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의 법칙_01] 어느덧 저물어가는 해가 하늘을 주황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한 시각. 그럼 다음 시간에 봅시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다들 기다렸다는 듯 강의실 뒷문으로 쏟아져나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잠깐 손 내놓고 있으면 금방 시리더니 이제 진짜 봄이긴 봄인가보다. 길게 늘어진 해를 따라 한결 부드러워진 바람이 살살 불어오고 휑하던 나뭇가지에도 조금씩 하얀 꽃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동아리들도 새 동아리원을 모집하기 위한 홍보가 한창이다. 지나가는 길목의 한 가운데서 달달한 노래를 불러대는 밴드부의 버스킹 공연을 비롯해 손잡고 캠퍼스를 누비는 커플들. 그야말로 대학은 낭만이 들어차있다. 대학가면 다 연애한다는 말에 대한 신뢰도는 이미 추락한지 오래였지만 이러면 또 한 번 희망을 품고 싶어진다. 아무래도 사랑을 시작하기 딱 좋은 타이밍. “와 미쳤다, 진짜였어.” “뭐가?” “진짜 같은 과였다고...” “누구... 아 설마, 또 그 사람?” 착각일지 몰라도 내게도 그럴 거라고 믿고 싶은 날이었다. 옆에서 걷던 이창윤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뱉는 내 중얼거림에 쳐다보지도 않고 되묻더니 곧 뭔가 깨달은 듯 걸음을 멈칫한다.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지금까지 내 짝사랑 연대기의 가장 오른쪽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 며칠 간 수없이 되뇌었던 이름이다. 그 이름을 떠올리면서 슬며시 고개를 끄덕이니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던 이창윤은 다시 멈췄던 걸음을 뗀다. “너 요즘 계속 걔 얘기만 한다?” “걔라니. 우리보다 한 살 많다니까?” “한 살 많다고 뭐. 너 승준이 형은 선배 취급도 안 해주잖아.” “야. 내가 언제!” 발끈하여 큰 소리 내봤지만 전부 맞는 말이었다. “근데, 우리 과라고? 이름이 뭐였더라. 김현진?” “아니. 효진, 김효진!” “아아. 그거나 그거나.” 벌써 몇 번째 정정해주는 건지 모르겠다. 이효준부터 김현진까지 딱 김효진만 빼고 다 나왔다. 그게 어떻게 그거나 그거나야. 김현진과 김효진은 엄연히 다르다고. 열을 내는 나를 보더니 이창윤은 뭐가 재밌는 건지 속도 모르고 웃는다. 그 모습을 보니 왜 윗학번 언니들이 얘 새내기 때 귀엽다 귀엽다하며 죽고 못 살았는지 대충 알겠다. 인정하긴 싫지만 웃는 거 하나는 좀 귀엽긴 하다. “너도 취향 한 번 한결같다.” 그런 이창윤과 친구가 된 지도 벌써 5년이 다 되어간다. 함께한 시간이 쌓인 만큼 서로에 대한 데이터 역시 무의식 속에 쌓여있다. 어쩌면 당연한 거다. 그치만 특히나 이창윤은 이렇게 신기할 정도로 나를 전부 꿰고 있다.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게 한편으로는 좀 문제지만 아무튼. 이성에 눈 뜨기 시작한 고2 무렵부터 내 이상형은 단 한 번의 흔들림 없이 확고했다. 끝이 올라간 눈매에 쌍커풀이 진 예쁘게 생긴 남자. 거기다가 조곤조곤한 말투에 다정한 성격을 가진. 한 마디로 맨날 놀리기만 하는 내 옆의 이 녀석과는 정반대인 사람이다. 몇 번인가 이상형에 가까운 사람을 만난 적도 있었으나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소심해지는 성격 탓에 주구장창 짝사랑만 해왔다. 그 비하인드 스토리 하나를 꺼내보자면 한번은 그랬다. 바야흐로 앞자리수가 1에서 2로 변하던 시점. 수능이 끝난 후 같은 반이었던 남자애에 대한 오랜 짝사랑을 청산하려던 날이었는데 그 애가 고백을 선수 치는 바람에 직접적으론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시원하게 까였다. 그것도 그 애의 짝사랑 상대는 학교에서 제일 예쁘기로 소문난 연수라는 여자애였다. 차이고 공원에 혼자 남아있자니 울적한 마음에 이창윤을 불렀더니 한 걸음에 달려왔다. 그러고는 자기가 더 불같이 화를 냈다. ‘찼다고 걔가? 아니 고백은 언제 했는데. 너 고백할 거라고 나한테 말도 안했잖아.’ ‘아니야. 고백 안했어. 정확히는 못한 거지. ...먼저 나한테 도와달라고 하더라. 자기 연수 좋아한다고.’ ‘뭐? 미친 거 아니야?’ ‘됐어. 그럴 수도 있지. 걘 내가 자기 좋아하는 거 몰랐으니까.’ ‘넌 이 상황에서도 걔 편이 들고 싶냐. 티도 많이 냈으면서...’ ‘......’ ‘...그리고 정연수보다 네가 훨씬 나은데.’ ‘...빈말이라도 고맙다...’ ‘빈말아니고 진짜야. 걔 눈 이상해. 그러니까 그런 앤 잊고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 그렇게 바보같이 지켜보기만 하다가 짝사랑이 끝나버린 날에는 꼭, 그래도 친구라고 이창윤이 옆에서 우울해있던 내 기분을 풀어주곤 했다. 그건 좀 고마웠다. 아무리 친구라 해도 맨날 짝사랑얘기 들어주고 차일 때마다 족족 위로해주는 게 절대 쉬운 일은 아닌데. 아 그 얘긴 됐고 어쨌든, 그게 반복되다보니 자연스럽게 이젠 더 이상 누굴 섣불리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게 된 거다. 그런데 정확히 이주 전, 교양 수업시간에 손을 들어 교수님께 질문을 하던 김효진을 처음 봤다. 완벽한 내 이상형이었다. 첫 눈에 반한 걸 이미 돌이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난 또 한 번 그 지겨운 짝사랑을 다시 시작해버리고야 말았다. “오늘 발표하는 거 봤지, 우리 교수님 완전 깐깐하댔는데 칭찬만 듣고... 발표도 완전 잘하지 않아? 진짜 사람이 어떻게 그래?” “집중 안 해서 잘 모르겠는데.” “효진 오빠는 진짜 못하는 게 뭘까. 아 목소리도 완전 내 스타일이었...” “야야, 승준이 형 기다려. 빨리 오기나 해.” 찬물 끼얹는 소리는 무시하고 좀 더 이어보려는데 말을 끊고 옷소매를 질질 잡아끈다. ...이거 오늘 처음 입은 건데. 최근에 좀 불편해지지만 않았어도 가만 안 뒀다 이창윤. 사실 요즘 들어 이창윤이 좀 변했다. 제대한지도 벌써 두 달이 다 되어 가는데 군대 갔다 와서 폼을 잡는 건지, 아님 철이 든 건지. 확실히 어느 쪽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느낀 몇 가지 그의 변화를 이야기해보자면, 먼저 마냥 철없는 남고생 같기만 하던 스무 살 때와 달리 분위기가 한결 어른스러워졌다. 또 옷도 꽤 신경 써서 입는 것 같고, 향수를 뿌리고 다니기 시작한 건지 조금 가깝다 싶으면 은은하게 좋은 향이 풍기기도 한다. 잠시만, 이런 변화는 보통... “야, 너 요즘 여자 생겼냐?” 그래, 원래 이런 변화들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거나, 썸타는 사람이 생겼거나. 뭐 대충 그럴 때 나타나는 변화다. 짚이는 대로 앞서 걸어가던 창윤이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장난 식의 질문을 던졌다. “...뭐?” “...장난이잖아, 왜 그래...” 그런데 예상과 달리 표정이 좋지않은 이창윤. 그와 함께 우리에게는 잠시 동안의 정적이 흐른다. 그의 어깨에 둘렀던 내 팔도 스르륵 떨어지고 만다. 변했다는 게 바로 이런 거다. 원래 같았으면 ‘너보단 많아.’ 라든가, ‘그랬으면 좋겠네.’라든가. 이런 식으로 어떻게든 웃어넘겼을 텐데 요즘은 이상하리만큼 자꾸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들어가자. 승준이 형 기다리다 지쳐서 먼저 먹고 있대.” “어...? 어... 그래.” 어색해진 와중에 어느새 도착했는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말을 돌린다. 다시 웃는 걸 보니 그나마 좀 긴장이 풀린다. 근데, 아까는 왜 그런 표정을 지었던 건데. 곱씹어도 모르겠다. 복잡해진 마음은 고개를 흔들어 지워버리고 이창윤의 뒤를 따라 치킨 집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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