌드위치 고마웠어요.”
― “아, 네.”
― “이따가 음료수 쏠게요.”
― “네.”
― “……끝인가요?”
― “네.”
……혹시 제 마음을 듣고 계신 분이 있다면, 전편에 이지훈 공과 사에 빠져 죽고 싶다고 했던 말 지워 주세요. 수정 버튼 누르고 백스페이스로 화끈하게 밀어주세요. 복구 불가 트위터 청소기로 관련된 데이터 전부 앗아가 달라는 말입니다.
과감히 몸을 틀었다. 로비 위층을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K건설 직원들을 보며 애써 서운한 눈빛을 감췄다. 공과 사 지키자고 계약서까지 만든 인간이 바로 나다. 다시 말하지만 노후 연금 타려면 멀었고 다음 달 월급도 소름 끼치도록 동일하다. 잊지 말자. 3억.
― “비스듬한 각도를 선호하시나 봐요.”
― “심신안정을 위해 늘 45도를 유지하는 편이에요.”
― “불편하세요?”
― “전혀요?”
― “그래요?”
― “그럼요.”
장난스러운 눈빛과 올라간 눈썹의 각도를 보건대 지훈은 이 상황을 분명 즐기는 중이었다. 자유로운 연애 선언에 무릎이 닿도록 사각지대로 몰아넣을 때는 언제고, 이젠 동방예의지국 거리도 얄미울 만큼 잘 지켰다. 심지어 가운뎃손가락으로 미간을 긁더니 입 모양으로 ‘바보-’ 란다.
5. 기타
- 중지로 미간을 긁으면 개인적인 대화 일시적으로 가능 (단, 제한 시간 3분)
― “되게, 허공을 보고 얘기하시는 것 같은데.”
갓 나온 빵은 참아도 선빵은 못 참지. 투지의 중지가 지훈을 따라 미간을 긁었다. 어쩌라고, 지는, 웃어? 따위의 1차원적 발언도 서슴없었다. 그럴수록 복숭아 같은 지훈의 뺨이 올라갔다. 부승관 못지않게 얘도 은근 장난끼 대박이거든. 각자 신호를 보내며 음 소거 욕설이 난무할 때, 곁에서 지켜보던 박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 “두 분 혹시 미간에 모낭염 있으세요?”
― “건조하긴 하네요.”
― “시계는 왜 자꾸 보시는 거예요?”
― “3분 지났나 해서.”
― “사무실에 햇반 올려놓으셨어요?”
― “저기 팀장님 오시네요.”
지훈은 말머리를 돌렸다. 로비 회전문을 몸으로 밀고 들어온 설계팀 팀장이 어벙하게 서 있는 박과 악수했다. 미팅 때문에 오전 스튜디오 촬영에 참여하지 못해 미안했다고 운을 뗀 팀장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내게 물었다. 시작은 다 지난 여름날의 병원 생활이었다.
병원에 있었다면서요? 몸은 괜찮아요? 후유증은 없고? 회사에만 붙어 있던 놈이 갑자기 미친놈처럼 빗길로 뛰쳐나가길래 무슨 일인가 싶었더니, 세상에 폭우에 갇혀 있을 줄 누가 알았나. 다음날에 휴게실에서 퀭하게 자고 있길래 내가 물어봤지. 집에 홍수 났냐고. 처음에는 말을 안 하더니 나중엔 쫄딱 젖은 병아리 보러 가야 한다고 짐을 싸더라고? 하루라도 안 보면 병아리 숨 넘어간다고 안 하던 퇴근까지 하더라니까? 난 또 진짜 병아리를 길바닥에서 주웠겠거니 그날 사료도 준비했단 말이지?
― “팀장님.”
― “왜? 없는 말 지어낸 것도 아닌데?”
― “강아지 사료 사오셨잖아요.”
― “너도 내 나이 돼 봐. 밤엔 침침해서 편의점도 못 가요.”
지훈은 갑갑한 얼굴을 쓸었다. 오랜만에 물 만난 팀장은 할 말이 많았다. 앉은 자리에서 풀린 구두끈을 묶으면서도 입은 쉴 새가 없었다.
그 숨 넘어가는 병아리가 여주 씨인 거 알고 나서부터 둘이 다시 어찌 잘 되나 싶었거든? 말한 사람 민망하게 표정들이 왜 그래? 내가 눈치 없이 떠드는 건가? 아, 그냥 서로 친구 되기로 한 거야? 그래도 일은 끝까지 같이 하는 거고? 캬아, 둘 다 프로네, 프로야. 내가 원하는 인재상이 바로 이런 거란 말이지. 헤어졌어도 일은 똑바로 해야 세상이 돌아가는 거라고. 공과 사 똑 부러지는 이런 젊은이들이 성공을 해야 돼. 뒤에서 응큼하게 비밀 연애나 하는 것들보다야 낫지. 말이 나왔으니까 그래, 요즘 것들은 일하러 왔으면 일만 해야지 왜 거기서 쓸데없는 사랑을 찾나? 내 눈에 걸린 쌍쌍만 해도 벌써 수십은 된다고. 내가 저번에 얘기했지?
팀장이 지훈의 팔뚝을 쳤다. 순간 세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한 명은 오십견 방지 척주 7번 운동을 위해 뒤를 돌았고, 다른 한 명은 뒷머리를 만지며 로비 바닥 무늬를 훑었다. 든든한 서포터도, 공조 중인 파트너도 사라진 현재, 팀장의 타깃은 허공을 바라보는 나였다.
― “그나저나 여주 씨, 남자 친구 있어요?”
이 시간부로 무조건 난 혼자다.
― “제 별명 참 솔로.”
― “주변에 좋은 놈 하나 있는데 소개해 드려요?”
― “번호 지금 드릴까요?”
이지훈 / 지나가던 참 솔로 남자 친구
? ? ? ? ? ? ? ? ? ? ?
눈으로 욕하는 남친을 외면하기란 스밍 인증만 해도 뿌링클 세트를 준다는 트위터 이벤트와 같았다. 가까스로 시선을 돌려 팀장이 건넨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나의 새로운 애인이 될 남자들은 총 다섯 명, 하나같이 똑똑하게 생겼다. 석민을 뒤이을 상견례 프리패스 상이란 이런 것일까.
― “……뭐 하세요.”
지훈의 어이없는 눈초리가 내게 향했다. 팀장은 보란 듯이 지훈을 등진 채 그들의 스펙을 나열했다.
그래도 난 예쁜 게 좋은데. 동그란 뒤통수, 올망졸망한 귀, 웃으면 초승달 같은 눈, 피곤하면 귀여운 코끝에 생기는 붉은 점, 매꼬롬하게 생겼는데 밤에는 야하게 생긴 얇은 입술 같은 거. 보기만 해도 심장 작살나는 거 있잖아. 뭔지 알지.
― “(저 지훈이랑 다시 만나는데요. 저희 같이 사는데요. 한솥밥만 먹는 게 아니라 침대도 하나 나눠 쓰는데요. 이불 뺏기면 저한테 엉겨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까치집 짓고 코 바로 위까지 이불 덮고 비몽사몽 하다가 옆에 저 있나 없나 확인하는 애가 지금 빡쳐서 웃고 있는 이지훈이라고요.) 다들 좋으신 분 같아요.”
― “언제 시간 돼요?”
― “근데, 제가 다 되는데 시간이 안 돼요.”
― “그게 무슨 소리예요?”
― “어제 피티도 끊고 필라테스에 핫요가, 암벽등반 장기간 코스 끊어서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요.”
― “뭐 그렇게 하는 게 많아요?”
― “젊을 때 땡겨 놀아야죠. 그래야 팀장님처럼 우수한 인재가 되는 거 아니겠어요?”
― “마음에 쏙 들게 대답을 참 잘한단 말이야?”
팀장은 엄지를 치켜들었다. 지훈의 표정은 ‘그 짧은 순간에 대단하다’였고 박은 ‘또 해내셨네요’ 느낌을 가득 담아 제2의 라이프지 김 팀장을 보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훈의 눈짓에 박은 살가운 팔짱을 끼며 팀장과 앞서 걸었다. 틈을 놓치지 않는 팀장의 어필은 계속됐다.
― “그린 에이지 다음 호 설계팀 단독 인터뷰 어때요? 쇳불도 당긴 김에 빼라고 내일 저녁 시간 돼요? 저번에 못 받은 여주 씨 번호 오늘 받아 봅시다. 내사 번호 말고 개인 번호 줘요. 내 휴대폰이…….”
― “팀장님, 부장님 연락하신다면서요.”
― “아이고, 내 정신이 이래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박은 팀장을 잡고 촬영용 반사판의 백옥 효과와 그린 에이지 예산을 뿌리 뽑아 먹은 카메라의 미친 듯한 화질에 대해 입을 털었다. 그들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안전바를 잡았다. 지훈과 손이 닿은 시점도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우연치 않은 스킨십에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동그란 뒤통수, 올망졸망한 귀, 웃으면 초승달 같은 눈, 매꼬롬하게 생겼는데 밤에는 야한 입술 같은 게 눈앞을 마구 돌아다녔다. 그토록 찾던 이상형이 내 앞에 있는데 은밀한 스킨십 위반 어쩌고 경고 먹어도 알게 뭐람. 비밀 연애의 묘미는 바로 이런 곳에 있거든.
손끝으로 지훈의 손등을 쓸었다. 그는 피하지 않았다. 하여 손가락을 엮어 아래로, 슬며시 손을 맞잡고, 마침내 깍지를 낀 채 옆을 쳐다봤다. 지훈 역시 입술을 앙다물며 눈을 맞췄다. 이대로 팀장이 뒤를 돌기만 해도 게임아웃. 재시작도 없어. 종료 버튼도 없어. 무조건 다시 태어나야 돼.
엘리베이터가 목적지에 다다를 때쯤 팀장은 매무새를 점검하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들짝 놀란 새가슴과 달리 지훈은 손을 더욱 움켜쥐었다. 그 세기에서 벗어나려 할수록 꿈쩍하지 않았다. 이미 머릿속은 백지상태, 비상 직전 손목을 비틀어 반대로 힘을 당기자 그가 단번에 악력을 풀었다. 빌어먹게도 그 힘은 팀장의 뒤통수를 그대로 가격했다.
팀장의 뒷머리가 옆으로 돌아갔다. 예상치 못한 가발 커밍아웃이었다. 심신안정을 위한 각도가 45도였으니 저 각도는 분노의 18도쯤 되려나.
― “……팀장님.”
― “장난이 참 살가워요?”
― “그, 손목에 구멍이 있어서 운동을 좀 하다가…… 정말 죄송합니다.”
― “뭐가 있다고요?”
― “손목 터널 증후군이요.”
팀장은 촉촉한 눈가를 닦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집안 대대로 대머리가 유전인 박이 눈을 번뜩였다. 아무도 눈치 못 챘죠? 진짜 같았죠? 완전 풍성 대에박! 박은 환희에 찬 엉덩이로 팀장을 따라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들 몰래 비상구 계단에 나란히 앉은 비밀 연애 듀엣은 조용했다.
― “팀장님 가발인 거 알았어?”
― “저번에 같이 사우나 갔을 때.”
― “저렇게 막 돌아가는 것도?”
― “그건 몰랐어.”
― “한강 물 찹나.”
― “사투리 넣어둬.”
― “퇴사할까.”
― “괜찮아.”
― “내 힘이 그렇게 세?”
― “자책하진 마.”
― “공중그네 법칙 때문에 그래.”
― “그렇다고 아무 말은 하지 말고.”
― “블루투스 샤워기는 개발했어?”
― “그건 내 영역이 아냐.”
― “엉덩이 시려워.”
― “앉아. 따뜻해.”
지훈은 제 무릎을 두드렸다. 언제든지 열려 있는 전용 방석에 고마움을 느끼며 엉덩이를 뗀 순간, 개코 설계 팀장이 거칠게 비상구 문을 열었다. 2대 8 가르마의 가발이 들어오자마자 지훈은 대뜸 미간을 구기며 벌떡 일어났다. 그 짧은 시간에 시나리오를 쓰는 머리는 감히 인정하고 싶다. 올해 청룡영화제 작가상은 네 거야.
― “불편하기 짝이 없네요.”
― “……네?”
― “팀장님 인터뷰하고 싶으면 직접 말씀하시면 되잖아요.”
― “지훈 씨?”
― “일하러 오셨으면 공과 사 구분해 주세요.”
잘생긴 작가는 연기력도 출중했다. 표정 변화 없이 무릎 방석을 거두고 일어난 그는 인터뷰란 말에 화색이 도는 팀장에게 말했다. 친구로서 대신 드리는 부탁이니 한 번만 들어 달라고. 진지한 묵례까지 마친 그가 문을 나섰다. 팀장이 물었다.
― “로비에서부터 표정이 영 이상하더니 이것 때문에 둘이 싸운 거예요?”
짐짓 그런 척, 콧대를 쥐며 고개를 숙였다. 팀장은 모든 게 자신 때문이라고 자책했다. 위로를 받는 중에도 떠오르는 이목구비에 실실대는 입을 막았다. 문을 나서며 팀장의 뒤통수를 원망스럽게 쳐다보는 귀여운 얼굴이 생각 났으니까.
(애인이랑 있을 때 방해 받는 거 개싫어함.joldo)
뭘 싸워요.
이지훈 눈썹 저렇게 올라가 있는데.
Oh My Rainbow
; The Finale
10. 비밀 연애 Part. 2
지훈 씨 특별 호 인터뷰 홍보 영상에 들어갈 일부 촬영이구요. 보이스는 들어가지 않고 편집도 기가 막히게 할 예정입니다. 긴장하지 마시고 표정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번 오늘 협조해주신 K건설을 비롯한 설계팀 팀장님과 직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슬레이트 대신 박이 손뼉을 쳤다. 촬영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일하는 자의 본새는 회의실에서 나온다는 회의무새 라이프지 팀장의 아이디어를 받들어 지훈을 비롯한 직원들이 컨퍼런스 실에 모였다.
그를 중심으로 총 다섯 대의 앵글이 돌아갔다. 극도의 긴장감으로 손을 떨거나, 카메라와 아이컨택을 하거나, 심지어 피하지 않고 웃는 팀원들 덕분에 편집점이 많아진 카메라 맨은 터진 일복에 감격스러운 눈물을 흘렸다. 옆에서 숨을 죽이던 박이 회의용 모니터를 보며 조용히 물었다.
― “저게 뭐예요?”
― “글쎄요.”
― “모양 엄청 이상하지 않아요?”
― “짓다가 만 건물 아닐까요.”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지훈을 나흘 밤낮으로 외박하게 만든 제6차 보고서였다. 카메라 앵글이 비껴간 모니터에 괴이한 역삼각형이 등장하자 그들은 한숨을 뱉었다. 모래시계 상단 부분에 영감을 받은 어느 미친 투자자가 내후년 일산 신도시에 개관할 미술관 외관이란다.
― “클라이언트 원하는 대로 다 맞춰 주면 건물 무너져요. 건축법 무시하고 지반 자체를 아예 날리자는 건데 이건 백텔 (BECHTEL)에서 시공해도 주저앉아요 팀장님.”
후버 댐을 비롯해 영국과 프랑스를 연결하는 해저 댐을 지은 미국 최고 건설사도 해내지 못할 괴상한 구조라고 지훈은 말하고 있었다.
건축 디자이너가 만든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형태를 현실적인 도면으로 바꾸는 것이 지훈과 설계팀의 업무였으니 저건 당치도 않은 판타지에 불과했다. 붕괴 예방과 데미지를 감할 수 있는 축으로 떠받친다 한들, 조만간 MBC 뉴스 데스크 속보에 실릴 사고였다. 팀장은 얼굴을 쓸었다. 부장님 친가 사업이라 밀어붙이는데 이것 때문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고.
― “그렇다고 내일 무너지는 르네상스를 지어드릴 순 없잖아요.”
― “대한민국에서 혈연 파괴는 어떻게 안 되나?”
― “요즘은 학연, 지연, 혈연이 아니라 학연, 지연, 흡연이라고 부장님께 알려주세요.”
대한민국 3대 연 공격에 골초 카메라맨들은 물론 직원들과 팀장마저 입술을 꾹 물었다. 박은 이미 벽을 보고 있었다. 흡연의 기운을 받아 기필코 부장과 결단 내겠다는 팀장은 끝내 유혹을 떨쳐내지 못하고 카메라를 보며 하소연을 시작했다.
일 년에 서너 번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디자인 때문에 죽어 나간다며 자신과 제 새끼들이 안쓰럽다고 운을 떼더니, 그 끝은 K건설 설계팀에 없어서는 안 될 지훈의 자랑으로 이어졌다.
― “우리 지훈 씨 덕분에 깔 땐 까더라도 눈치 덜 보고 깝니다. 누가 이 어린 나이에 국제 공모전, 젊은 건축가 상을 동시에 탑니까?”
― “팀장님, 카메라 보시면 안 돼요.”
― “남들 크리스마스 연휴 해외여행 갈 때 사무실에서 보고서 작성하던 미친놈이 이놈입니다. 일 년 내내 그 누구냐, 그린 에이지 팀장이 인터뷰하자고 매달려도 질색하면서 거부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로비에서 그린 에이지 직원분과 초밥을 먹더라고요? 날 것 먹기 싫다고 도망갈 땐 언제고 나한텐 그런 배신이 없었단 말이죠?”
― “잠깐 쉬었다 갈게요.”
카메라 맨은 기다렸다는 듯 오케이 사인을 날렸다. 아쉬운 입을 쩝쩝대는 팀장을 보며 박이 소곤거렸다.
모든 사내 목격담 들춰내는 근원지가 저분 같아요. 회사에서 비밀 연애 수십 봤다는 말 거짓은 아닌 것 같으니까 조심하세요. 들키면 죽음뿐.
그 후로 지훈은 팀장의 눈을 피해 나와 눈을 맞췄다. 자신과 나를 번갈아 보는 설계 팀장의 꾸준한 시선이 있었기에 그마저도 텀이 길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팀장을 신경 쓰느라 뒷골이 당겼다. 붉은 포인터로 브리핑을 시작한 지훈을 보며 박이 넌지시 말했다.
저희 팀장님이 왜 회의 컷에 환장하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아요. 본인 일 잘하는 것도 잘하는 거지만 다른 사람들 경청하는 얼굴이나, 걷어붙인 셔츠나, 한 번씩 머리 넘기면서 질문하는데 같은 남자인데도 완전 반할 것 같잖아요. 일하는 자의 멋짐은 회의실에서 나온다는 말 구라 개뻥인 줄 알았는데 이건 지훈 씨를 두고 하는 말이었던 거죠. 촬영 끝나고 같이 사진 찍자고 하면 거부당할까요? 아아, 지훈 씨 겉바속촉이라 웬만한 건 다 들어준다구요? 혼자서만 엄청 좋은 환경에서 살고 계시는군요?
회의 컷과 복도 컷을 마친 직원들은 예상보다 지체된 까닭에 서둘러 설계 사무실로 돌아갔다. 박은 설계 팀장과 휴게실에서 간단한 인터뷰를, 지훈은 소형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내 앞에 섰다. 홍보용 데일리 브이로그였다.
텐션 조금만 업되게 할게요. 언제든 끊어갈 수 있으니까 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카메라를 켜자 지훈은 큰 숨을 들이켰다. 역시 재롱둥이 부승관의 친구는 다를 바가 없었다.
#1. 설계 사무실
Q. 지훈 씨, 안녕하세요. 지금 특별 호 홍보 촬영 중인데 기분이 어떠세요?
A. 좋아요. 재밌어요.
Q. 오늘 데일리 룩은 어떤 컨셉이에요?
A. 약간 편안한?
Q. 잘 어울리세요. (내 남자 같은) 보이프렌드 룩 같기도 하고.
A. 감사합니다.
Q. 여기가 지훈 씨 책상인가요?
A. 네, 근데 뭐가 많이 없죠 ㅎㅎ
Q. (내가 준) 다육이 키우시네요?
A. 선물 받은 거예요. 이산화탄소 잡아먹는다고 큰 걸로 주시더라고요.
Q. 친하신 분인가 봐요?
A. 가장 친하죠.
Q. 승관 씨?
A. 아, 그분은 아닙니다.
Q. 다육이한테 뽀뽀하기 V.S. 승관 씨한테 뽀뽀 받기
A. ……ㅇ 예? 갑자기요?
Q. 이런 건 갑자기 해야 돼요.
A. 꼭 골라야 돼요?
Q. 하나, 둘, 셋.
A. 어…… 생각은 안 해봤는데 그래도 식물한테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Q. 승관 씨가 어제도 라디오에서 지훈 씨 출연 부탁했는데 들으셨나요?
A. 들었죠.
Q. 여기서 출연 논의 가능한가요?
A. 아, 근데 라디오 방송이 언제죠?
Q. (생략) 지금 들고 계신 그 분무기는 어떤 용도일까요? 다육이 물 줄 때?
A. 제 가습기.
Q. (애써 모른 척) 책상 정리가 유독 깔끔하신데 청소하실 때 어떻게 정리하시는 편이세요?
A. 발랄하게.
Q. 죄송한데 조금만 자중해 주시겠어요?
A. (빠른 적응)
Q. (제발입꼬리 자아 금지) K건설 아이돌이라고 소문이 자자하신데 소감이 어떠세요?
A. 그런 소문은 처음 들어보는데요.
Q. 시청자분들을 위해 아이돌 애교 보여주세요.
A. (시키는 건 빼지 않고 다 함) 저 지금 뭐 하고 있죠?
#2. 복도
Q. 어디 가세요?
A. 3층이요.
Q. 들고 계신 사진은 뭐예요?
A. 나중에 인터뷰 이벤트 하신다고 해서 폴라로이드 스탭분한테 드리러 갑니다.
Q. 평소에 사진 찍는 거 좋아하세요?
A. 딱히 좋아하진 않는데 필요하면 찍어요.
Q. 이상형이 뭐예요?
A. 아까부터 계속 훅 들어오시네요.
Q. 제가 깜짝 질문을 좋아해요.
A. 어…… 그냥, 본인 할 일 잘하는 사람?
Q. 지훈 씨 같은 스타일을 좋아하시나 봐요?
A.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
Q. 저요?
A. 네.
Q. (어차피 편집 각) 상견례 프리패스 상이요.
A. 그게 뭐예요?
Q. (어차피 편집 각2) 가수 석민 씨 아시죠?
A. 그분이 이상형이라고요?
Q. (어차피 편집 각3) 이상형도 되고 배우자도 되고 일석이조죠.
A. 카메라 어떻게 꺼요?
Q. 네?
#3. 엘리베이터
Q. 사진 주시러 간다더니 또 어디 가세요?
A. 퀵 받을 게 있어서 로비 가고 있어요.
Q. 틈을 이용해서 질문 하나 드려도 될까요?
A. 뭔지 두려운데 일단 해보세요.
Q. 요즘 자주 하는 생각이 있다면?
A. 사회생활 참, 재밌다…….
Q.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즐거우실까요?
A. 분명히 오늘 여섯 명한테 말했는데 다음 날 되면 백 명이 제 소식을 알아요.
Q. (슬픈 생각2) 웃는 게 정말 예뻐요
A. 브이로그가 이런 식인 건 처음인데 새롭네요 (웃음)
Q. (누누슴 직격타 손해 배상 청구서)
#4. 다시 복도
Q. K건설 블라인드 5차 유일한 합격자로서 수많은 취업 준비생 분들에게 응원의 한 말씀 해주신다면?
A. 음, 섣불리 말할 주제는 아닌 것 같아서 조심스럽네요. 저도 막막하고 깜깜한 상황에서 취업을 준비했을 때가 있었는데요. 제가 경험하면서 느꼈던 건, 설령 눈앞에 기회가 찾아와도 제 스스로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놓쳐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더라고요. 이 영상을 통해 감히 말씀드린다면 주변의 시선, 주변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내가 해야 할 것, 준비할 것들을 꾸준히 챙기다 보면 어느 순간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여러분들도 반드시 그러셨으면 좋겠고 서로 다양한 필드에서 마음껏 능력을 펼쳤으면 좋겠습니다.
Q. 이제 일하시나요?
A. 해야죠. 밤에 야외 촬영이 있어서 빨리 끝내야 할 것 같아요.
Q. 마지막으로 시청자 여러분께 강력한 한 마디 부탁 드립니다.
Q. (과도한 집착 증세) 한 번만 더 보여 주세요.
A. (우아해2) 도대체 뭐 하시는 분이죠?
Q. 지훈 씨,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활기찬 직장 생활 하시길 바랍니다.
A. 끝났어요? 아, 됐어요? 그럼 일단 브이로그 기획하신 분 인적 사항 좀 주세요.
Q. (도망)
지훈은 설계 사무실로 도망치려는 내 뒷덜미를 잡고 옆방 창고로 들어갔다. 복도 블라인드를 돌려 시야를 막고 출입문까지 걸어 잠근 스피드는 단 3초에 불과했다. 그는 서류 더미에 쌓인 테이블 구석에 날 앉히더니 양옆으로 손을 짚었다. 그러더니 대뜸 하는 말의 주제는 예상치 못한 석민이었다.
― “프리패스상 조건이 뭔데.“
비스듬히 고개를 틀어 날 응시하는 이목구비는 오늘도 뽀얗다. 세미 프로포즈 받은 것 같고 좋은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 근데 너무 막 좋아하면 좀 그렇지 않을까? 여유롭게, 어?
― “대답을 주저할 정도로 어려운 질문은 아니지 않아?”
……
― “같이 살기 싫나.“
반항적인 눈은 나를 향해, 코끝으로 내 콧볼을 건들이며 그가 물었다.
― “나 싫어?“
오 주여 아멘. 이지훈 널 누가 싫어해. 완전 할렐루야.
― “한 치의 앞날도 모르는 게 인생이잖아?”
― “그래서.”
― “때가 되면 말해 줄게.”
― “그게 언젠데.”
― “우리가 판교에 집 살 때?”
― “어제부터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네.”
― “내 심장 네 거야.”
오른쪽 가슴에 지훈의 손을 얹었다. 사뭇 놀란 표정에 내 프로포즈가 먹혔나 싶었으나 지훈은 늘 그렇듯 할 말은 따로 있었다.
― “고맙긴 한데 심장은 왼쪽이야.”
……
― “괜찮아. 내일부터 대성 마이맥 프리패스 끊어 줄게.”
인생 진심 은퇴할까.
* * *
― “네, 많은 관심 부탁드리고…… 근데 저분은 아까부터 어딜 가시는 거죠?”
새 광화문 광장 갈대밭에서 시작된 지훈의 저녁 야외 촬영에는 의외로 담당자가 바빴다. 촬영팀 막내가 달려오다 날려 먹은 70만 원짜리 조리개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총책임자의 감투를 쓰고 막내 뒤치다꺼리 하러 온 본사 파견직은 현타와 동시에 머나먼 밴쿠버 부편집장 디에잇이 보고 싶었다. 아마 그는 새로 배운 ‘짬빠’를 섞어 쓰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 짬빠가 얼만데 그런 걸 해? 좀 더 열심히 찾지 못해?
젠장.
― “안녀엉-.”
조리개를 찾는 책임자 대신 브이로그 카메라를 잡은 박은 지훈과 마지막 컷을 찍고 난 후 시원하게 카메라 뚜껑을 닫았다. 그와 동시에 지훈은 허리춤에 달린 마이크를 빼며 무성한 갈대밭 안으로 들어왔다. 기다란 숲을 헤치고 온 그가 금을 찾는 70년대 광부처럼 땅만 쳐다보고 있는 내게 물었다.
― “뭐해 여기서.”
― “조리개.”
― “그걸 네가 왜 찾아.”
― “이거 하려고 유학 가서 대학 졸업하고 직장에서 파견 온 거야.”
― “정신이 아예 나갔는데.”
― “70만 원짜리야.”
― “월급에서 까.”
― “네 돈 아니라고 막말하기 있기 없기?”
― “너 보려고 왔는데 피하기 있기 없기?”
지훈은 내 허리를 일으켜 쪽쪽 새 마냥 입을 맞췄다. 급기야 품에 안기까지 했다.
― “아마추어같이 왜 그래?”
― “아마추어 할 테니까 5초만.”
― “보고 있어도 보고 싶었어?”
― “알면 좀 안아.”
내 팔을 제 허리에 두른 그가 좌우로 몸을 움직였다. 좋다는 뜻이었다.
더욱이 하늘은 노을 지고, 겨울 갈대는 바람에 흔들리고, 저녁 냄새와 지훈의 향이 섞이는 완벽한 이 순간. 예전 드라마 속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는 말을 내가 하고 싶어졌을 줄이야.
― “근데 이거 뭐야?”
지훈의 바지 뒷주머니에 걸리는 묵직한 물체를 꺼냈다. 막내가 잃어버린 70만 원짜리 조리개였다.
― “……이게 왜 여기서 나와?”
지훈은 빠른 걸음으로 갈대밭을 헤쳤다. 유유히 사라진 그를 따라 밖으로 나오자 박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 “지훈 씨가 입구에서 찾으셨어요. 아, 말을 안 하셨구나?”
― “이유가 뭘까요?”
― “남자 마음을 이렇게 몰라서야.”
― “네?”
― “찾았다고 하면 바로 내빼실 거잖아요. 지훈 씨는 같이 있고 싶어서 간 건데.”
박은 혀를 차며 카메라를 품에 안았다. 스탭들과 늠름하게 앞장 서서 걷던 지훈이 슬쩍 뒤를 돌았다. 그리고는 쳐다보지 않은 척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그 사이사이 곁눈질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지겹게 따라붙던 설계 팀장의 시선이 사라졌으니 현재의 지훈은 빈틈으로 활개치는 쟉고 소즁한 솜 뭉치.
한 시간 뒤, 회식 자리에서 거나하게 취한 설계 팀장의 2대 8 가르마를 보며 지훈은 묵묵히 밥을 먹었다. 지금은 숨 죽은 솜 뭉치였다.
K건설 직원분들은 심심하면 꽃등심을 숨 쉬듯이 드시는 거예요? 법카 한도도 없이? 그래서 다들 감흥이 없는 건가요? 아무리 그대로 그렇지 익숙함에 속아 사내 식당의 소중함을 잃어도 될 것 같아요. K건설 사랑합니다. 홍보팀에 남는 자리 없으세요? 복사 하나는 제가 기가 막히게 하거든요?
저녁 야외 촬영이 끝난 후 모인 회식 자리에서 박은 그린 에이지 주방 참모님의 감기로 최근 모든 음식에 간이 맞지 않아 겪는 고통을 호소하며 소고기를 세 점씩 퍼먹었다. 소주잔을 든 설계 팀장이 내 옆에 앉아 맞은편 지훈의 눈치를 봤다. 이번 주말 1박 2일 친목 도모 겨울 워크샵에 그를 꼬드기기 위함이었다.
― “올해가 어떤 해야? 멀티플렉스 프로젝트 덕분에 성과급 쓰고도 남는 해지?”
― “안 가요.”
― “지훈 씨 좋아하는 스키만 죽어라 타면 돼. 족구장은 또 얼마나 큰데? 작년에 갔던 곳 들었지?”
지훈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팀장의 관심이 이번엔 내게 흘렀다.
― “이참에 같이 와요. 여름 내내 고생했는데 우리끼리 뒤풀이해야지.”
― “전 괜찮아요.”
― “특별 호 덕분에 공식 홈페이지, 유튜브, 인터넷 기사에 우리까지 쫙 나가는데 싫어할 사람 누가 있어요? 내가 나이 많아서 팀장 같아요? 다들 오라고 난리야. 회사 이념을 넘어서 우린 이제 가족이라니까? 가면 벚꽃도 있는데 진짜 안 가요?”
― “벚꽃이요? 강원도 가세요?”
― “명당 입장권은 없어도 눈으로는 다 볼 수 있지.”
팀장의 눈빛이 간절했다. 지훈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 “시간 되면 와요.”
팀장은 두꺼운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내려치며 나이스를 외쳤다. 빈 소주잔은 그대로 들고 나갔다. 박은 내 SOS에 고개를 저었다.
주말에 여친 만나러 가야 돼요. 주말 커플. 장거리.
한 달 전만 해도 이번엔 진짜 정말 헤어졌다면서 휴게실에서 울던 박은 눈가가 마르기도 전에 재회를 했다. 지훈은 느닷없이 박에게 물었다.
― “장거리 할 만해요?”
― “군인이라 휴가 아니면 직접 광주까지 내려가야 해서 힘들죠.”
― “얼마나 걸려요?”
― “KTX 타면 두 시간 정도?”
― “주말에만 만나도 매주 보는 거니까 좋긴 하겠다.”
지훈은 턱을 만지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 남 연애에 그리 관심이 많으셨는지 밥까지 외면하고 잡담을 하는 걸까. 어디에 어떻게 꽂힌 걸까. 장거리? 주말 커플? 아니면 둘 다?
― “비행기 타고 가본 적은 있어요?”
― “그런 적은 없는데 왜요?”
― “그냥, 궁금해서.”
― “혹시 다른 나라에 몰래 살림…….”
테이블을 쪼개는 힘, 그것은 바로 나.
― “비행기는 왜요?”
― “아 그거다, 멜로 눈빛.”
― “멜로가 아니라 공포 스릴 물이겠지.”
― “반말. 경고 두 번.”
― “……뭐하는 거야?”
― “너무 가깝다. 세 번.”
― “너 조용히 안 해?”
― “이젠 돌이킬 수가 없다. 네 번.”
― “야!”
<손해 배상 청구서>
KISAN Engineering & Construction Co., Ltd. 이지훈 (이하 “지훈”)과 Green-age Korea 김여주 (이하 “여주”)는 해당 비밀 계약에 대한 손해 배상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1) 여주는 상세 조건 (시도 때도 없는 멜로 눈깔, 엘리베이터 은밀한 스킨십)을 위반하였기에 지훈에게 금전적 손해 배상 3억 원의 채무 의무를 가진다.
2) 지훈은 여주로부터 3억 원의 손해 배상 채권을 가지고 있으며, 협의 시 금전적 보상을 대체할 결정권 자격이 주어진다.
3) 채권에 대한 채무 이행은 현재 11월 11일을 기준으로 금월 22일까지이다.
* * *
이지훈의 모든 것.
11월 21일, 전국 온라인 서점과 오프라인에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늦은 저녁, 라이프지 팀장은 박과 내 사이에 앉아 양팔로 껴안았다. 특히 마지막 얼빡 샷이 마음에 아주 쏘옥 든단다.
본사에서 날라온 복덩어리 덕분에 영양제를 바르지 않아도 손톱이 건강하게 자란다고, 그렇게 꺼리던 Y코스메틱과 K건설 얘기도 둘러가며 인터뷰를 따낸 내가 자랑스럽다고, 미스 캐나다 사주에는 성공의 척도인 백호살과 괴강살이 일주에 분명 자리하고 있을 거라고 통계학 사주팔자를 맹신하는 팀장이 칭찬을 쏟았다. 그녀의 눈은 멈춰 있는 지훈에게 꽂혀 있었다.
― “언제 봐도 아이돌 상이야. 건축에만 있기엔 페이스가 너무 아까워.”
― “공개 오디션 추천해 볼까요?”
― “그 어디지? 캐스팅 잘하는 엔터 있잖아.”
― “플레디스요?”
― “지금 전화 돌려. 채용 담당자 바꿔서 나 주고.”
― “채용 담당자가 아니라 신인 개발팀이라고 하죠. 채용은 저희 같은 오피스 노예 낚을 때 쓰는 거고요.”
박의 반박에도 팀장은 흥얼거렸다. 다음 주부터 들어갈 인쇄 작업에 들뜬 상태였다. 스테레오 버튼만 멍하니 보는 내게 그녀가 물었다.
― “미스 캐나다 눈은 말린 명태니?”
― “팀장님.”
― “안 돼.”
― “저번에 부탁하신 자료 합쳐서 메일 보냈어요.”
― “그 페이지를 다? 혼자?”
― “더 필요한 부분 있으시면 오늘내일 연락 주세요. 이번 주말은 서울에 없을 것 같아요.”
팀장의 의심쩍은 눈이 따라붙었다.
― “그날 결혼하니?”
― “아니요.”
― “약혼하니?”
― “아플 것 같아요.”
― “아픈 것도 아니고 아플 것 같다는 건 뭐야? 질병 예약이야?”
기어코 캐물은 팀장은 K건설을 곱씹더니 갑자기 편집실을 나갔다. 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렇게 한 번 나가면 돌아오지 않는다는 팀장의 또 다른 별명은 ‘김 함흥차사’였다.
박이 퇴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팀장이 돌아왔다. 옆구리에 거대한 선물을 끼고 온 그녀가 꽃별까지 붙은 그것을 내 책상에 올렸다. 받는 사람이 나라고 했다.
오늘 아침에 택배도 아니고 K건설 회장님 비서가 직접 왔다니까? 얼른 열어 봐.
채근하는 팀장을 따라 포장을 뜯었다. 한약 냄새가 훅 끼쳤다. 겉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물건의 정체는 정관장 리미티드 에디션 지삼 10지 800g. 건강식품 애호가인 팀장이 놀람을 금치 못했다.
― “미스 캐나다, 드디어 해냈구나? 이제 시아버님이라고 부르기로 한 거야?”
― “네?”
― “통도 크셔라, 500만 원짜리를 한 번에 쏘시네?”
무려 영이 여섯 개 붙은 고가의 물건이었다. 포장에 껴 있는 카드를 꺼내 이 또한 조용히 펼쳤다. K건설 회장, 다시 말해 지훈의 아버지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짧지만 강력하고 힘 있는 필체였다. 팀장이 물었다.
― “지훈 씨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써 있네? 몰래 주는 건가?”
― “받아도 될까요?”
― “다음번에 아무도 모르게 식사하자는 건 아무도 모르게 땅에 묻겠다는 얘기 아니야?”
― “솔직히 저도 그 생각을 아주 잠깐 하긴 했거든요.”
― “휴대폰 긴급 버튼 누르는 방법 알지?”
― “저랑 같이 가주시는 방법도 있어요.”
― “난 얇고 길게 살고 싶어.”
― “제 꿈도 명줄 긴 한낱 실오라기에요.”
― “시간 되면 십자가 앞에서 기도할게.”
― “5대째 불교 집안이시잖아요.”
― “종교 대통합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뉴스를 보지 못했니?”
팀장이 페이드 아웃처럼 사무실을 나갔다. 책상을 차지한 고가 물건에 뒷머리만 긁었다. 직속 비서가 내려와 건넨 오백만 원이라니. 보통 돈 봉투를 주던데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서 건강하게 내쫓기가 유행인가?
혹여 내가 찾지 못한 현금 봉투가 있을까 상자를 더듬거리는데 승관의 문자가 울렸다. 조슈아 사인 픽업 오라는 독촉 연락이었다. 제주도 자연산 숭어는 날아간 것 같으니 대신 조언을 구해보자.
― [숭어 드실?]
― [졌어.]
― [역시.]
― [나 지금 가?]
― [오늘 픽업 안 하면 조슈아는 내 거다.]
― [지금 뭐해?]
― [대본 떠.]
― [뭐 하나 물어봐도 돼?]
― [언제는 대답 듣고 물어 봤냐?]
― [혹시 정관장 리미티드 에디션 선물로 받아본 적 있어?]
― [홍삼?]
― [지삼 10지 800g.]
― [그 귀한걸? 울 라디오에서 협찬 부탁했다가 대쪽으로 까인 게 세 번이다.]
― [그래?]
― [엉, 왜?]
― [그럼 보통 윗사람이 아랫사람한테 저런 비싼 선물을 주나?]
― [야, 선물에 위아래가 어딨냐?]
― [그러면, 저 선물 주면서 아무도 모르게 만나자는 건?]
― [아무도 모르게 만나자고?]
― [응, 그 누구도 모르게]
― [아무도 그 누구도 모르게 조용한 곳에서?]
― [응응, 아무도 그 누구도 모르게 조용하고 은밀한 곳에서]
그로부터 3초 뒤, 승관의 고함은 아침보다 거셌다.
― [이게 진짜 하다 하다 사채까지 손을 대냐? 미치셨어요? 콩팥 하나로 사네 마네 씨부리더니 뭘 얼마나 빌렸길래 저딴 걸 선물이라고 주는데? 그 먼 태평양 건너서 고국까지 왔으면 손 씻고 조용히 살 것이지 그걸 못 참고 사고를 치고 다녀? 뒤질라고 환장했냐? 뭐라고? 윗분? 야, 어디 윗분? 도박 돈줄 윗대가리? 제3금융권 건달 깽깽이 새끼들 말하는 거냐? 울 방송국에서 인맥으로 내 아이템 훔쳐 먹고 지랄하다가 도박으로 사회 매장된 놈 기억 안 나? 너 인마 그게 얼마나 무서운 줄 몰라? 어?]
목소리만 톤만 들어도 알았다.
부승관 진심 개빡침.
― [야이 간땡이 부은 똥뙈지야 새끼야! 인셍 망치고 십어? 시비지장을 세트로 털리고 십은 거야? 머? 외? 내 맛춥법 외 그럿게 족같냐고? 미친아! 도박도 족같이 틀린 맛춥법과 똑가타! 잉간 하나 개언망진창으로 만든다고! 조슈아 사인 못 줘! 가질 생각도 하지 마!]
― [알겠어. 돈 따면 반 나눠 줄게.]
― [이지훈 고도리로 치킨 튀기는 소리 하네. 러시앤캐시든 산와머니든 불법 도박 자금 융통한 새끼 네 남친한테 꼰지르기 전에 당장 불라니까!]
.
.
.
― [지후나 모행]
[사진]
[사진]
― [집 헬스장]
― [운동 열심히 했네?]
― [어, 오늘 펌핑 잘 된다]
― [나 위협에 갇혔어 도와줘]
.
.
.
.
한 시간 뒤.
― “위협이라고 하지 않았어?”
― “야, 너 마침 잘 왔다.”
지훈과 도착한 라디오국 정문 앞에는 조슈아 사인지를 쥐고 팔짱을 낀 채 노려보는 승관이 있었다. 녀석은 내게 눈을 째리며 지훈에게 귓속말을 시작했다.
귀찮은 지훈의 표정이 아리송하게 변하더니 녀석이 멀어지자 입술을 꾹 다물었다. 승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조슈아의 사인은 지훈에게, 내가 손을 뻗자 그가 등 뒤로 사인지를 감췄다.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 “그래서 콩팥 지금 몇 갠데.”
― “뒤질라고 그걸 알려주겠냐?”
― “괜찮아, 긴장 풀고 말해.”
― “이쥰 네 눈깔부터가 존나 안 괜찮아.”
승관은 지훈의 뒤에 숨어 사채에 장기를 팔아 넘긴 천하의 몰상식한 인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 “나름 침착한 편이야.”
― “일단 지금 하나 없는 건 확실해.”
― “생체 반응 어디서 확인하지.”
― “딱 보면 모르냐? 눈은 흐리멍텅해가지고 내일 관악산 어디에 셀프로 묻히게 생긴 거?”
― “이왕 묻힐 거 미리 묻는 방법도 괜찮지 않아?”
― “이참에 정한이 형 부르자. 바디 다루는 방법은 형이 잘 알잖냐.”
― “트렁크에 삽을 챙겼나.”
― “내가 봤어. 너 챙겼어.”
― “윤정한 살 째느라 바빠. 그냥 우리끼리 아무도 모르게 묻어보자.”
― “조용하고 은밀하게 콜?”
― “지문 안 묻게 조심하고.”
― “형, 우리가 작업 한두 번 해봅니까?”
완전 범죄를 꿈꾸는 검은 조직이 움직였다.
― “진짜 아니야! 위에서 준 거라니까?”
― “그러니까 어디.”
― ‘지훈 씨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써 있네? 몰래 주는 건가?’
― “……정보 산업 기관?”
― “해커야?”
라디오국 지상 주차장을 뛰어다니는 한 마리의 짐승이 코너에 몰렸다. 그 자리에서 은행 어카운트, 메일 함, 문자 리스트를 훑는 손가락이 급했다.
― “몰래 비밀 계좌 튼 거 아냐?”
― “그럴 가능성 농후하지.”
― “스위스 계좌가 유력하지 않겠냐?”
― “거의 확실하다고 봐.”
― “아냐, 거긴 김여주 못 들어가.”
― “왜?”
― “신용 등급 많이 따지는 곳인데 쟤가 어떻게 들어가냐?”
― “등급이 낮아?”
― “쟤 모의고사 보면 맨날 5등급이었거든? 신용도 그럴 거야.”
― “일리 있어.”
― “일리가 있긴 뭐가 있어!”
검은 조직이 끅끅대며 웃는다. 눈이 함지박만 한 놈은 뷰웅- 소리를 내며 깔깔거렸고, 그보다 새초롬한 눈은 작디 작은 얼굴을 가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누가 봐도 일부러 그러는 모양새였다. 승관은 놀리는 재미에 산다고 쳐도 이런 짓에 늘 빠지지 않고 앞장서는 이지훈이 제일 신났다. 내 어깨를 두르며 지훈이 말했다.
― “가자, 숭어도 먹고 찜닭도 먹으려면 시간 없어.”
― “숭어를 네가 어떻게 알아?”
― “난 다 알아.”
지훈은 앞장서 걷고 있는 승관에게 손을 뻗었다. 친근하게 어깨동무를 한 그들은 달밤의 만담 쇼로 나를 골렸다.
역시 범인은…….
― “인사해, 내 친구 부승관.”
― “이제 네 이지훈은 내 껍니다.”
― “가자, 친구.”
― “좋아, 자기.”
― “기대지는 말고.”
― “자기는 거꾸로 봐도 예쁘다?”
― “닥쳐.”
― “으휴, 애교는.”
이놈들이.
* * *
조슈아 사인은 언제 받았대?
예전에 받은 거여. 너 한국에 없었을 때.
진짜?
주인공 언제 올지 몰라서 땡겨 받았다.
내가 팬이란 것도 말했어?
대뇌 피질까지 사랑하는 팬이라고 내가 힘 좀 썼다.
대뇌피…… 야, 장난해?
언제 한번 라디오국 와라
왜? 소개받을 수 있어?
이쥰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감히 그딴 헛소리를 하다니.
작게 말해서 안 들릴 거야.
― “어, 가둘까 말까 생각 중인데 진짜 안 들려.”
지훈은 숭어보다 들 떠 있는 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해볼 테면 해 봐라, 이걸 가만히 내버려 두나 보자, 였으니 승관이 따라 주는 소주만 조용히 계속 기울였다.
― “사인이면 충분하잖아.”
― “지식인에서 그러는데 골수팬은 사진까지 찍고 대대손손 가보로 물려준다더라.”
― “두근두근 방지법 그거 적용해.”
― “두근 뭐? 그게 뭔데?”
― “물리적 거리 삼천 킬로미터.”
― “둘 중 하나는 남극에서 찍으라는 얘기냐?”
― “현대 기술 좋아서 가능해.”
― “술을 얼마나 쳐 마신 거냐.”
― “한 입도 안 댔어.”
앨범 스튜디오 녹음을 마치고 합류한 석민은 지훈을 보며 실실 웃었다.
― “지훈이 질투해서 그런 거잖어.”
― “뭐래 이 미친놈은.”
― “딱 봐도 알지. 입은 거짓말을 해도 눈은 거짓말을 못 하거든.”
― “내 눈이 어떤데.”
― “여주 조슈아 만나면 집에 올 때까지 가만히 방에 박혀서 온다, 안 온다 풀잎 뜯고 있을 눈?”
― “쟤 잔 그만 채워라.”
― “저 새끼 아까부터 자작하고 있다.”
승관은 소주에 빨대를 꽂아 마시는 석민의 입을 막았다. 넌 입을 노래 부를 때만 써. 앞으로 텔레파시로 말해. 그래, 말해 봐. 엉, 그래. 화장실은 신발 신고 나가서 왼쪽이야. 야! 신발!
승관은 하얀 양말을 신은 채 밖으로 나가는 석민을 쫓았다. 어디서 많이 보던 그림이다. 취한 사람이 바뀌었을 뿐, 신호등 앞에서 하는 짓은 똑같았다. 이번엔 석민이가 숭어를 육지에 토하게 생겼구나.
― “지훈아, 있잖아, 그 워크샵 말이야.”
― “팀장님 눈에 띄지 않는 게 상책이야.”
― “역시 감정보다 이성이 앞서는 똑똑한 아이구나.”
― “오늘 다들 우리만 보고 있었잖아.”
― “티는 안 났지?”
― “아슬아슬 하기는 했지.”
― “그래도 우리에겐 기회가 늘 열려있어.”
― “기회 뭐.”
― “사각지대에서 끌어안고, 엘리베이터에서 손잡고.”
― “야, 잠만.”
― “블라인드치고 테이블에 나 올려서 막…….”
― “막 뭘 했는데?”
석민의 뒷머리를 잡고 돌아온 승관이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테이블에 올려서 뭘 했길래 이쥰 귀가 터질 것 같냐? 뭐했냐 둘이? 일만 하고 온다면서 둘이 뭔 개수작을 부리고 왔는데? 일도 하고 사랑도 하고 왔다 그거냐?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 누구는 쌔 빠지게 일해도 토하진 않았니, 관절은 괜찮니 물어보는 사람 하나 없는데 누구는 먹고 싶다고 하면 자연산 숭어 사주는 사람도 있고 개부럽다. 안 그러냐 내 동반자 석민아?
석민은 승관에게 폭 안기며 느리게 입을 뗐다.
― “나 여친 생겼어.”
― “배신자 새끼!”
석민은 자신을 떼어 놓을수록 한 때 동반자에게 더욱 더 달라 붙었다. 허리를 뺏긴 녀석은 체념한 듯 폭 숨을 내쉬었다.
― “그래서 비밀 연애를 더 하시겠다고요?”
― “구경하러 올래?”
― “딴말하기 없다?”
― “올 거지?”
― “오라며?”
야 서쿠야,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가야겠다. 스케줄 비냐? 난 이미 뺐거든? 취한 석민의 멱살을 잡아 흔들며 녀석이 물었다. 석민은 게슴츠레 눈을 뜨며 손을 동그랗게 말아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Hut 소리도 다시 보는 덤앤더머 앞에서 목숨 걸지 않은 장난은 금물이었다.
― “내 친구 승관아, 말이 나온 김에 너희 라디오에서 협찬 받은 겨울 벚꽃 여행 티켓 남은 거 있으면 공유해 줄 수 있을까? 워크샵 강원도로 간다는데 거기가 거기래.”
― “저 안 취했거든요? 이게 어디서 날로 먹으려고?”
― “내가 그 티켓 얻으려고 널 라디오에 보낸 거야. 잊었어?”
― “응, 딴 놈 줬어.”
― “미쳤어?”
― “더 절실해 보이는 놈한테 줬다. 됐지?”
― “지금 절교 하자고 돌려서 말하는 거야?”
― “시간 아깝게 돌려서 말할 필요가 있냐? 우리 헤어져.”
― “야!”
― “됐어, 일어나.”
지훈은 외투를 챙겼다. 승관은 일어서려는 그를 손짓으로 붙잡았다. 술이 이렇게 나 많이 남았는데 다 마시는 건 보고 가야 하지 않겠냐며 미래의 진풍경을 추천했다. 취한 내 발에 신발까지 욱여넣던 지훈은 아직도 내 손에 들린 커다란 맥주 잔 속 투명한 소주를 보며 한숨을 뱉었다. 그 진풍경은 다름 아닌 나였다.
― “얘 뭐해?”
― “응, 술 뺏길까 봐 빨대 두 개로 마시는 거야.”
― “네가 알려줬어?”
― “넌 잡지사가 괜히 날 밤 까고 회식 하는 줄 아냐?”
그린 에이지 주당 김 팀장의 습관이 그대로 내게 안착했다. 빨대 두 개로 마시는 소주는 알콜 농도도 두 배. 지훈은 맥주 잔을 빼앗아 테이블 구석으로 밀었다.
나 봐봐. 눈 뜨고. 아니, 그렇게 뜨지 말고 똑바로. 이거 몇 개야. 야, 이게 어떻게 스물 백만 개야. 뭐가 어떻게 겹쳐 보이는지 설명해 봐. 아니, 손가락은 원래 다섯 개잖아. 이해 했어?
덕분에 나는 만취, 승관은 꽐라 석민을 업고 횟집 가게 문을 나섰다.
― “서쿠랑 택시 타고 갈 거니까 집 도착하면 연락해라.”
― “뭔 연락까지 해.”
― “똥뙈지 업다가 울 애인 목 졸려 죽으면 나 어떡해?”
― “죽이기 전에 꺼져. 가, 얼른.”
승관과 석민은 콜택시에 몸을 실었다. 그들을 보낸 지훈은 만취 애인을 업고 제 차 뒷자리에 눕혔다. 흔들림 없는 시몬스 침대 벤츠 버전을 느끼며 정신을 놓은 것도 이때 쯤이었다.
뺨에 닿는 추운 계절에 졸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익숙한 향과 온기에 따뜻한 등의 주인이 지훈이라는 것도 알았다. 고롱고롱한 피죤 냄새는 지구에 하나밖에 없잖아.
― “지훈아.”
― “깼어?”
― “아까 워크샵 장소 찾아봤는데 거기 인기 되게 좋대.”
― “너 되게 가고 싶은가 보다.”
지훈은 밤길을 천천히 걸었다. 바람은 차지만 등은 따뜻하고, 차 뒷좌석에 넣고 다니는 담요로 내 등을 감싸고, 집까지 가까이 보였으니 눈은 바짝 감길 수밖에.
― “방도 많고, 노래방 기계도 있고, 게임기도 있고, 마당에는 족구장도 있고, 밤엔 바비큐도 되고…… 자?”
― “…….”
― “나 없으면 누구한테 업혀 오려고 이렇게 취했어.”
팔을 감아 목을 두르면 그 끝에서 또 고롱고롱.
아주 예쁜 숨소리가.
― “마실 때마다 옆에 있을 수도 없고.”
……
― “사람 별걱정 다 하게 만들어.”
지훈에게 업혀 발만 달랑거리며 돌아온 곳은 그와 같은 냄새가 풍기는 집.
도어락을 풀어 문을 당기면 오늘 새벽 그대로의 모습인 침대가, 그리고 내 곁엔 역시 그대로인 그가.
― “팀장님이 술을 좋아하니까 일단 얘를 구석에 앉혀서 내가 막고, 단체 주 들어 오면 잔을 몰래 바꿔서 내가 다 마시면 나쁘진 않을 것 같긴 한데. 그놈의 빨대는 보이는 대로 다 없애 버리고 사이다만 먹이면 되겠고…… 그렇다고 얘가 가만히 있을 성격은 아니니까 소주만 조금 타서 먹이면…….”
네, 우리 지훈 씨께서는 이날 새벽에 찜 닭은 안 먹고 워크샵 대비 저런 계산이나 하고 계셨답니다.
― “……니는 잠이 오나.”
잠결에 들은 부산 사투리는 아주 섹시했다는 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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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목 도모 K건설 워크샵 현장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아아, 우리 지훈이는 어디 있냐구요?
(뭐든_본인이_질릴_때까지_조져야_직성이_풀리는_성격_17번째_외침.gif)
― “김여주 죽었니 살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