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작가님. 조금 주제 넘은 말처럼 들리실 수도 있는데, 작품에 대해 한 마디만 해도 될까요?"
"뭔데요?"
"개인적으로 저는 주인공의 마인드가 이해가 안 돼서요."
"헤어지고 나서 바로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나요?"
"안 될 것도 없죠. 그게 왜 불가능해요?"
곧 복귀할 태형의 차기작 회의 중인 여주와 태형. 여주가 쓰고 있는 안경 알에는 태형의 웹툰 시놉시스가 반사되어 보인다. 판타지 액션 장르를 선보였던 전작과는 달리, 로맨스 웹툰을 들고 온 태형을 의아하게 바라본 것도 잠시. 여주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시놉시스 속 주인공의 행보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3년 간의 지독한 연애를 끝낸 주인공이 바로 다음 날, 첫 눈에 반하는 상대를 마주하고 그 이후의 이야기를 로맨틱하게 그려내는 내용의 시놉시스였다. 그림체야, 전작에서 증명되었기 때문에 별 걱정이 없었지만 스토리가 영 여주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뭐... 작가님 웹툰이니까 제가 왈가왈부할 건 아니긴 한데."
"이대로 낸다면 대중들의 저항을 크게 받을 것 같은데요."
"... 저 같은 연애가 뭔데요?"
"구질구질하게 10년 사귄 남자친구 못 잊는 연애요."
"..."
박여주 / 27세 / 10년 사귀던 남자친구와 이별 후 후폭풍 반 년 째 겪는 중
태형이 당당하게 1승을 거머쥔 순간이자, 두 사람의 배틀 아닌 배틀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
그래도 태형은 여주의 의견을 어느정도 반영하여, 3년 간의 지독한 연애를 끝낸 주인공에서 반 년 간의 지독한 연애를 끝낸 주인공으로 수정하였다. 첫 눈에 반하는 설정은 그대로. 첫 연재분이 사이트에 올라간 후의 반응은 꽤 나쁘지 않았다. 액션물을 그려낼 줄 알았던 태형이 로맨스 물을 그린다는 것에 대한 의아한 반응 반, 장르가 바뀌어도 명불허전이라는 반응 반. 초반부터 상위권에 랭크되기도 했다. 새로운 시작 겸, 좋은 반응을 얻은 겸 두 사람은 자축 파티를 하기로 하는데...
"어우, 지긋지긋해. 어떻게 한 사람이랑 10년을 연애해요?"
"참나, 그러는 작가님이야 말로 어떻게 전 애인이 10명일 수가 있어요."
"알고보니 여기에도 작가님 전 애인 중 한 명 있는 거 아니에요?"
"... 어떻게 알았어요?"
김태형 / 27세 / 현재 전 여친 10명 중 8번 째 여친이 옆옆테이블에 앉아 있음
이번엔 박여주 1승.
-
굳이 따지자면 태형은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안 잡는 스타일이었고, 여주는 한 사람에게 빠지면 깊숙하고 진득하게 빠져 한참을 허우적 대는 타입이다. '사랑'에 대한 인식이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일까. 판타지 액션 웹툰을 쓸 때는 그렇게 취향이 찰떡이었던 두 사람은 태형이 로맨스 웹툰을 연재하기 시작하자, 매주 내용을 가지고 입씨름을 했다.
"작가님, 이 부분 수정하는 게 좋을 듯 한데요?"
"또 어디요."
"현태(남자주인공)가 소희(여자주인공)한테 연락 왔는데도 안 보는 부분이요."
"원래 좋아하는 사람한테 연락 오면 곧바로 답장 하지 않나요?"
"그건 좋아하는 사람 앞이면 사족을 못 쓰는 여주 씨 입장이잖아요."
"원래 썸 탈 때도 밀당이 최고 중요한 거라고요."
"하긴, 10년 동안 한 사람만 바라본 순애보가 뭘 알겠어요."
(이제는 태형의 말에 타격도 없음)
"아니죠. 지금 현태는 그 누구보다 소희한테 빠져 있는 상태잖아요."
"그런 상태에는 연락이 오면 재고 따질 시간이 없다고요."
"아, 작가님은 그런 사랑 해본 적 없어서 모르시려나?"
"... 네, 그렇네요. 제가 진짜 사랑이란 걸 해본 적은 있는지..."
태형의 한 마디에 회의실에 정적이 감돌았다. 열심히 11회차 원고를 보던 여주의 마우스 위의 손도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는 두 눈을 데굴데굴 돌려서 태형의 눈치를 살폈다. 에이씨, 저 인간은 갑자기 왜 시무룩한 표정인 거야. 지끈거려오는 머리에 쓰고 있던 안경을 벗은 여주는 태형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둥글고 큰 눈에 높은 코, 적당한 입술까지. 나비가 향기로운 꽃을 찾듯, 사람들은 조화로운 태형의 얼굴을 보고 많이들 들이댔을 것이다. 저도 10년 간 사귀었던 남자친구가 아니었더라면 한 번 쯤은 사심을 가질 수 있었을 지도...
"여주 씨"
"... 네?"
"우리 좀 가까운 것 같은데?"
"허어어어억...! 죄... 죄송...!"
태형의 얼굴을 저도 모르게 감상하고 있다 보니, 코 앞까지 다가가버린 여주. 태형이 말을 걸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입술 박치기를 해버렸을 지도 모른다. 마... 마실 것 좀 사올게요! 태형이 대답하기도 전에 황급히 몸을 떼어낸 여주는 붉어지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벗어났다.
"..."
어쩐지 그런 여주가 귀엽다는 생각이 든 태형이다.
-
『 작가님, 저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런데 피드백은 메일로 해도 될까요? ㅠㅠ - 박여주 / 2021년 4월 20일 』
『 그래요. - 김태형 / 2021년 4월 20일 』
-
『 작가님, 저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런데 피드백은 메일로 해도 괜찮을까요? - 박여주 / 2021년 4월 27일 』
『 알겠어요. 아픈데 너무 무리하지는 말기. - 김태형 / 2021년 4월 27일 』
-
"작가님, 정말 죄송한데 ... 오늘 지인 결혼식이 있어서..."
"아니, 아니야... 이건 너무 티나잖아."
"하씌... 이젠 핑계 댈 것도 없네..."
태형과 의도치 않게 입을 맞출 뻔한 회의 날 이후(사실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저 여주의 머릿속에 스쳐지나간 작은 음흉한 생각이었을 뿐.), 여주는 최선을 다해서 태형과의 대면 회의를 피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태형을 생각하면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설레는 감정이 드는 게 아무래도...
"나 작가님을 좋아하게 됐나봐..."
여주는 인정이 빠른 타입이었다. 학창시절이었다면 불도저 급의 들이댐을 통해 상대를 어떻게든 꼬셔내고 말았겠지만, 지금은 사회인이기에 쉽게 그럴 수 없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일로 엮여 있는 김태형. 분명 제가 들이댄다면 그의 수 많은 애인들처럼 쉽게 받아줄지는 몰라도, 만약 이별을 한다면 그 후가 문제였다. 한 사람만 10년을 사랑할 수 있는 여주가 태형과 헤어지면 아무렇지 않게 비지니스를 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작가님이 나랑 사귀어 준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이별까지 상상해버렸네."
이해할 수 없는 애정관을 지닌 태형을 좋아하게 되어버린 여주는 멘탈이 나간 상태다.
-
『 작가님, 저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런데 피드백은 메일로 해도 될까요? ㅠㅠ - 박여주 / 2021년 4월 20일 』
"... 귀엽다."
.
.
『 작가님, 저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런데 피드백은 메일로 해도 괜찮을까요? - 박여주 / 2021년 4월 27일 』
.
.
『 작가님, 저 내일 어린이날이라 조카 보러 가야 해서... 오늘도 메일로 피드백 가능할까요? - 박여주 / 2021년 5월 4일 』
태형도 태형 나름대로 멘탈이 나갈 것만 같았다. 여주가 귀여워 보이기 시작한 그 날 이후부터 이상하게 저를 어색해한다 싶더니, 3주 째 핑계를 대고 대면 회의를 회피한다는 사실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원래 작업 할 때는 일체 휴대폰을 보지 않는 것이 태형의 습관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여주의 연락이 올까봐 괜히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회의를 못한다는 여주의 문자에 그림을 그리던 펜을 내려두고 곧바로 답장했다.
『 피드백은 메일로 주시고 오늘 저 좀 만납시다. 제가 집 앞으로 갈게요. - 김태형 / 2021년 5월 4일 』
"아니죠. 지금 현태는 그 누구보다 소희한테 빠져 있는 상태잖아요."
"그런 상태에는 연락이 오면 재고 따질 시간이 없다고요."
답장을 하는 순간에 여주의 말이 왜 떠오른 것인지. 진정한 사랑을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태형은 그 이유를 깨닫지 못했다.
-
아마 上, 下 두 편으로 나뉘어져 올라갈 것 같습니다!
오늘도 별 볼 일 없는 글 (태형이 얼굴과 다양한 짤들만 열일하는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