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 My Rainbow
; The finale
11.5 Winter Cherry Blossoms
울고 싶은 순간들이 있었다.
눈 쌓인 캠비 브릿지를 달리는 99번 버스에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읽을 때면 그 애 생각이 났다. 차디찬 사막에서 기꺼이 내게 내어준 최초의 숨결이 그러했고, 슬프지만 비극적이지 않길 바라는 최후의 안녕이 그러했다. 창밖 강가 물비늘이 반짝이는 오후가 되면 행복의 약을 먹고 흔들리는 차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새벽에는 푸로작, 스틸녹스, 아빌리파이같은 녹지 못한 행복이 목구멍을 타고 뿌연 변기에 빨려 들어갔다.
그날은 처방된 20mg보다 네 알을 먹고 다시 잠에 들었다. 다음날은 현관 비밀 번호를 까먹어 열쇠 수리공을 불렀다. 시간당 $20불짜리 테크니션은 폭설에 도로가 막혀 다운타운에서 출발해도 세 시간은 족히 걸릴 거라고 에둘러 거절했다.
96……
96… 4……?
캐나다산 도어락은 열 번 만에 리셋 락이 걸렸다. 다른 수리점도 올 수 없는 이유를 날씨로 그럴듯하게 설명했다. 화는 죄 없는 문으로 향했다. 걷어찰 때마다 부츠 밑창에 달라붙은 까만 눈이 징그럽게 흘러내렸다. 로비에서 올라온 시큐리티가 신분증을 요구했다.
YOUR ID. FOR RESIDENTS.
내 지갑.
지갑을 어디에 뒀더라…….
가방에 있어야 할 물건이 없다. 코트 안쪽 주머니는 쓰다만 메모장과 펜이 전부다. YOUR ID! 강압적인 목소리에 시멘트 바닥에 가방을 털었다. 컴패스 카드, 빈 약 봉지, 열린 립스틱이 축축한 복도에 나뒹굴었다. 울컥 눈물이 찼다. 옆집 파란 눈 아줌마가 아이를 안고 다가왔다. 내 이름을 부르며 사막처럼 차디찬 바닥을 헤집는 손을 잡았다.
지갑을 분명히 가방에 뒀는데 어딨는지 모르겠어요. 아까 점심 먹고 회사 들어가서…… 아니 점심은 안 먹었어요… 저녁에 버스 카드 찍고…… 아 맞아요. 콜택시를 불렀었어요. 아줌마랑 아까 베란다에서 인사했잖아. 맞아, 인사 했었어. 근데 제가 지금 비밀번호를 모르겠거든요. 기억이 안 나요. 숫자를 모르겠어요. 그냥… 그냥 지갑이 없어져서…… 경찰을 불러야 할 것 같아요. 정말 죄송한데 주소 좀 알려주실래요? 여기 주소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한국어로 되뇌인 건 어쩌면 가장 보이기 싫었을 내 밑바닥을 숨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약물 부작용이죠. 기억 장애는 처방 전에 충분히 설명 드렸는데 이것도 기억이 안 나세요? 한인 간호사는 카운터에서 비쩍 마른 미간을 좁히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예약 없으시면 진료 안 되세요. 패밀리 닥터 소견증 없으시면 적어도 3주는 기다리셔야… 저기요, 듣고 계세요?
키칠라노 해변에 앉아 저무는 태양을 보고 있노라면 붉은 살갗에 그 애가 타올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온몸에 화상을 입히는 그 애가 사무쳤다. 어린 왕자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혼자 모래사막을 걸었던 그 밤, 막힌 싱크대 배수구에 가진 행복을 모두 녹여 보냈다. 내 행복은 더 이상 이곳에 있지 않았다. 빈 약통과 처방전을 구겨 휴지통에 버렸다. 냉장고에 붙인 도어락 비밀번호 961122는 스카치 테이프로 두 번 붙였다. 작년 겨울의 일이었다.
승관이가 준 건데 이렇게라도 써야겠다.
그 애는 내 코까지 목도리를 둘렀다. 두꺼운 실에서 같이 잠을 잘 때 풍기는 좋은 냄새가 났다. 야간 폐장 30분 전 들어온 차는 가장 높은 곳에 멈췄다. 뜨거운 보닛에 앉아 절벽 위에 핀 하얀 절정을 숨으로 들이켰다. 정량보다 더, 과다로 기억을 잃어도 좋을 호흡으로.
아침에 여기 입장권 찾느라 늦게 나왔어. 차 청소한다고 뒤집다가 밖으로 떨어진 것도 모르고.
동그란 귀를 조물조물 만지며 촘촘한 속눈썹을 깜빡인다. 가만히 손을 잡으면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는 그 애는 내 눈 속에 핀 영원한 절정.
사실 인터뷰 했을 때 말 안 한 거 있어.
뭔데?
건축 하는 진짜 이유.
광활한 설원 아래 낮은 지붕과 알전구가 한데 엉켜 깜빡이는 밤, 샹들리에를 닮은 그 애의 음성이 바깥으로 한 올씩 벗겨졌다.
우리 고등학교 다닐 때 내가 일부러 시험망치고 너희 집 찾아갔던 날 있잖아. 너는 너 때문에 시간 뺏겨서 그렇게 된 거라고 울고 있는데, 나는 이상하게 계속 그 집이 차가운 거야.
내가 올 때까지 저 깜깜한 방에 혼자 있었나. 거실에는 왜 온기가 하나도 없을까. 꿈을 찾지 못하면 같이 도망쳐주겠다는 대답이 왜 이렇게 아프고 서럽게 들릴까. 도망치고 싶은 사람이 혹시 너는 아닐까. 또 밤이 되고 내가 떠나면 이곳에 혼자 남아서 어떤 생각을 할까.
한 달에 두 번은 아버지가 서재에 계셨는데 어느 날 내가 그랬어. 아버지처럼 집을 짓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나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그러시더라. 그 전에 네 인생에서 어떤 집을 짓고 싶은지 한마디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따뜻한 집이요.
설령 혼자 있어도 차갑지 않고 외롭지 않은 집이요.
처음으로 꿈에 대해 망설임이 없었는데, 왜 그런지 생각해 보니까 그 꿈에는 네가 있더라고. 언젠가 직접 창을 내고, 문을 달고, 해가 드는 테라스에서 네가 책을 읽고, 그 목소리를 옆에서 내가 듣고 있다면, 그 꿈을 이룰 수 있다면 여기서 죽지 않고 조금 더 살아봐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더라.
지겨운 시험에 악착같이 매달린 것도, 실무라면 가리지 않고 집착한 것도, 무리해서 공모전에 나간 것도…… 사실은 다 너야. 어느 날 네가 돌아오면 말해주고 싶었어. 화려하고 멋진 구조는 아니어도 네가 원하는 집, 꿈꾸는 공간은 내가 직접 짓게 해달라고.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그 애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아버지는 내 꿈 응원해준 유일한 가족이야. 그것 때문에 아버지 회사에 들어가서 잠깐 도와주는 것뿐이고. 아마 내 인터뷰 나가면 경영 수업이다, 승계다, 하다못해 주식 때문이라고 별별 이야기 다 돌 거야. 그래도 내가 인터뷰를 했던 이유는…… 내 이름 옆에 네 이름도 같이 있으니까. 같이 있으면 하나도 안 무서워.
하얀 정경을 닮은 그 애의 눈이 내 뺨과 콧볼과 가려진 입술을 훑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예전처럼 혼자 도망가지 마. 힘들면 내 뒤에 숨어. 지켜줄게. 혼자 아파하는 건 너무 오래 했잖아. 나도 내 일 끝나면, 마지막으로 끝내고 나면 우리 그땐 어디든 가자. 너 먹고 싶은 해파리도 내가 책임질게.
사무쳤던 목소리가 환상이 아님을 깨달았을 때, 감은 목도리를 벗어 그 애를 엉성하게 말아 품에 와락 안았다. 그 애가 웃는다. 내가 찾던 행복의 약이었다.
갑자기 왜 그래.
그냥.
그냥 안고 싶었어?
응.
아빠와 은수처럼 그 애도 내 곁을 떠나지 않을까, 그 불행한 마음이 사랑까지 잡아먹지 않을까 두려웠던 시간이 있었다. 결국 그 애의 사랑을 동정과 연민으로 치부하며 돌아선 낯선 땅에서, 난 매년 그 애의 생일이 되면 속죄를 했다. 내가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외로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그래서 그 애와 이별하는 일을 처음부터 가슴에 품고 있지 않았더라면…… 케이크 초가 녹아 시트에 엉길 때까지 돌이킬 수 없는 후회만 되풀이했다.
이제라도 한 품에 들어오지도 않는 널따란 등을 품으며 고백한다. 7년을 집어삼킨 못난 내가 아직도 널 사랑한다고.
뒤늦은 고백. 그런 고백.
“그 시간이 있었으니까 지금 네가 이렇게 내 앞에 있는 거야.”
“애초에 내 감정이 동정이고 연민이라고 네가 느꼈으면 진작 너 나 만나주지도 않았어.”
“내가 너보다 널 잘 아는데 그거 하나 모를까.”
그 애는 말했다. 내겐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라고. 돌이켜 보면 7년은 서로를 기다리는 시간이자 서로를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었다고. 필요한 시간을 거쳐 돌아온 거리만큼 내년 겨울에도 이상한 벚꽃이나 많이 보러 오자고 어쩌다 목에 죄인 목도리를 밑으로 당기며 그 애가 띄엄띄엄 말하며 웃었다.
“그동안 나만 기다린 거 아니야. 너도 거기서 나 기다렸잖아.”
지난 겨울 시멘트 바닥을 헤집으며 찾고 있었던 건 때 묻은 낡은 지갑이 아니라 그 지갑 속 그 애의 사진이었음을 그때서야 알았다. 지구 반대편으로 도망치고 숨어도 그 애는 언제나 지금처럼 내 옆에 있었다는 것도.
“내가 본 겨울 중에 제일 예쁘다.”
그렇기에 그 애는 환상 같다. 다만 지워지지 않고 오래 남는 환상이다.
Personalteam@greenage.headquarters.ca
As discussed, we are happy to officially promote you to Senior Web Media Planning Manager as of the next June.
Attached you will find your updated contract that contain your new employment terms along with your compensation package and benefits.
We appreciate your hard work and commitment to the Greenage Canada for the past 3 years. We are all looking forward to seeing you achieve great things in your new role.
Congratulations!
Best regards,
Jessi Real | Personal Team Manager
889 Georgia street, Vancouver, B.C. V5Y 0E7
Tel: (604) 209-7111
Fax: (604) 769-9188
The8asis_official@greenage.ca
잘 지내지?
회사 메일 체크했는지 모르겠지만 미리 축하해 주고 싶어서 보내.
본사 미디어 기획팀, 아마 당신이 될 것 같아.
그동안 준비한 포트폴리오 힘이 컸어. 한국 가기 전까지 나랑 밤새서 준비했던 거 기억나지?
6개월 뒤 한국에 남든, 내 옆으로 돌아오든 당신 몫이라고 했지만 3년 동안 열심히 일한 이유 누구보다 내가 잘 아니까 아까워서 말이야.
생각 정리해서 돌아오면 알려줘.
나의 분신, 그럼 2월에 봅시다.
우리는 항상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다. 어느 길을 가든, 책임은 오로지 내 몫이다.
시간 다 됐다. 내려갈까.
……응.
전등이 꺼진다. 가로등이 내려앉는다. 라디오에서 푸른 새벽 <Last arpeggios>를 들었다. 그 애는 기다림을 참기 힘든 날이면 가끔 이 노래를 떠올렸다고 지나간 시간을 말했다.
차창으로 고개를 돌려 눈을 감는다.
참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