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남자친구, 아니죠."
"네?"
"친구라고 했잖아요, 맞죠."
"저 거짓말 안 해요."
"누나! 형 찾았어요? 어! 형 언제 왔어, 찾아다녔잖아. 단체 손님 오셨어."
"얼른 가보세요."
"저녁에 얘기해요."
저녁에 얘기해요... 한참 동안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저녁... 저녁에 무슨 얘기를 하자는 걸까... 저녁... - 이란 생각을 반복하며 3층에 다다르니 그곳엔 유태양이 있었다.
"갑자기 어딜 그렇게 급하게 다녀온 거야?"
"너, 아까 나 오기 전에 직원들이랑 무슨 얘기 같은 거 했어?"
"아니, 내가 무슨 얘기를 해. 처음 보는 사람들이랑."
"근데 갑자기 재윤씨가 왜 그런 얘기를 했지..."
"재윤씨?"
"아냐, 알 거 없고. 저녁에 파티한대, 너도 갈 거야?"
"너 가면 가지. 너 안 가면 안 가고."
"갑자기 왜 이래. 평소처럼 너하고 싶은대로 해, 나 따라 하지 말고."
"나 지금 나하고 싶은대로 하고 있는 거야."
유태양에게 분명 무슨 일이 있다. 평소 같지 않은 표정, 평소답지 못한 목소리 톤, 그리고 말투. 모든 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내 복도에서 소란스러운 소리들이 들려왔다. 단체 손님들이 객실로 올라왔구나. 몇 명이나 되려나, 재윤씨 바쁘겠네.
"너 내가 무슨 일 있냐고 물어도 대답 안 할 거지."
"응. 무슨 일 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거 없을 거 아니까."
"...나 쉴거니까 저녁 먹을 때 만나, 파티에서."
태양이를 보내곤 재윤과의 톡 화면을 보며 내내 고민했다.
아까 말한 얘기 뭐예요?, 파티 몇 시부터였죠?, 도와드릴까요?
메시지를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던 중에 갑자기 톡이 도착해 황급히 뒤로 가기를 눌러 보았지만, 이미 늦었다.
- 파티 6시부터예요
- 날씨가 괜찮아서 마당에서 하기로 했어요
- 준비하고 내려와요
- 친구랑
다시 느껴졌다, 함께 저녁 먹을 때 느껴졌던 마치 롤로코스터 위에 있는 듯한 기분. 나는 침대에 누워 있다 말고 벌떡 일어나 매무새를 만지며 괜히 향수도 슬쩍 뿌려 마무리하곤 방문을 열고 나섰다.
"야, 유태양! 나 먼저 내려간다! 얼른 나와!"
계단을 내려가다 1층에 가까워지자 들려온 지하에서 올라오는 발소리에 백스탭하며 로비를 내려다보았다.
옷 갈아입으셨네, 아까 옷 예뻤는데. 짐을 들고 올라오는 재윤과 찬희의 뒤를 따라 자연스레 나는 밖으로 향하며 말을 붙였다.
"일손 안 모자라세요? 의자 보니까 단체 손님 꽤 많이 오신 것 같은데."
"우와, 누나 그럼 저희 꼬치 꽂는 것만 도와주시면 안 돼요?"
"어, 안 돼 그건 너 할 일이잖아. 도와줄 생각 말고 추우니까 로비에 있다가 시간 되면 나오세요. 손님이시잖아요."
손님, 뭔가 그새 선이 그여 버린 느낌이 들었다. 같이 장 볼 때만 해도 괜히 뭐라도 된 것 같고 좋았는데.
로비 의자에 앉아 마당에서 일하는 두 사람을 구경하다 보니 웅성거림과 발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단체 손님이 내려왔다.
"어, 안녕하세요! 저희 말고 다른 분도 계신지 몰랐어요~"
"아, 네 안녕하세요. 친구들끼리 오셨나 봐요."
"아, 저희 동아리 엠티 왔어요!"
"안녕하세요-, 넌 좀 기다리지 왜 혼자 내려가고 그래."
유태양도 무리를 뒤따라 계단에서 내려와 인사를 했다. 바로 느껴지는 우리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는 듯한 눈빛. 여섯 시가 되었다.
"두 분이 일행이시구나, 커플이신가 봐요! 좋겠다~"
"파티 준비되었으니 다들 나와서 드세요."
"아뇨, 저희 완전 친구예요! 와, 얼른 나가야겠다-"
때마침 들어온 재윤에 나는 괜히 큰소리로 친구라며 말을 해 보였다. 왜 이렇게 자꾸 오바하게 되는지.
파티는 꽤 즐거웠다, 같은 나이대의 사람들이 모여서 그렇겠지. 모 대학의 출사 동아리라는 사람들과는 얘기가 잘 통했다. 유태양과 내가 어떻게 친해졌고 어쩌다 같이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까지 술이 들어가니 자연스레 나도 모르게 내뱉고 말았다.
바베큐 식사가 끝나고 추워지는 날씨 탓에 우리는 지하로 자리를 옮겨 파티를 이어나갔다. 유태양은 대학 생활 동안 늘 그래왔듯이 여자들의 테이블에 붙잡혔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겐 문장 하나 완성 짓지 못하는 성격 탓에 어김없이 고통받는 듯 보였다.
"찬희야, 다들 일어나시면 대충 마무리만 짓고 정리는 내일 일어나서 하자. 나 먼저 들어갈게."
"알겠어, 잘 자."
반쯤 정신이 가출한 와중에도 재윤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들려와 나는 재윤이 일어나자 자연스레 뒤를 따랐다.
술 못한다더니, 조금 드신 건가. 걸음걸이가 평소답진 못하네. 목덜미도 벌겋고 자꾸 머리를 짚는 게 취한 건가?
"재윤님- 아, 재윤씨. 괜찮아요?"
"어, 왜 벌써 나오셨어요. 식사는 잘 하셨어요?"
"당연하죠, 누가 구워준 고긴데!"
"여주씨는 참, 말을 예쁘게 해주시네요-."
"ㅋㅋㅋ재윤씨 취하셨다, 맞죠?"
"아뇨, 얼마 안 마셨어요."
"그럼 왜 먼저 나오셨어요? 아직 10시도 안 됐는데."
"약속했잖아요, 저녁에 얘기하기로 여주씨랑."
"...네?"
"가요."
숨이 막혔다. 자꾸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이런다. 분명 지난 수많은 짝사랑들 앞에선 이런 적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양볼 가득 웃음이 가득찬 재윤은 내 손을 잡아 이끌며 계단을 올랐다. 어디로 가자는 거야, 지금 어디로 가는 건데. 설마 자기 방에 데려가고 그런 거야? 아니겠지?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몰려듦에도 난 이 남자 손을 뿌리치며 물어볼 수 없었다. 그냥 지금, 이 순간 이 남자의 손이 너무 따뜻해서.
"다 왔다. 추우니까 이것도 하시고."
"여기가 어디..."
재윤은 날 마주 보고 선 채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머플러를 나의 목에 감아 주었다. 그리곤 문을 열자 내 앞에 그림이 펼쳐졌다.
"예쁘죠. 시골이라 빛이 없어서 야경이라 할 건 없지만 대신 하늘에 별이 많아요."
"...너무 예뻐요."
"난로도 틀었고 여기 담요도 있으니까 많이 춥진 않겠죠?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요."
너무 아름다웠다. 끝없이 펼쳐진 밤바다와 그 위로 빛나는 별들. 이 남자가 하고자 했던 얘기가 무엇일지에 대한 궁금증은 전부 잊어버렸을 만큼.
재윤은 손에 와인과 잔을 들고 계단을 올라오더니 내게 따라 건네었다.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니 잊고 있던 취기가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고 이 남자 또한 아까처럼 방긋방긋 웃어 보이는 게 취한 게 분명하다.
"아까 한 말 다 맞아요-. 아슬아슬 취기가 올라오더라구요. 그래서 얼른 일어나서 나왔죠."
"그럴 줄 알았어, 목 뒤가 벌겋더라구요. 봐요, 엄청 뜨겁네."
아무 생각 없이 얘기하다가 남자의 목덜미에 손을 덴 나는 예상치 못하게 좁혀진 거리에 난 당황해 손을 떼며 미안하다 전했고 남자는 멀어지는 나의 손을 붙잡아 다시 그자리에 두었다.
"왜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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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월...만이라니...
천천히라고는 했지만 이렇게 천천히 진행할 생각은 없었는데 한 편 작성하는데 꽤 시간이 걸리는 편이라 항상 미루게 되었네요ㅠㅜ
다음 편은... 제가 퇴사 후가 되지 않을까 예상 중입니다
꼭 결말을 내고 싶으니 잊혀져 갈 쯤이라도 돌아 올게요🥲
킹덤 화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