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e: 새로 고침
별이 떨어진다면 당신이 있는 공간으로
- 성동혁, 1226456
그때처럼 네가 말없이 떠났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버려진 순간은 평생 남거든.
지훈의 머리맡에 얼굴을 묻는다. 내 눈물은 낙하도 없이 침대 시트를 적셨다. 영영 깨어나지 않을 것처럼 눈을 감은 작은 얼굴 앞에서 속죄하듯 무릎을 꿇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상쇄할 수 없는 죄였다.
차가운 손길이 뜨거운 지훈의 이마를 감싼다. 한 시간 전 연락을 받고 달려 온 정한이었다.
― “긴장이 갑자기 풀리면 몸에 경련이나 열이 와. 해열제 넣었으니까 시간마다 체크하고 날 밝으면 뭐라도 좀 먹여.”
넥타이와 시계를 푼 정한은 그대로 소파 밑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혔다. 병원 복직 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음이라. 그럼에도 지훈의 신음이 들릴 때면 정한은 지체없이 눈을 떴다. 어느덧 밤이 찾아왔다.
― “우리 잠깐 나갈까?”
테라스에서 담배를 문 정한은 주머니를 뒤적였다. 맞다, 나 어제부터 금연이었지. 텅 빈 주머니에 멋쩍은 듯 웃으며 흰 대를 말아쥔다. 이내 난간에 기대어 머리를 쓸어넘겼다.
런던에서 모레나 돌아온다더니 콩 스프가 어지간히 맛도 없었나 봐. 그렇지? 소파 위 지훈의 여권과 짐가방을 보며 정한이 말했다. 그 한 마디에 겨우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위아래로 엉겨 붙는 발음으로 무엇을 설명했는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정한 앞에서 그렇게 울었던 것 같다. 십 년 가까이 바뀐 적 없었던 지훈의 번호를 망각한 사실까지도. 정한은 내 어깨를 다독였다.
― “휴대폰이 망가진 것도, 제때 연락하지 못한 것도 여주 네 의지가 아니었잖아. 하루에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얼마나 많은데. 오늘도 그런 하루 중 하나였던 거야.”
……
― “지금은 자책 말고 다짐. 앞으로 어떤 순간이 찾아와도 오늘처럼 옆에 있겠다는 다짐 말야. 오늘은 그 마음이면 충분해.”
정한은 약물 부작용에 대해서도 위로하듯 말을 건넸다. 천천히 나아지면 돼. 시간이 좀 더 필요할 뿐이야. 달빛에 번진 불빛과 희미한 경적이 들리는 밤, 정한은 다시 조심스레 입술을 뗐다.
― “오는 길에 기사 봤어. 이모 정치질 열심히도 하셨더라.”
……
―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여주 넌 알고 있어야 해. 경영도 약혼도 지훈이 진심은 하나도 없다는 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알고 있어요. 젖은 눈가를 손등으로 닦아낸다. 정한의 선명한 눈빛이 보였다.
― “소중한 걸 지키는 건 당연한 거래. 자기한테는 너, 네 인터뷰가 그렇다고.”
― …….
― “지훈이 끝까지 믿어줘. 여주 널 위해 하고 싶다는 건축이라는 꿈, 그렇게 쉽게 버릴 애는 아니니까.”
정한은 K건설 기념식에 날 초대했다. 단독 기사의 사실 여부로 지훈에게 기자들이 대거 몰릴 예정이니 자신의 파트너로 옆에 붙어있으라는 얘기였다. 정한은 장난스레 말했다.
바늘이 가는 데 실이 가지 않으면 서운하잖아. 그날은 지훈이가 많이 바쁠 거야. 대신 내가 옆에 있어 줄게. 잘생긴 반짓고리 하지 뭐.
정한의 시선이 흐트러진 밤별로 향한다. 어린 빛을 좇는 얼굴에 점차 그늘이 드리웠다.
― “요새 지훈이 잠은 잘 자니? 저번에 처방한 약은 보다시피 아예 뜯지도 않은 것 같아서.”
정한은 외투 안에서 플라스틱 마감 덮개가 달린 약통을 꺼냈다. 그냥 내 습관이야. 지훈이 집에 올 때마다 약이 얼마나 줄었나 확인하는 아주 오래된 습관. 정한은 라벨에 붙은 지훈의 이름을 엄지로 쓸었다.
― “한 번에 끊기 어렵다고 말했는데도 끝까지 제멋대로야.”
― “…….”
― “이젠 너 있어서 복용할 이유 없다고 의사처럼 굴더니 진짜 의사 말은 코빼기도 안 들어먹었네. 요 환자를 어떡하면 좋을까.”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는 정한이라 한들, 제 동생 앞에서는 알약 개수를 확인해야만 하는 걱정 많은 형이었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문득 정한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게.
― “제가 옆에서 잘 돌볼게요.”
― “들었던 말 중에 가장 듣기 좋은 말이네.”
― “계속, 꼭 그럴게요.”
― “고마워.”
고마워.
저 단어에 함축된 정한의 마음을 감히 헤아릴 수 있을까. 지훈의 손을 놓지 않고 나의 부재를 함께 견뎌 준 그에게 나 또한 고맙다고 주제넘게 말할 수 있을까.
오래전부터 내 옆에 승관이가 있었듯 지훈이에게도 정한이 있었음을 여실히 깨닫는다. 한결같이 그 애를 지켜주는 이가 있었음을, 눈시울이 붉어진 정한을 보며 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안도를 느꼈다.
― “내 동생 잘 부탁해.”
병원 콜을 받은 정한이 문을 나섰다. 그 틈으로 까맣게 물든 어둠이 안으로 스며들었다. 지훈의 손을 잡은 채 선잠에 들길 여러 번, 뺨을 어루만지는 촉감에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젖은 눈으로 날 바라보는 지훈이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내가 당신에게 어떤 존재이며, 당신 또한 내게 어떤 존재인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함께 거쳐온 시간의 잔상을 눈물로 흘려보내며 그대에게 조용히 입을 맞춘다. 지훈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널 다시 만났을 때.
네 번호를 쓰고 지우길 반복했을 때.
비가 내리는 창밖에서 내게 걸어오는 널 발견했을 때.
뜨거운 여름, 한강에서 이름 모를 풀꽃을 내게 건넸을 때.
맨발에 짝짝이 슬리퍼를 신고 들것에 실려 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하는 널 봤을 때.
내게 반지를 다시 끼워줬을 때.
같이 살자고 말했을 때.
사랑을 속삭이는 맑은 네 눈을 봤을 때.
내려앉지 못한 지훈의 달뜬 숨이 밖으로 흩어진다. 현실과 꿈의 경계가 모호한 그 애는 끝내 나를 울렸다.
― “꿈이라도 넌 아프면 안 되지.”
……
― “보낼 수가 없잖아.”
꿈에서조차 너에게 난 늘 떠나는 사람이었음을.
그 꿈에서조차 당신은 늘 떠나보내는 사람이었음을.
To: The8asis_official@greenage.ca
미디어 기획팀 오퍼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제 자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물러나게 된 점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또한 본사의 요청으로 다음 달 12월 귀국 요청을 받았으나 일정에 무리가 없다면 예정대로 내년 2월까지 마무리를 짓고 싶습니다.
본사 퇴직과 인수인계를 포함한 차후 계획은 그때 직접 만나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실망을 드리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그때처럼 네가 말없이 떠났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버려진 순간은 평생 남거든.
내 동생 잘 부탁해.
[메일이 전송되었습니다]
Oh My Rainbow
; The Finale
13. 선언
11월 21일.
D-day.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숱한 좌절을 맛보고도 감히 오늘을 증거로 말한다. 대한민국 잡지 몰락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그린 에이지 코리아 특별 호는 백만 부를 찍었다. 한때 존속 위기의 불명예를 안았음에도 굴복하지 않은 라이프 스타일 팀은 역경을 딛고 제자리를 찾았다.
편집장실에서 나온 라이프지 팀장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팀원들과 얼싸안았다.
― “여주 씨 없었으면 우리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어. 여주 씨 덕분이야. 정말 고마워.”
긴 터널을 벗어난 그들을 뒤로하며 사무실을 나섰다. 빌딩 앞에 정차한 아우디가 날 향해 짧은 경적을 울렸다. 하얀 정장을 빼입고 운전석에 앉아있는 정한이었다.
― “K건설 기념식인데 누가 보면 쌤 결혼식인 줄 알겠어요.”
― “나야 좋지. 두 번째는 정말 잘할 자신 있거든.”
정한의 아우디가 광화문을 빠져나간다. 막히는 차선을 잘도 빠져나가면서도 정한은 자신의 용모 체크를 놓치지 않았다.
― “역시 병원에만 있기에는 너무 아까워, 그렇지?”
― “자의식 과잉도 심하면 병이에요.”
― “그런 병이면 유병장수도 좋겠다.”
― “지훈이도 쌤 말기인 거 알아요?”
― “자기 죽기 전에 꼭 치료법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다정하게 위로해주던데?”
― “욕을 하진 않던가요?”
― “다정한 욕은 큰 범주의 위로 아닐까?”
고속도로로 들어서자 10년 무사고 경력 정한의 운전 스킬이 빛을 발했다. 막힘 없이 도로를 비집던 정한이 묻는다.
― “김여주, 준비됐어?”
― “윤정한, 너도 준비됐어?”
― “넌 시아주버님을 그렇게 부르면 돼?”
― “저희 호적 따로예요.”
― “아직도?”
― “아직도라뇨?”
― “은근히 진보적이지 못하다니깐.”
한 시간가량 고속도로를 질주한 정한의 아우디는 성남 파크온 빌리지에서 멈췄다. 대기 중인 발렛 요원에게 차키를 건넨 정한은 조수석 문을 열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런 정한을 훔쳐보는 주변의 시선이 짙어진다. 누구의 말대로 역시 병원에만 갇혀있기엔 조금은 아까운 피사체였다.
―“취향대로 입힌 건데 보면 볼수록 여주 옷 같네?”
― “제 옷걸이가 융통성이 좀 있어요.”
― “대답도 맘에 들어.”
― “저희도 팔짱 껴야 해요?”
― “저야 영광이죠.”
― “혹시 저 긴장한 거 티 나요?”
― “CT 찍기 직전에 긴장하는 환자분들 많이 봤어. 익숙해. 괜찮아.”
― “여기서도 병원 생각밖에 안 하시죠?”
― “이래서 선을 봐도 애프터가 다 꽝이야.”
정한의 배려에 서서히 긴장이 풀릴 무렵, 기념식 행사장 입구에서 직접 게스트를 맞이하는 Y코스메틱 회장이 보였다. 정한은 화환 뒤로 몸을 숨기며 덩달아 나를 잡아당겼다.
― “오늘 우리 컨셉 눈막 귀막이라고 말했었나?”
― “네? 아니요?”
― “뻔뻔하자. 뭐랄까, 20년 동안 독재 정권을 누리며 살아온 고약한 성주 같은 얼굴?”
― “그런 얼굴이 뭔데요?”
― “감을 못 잡겠어?”
― “전혀요?”
― “사랑해.”
― “미쳤어요?”
― “좋아, 뻔뻔하고 성깔 있어 보여. 가자.”
화환 앞으로 모습을 드러낸 정한의 걸음이 점차 빨라진다. 뻔뻔하고 성깔 있는 자신과 나를 자랑하고 싶은 반항적인 욕구였다. 코스메틱 회장은 광기 어린 정한에게 다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 “사모님, 남들 다 실패한 아드님 인터뷰 여기 있는 김여주 씨가 따냈는데 어떻게 초대장 하나를 안 줘요? 너무 날로 먹는 거 아니야?”
― “윤정한.”
― “그래서 내가 데려왔어. 우리 엄마 다음으로 내가 사랑하는 여자야. 예쁘죠.”
― “너 미쳤니?”
― “별말씀을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한의 가벼운 목례가 이어진다. 주변 시선에 어쩌지 못하고 분만 삭히는 그녀에게 보란 듯이 상냥하게 웃는 정한이었다. 기념식에 입장하자 정한에게 꽂히는 시선이 더더욱 많아진다. 정한은 플루트 잔에 담긴 샴페인을 마시며 말했다. 지금부터 악당들이 몰려올 거라고.
남 얘기 씹어먹길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정한은 좋은 먹잇감이었다. 자신들을 정한의 친구라고 소개한 그들은 팔려 가듯 해치운 결혼, 전처의 바람, 소송, 법정 싸움, 항소를 들먹이며 정한을 무자비하게 찔러댔다. 하지만 정한은 그들의 무례함에도 상냥함을 잊지 않았다.
― “저기 봐봐. 우리 동생 찍겠다고 기자들 몰려온 거 보이지? 가만 보자. 넌 돈세탁해서 주식하고, 넌 공금 횡령해서 양주 따고. 심심한데 같이 가서 이야기 더 해볼래?”
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세브란스 외과 의사였다. 정한은 눈치만 보는 그들을 지나쳐 자리를 빠져나왔다. 이내 샴페인이 야자수 꼭다리 맛이라느니, 파티장에서 1303호 환자의 로션 냄새가 난다느니 아무렇지 않게 화제를 돌렸다. 진심이라기엔 쓰리고 가면이라기엔 애달픈 그 미소로.
― “전화 온 것 같은데?”
― “잠시만요.”
야외 테라스에서 발신자를 확인했다. 직책을 거절하겠다는 내 이메일을 받고서 반 미쳐버린 부편집장 디에잇이었다.
「운이 좋아서 오는 기회 아니야. 아무한테나 주는 포상 같은 것도 아니라고. 당신이 이 회사에서 쌓아 올린 걸 생각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면 난 너무 실망스러울 것 같아.」
……
「그 자리 당신 거야. 당신 아니면 아무도 못 해.」
내가 그 자리를 가져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부편집장은 영어와 한국어를 반반씩 섞어가며 나를 설득했다. 행사장으로 들어온 이후에도 부편집장의 연락은 끊이질 않았다. You deserve it. 본사로 돌아와 자신과 일하자는 문자를 옆에서 정한이 훔쳐본 게 문제였다.
― “여주를 나만 사랑한 게 아니네.”
― “지훈이한테는…….”
― “판교는 어떡하지.”
― “판교요?”
― “으응, 아니야.”
그 순간 조명이 중앙에 집중됐다. 마이크를 들고 단상에 오른 K건설 관계자가 사운드 부스에 신호를 보냈다. 기념식장 한쪽에서 실연 중인 오케스트라가 차차 소리를 죽였다. 이 자리에 모인 귀빈과 기자들을 향해 형식적인 인사를 건넨 관계자는 사람들의 박수에 힘입어 자신감 있게 말했다. 본격적으로 기념식을 시작하기 전에 단독 기사와 관련된 긍정적인 입장을 이곳에서 발표하겠다고.
새까만 어둠 속에서 빛으로 나온 지훈의 걸음은 한 치의 망설임이 없었다. 뒤쪽에서 강한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마침내 무수한 시선 앞에 모습을 드러낸 지훈은 되려 초연했다. 두려움이나 불안은 느낄 수 없었다. 수많은 질문을 쏟아내는 기자들 사이에서 그가 마이크를 들었다. 예상치 못한 일은 그때부터였다.
― “이 자리를 빌어 기사와 관련된…….”
지훈은 말끝을 맺지 못했다. 한껏 들뜬 얼굴로 행사장에 나타난 여자가 자신에게 걸어오고 있었으니까. 관계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지훈의 옆에 선 여자는 파파라치 사진 속의 그 여자였다.
지훈은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주시했다. 정한의 시선도 같았다. 멀리서 우아하게 박수를 보내고 있는 코스메틱 회장이었다.
― “끝까지 지독하셔라.”
정한은 인상을 구겼다. 어디선가 나타난 K건설 관계자가 내 손목을 잡자, 정한은 곧바로 남자를 저지했다.
― “뭡니까.”
― “이지훈 씨 약혼녀분께 꽃다발 전해주시는 분 아닌가요?”
― “뭘 전해줘요?”
― “K건설 사모님께서 예의를 갖춰 건네주시라고…….”
정한은 낮게 욕을 뱉었다.
― “가지 마.”
― “…….”
― “하지 마 여주야.”
정한이 내 팔목을 움켜쥔다. 내 멍한 시선은 코스메틱 회장에게 흐른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삶은 그저 엑스트라에 불과하다는 치욕을 주고 싶은 얼굴이었다. 관계자는 나를 재촉했다.
― “보는 눈이 많으니 지훈 씨를 위해서라도 조용히 전해주시고 나가라는 말씀을 하셔서요.”
― “…….”
― “꽃만 전해주시고 옆으로 빠지시면 됩니다. 아셨죠?”
긴 레드카펫의 시작에 서서 물끄러미 꽃을 바라본다. 그래, 빌어먹을 프리지아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노오란 이파리들이다. 열병을 앓던 젊은 날에 사랑한다는 말 대신 지훈과 주고받았던 그 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꽃이, 그 사랑이 결국 다른 이에게 가고 있다.
죽고 살기를 반복하고, 끌어안고, 절대 놓지 않겠다는 다짐에도 불구하고 난 다시 지훈의 반대편에 서 있다. 배경이면 그만일 엑스트라 53의 얼굴을 하고서.
의미 없는 한 발을 뗀다.
그러지 말라는 정한이 보였다.
자조 섞인 한 발을 뗀다.
코스메틱 회장의 미소가 보였다.
다시 쓰러지는 한 발을 뗀다.
레드카펫 끝에서 날 응시하는 지훈이 있었다.
네가 오래된 반지를 내게 다시 끼워줬을 때, 이젠 내가 널 지켜줄 차례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
난 두려울 게 없었어. 이제 마음만 먹으면 모든 게 잘될 거라고 확신한 그런 날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난 또 이 모양 이 꼴이야.
보고 싶었다는 말 대신 명함이나 내밀었던 그때와 변한 게 하나도 없을 만큼.
부딪칠 용기가 없고 낯선 시선이 두려운 나는 또다시 이렇게 말해
― “약혼 축하드립니다.”
여자는 꽃을 받았다. 애써 눈을 마주치지 않고 왔던 길을 홀로 돌아간다. 난 비겁하고 나약했다. 지훈과 여자에게 박수가 쏟아진다. 자리를 박차듯 일어난 정한이 내 쪽으로 다가오다 서서히 걸음을 멈췄다. 정한은 내 뒤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가 날 향해 걸어오고 있었기에.
― “네 거야.”
……
― “다신 뺏기지 마.”
지훈은 여자에게 건넨 프리지아를 내게 떠밀 듯 안겼다. 관중에 가까운 사람들이 술렁였다.
―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끝날 때까지 절대 내 손 놓지 마.”
― “너 지금 뭐 하는…….”
내 머리 위로 정한의 정장 상의가 날아든 건 그 순간이었다. 품 넓은 정장 안에 얼굴이 숨겨지자, 지훈은 곧바로 제 뒤로 나를 숨겼다. 일순간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아찔할 만큼 공격적인 소리였다. 이윽고 지훈의 첫 마디는 진정한 파티의 시작이었다.
― “단독 기사는 제 의사와 무관합니다. T그룹과의 약혼은 사실무근입니다. 올바르지 않은 기사를 정정합니다.”
……
― “K건설 후계와도 관련이 없습니다. 양도성 예금 증서, 그룹 스톡옵션, K건설에 관한 모든 상속 증여는 이미 포기한 상태이며 가까운 시일 내에 자세한 입장 전달하겠습니다.”
코스메틱 회장은 악을 질렀다. 사선으로 고개를 들자 정한은 그녀가 앞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안고 있었다. 지훈은 내 손을 꽉 움켜잡았다.
― “전 건축을 합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제 꿈은 같습니다.”
지훈과 잠시 눈을 맞춘 이 회장은 천천히 자리를 떠났다. 지훈과 비슷한 입매로 미소를 머금고서.
완벽하게 망친 파티장을 달려 나가는 맞잡은 손 하나. 엘가의 사랑의 인사가 흐르는 야외 분수대에서 피날레를 장식할 폭죽이 터졌다.
정한은 떠나가는 그림자를 멀리서 바라보았다.
그는 샴페인을 말끔히 비운 뒤였다.
* * *
인적 없는 바닷길을 걷는다. 외딴 해변가에 불시착한 비행사와 어린 왕자는 서로 곁을 내주며 나란히 걸었다. 생일 축하해. 지훈의 손목에 시계를 채운다. 앞으로의 시간은 온전히 당신 거라는 말과 함께.
코끝을 스치는 바람, 비릿한 바다 냄새, 밀려오는 추억, 언젠가 꿈꿔 온 순간을 직접 맞이한 지금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당신이 내 옆에 있고, 내가 당신 곁에 있음에 더는 소망할 것이 없었다. 비록 지켜온 내 꿈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이 순간을 떠올린다면 그 어떤 것도 후회따윈 하지 않을 만큼.
거센 파도가 몰아쳤다. 지훈은 걸음을 멈췄다. 주황빛 노을 지는 모래사막 앞에서 내 두 손을 잡은 그가 말했다.
― “오랜 시간이 더 지나도, 우리가 전처럼 또다시 엇갈린다 하더라도 내 미래에는 지금처럼 네가 있을 거야.”
……
― “네 미래에도 반드시 내가 있을게.”
……
― “꼭 그럴 테니까,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돌아와.”
그가 날 떠나보낸다.
내가 자신을 택하고 포기한 게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 “네가 날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만큼 나도 네가 너무 소중해. 나 때문에 네가 뭔가를 포기한다면 난 네 옆에서 평생 후회할 것 같아.”
……
― “일을 하면서 누군가가 날 알아준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잖아. 어렵게 인정받고 이제 시작하려는 너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가둬두기 싫어.”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어설픈 핑계를 덮어씌우며 매년 직급에서 탈락되고, 거래처는 내가 늘 말단 직원인 줄 착각했으며, 명함을 줘도 이름을 되묻고는 엉뚱한 발음을 내뱉으며 조롱하던 그 시간을 꼭 옆에서 본 것처럼, 혼자라고 느꼈던 그 순간들을 언제나 나와 함께한 것처럼 그는 말했다.
앙상한 손등의 뼈가 비치도록, 그렇게 놓치면 죽을 것 같은 사람처럼 당신의 손을 잡는다.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내 욕심에 미안해서, 이번에도 떠나는 게 나라서, 그렇게 남겨지는 게 또다시 너라서.
― “기다릴게.”
……
― “내가 기다릴게.”
오래된 반지를 거두고 약지에 새로운 약속을 끼운 그가 말한다.
― “걱정 마.”
……
― “난 건강하고, 네 옆에서 오래오래 살 거야.”
외딴 해변.
노오란 이파리를 먹는 해파리가 숨을 쉬는 곳.
― “많이 보고 싶을 거야.”
Epilogue.
지훈의 집들이 술자리.
― “김여주 살 빠졌냐?”
― “일주일째 정체기야. 일 그램도 안 줄었다고 스트레스받고 있으니까 살 빠졌냐는 말 입 밖으로 꺼내지도 마.”
― “지 꺼라고 챙기는 것 봐라.”
― “너 갈 때 이석민 데리고 가.”
― “하루만 재워주면 안 되냐?”
― “어, 안 돼.”
김여주 퀴즈 퀴즈 채널을 마치고 취한 석민과 여주를 구석으로 처치한 승관은 테라스에서 얇은 담배를 물었다.
― “김여주 보약이라도 한 첩 먹이던지. 환절기엔 강아지도 특식 먹잖냐.”
― “홍삼 같은 거 말하는 건가.”
― “야, 어느 때 홍삼이냐. 뒤지게 비싼 지삼 정도는 돼야지.”
― “사주면 돈으로 바꿔오라고 할 것 같은데.”
― “아버지한테 부탁해 인마. 아무리 김여주가 돈이 좋아도 어른이 주셨는데 죄송하지만 짤짤이로 바꿔주세요 하지는 않을 거 아녀.”
― “생각 좀 해보고.”
― “네 애인 허약 병 먹고 나가리 되기 전에 얼른 처치하는 게 좋을 거다.”
승관은 입밖으로 매캐한 연기를 뿜었다. 꽁초가 되기 직전이었다.
― “재작년에 너랑 약혼설 났던 여자 있잖냐. 그 뭐였더라, KT?”
― “KT는 통신사야 븅신아.”
― “착각할 수도 있지 뵹신아.”
― “하고 싶은 말이 뭔데.”
― “그 사람 숨겨둔 자식 있다던데 진짜냐?”
― “몰라, 그러든 말든 알 게 뭐야.”
지훈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밖을 쳐다봤다.
― “방송국에 있으면 별 얘기 다 들어와.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어느 모 회장님 세 번째 첩이 바람나서 어젯밤에 도망갔다는 것까지 다 듣는다니까? 그 여자 대마 상습범인데 경찰이 뒷돈 받으면서 봐준다고 소문 흉흉해. 진짜 뭐 들은 거 없냐?”
― “애가 있든 마약을 빨든 어차피 나랑 상관도 없을 사람인데 굳이 신경을 왜 써.”
― “세상살이에 그렇게 관심이 없으십니까?”
― “내 일도 바빠죽겠는데.”
― “뭐하냐?”
― “사진.”
지훈은 느닷없이 송전탑에 걸린 보름달을 찍더니 어딘가로 사진을 전송했다. 수신은 묻지 않아도 자고 있는 여주였다. 루즈한 인물사진보다 다이나믹한 광물 사진을 좋아한다는 여주의 말투를 그대로 따라 하는 지훈을 보며 승관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쯧쯧 혀를 찼다.
― “맞다, 아까 낮에 전화는 왜 했고?”
― “그냥 물어볼 거 있어서.”
― “뭐 얼마나 심각하길래 표정이 그러냐?”
거리낌 없었던 지훈이 잠시 망설인다. 승관은 섣불리 지훈을 채근하지 않았다. 도심의 빌딩과 오묘하게 섞인 야경에 어느덧 달빛이 떠올랐다. 지훈은 승관의 담배 케이스를 매만지며 넌지시 물었다.
― “쟤, 좀 있으면 가?”
승관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진다. 바닥에만 머무는 지훈의 시선과 그를 바라보는 승관의 표정이 대비된다. 거실의 인기척을 슬쩍 확인한 승관은 낮게 대답했다.
― “너한테 아직도 말 안 했냐.”
― “넌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데.”
― “김여주 한국 왔을 때.”
― “……오래됐네.”
― “아휴, 저 등신. 너 상처받을까 봐 말도 못 하고.”
승관은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벽에 기댄 지훈은 좀처럼 고개를 들지 않았다.
― “쟤 병원에 있었을 때 그쪽 팀장한테 들었어. 본사 파견직이고 6개월 후면 떠나야 한다고.”
……
― “팀 좌초될 때 나타나 준 은인이라고 고마워하더라. 본사에서 인정받고 승진 기회만 남은 사람이 갑자기 한국으로 왔으니까.”
……
―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대. 어딜 가든 내내 마음에 걸리던 사람이.”
지훈과 나란히 벽에 기댄 승관은 하늘 위로 숨을 흘려보냈다. 여주에게 그런 사람은 오직 한 명이었다.
― “해외에서 인정받기 쉽지 않잖아. 쟤 성격에 뿌리치고 온 거면 얼마나 많은 포기를 하고 온 거겠어.”
― “그래, 네 말대로 김여주 개고생하면서 살았으니까 하고 싶은 일 계속하라고 보내준다고 치자. 그럼 너는?”
― “여기서 내가 왜 나와.”
― “가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애 붙잡고 또 얼마나 폐인처럼 살려고?”
겨우 문을 열어주면 지훈의 손목부터 살피던 승관이었다. 그 짓을 나보고 또 하라고? 넌 친구고 뭐고 없냐? 승관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지훈은 고개를 저었다.
― “이젠 안 그래.”
― “지랄하지 마 새끼야. 내가 널 모르냐? 김여주 인생 막기 싫어서 보낸다고? 그럼 네 인생은? 넌 두 번 사냐?”
― “괜찮다니까.”
― “정한이 형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너 보러 올 때마다 네 약통 확인하는 게 습관이라고. 네가 딴맘 먹고 이상한 거 처먹었을까 봐 서랍까지 싹 다 뒤지던 형이 불쌍하지도 않냐?”
승관은 말했다.
― “내 친구 생각해 줘서 존나게 고마워. 근데 너도 내 친구야 병신아. 김여주 생각하는 것만큼 너도 널 좀 생각하라고.”
― “…….”
― “어떻게 사람을 두 번이나 보내냐.”
지훈의 그림자 옆으로 흐릿한 안개가 흘렀다. 지훈은 처음으로 담배를 태웠다.
― “나도 보내기 싫어. 매일 옆에 있고 싶어. 같이 살다가 더 넓은 집으로 이사도 가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갖고…… 더 좋은 차로 더 좋은 곳 다니면서 같이 살고 싶어 나도.”
……
―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욕심이니까. 여주한테 분명 좋은 기회가 왔는데 나 때문에 포기했고, 포기하고, 또 포기할 거라면…… 그러지 않게 내가 먼저 보내는 게 맞잖아.”
……
― “사랑한다고 아무것도 못 하게 막는 건 내가 싫어. 걔가 행복해야 나도 비슷한 기분이 드니까.”
참지 못한 승관은 나머지 두 대를 모조리 피웠다. 절반도 태우지 못한 지훈의 담배가 쓰레기통으로 사라졌다.
― “돌아간다고 하면 보내 줄 거냐.”
― “사랑하니까 보내준다고 하면 병신 같나.”
― “병신만 같겠냐. 또라이 같지.”
깜깜한 새벽, 지훈은 여주를 침대에 눕혔다. 어딘가 허약해 보인다는 승관의 말도 자꾸만 맴돌았다. 지삼. 홍삼 말고 지삼. 비싼 거. 조만간 어색한 부자 사이에 말을 먼저 틔워볼 그였다.
― “파리 가족 다 들어가겠다.”
입을 벌린 채 숙면 중인 여주의 입술을 엄지와 검지로 붙이기를 시도한다. 실패에 지친 지훈은 여주의 말랑한 윗입술을 괜히 건드리거나 자신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신기한 점을 찾아 눈을 돌리기도 했다.
― 어떻게 사람을 두 번이나 보내냐.
모르겠다. 오늘은 모르겠다. 어제는 보내준다고 약속했는데 오늘은 쉽게 그럴 수가 없다. 지훈은 엎드린 채 여주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 돌아간다고 하면 보내 줄 거냐.
― “……나 기다리는 거 잘해.”
지훈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지독한 불면이었다.
더보기 |
완결까지 데려오려 했으나 사정상 앞부분 먼저 업로드 합니다. 연달아 5개 올리기 프로젝트는 다음에 하는 걸로 (눈물 늦지 않게 올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