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의 법칙_02] “창윤! 왔어?” “오래 기다렸지, 미안.” 안쪽에 홀로 앉아있는 이승준이 보인다. 기본안주로 나온 과자만 깨작대다가 먼저 들어간 창윤이를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든다. 그러자 환한 웃음을 지으며 테이블로 빠르게 다가서는 이창윤. 나 만났을 때도 그렇게 반가운 척 좀 해보지. “알긴 아네. 왜 늦었어? 너네 기다리다가 치킨 다 식었잖아.” “아, 오늘따라 교수님이 늦게 끝내주시더라고요...” “얘가 늦장 부렸어.” “야!” 내 변명 아닌 변명이 무색해지게 이창윤이 곧장 일러바친다. 어른스러워졌다는 말은 취소다. 이럴 때보면 고등학생 때랑 별반 다를 게 없다. 쏘아보자 장난섞인 웃음과 함께 사과 대신 내가 아무렇게나 벗어두려던 가방을 가져가 옆의 빈자리에 놓아둔다. “어허 지금 화를 낼 사람이 누군데.” “...근데 먼저 먹고 있겠다면서 치킨은 왜 그대로예요?” “말이 그런 거지 어떻게 먼저 먹어.” 재빨리 말 돌리려는 작전이 통했다. 이승준. 스물 세살. 우리보다 한 살 많은 경제학과 19. 특이점은 이창윤이 예전부터 알아온 나를 제외하고는 거의 유일하게 터놓고 지내는 사람이라는 거다. 새내기 때 창윤이랑 같이 들었던 동아리 첫 회식 때 이 사람을 처음 봤다. 나도 그렇고 이창윤도 꽤나 낯을 가리는 지라 어색하게 둘이서만 치킨을 뜯고 있었을 때, ‘너네 무슨 과야?’ 해맑게 말을 붙여오던 그 사람. ‘경영이요.’ 창윤이가 대답하자 자기는 경제학과라며 비슷하니까 짠 하자는 식으로 술잔을 내밀었다. 대체 어디가 비슷하다는 거지 생각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같이 건배를 하고 있었다. 때문에 내가 20여년간 만나온 사람들 중 가장 친화력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날 이승준은 그냥 잠깐 휴가 나와서 회식에 들렀던 거였는데 그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게 된 거니까. “자 늦게 왔으니까 하나씩 먹어.” 물론 친화력만 좋은 게 아니라 배려심까지 깊다. 지금 두 개밖에 없는 닭다리를 우리한테 하나씩 양보해줘서 하는 칭찬은 절대 아니고 진짜로 그렇다. 이창윤도 웬일인지 제 앞접시에 놓인 닭다리를 슬쩍 내게로 넘기며 묻는다. 오늘 먹을 복 좀 있나보다. “근데 박민균은?” “못 온다고 연락왔어.” “갑자기 왜?” “희망이 아픈 것 같다고 병원 가 본대.” 아, 고개를 끄덕이며 승준 오빠가 건네주는 술잔을 받았다. 소맥 비율 한 번 제대로다. 희망이는 민균이가 얼마 전부터 키우는 고양이 이름. 지난 주 박민균 자취방에 놀러갔을 때 처음 봤는데, 특히 이창윤이 희망이를 무지하게 예뻐했었다. 그래서인지 질문을 던진 창윤이도 술을 받으며 어쩐지 걱정되는 표정이다. 근데 가만 보니까 받는 맥주잔에 나와 달리 소주가 한 방울도 안 들어가 있다. “너 오늘 맥주 마시게? 왜?” “형 오늘 기분 별로라고 작정하고 마실 거래. 이승준도 취하고 너도 취하면, 너 기숙사 어떻게 가게.” “내가 안 취하면 되지.” “내가 너랑 술 마신 게 몇 번인데. 너 백퍼센트 취해.” 또 저렇게 웃으면서 나를 다 안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 말에 괜히 오기가 생겨 삐죽거렸다. 내가 취하나봐라. 그러나 정말로 그 말은 곧 현실이 되었다. “오빠, 과씨씨 해봤어요? 어때요?” “뭐 과씨씨? 그냥 씨씨도 아니고 같은 과씨씨?” 그렇다. 이승준도 나도, 이창윤의 예언대로 제대로 취해버렸다. 취기가 오르는 걸 핑계 삼아 좀 더 대담하게 질문을 던진다. 아직 김효진이랑 말도 제대로 안 해봤으면서 나 혼자 김칫국 마시는 게 좀 웃기긴 하지만. 그러나 내 기대와 달리 이승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 왜요? 안 헤어지고 잘 사귀면 되잖아요.” “그게 쉽지 않으니까 문제지. 근데 갑자기 왜, 누구랑 과씨씨 하게?” “그게 사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한 학번 선배고, 이름은 김효진. 그리고 같은 과다. 그렇게 답하려는데 이승준이 되도 않는 말로 선수를 친다. “아 설마,” “......” “알겠다.” “뭘요?” “그럴 줄 알았어.” “에엥?” “너네 둘이 사귀지?” 덕분에 술이 확 깬다. 이승준은 잘 나가다가 꼭 한 번씩 저런다. 그런 게 절대 아니라는 걸 이제 잘 알만도 한데 아직도 가끔 저런다니까. 부정의 표시조차 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 고개를 저으며 시원하게 잔에 남은 술이나 털어냈다. 뜨거워진 볼의 열기에 힘입어 말한다. “그런 거 아니고 저...” “......” “좋아하는 사람 생긴 것 같아요.” “...야, 그만 마셔.” 그렇게 말하자마자 이창윤이 내 술잔을 가져가더니 물컵으로 바꿔놓는다. 오늘 술 좀 잘 받는 것 같아서 좀 더 마셔보려했더니만. 반면에 이승준은 듣자마자 불길하게 씩 웃는다. “그래, 창윤이겠지.” “그냥 말 안할게요.” “아 알았어 알았어, 말해봐. 누군데?” 나를 달래며 들어나 보자라는 눈으로 이승준이 흥미롭게 본다. 반면에 창윤이는 옆에서 듣고 있긴 한 건지 가져간 잔만 만지작댄다. 쟨 이제 엮이는 말에는 타격도 없는 건가. “효진. 김효진이라고, 알아요?” “너네 과 19 김효진?” “어떻게 알았어요?” “알지. 내 친군데. 예전에 같은 동아리 했었어.” 이승준은 정말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왜일까. 둘이 아는 사이라는데 이상하게 내 가슴이 뛰어온다. “근데, 하필 또 힘든 상댈 골랐네.” “왜요?” “효진이 워낙 인기 많아서 경쟁자 많을 텐데.” “역시 그렇구나...” 예상은 했지만 들떴던 기분이 축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얼마만의 짝사랑인데. 이렇게까지 이상형에 들어맞는 사람은 처음인데.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알게 된 진 얼마 안됐지만 그 짧은 순간에 나는 운명이라고 느꼈으니까. “그러지 말고 좀 도와주면 안돼요?” 답지 않게 부탁하는 투의 내 말에 이승준이 잠깐 고민하더니 입을 뗀다. “도와줄까?” 근데 이상한 건 내가 아닌 이창윤을 보면서 묻는다는 거다. 끄덕일 준비는 다 돼있었는데 그걸 왜 얘한테 묻지. 이유를 몰라 알쏭달쏭하기만 한데 술을 좀 마셔서 그런가 머리가 잘 굴러가질 않는다. “...둘 다 너무 많이 마셨다. 뭐라도 좀 사올게.” “갑자기? ...그럼 나는 메로나!” 또 얘는 왜 뭔 일 있는 것 마냥 표정이 별로고. 갑자기 일어나더니 자리를 뜬다. 메로나를 외치는 이승준 목소리와 함께 어지러운 시선을 따라 창윤이가 멀어진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리곤 진짜 도와주면 안돼요? 그럼 이제 안 놀릴게요 네? 하며 이승준의 대답 재촉하기를 이어갔다. “아 근데 이게 도와줘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왜인지 머리 아프다는 식으로 중얼거리더니 진짜 후회 안해? 이승준이 묻는다. 당연하죠. 후회를 왜 해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러니까 결국 그는 한숨을 내쉬며 그래 그럼, 체념한 듯 대답한다. 난 모르겠다라는 어투로. “그럼, 한 번 불러볼까?” “네? 어, 이렇게 바로요? 누구...를요?” “효진이.” 주량보다 더 마신 건지, 아니면 오늘따라 빨리 취한 건지.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 “어 창윤아 난데 그 효진이 있잖아, 불러도 돼? 응, 여기로.” “.....” “취해가지고 자꾸 도와달라는데 어떡해.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어 어 알았어. 그럼 부른다.” 폰을 꺼내든 이승준이 전화를 거는 모습이 마지막인 채로 엎드려 잠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뺨에 닿는 찬 공기에 잠에서 깼다. 최근에 이창윤이 뿌리던 향수와는 사뭇 다른, 처음 맡는 기분 좋은 향과 함께 내 오른쪽에 누군가 앉았다. 부스스 고개를 든 내 눈에 들어온 그 누군가의 모습은 사고회로를 3초 간 정지시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진짜... 김효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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