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이 너무 좋아서 머나먼 아프리카 어딘가의 넓은 강은 분명히 초콜릿으로 이루어져 있을거라고 확신하며 콜롬버스같은 탐험가를 꿈꾸었다. 한 여름에 옆집 담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익지도 않은 감을 따서 한입 깨물어봤다가 우리집 부엌에 수류탄처럼 투척하고나서 세계 최고의 특수요원을 꿈꾸었다. 형이 엄마 몰래 방안에 꽁꽁 숨겨놓았던 쌍절곤을 휘두르며 화분병을 깨트리고 나서 홍콩영화에 나오는 사람처럼 쿵푸를 마스터해야겠다고 꿈꾸었다. 택이네 방에서 친구들과 처음 축구경기를 봤을 때 남아메리카로 이민을 가야겠다는 결심까지 한 뒤, 마라도나같은 축구선수를 꿈꾸었다. "아야!" 길바닥에서 철푸덕 넘어져 까진 무릎을 호호 불고있는 덕선이의 손에 마데카솔과 밴드를 쥐어주며 어느새 덕선이를 지키는 보디가드가 되어야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1978년 9월 13일 수요일. 오늘 하루 매우 맑음 . 오늘 덕선이가 오디를 먹고싶다고 했다. 엄마한테 오디를 어디서 따냐고 물어보았더니 뒷산에 가면 많이 열려있다고 하길래 도롱뇽이랑 같이 따러 갔다. 오디가 높이 있어서 따기 어려웠지만 한 주먹 넘게 따서 기분이 좋았다. 덕선이 사물함에 몰래 놔둘거다. 일기를 쓰다가 정환이는 이게 보디가드가 하는 일인가 하며 고개를 갸웃가렸다. (사실 보디가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하게 모르는 8살 꼬마아이였다.) 긴 생각도 잠시 사물함에 놔둔 오디 생각으로 빠져버렸다. 혹시 못보고 버리면 어떡하지? 종이로 잘 덮어놨는데... 하지만 이 오디가 정환이와 덕선이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원인이 될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9월 중순임에도 불구하고 길게 이어진 늦여름의 폭염은 안그래도 쉽게 상해 보관이 어려운 오디를 사물함에서 이틀만에 무참하게 상하게하고말았고 아무것도 모르고 좋아라 먹은 덕선이는 오디를 손에 꾹 붙든 채 쓰러져 순진한 반아이들을 경악케 만들었다. 생일을 삼일 남겨두고 병원에서 되도록이면 당분간 나아질 때까지 음식을 먹이지말라는 소리를 들은 덕선이는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였다. 미안한 마음에 정환이가 덕선이의 마음을 풀어볼려고 애를 썼지만, "개정팔이랑 두번 다시 안 놀거야!" 집안으로 들여보내지도않고 밖으로 내쫓아냈다. 이대로 덕선이와 멀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 정환이는 며칠 끝에 고민하다 생일날 밤에 덕선이네 집 앞으로 달려가 생일선물로 '김정환 노예 10년 계약'을 우렁차게 선포했다. 창가에서 가만히 정환이의 말을 듣던 덕선이는 정환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창문을 드르륵 열고선 박수를 쳐주었다. 정환이를 용서하고 받아들이겠다는 표현이었다. 정환이는 다행이다하며 덕선이를 위로 올려다보며 샐쭉 웃었지만 자신이 지금 어떠한 후회를 저질렀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내가 왜 너 숙제까지 해줘야하는데?" "...정말 몰라서 물어?" "아니...그게..." "산수책이나 받아, 팔아프니깐." 애들이랑 공원에서 축구하기로 약속했는데! 정환이는 약속시간 십분을 남기고선 덕선이의 산수책을 받아들고선 볼일 급한 강아지마냥 안절부절 가만히 있질 못했다. 더군다나 성덕선은 삼일치 산수 숙제를 내게 넘겨주었다. 내가 만약 거부를 하면 계약 종이를 꺼내들며 바락바락 소리지를게 분명하다. 내가 왜 이런 한심한 짓을…. 그나마 저학년때는 나았다. 구슬을 사달라고 하거나 팽이를 돌리는법을 가르쳐주라는게 전부였으니깐. 뒤에서 몰래 머리를 때리는 시늉을 하자 성덕선이 재빠르게 뒤돌아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또 거기에 등신같이 에헤헤…하고 어색하게 웃어보았다. "...숙제 다 끝내면 눈깔사탕 열개 사줄게." "좋아." 가끔은 해주는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잠깐만 나와봐." "너는 애가 어떻게 된게 항상 내가 형이랑 게임하고 있을 때 찾아오냐. 뭐, 일부러 맞춰서 오냐?" "덕선아. 조금만 기다려보는게 어떠하겠니. 지금은 ...읏! 엄청나게 중요하거든." "얼른 나와." 아... 또 졌네. 막판에 다 이겨가던걸 놓친 판을 아쉬워하며 환호성을 질러대는 정봉이 형을 바라봤다. 이번에는 이 게임만 했구만. 시간은 덕선이가 찾아온지 한시간이 훌쩍 넘어가있었다. 밖은 이미 어슴프레 검게 변해있었고 빗방울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동생아. 덕선이한테 가봐야 하는거 아니니?" 설마, 멍청하게 아직도 기다리고 있을까. 뻐근한 어깨를 풀며 다시 게임을 하려고 게임기 위에 손을 얹었지만 여간 마음이 찝찝한게 신경이 쓰였다. 결국엔 현관에서 손에 아무거나 집히는 우산을 들고 바로 뛰쳐나갔다. 주위를 둘러보니 덕선이는 계단 위에 쪼그려 앉아있었다. 비에 홀딱 젖은 채 앉아있으니 비맞은 생쥐처럼 덕선이의 몸이 몹시나 작아보였다. "야...너는 진짜. 애가 왜그러냐? 비 맞아가면서 이러고 싶었냐?" 중학생이 된 이후로 내게 눈물 한방울을 안보여주던 그 성덕선이, 세상이 다 무너질듯 처량하게 울고 있었다. 비때문에 얼굴에 있는 물이 눈물인지 빗물인지 잘 모르겠지만 덕선이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게 분명했다. 방금 화를 낸 나의 행동이 너무나 미안해졌다. "내가...끄읍...성보라랑 생일...생일파티 같이 하기 싫다고...끅...몇 번이나 말했는데..." 생일 차이가 일주일도 안 된 누나를 둔 덕에 덕선이네 부모님은 생일파티를 함께 해주시곤 했다. 덕선이는 그걸 엄청나게 싫어했다. 챙겨주시는 부모님과 불같은 성격의 보라누나를 생각하니 티는 못 내겠고. 나름대로 속으로 많이 삭혔던 것이다. 애들끼리 모여서 생일파티를 해줘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던 건 항상 이런 이유였다. "그만 좀 울고. 어?" "...끄읍..." 뭐라 말을 해줘도 우는건 멈추질 않았다. 축축해져버린 머리를 긁적거리며 덕선이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결국 크나큰 결심을 하게된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어렸을 때 말고는 애들이 부르라고 아무리 부추겨도 그냥 박수만 치고 뻥긋 안했던 노래. "생...일 축하합니다~" "..." "생일 축하합니다~" "..." "사랑하~는 덕선...이." 덕선이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이래서 부르는 걸 싫어했다. 사랑한다는 말이 노래라고 해도 이상하게 심장을 간지럽히는게. 너 원래 축하노래 안 부르잖아. 덕선이가 머쓱한 퉁퉁 부어있는 눈을 비비며 말했다. 대답을 하려는 순간 덕선이는 내게 안겨왔다 .전혀 생각치도 못한 행동과 딸려오는 덕선이의 달큰한 냄새가 나를 당황케 만들었다. 나는 어버버거리며 안길대로 다 안겨놓고 덕선이를 급하게 떼어냈다. "에이씨...왜이래 진짜?" "고마워서." "..." "개정팔 고맙다." 비를 계속 맞고있어도 찝찝한게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소나기가 세차게 내린다고 해도 햇살처럼 밝게 웃고 있는 덕선이의 얼굴을 가리지를 못했다. "엄마가 모자르면 더 달라고 말씀드리래요~" "야...야, 노을아." "응?" "안에 작은누나 있냐?" "응." "잠깐 계단 쪽으로 오라고 해." "둘이 만나게? ...단 둘이?" "뭐."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는 노을이 등을 억지로 떠민 뒤 급히 계단으로 달려갔다. 덕선이는 잠옷 바람에 대충 터덜터덜 걸어나왔다. 얼굴에 온갖 신경들을 꾸겨넣은 채. 온갖 욕설을 해대며 바삐 움직이는 덕선이의 입이 보였지만 어차피 올거면서 뭐하러 화를 내는 건지 이해가 안갔다.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쳐다보는 덕선이한테 치즈케이크를 보여주었다. "뭐냐." "...감동 안 받았어?" "이 오밤중에 감동은 무슨. 그리고 내일이 생일이잖아." "아오 진짜. 그냥 케이크가 아니라 치즈케이크야. 정봉이형 몰래 가져왔단 말아." "고맙긴한데 나 치즈 싫어해. 그것도 모르고 있었냐?" 정봉이형 몰래 가져왔는데 아무거나 다 먹는 성덕선이 치즈를 싫어한다는 큰 오류가 있었다. 다시 가져다두기엔 좀 그렇고 덕선이가 그냥 나보고 먹으라고 해서 포장을 뜯었다. 그래도 다시 한번 정말 안먹을거냐고 내가 묻자 덕선이는 됐다는 제스쳐를 취하며 손으로 턱을 굈다. "개정팔." "뭐." "내일 노예 계약 끝나는거 아냐." "그런가. 모르겠다. 요즘 시간개념이 있어야지." "...있잖아. 생일선물 하나 더 부탁해도 될까?" "뭔데?" 덕선이가 입술을 깨물면서 두 손을 내 볼에 올렸다. 그리고 점점 가까워지는 얼굴에 나는 몸이 굳어버렸다. 천천히 입술을 뗀 덕선이는 부끄럽다는 듯이 괜시리 헛기침을 해댔다. 덕선이 입술에 묻은 치즈케이크를 보고 묻었다며 말을 해주려고 했는데 혀로 핥아버리는 덕선이의 행동에 말이 입안으로 쏙 들어가고 말았다. 갑자기 일어서서 날씨가 덥다며 집으로 돌어가려는 덕선이의 팔을 재빠르게 붙잡아 다시 앉혔다. "덕선아." "응." "나 노예 벗어난 기념으로 부탁 하나 들어주면 안될까." "...뭔데?" 내 물음에 고개를 든 덕선이의 턱을 들고 살풋 입을 다시 한번 맞췄다. 내 첫키스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덕선이의 입안으로 자연스레 흘러들어갔다. 흐물흐물하고 따뜻한게 마냥 서로 섞이는게 사람을 홀리게 했다. 물컹물컹한 토마토를 입에 댄 듯한 느낌에 온몸이 짜릿해졌다. 주먹을 꽉 지고 있던 덕선이의 손이 조심히 내 등 위로 얹혀졌다. 입천장을 건드린 내 혀에 덕선이가 몸을 움찔거렸다. 순간 덕선이에게 미안해져서 조심히 입술을 떼어냈다. 아직 여운이 가시질 않은건지 덕선이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뜨질 못했다. "야, 눈떠라. 내가 뭐가 되니." "개정팔 진짜..." "이제 부탁 말한다." "뭐?" "이 케이크 너가 먹어야 할 것 같은데." "..." "먹어 줄거지?" 덕선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잘라준 케이크를 야금야금 먹기 시작했다. 덕선이와 나는 마주보며 예전과 다른 느낌으로 웃기 시작했다. 88년도 가을, 그 날도 우리는 함께였다. "덕선아. 내가 장래희망을 다시 생각해 봤거든?" "..." "성덕선 남자친구나 될까봐. . 정환이의 어렸을 적 일기장이 생각나서 써본 글입니다. 구애하는 김정환 3편은 조만간 올릴게요. 항상 봐주시는 분들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