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 너."
"보고 싶었어, 윤기야."
"... 미쳤어? 여기가 어디라고 와."
"연희아."
"..."
연희아라는 말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민윤기의 아내이자 쿠키의 엄마. 민윤기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연신 눈을 감았다 떴고, 김태형은 화난 듯 욕을 퍼부으며 급기야 나가라고 소리까지 질러댔다. 뻔뻔하게 아, 시끄러워. 하고 귀를 막는 듯한 모습에 나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이는 어디 있어?"
"네가 뭔데 쿠키를 찾아."
"애 이름이 쿠키야? 좀 잘 짓지."
"왜 찾냐고 묻잖아."
"내 아들이잖아, 내가 낳은 내 아들."
... 허. 그녀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가관이었다. 쿠키가 어디 있는지 자기가 왜 물어. 자기가 버리고 갔으면서. 그 어린 아이 가슴에 대못을 박아놓고. 나는 제발 쿠키를 데리고 있는 김남준이 임무에서 늦게 오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여자는 고개를 돌리더니 나를 쳐다보며 얼굴엔 비웃음을 띈 채로 입을 열었다.
"얜 누구야? 못 보던 애네. 새로 뽑은 애?"
"네가 상관할 바 아닌 것 같네."
"이렇게 까칠하게 굴 거야?"
"그렇게 만든게 누군데 그 지랄이야."
"윤기야,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응?"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입가엔 여전히 조소가 띄워져 있었다. 여자는 내게 다가오며 자, 우리 통성명 할까? 이래봬도 나 네 선밴데. 하며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찰싹, 소리나게 치며 누가 내 선배예요? 하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여자는 맞은 손을 바라보더니,
"허, 정수정 판박이가 들어왔네. 보는 눈이 이렇게 없어 자기야?"
하고는 민윤기의 가슴팍에 손을 갖다대었다. 김태형은 빡친 듯 머리를 짚으며 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심 민윤기가 그녀를 냉정하게 뿌리치고 내쫓아주길 바라며 쳐다보았다. 하지만 민윤기는 그런 내 마음을 꺾어버리기라도 하는 듯 그녀에게 아무런 거절의 행동도 보이지 않은 채 물었다.
"... 왜 온 거야."
"말했잖아, 너 보고 싶었다고."
"5 년 전에 가놓고 이제 와서? 그 새끼한테 버려져서 온 거라고밖에 안 보이는데."
"... 누가 버렸다고 그래. 내가 내 발로 나온 거야."
"어쨌건 우리가 받아주지는 못해."
"... 윤기야아..."
"..."
"우리 좋았잖아, 응?"
나는 여자를 정말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다 민윤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생기가 돌며 어느새 그녀로 인한 희열이 자리잡았고, 결국 그는 그녀를 놓지 못했다.
#
"다녀 왔...?"
"... 연희아?"
"씨발, 민윤기 어디 있어."
"... 하아, 수정 누나 잠시만 진정..."
"민윤기 어디 있냐고!!!!!"
밖이 시끌벅적했다. 연희아가 들이닥쳐 내가 방으로 왔을 때부터 밤이 되어 김남준이 쿠키와 임무에서 돌아올 때까지 나는 계속해서 눈물을 쏟아냈다. 민윤기가 그녀를 놓지 못하고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을 때, 바보같이 나는 그 모습을 쳐다보기만 했다. 사실 시간을 돌려 그때로 돌아간다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그의 애인도, 아내도 아니다. 결국 좋아하는 사람이 진다는 말이 맞는 거다. 나는 그녀가 민윤기를 안을 때, 뿌리치지 않는 그를 보며 내 감정에 정의를 내렸다.
나는 민윤기를 좋아한다.
방 문이 벌컥 열리고, 수정 언니가 자는 척 하는 내 옆으로 다가왔다. 눈물 자국인 베개를 봤는지 말없이 등을 다독여준다. 언니, 나는요...
"... 왜 이제야 안 걸까요."
"..."
"왜... 왜... 이제 알았을까요..."
언니는 두서없는 내 말에도 안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물음에 대답해주었다.
"...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야."
언니와 함께 거실에 나오니 심각한 분위기 속에 나를 발견하고 벌떡 일어나는 민윤기가 있었다. 애써 시선을 피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오셨어요? 하고 간부진들에게 인사를 한 후 분위기에 눌려 가만히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 뛰어오는 쿠키를 익숙하게 안아들었다. 쿠키는 마망, 나 마망 방에 가서 자꺼야! 하며 앙탈을 부렸고, 나는 우리 쿠키 졸려? 하며 방으로 가려고 발을 돌린 순간.
"민쿠키, 이리 와."
"... 아주마 시러요..."
"내가 왜 아줌마야? 난 네 ㅇ..."
"연희아!"
연희아의 말을 가로막고 수정 언니가 소리를 질렀고, 쿠키가 놀라 토끼눈을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언니의 손짓에 황급히 쿠키를 데리고 방에 들어갔다. 쿠키는 내 품에서 내려가더니 토닥토닥 해달라며 내 손을 잡아 침대로 이끌었다. 나는 쿠키의 옆에 누워 배를 작게 토닥이며 자장가를 불러주었고, 많이 피곤해보였던 쿠키는 5 분 안에 잠이 들었다. 조용히 다시 거실로 나와 남은 자리인 박지민 옆에 앉았다. 박지민은 내 손 위로 제 손을 겹쳐주며 씩 웃곤 괜찮아, 하고 다독여주었다.
"네가 무슨 낯짝으로 여길 온 건지는 모르겠는데, 여기 네가 마음대로 들락날락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알아, 이번이 마지막이야."
"받아줄 마음도 없는데, 건방지게 네가 뭘 정해?"
"말 좀 예쁘게 하지? 여전히 싸가지 없는 말투 못 버렸니 너?"
"씨발년이."
수정 언니와 연희아는 이빨을 드러냈고, 나는 민윤기를 바라보았다. 민윤기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이내 내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너무 울어댄 탓에 머리가 아파왔다. 연희아는 수정 언니를 째리더니 내게 시선을 돌리며 악을 쓰기 시작했다.
"네 코드 네임이 C야?"
"따질 거면 민윤기한테 따져, 괜한 탄소 괴롭히지 말고."
"윤기야, 저 코드 네임 네가 지어준 거야?"
"... 어."
"그렇게 내가 그리웠어? 내 코드 네임을 붙여줄 만큼?"
그 말을 듣자마자 다시 심장이 아렸다. 아내의 코드 네임을 붙여줬다라... 그래서 그때 전정국이 그렇게 행동한 건가. 그런데 어떻게 내 코드 네임을 알지? 저 사람에게 누군가가 코드 네임을 알려준 건가...? 생각은 하면서도 민윤기일 거라 예상하고 있는데 박지민이 내 손을 꽉 쥔다.
"누가 C든, 이제 이 곳에 누나 자리는 없어요."
"... 뭐?"
"누나는 우리 조직을 배신한 배신자예요."
"..."
"보스랑 쿠키 버리고 가놓고, 뻔뻔하게 그런 소리가 나와요?"
"... 박지민 그만해."
민윤기가 박지민을 제지했다. 왜? 왜 제지해요? 묻고 싶었다. 저 여자를 못 잊겠어요 여전히?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심장은 계속해서 쿵쿵거렸고, 속도 메스꺼워졌다. 머리를 짚으며 끙끙거리자, 김태형이 괜찮냐 물어왔다. 고개를 끄덕여줄 힘도 없었다. 민윤기는 연희아에게 방에 가 있으라며 보냈다. 울컥, 눈물이 났다. 왜 저 여자가 보스 방에 들어가요? 묻고 싶었다. 연희아가 들어가면서 나를 보고 비웃음을 날린 듯도 했다.
"... 며칠만 집에 머무르게 해줘."
"보스...?"
"... 야."
"우리가 보고 싶어서 왔대."
"우리가 아니라 돈이 보고 싶었겠지. 그걸 왜 믿어?"
"... 정수정, 한 번만 믿어."
"저 미친년이 구라친 게 한 둘이야? 왜 늘 속아넘어가!!!!"
수정 언니는 여전히 악을 쓰며 민윤기에게 따졌고, 김남준이 그런 수정 언니를 잡아 앉히며 김태형에게 물을 가져오라 지시했고, 김태형은 옆에 놓인 물컵에 물을 따라 수정 언니의 앞에 놔주었다. 수정 언니는 물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민윤기를 응시하며 조금 차분해진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탄소는?"
"..."
"탄소 기분이 어떨 것 같아?"
"... 그만해."
"이용 당한 거나 마찬ㄱ,"
"그만하라고!"
민윤기가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큰소리에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민윤기를 쳐다보았고, 그는 나를 보더니 한숨을 푹 쉬며 수정 언니에게 미안하다, 먼저 들어갈게. 하며 그녀가 있을 방으로 들어갔다.
"..."
"저 미친 새끼..."
"... 수정 누나."
전정국이 수정 언니를 불렀지만, 고개를 돌릴 힘도 없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 너무 당황스럽다. 만약 연희아가 간부진으로 다시 돌아오면, 나는 코드 네임을 바꿔야 할까. 비록 제 아내의 것이었지만 민윤기가 내게 준 이 코드 네임을? 아니, 무엇보다 민윤기와 연희아의 못다한 결혼 생활을, 나 아닌 다른 여자와의 생활에 행복해하는 그를 계속 봐야 할까. 먼저 자겠다는 말을 한 후 언니를 비롯한 간부진들의 걱정어린 인사를 받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새근새근 잘 자는 쿠키가 보였다. 그 옆에 조용히 눕자 습관처럼 품에 안겨오는 쿠키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꽉 껴안았다.
"우응... 마망..."
"미안해, 깼어?"
"마망 어디 가써써..."
"마망 여기 있어 우리 쿠키. 어서 자자."
"마망..."
옹알거리며 다시 눈을 감는 쿠키. 쿠키 특유의 아기 향을 맡으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오늘은 악몽도, 가위도 눌릴 것 같았다.
15.
"..."
"..."
간부진들은 연희아를 없는 사람 취급하기 시작했고, 나는 수정 언니의 손에 이끌려 쿠키와 함께 늦게 밥을 먹었다. 쿠키는 유치원에 갈 준비를 하며 내 품에 계속 안겨 있었고, 그걸 보던 연희아는 비꼬기 시작했다.
"아주 네 아들인 줄 알겠네?"
"..."
"쿠키 잡아서 윤기 눈에 들려고 했다면 오산이야."
"... 쿠키야 양말 신어야지."
"어제 봤지? 네 코드 네임이 원래 내 거인 거. 윤기는 아직 나 못 잊었어."
"저 아주마 머야? 왜 파파 이름 막 불러?"
"아냐, 아냐 아무것도 아냐 쿠키야. 늦었다, 어서 준비하자."
대답을 피하고 쿠키의 준비를 끝냈다. 오늘은 김남준과 함께 아침 임무라 쿠키를 데려다주고 가기로 했다. 김남준은 쿠키 이리 와서 삼촌 품에 안겨, 하며 가방에 총기류를 챙긴 후 달려오는 쿠키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때 마침 민윤기가 방에서 나왔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 눈을 피했다. 연희아는 민윤기가 나오자마자 방금의 안 좋은 표정을 지우고 웃는 얼굴로 우리를 보며 너희 되게 가족 같아. 애기 아빠, 애기 엄마, 그리고 아들. 내 아들이라 조금 마음이 그렇긴 하네? 라는 개소리를 내뱉었다. 어쩌면 사람이 저렇지, 인상이 찌푸려졌다.
"... 넌 무슨 소리야 또."
"아니 뭐, 어울리니까."
"그만해. RM, 임무 끝나면 몇 시 쯤 될 것 같아?"
"어, 한 세 시 쯤이요."
"그렇게 오래?"
"판이 꽤 커요."
"그래, C 잘 챙기고. 조심하고."
"예, 보스. 가자 여보ㅋㅋㅋㅋㅋ"
"...ㅋㅋㅋ?"
"가자고, 여보ㅋㅋㅋㅋㅋ"
"네 여보ㅋㅋㅋㅋㅋㅋㅋㅋㅋ"
"뒤지고 싶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김남준이 장난을 쳤다. 필시 연희아가 한 말을 듣고 민윤기 들으라는 듯 장난친 것일 거다. 쿠키가 김남준의 어깨를 콩콩 치며 마망은 파파 꺼야! 하고 소리쳤다. 이 와중에 빨개지는 내 얼굴을 치고 싶다. 연희아의 표정을 보니 아주 가관이다. 제 아들이 다른 여자를 엄마라고 부르는 것도 짜증날텐데, 그 여자를 제 남편 거라고 하니 저로썬 용납이 안 되겠지. 쿠키의 귀에 마망이 맛있는 거 사줄게, 하고 속삭였다. 그 귓속말을 들은 김남준은 한 번 웃어제끼더니 늦었다, 다녀올게요. 하고 내 손을 잡아 이끌었다. 흘끗 본 민윤기의 눈은 우리가 맞잡은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
"마망 남준 삼촌 빠빠이!"
"잘 다녀오고, 밥 꼭꼭 씹어 먹고!"
"그러께, 마망!"
"이불 발로 차지 마라."
"아라써 삼촌! 가따오께!"
"오냐 저녁에 보자."
쿠키를 보낸 후 임무 장소까지 느긋하게 걸으며 김남준과 이야기를 했다. 주로 수정 언니 이야기, 쿠키 이야기, 보스 이야기 등... 하지만 그래도 내 기분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래가지고 오늘 임무 제대로 할 수 있으려나 몰라. 괜히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리는데, 김남준이 갑자기 연희아 때문에 놀랐지? 하며 말을 시작한다.
"간부진들보다 놀랐겠어요."
"너도 간부진이야, 인마."
"에이, 저는 연희아 씨를 몰랐잖아요."
"놀라긴 했는데, 보스가 제일 놀랐을 거야."
"... 아무래도요."
"쿠키는 제 엄마가 누군지도 모르니 그냥 처음 보는 아줌마일 거고."
"... 너무 어렸을 때 보고 그 후에 못 봐서 엄마를 기억 못하는 건가...?"
"연희아는 쿠키 낳고 산후조리가 끝나자마자 도망쳤어."
"... 네?"
연희아에 대한 반감이 +200 추가 되었습니다! 진짜 이런 거 있었음 좋겠다. 반감들 다 모아서 공격해버리게. 진짜 저게 사람이 할 짓인가. 자기가 낳아놓고 어떻게 도망을 갈 수가 있어. 내 표정을 보며 살짝 웃던 김남준이 갑자기 엄마가 되는게 무서웠대. 하고 덧붙였지만, 이해해달라는 말투는 아니었다. 오히려 제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투였다.
"보스가 많이 설득했거든."
"..."
"보스가 원해서 가진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냐."
"..."
"그 정도로 연희아와 자신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길 간절히 바랐었어."
"... 아."
"근데 연희아는 그게 아니었던 거지."
"..."
"보스를 찌르고 도망간 걸 보면 말이야."
찌르고...? 그럼 칼에 맞았다는 건가, 아무리 도망치고 싶었다고 해도 그렇게... 복잡미묘한 마음을 애써 지우고 임무 장소로 보이는 낡은 건물 3층에 도착했다. 건물 안엔 이미 주인이 떠난지 오래라는 걸 보여주듯 벽지가 찢어지고 성치 못한 가구들이 즐비했다. 오싹한 느낌까지 들게 하는 내부에 팔을 쓱쓱 문지르며 안으로 향했다. 어제 김태형이랑 신나게 훈련했으니, 좀 나아졌겠지. 하고 내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다. 김남준은 총을 장전하더니 갑자기 소파 뒤 쪽을 쏜다. 그러자 쓰러지는 남자 한 명. 놀라서 넋을 놓고 있으니 김남준이 C, 뒤에! 하고 소리를 질렀고, 나는 곧바로 뒤를 돌아 뛰어오는 남자를 향해 조준이고 뭐고 방아쇠를 당겼다. 남자가 맥없이 고꾸라지고 나는 빠르게 김남준의 옆으로 가 어떻게 된 거예요, 하고 물었다.
"눈치를 챘나봐."
"어떻게 알고...?"
"그러게, 조금 당황스럽네."
"..."
"쿠키한테 맛있는 거 사주러 갈 순 있어, 걱정 마."
여전히 장난질인 김남준에게 이어폰을 건네받고 버튼을 누르자, 기다렸다는 듯 다급한 김태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V입니다, 도착했어요?
"어, 지금 상황 어떠냐."
- 모르겠어요, 어떻게 알았는지 조금 당황스럽네요. 냉장고 뒤에 한 놈, 기둥 뒤에 한 놈 있어요.
김태형의 말에 내가 서 있는 곳과 가까운 냉장고로 향했다. 순식간에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고, 나는 빠르게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남자의 총알이 더 빨랐던지 내 몸을 비껴나가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고, 내 머리카락이 조금 잘렸다. 그걸 느끼자마자 남자는 이미 내 앞에서 숨을 거둔 상태였고, 김남준은 아깝네, 머리카락 결 좋았는데. 하며 방으로 향했다. 와중에 농담질이라니. 못 말린다 생각하며 김남준을 따라가는데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뒤를 돌았다.
"아, 씨발 깜짝이야!"
나도 모르게 나간 욕과 함께 남자가 쓰러졌다. 주의해야겠네, 우리 막내. 아주 총을 막 쏘네. 하며 김태형의 장난스러운 음성이 들렸고, 나도 모르게 웃으며 농담하지 마요. 하고 중얼거렸다. 김남준이 방 안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쓰러진 남자를 지나 방 문을 열었다.
"V, 금고 비밀번호 알아낼 수 있겠어?"
- V입니다. 금고요? 금고가 있어요?
"어, 아, 이 새끼들 쉽게 주기로 해놓고."
"힘으로 부수면 안 돼요?"
"장난쳐?"
"아뇨."
김태형이 키보드를 치는지 타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주위에서는 연희아의 목소리도 살짝 들리는 듯 했다. 김남준과 내 표정은 순식간에 찌푸려졌고, 김태형은 기분 더러울 거 알아요, 그래도 이어폰 집어던지지 마세요. 하며 농담을 하곤 계속해서 키보드를 쳤다. 그러더니 아, 찾았다. 0268. 하며 번호를 불러주었고, 나는 조심스럽게 번호를 눌렀다. 한 번 틀리면 경보음이 울린댔나.
"0...2...6...8... 됐어요."
"자료가 이건가."
"그냥 종이 뭉치인데?"
"서류네, 서류."
김남준이 금고에서 문서를 꺼내 가방에 넣은 후 나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하며 창문을 열었다. 낡아서 그런지 끼익거리며 열리는 창문 소리는 오싹했다. 로프를 꺼낸 김남준이 떨어지지 않게끔 갈고리 부분을 벽에 고정시킨 후 팽팽하게 연결이 되었는지 잡아 당겼다. 설마, 제발 내 예상이 틀렸길. 나는 첩보 영화 찍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우리 왜 문 놔두고 여기로 나가요?"
"문 밖에 놈들 다 깔렸을 걸."
"이 아래는요?"
"눈높이보다는 공중이 나아."
김남준이 자기 하는 거 잘 보라며 로프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김남준이 어느 정도 내려가고 이제 내려오라는 손짓을 한 후에야 덜덜 떠는 손으로 로프를 잡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려가기 시작했고, 최대한 밑을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김남준은 먼저 도착해선 진지한 얼굴로 뛰어내려, 받아줄게. 하며 팔을 벌렸고, 나는 장난치지 마세요. 하며 차근차근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씨발, 들켰다. C! 뛰어내려!"
"...!"
놈들이 우리를 발견했다. 놈들은 순식간에 칼을 빼들어 로프 줄을 끊고 있었고, 나는 그때 2층의 밑부분에 도착했을 뿐이었다. 심지어 총알까지 내 주위를 돌아다니며 죽기 딱 좋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뛰어내리는 것밖엔 방법이 없다만 김남준이 받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찰나에 로프가 끊겼다. 나는 눈을 꼭 감은 채 바닥과 만날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도착한 곳은 김남준 품. 김남준은 그러게 뛰어내리랄 때 뛰어내리지, 오빠 놀랐잖아. 하며 수류탄을 가방에서 꺼내 핀을 입으로 뽑아 건물 안으로 던져버리고 반대편으로 뛰기 시작했다. 나를 안고 뛰어가는 김남준의 뒤로 폭발음과 함께 빨간 불꽃이 일었다.
"아니, 아니 저 이제 내려주셔도...!"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여자 안아 봐?"
"..."
늘 수정 언니 허리 감싸고 계시잖아요...
우리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정호석의 차에 올라타 차체에 총알이 박힌 채 출발했다. 정호석은 들킬게 뭐냐 들킬게. 김남준 실적에 흠났네, 하며 혀를 찼고, 김남준은 물을 마시며 그러게, 시발 그렇게 빨리 알아챌 줄 알았나. 하고는 가방에서 문서를 꺼냈다. 문서에는 정갈한 글씨체로 〈edic>〈edic>이라고 적혀 있었고, 이 회사는 파티 때 만난 그 남자의 회사였다. 나는 이거 어디다 쓰이는 거예요? 하고 질문했고, 김남준은 넘길 곳이 있어. 하며 문서를 다시 가방 안 속에 넣었다. 시간을 보니 2시 40분. 쿠키가 오려면 아직 한 시간 정도가 남았다. 차는 달리고 달려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 쪼르르 달려오는 쿠키가 없어 약간 허전했다.〈/edic>〈/edic>
"아, 드디어 집이다."
"수고했다."
"문서는?"
"넌 형이 죽을 뻔 했는데, 자."
"수고했어요, 형."
김석진이 우리를 다독이며 수고했다 전했고, 김태형은 인사보다는 서류를 원했다. 김남준은 살짝 째리며 서류를 넘겼고, 김태형은 그제야 활짝 웃으며 수고했다고 인사했다. 무슨 서류길래 그렇게 좋아해요? 하며 호기심에 김태형의 옆에 앉았고, 곧이어 방에서 나온 민윤기에 황급히 컴퓨터에 관심을 가진 척 했다.
"와, 와아...! 이 본, 본체 크네요!"
"... 그거 모니터인데."
"... 아, 모니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무식한 거 티내지 좀 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득츠..."
"다녀왔냐."
"... 네."
"다친 곳은. 야 너 머리..."
"이, 이거 별 거 아니에요. 내일 미용실 가서 다듬으려고요."
모니터를 본체로 헷갈려 김태형이랑 어제처럼 웃고 있는데 민윤기가 다친 곳을 물으며 갑자기 내게 다가오길래 그대로 얼음이 되어 가까워지는대로 쳐다보고 있는데, 순식간에 내 머리카락을 잡으며 머리, 하고 왜 이러냐는 뜻이 내포된 물음을 던진다. 최대한 태연하게, 걱정하지 않도록 별 거 아니라며 내일 미용실 갈 거라고 농담까지 했다. 하지만 민윤기의 표정은 꽤 심각했다.
"총에 스쳤네."
"..."
"다친 곳은."
"... 어, 음. 없어요."
"진짜로?"
"네, 없어요."
"... 다행이네."
걱정했다는 듯한 민윤기의 따뜻한 시선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 뻔 했다. 그가 나를 걱정하는 게 느껴져서. 재차 되묻는 그의 표정이 네가 다쳐서 놀랐다는 걸 보여줘서 마음이 편해졌다. 싸이코인가.
"그래, 씻고 좀 쉬어라. 오늘 쿠키는 내가 데리러 갈테니까."
"아니에요, 쿠키랑 오늘 맛있는 거 먹으러 가기로 했어요."
"..."
"?"
아침에 한 약속을 떠올리며 이야기하자, 민윤기가 자신의 방 쪽을 한 번 쳐다보곤 나도 같이 가. 한다.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아 그를 쳐다보자 내 눈을 피하며 일단 씻고 와, 얼굴에 피 장난 아닌데. 하고 나를 일으킨다.
15. (아싸 데이트다!!!!!!!!!!!!!!!!!!!)
민윤기는 내가 씻고 나오자마자 감기 든다, 머리 말리고. 하며 옆에서 계속 챙겨주었다. 이건 뭐지, 연희아가 와서 좋아했던 거 아니었나. 나 혼자 머리를 말리며 별 생각을 다 했다. 혹시 어제 코드 네임 때문에 미안한 마음에 챙겨주는 거...? 그런 거라면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기대하고 있었다. 나도 여자인지라.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수정 언니가 사준 흰 니트 원피스에 버건디 코트를 걸치고 나왔다. 핸드백에 총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고서. 거실에 나와 핸드백을 만지작 거리고 있으니 방문이 열리며 민윤기가 나온다. 그도 버건디 코트를 걸치고 나와 적잖게 놀랐다. 그도 나만큼 놀란 듯 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다. 내가 정신을 차리곤 아, 다른 거 입어야겠다! 하고 누가 봐도 어색한 폼으로 방으로 들어가려 하자 민윤기가 나를 제지하며
"왜, 그냥 가."
"... 예?"
"기다리겠다, 쿠키 데리러 가자, 마망아."
하고는 내 팔목을 잡아 이끈다.
? 아니 이 사람이...
커플 버건디 코트에 치이고 마망아라는 호칭에 정신을 보냈다. 그렇게 정신을 반쯤 이탈시켜놓고 쿠키의 유치원 버스 정류장 앞에 도착한 것 같다. 민윤기는 손목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더니 아 왜 이렇게 안 와. 하며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고, 나는 휴대폰 시계를 확인하며 아직 오려면 5 분 남았어요. 하고 말했다.
"뭐? 그걸 왜 이제야 말해? 일찍 나올 필요 없었잖아, 그럼."
"보스가 저 끌고 나왔거든요?"
"..."
"디자인도 완전 똑같네. 수정 언니가 사준 거라 예쁘게 입고 나온 건데!"
"정수정이 사준 거라고?"
"네, 저 입을 옷 없어서 언니가 대신 사다줬어요."
"아, 너 옷이 없네. 그러고 보니."
"... 이제 아셨나봐요."
"아니, 설마."
"거짓말."
"진짜."
흔들리는 동공부터 처리하고 오시죠... 민윤기를 한심하게 쳐다보다 유치원 버스를 보고는 어? 버스 와요! 하며 그를 흔들었다. 버스가 우리 앞에 서고 쿠키가 선생님의 손을 꼭 잡은 채 내렸다. 선생님은 맞잡은 쿠키의 손을 내게 옮겨주시더니 민윤기를 발견하곤 오늘은 아버님도 같이 오셨네요? 하며 부모님 사이가 너무 좋아요, 코트 색깔이... 하고는 웃어주셨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렸지만 민윤기는 부정하지 않고,
"... 예, 뭐..."
"쿠키가 왜 이렇게 잘생겼나 했더니 아버님이 미남이셨네요, 어머님은 늘 봐와서 미녀인 거 알고 있었는데~ 아, 어머님!"
"ㄴ, 네?"
"쿠키가 오늘 어머님이랑 데이트 한다고 많이 들떠있었어요~"
"그랬어요?"
"근데 오늘 열을 재보니까 미미하게 열이 있어서, 주의 해주셔야 할 것 같아요."
"아... 네, 알겠습니다. 감사해요 선생님."
"뭘요, 쿠키랑 재미있게 노시다 오세요~ 쿠키 선생님이랑 인사하자!"
"선샌님 안녕히 가세요!"
"네~ 쿠키도 잘 가요~ 어머님 아버님도 들어가세요~"
"안녕히 가세요, 선생님."
원래 말이 많으신 분이라 가끔 내가 데리러 갈 때면 오 분 동안 수다를 떨곤 했는데, 오늘은 뭔가 더 떠든 기분이다. 게다가 코트 색까지 언급해주시고... 유치원 버스가 떠나고 혹시 어머님 아버님으로 불려서 기분이 나쁜 건 아닌지 눈치를 본다고 끙끙거리는데 민윤기의 표정은 생각보다 괜찮아 보인다. 안심하고 쿠키를 안아들려는데, 민윤기가 너 오늘 피곤할 거 아냐, 이리 와 쿠키. 하며 쿠키를 안아든다. 그러더니 뭐 먹고 싶어? 하며 쿠키가 아닌 내게 묻는다.
"파파! 나 뽀로로 어린이 세트!"
"너 말고 인마, 오늘은 마망이 먹고 싶은 거 먹을 거야."
"마망! 마망도 뽀로로 어린이 세트!"
"마망은 그거 못 먹어."
"그럼 파파는?"
"파파도 못 먹어."
쿠키와 민윤기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진짜 내가 이 가족의 한 명이 된 것 같았다. 이 말은 설렘과 불안함이 공존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내가 돌아왔음에도 왜 나를 밀어내지 않는 거지.
"마망아, 왜 안 오냐."
"아, 가요!"
"마망, 쿠키 돈까쓰!"
"쿠키 돈까스 먹고 싶어?"
"마망이가 먹고 싶은 거 먹을 거라니까."
"이잉!"
"돈까스 괜찮아요?"
"너 먹고 싶은 거 고르라고."
"저는 쿠키가 먹고 싶은 거 먹어도 돼요."
그 말에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더니 줘도 못 먹네, 하며 가까운 돈까스 집으로 들어갔다. 따라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알바생이 메뉴판과 물을 갖다주었다. 쿠키는 민윤기 옆에서 어린이 세트를 요구하고 있었고 민윤기는 그런 쿠키를 무시한 채 나에게 먹고 싶은 거 시켜. 하며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나는 그런 두 부자가 정말 안 닮아서 살짝 웃어버렸다.
"왜."
"아뇨, 둘이 진짜 너무 안 닮아서."
"아직 아기라 그래, 나중에 크면 나처럼 말수도 적어지고..."
"싸가지도 없어지고..."
"죽을래."
"저는 치즈 돈까스요!"
"..."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민윤기는 그런 나를 뚱하게 쳐다보다 점원에게 고구마 돈까스 한 개, 치즈 돈까스 한 개, 어린이 세트 하나요. 하고는 장난감 뭐 할래, 하고 쿠키에게 메뉴판을 다시 보여주었다. 저렇게 보면 진짜 완벽한 아빠다. 쿠키는 통통한 손을 메뉴판에 갖다대며 나 요거! 하고는 점원에게 타요 주세요 타요!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쿠키에게 쉿, 하는 제스쳐를 해보이며 음식점에선 조용히 해야죠, 하고 엄한 척을 했다. 쿠키는 그런 나를 보더니 으응! 쉿! 하고는 입을 앙다물며 민윤기에게도 쉿, 하는 제스쳐를 해보였다.
"파파는 이미 조용해."
"앙니야, 파파가 제일 시끄더."
"뭐?"
"마망, 오늘 쿠키 이거 만드러써!"
"... 너 왜 쟤 닮아가냐."
쿠키가 정말 나를 닮아가는 것 같다. 쿠키는 내게 종이로 만든 학을 보여주며 쿠키가 일 등으로 접어써! 하고 자랑했고, 나는 학을 받아 이리저리 살펴보며 와, 진짜 잘했네 우리 쿠키 하고 엄마 못지않은 리액션을 해줘야 했다. 민윤기는 물을 마시며 우리를 쳐다보다 나즈막히
"진짜 엄마 같다 너."
"... 예?"
"너 엄마 같다고."
"..."
"뭔가 죄짓는 기분이네."
하고 중얼거렸고, 나는 보스, 어... 하고 할 말을 찾고 있는데 민윤기가 씩 웃더니
"여기까지 나와서 보스 보스거리면 좀 그렇지 않나."
"그럼 뭐라고 불러요?"
"여보, 해봐."
"예?"
"아까 김남준한테는 잘 했잖아, 여보 해보라고."
"마자! 마망이랑 파파는 여보라고 불러야 된대써!"
도대체 누가 그러디, 어? 아니, 것보다 이 사람 왜 이래. 어제까지만 해도 연희아 못 내치던 사람 맞아?
"... 그,"
"어색하면 오빠라도."
"... 그 소리가 그렇게 듣고 싶으셨어요?"
"당연하지, 왜 나만 보스야. 정수정도 언니고 다른 놈들은 오빠라고 부르면서."
"아니 그건,"
"나랑 김석진 한 살밖에 차이 안 난다."
"..."
이제부터 김석진도 김석진 씨라고 불러야겠다 씨X
"연희아 때문에 속상하지."
"..."
"금방 정리할게, 걱정하지 마."
"... 제가 뭘..."
마치 민윤기의 행동은 내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보여서 기분이 이상했다. 알 리가 없는데, 나도 어제 알게 된 내 감정을 그가 어떻게 알아. 민윤기는 그런 내 반응을 보다 쿠키에게 시선을 돌려 야, 하고 말을 걸었다. 아니 그렇게 부르지 말고 좀 다정하게 불러주라니까... 쿠키는 익숙한 듯 웅? 하고 고개를 들었고, 민윤기는 그런 쿠키의 입술에 뽀뽀를 한 후 마망 뽀뽀해 줘, 빨리. 하고 부추겼다. 쿠키는 내가 얼이 빠진 사이, 의자를 딛고 일어나 내 볼에 뽀뽀했고, 민윤기는 아, 입술에 했으면 더 좋았을 걸. 하며 웃었다. 나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늘은 쿠키를 통해서 간접 뽀뽀하고,"
"...?"
"다음엔 직접 뽀뽀하자."
*
1. 왜 갑자기 윤기가 달달하게 나올까요 여러분 ^ㅁ^?
2. 데이트라고 쓰긴 썼는데 데이트가 아닌 이 느낌... 난 역시 달달이랑 안 맞아
3. 완결을 달려가고 있습니다~
4. 암호닉 없으신 분들은 바로 말씀해주셔야 해요! 비회원 분들은 없으시다 하시면 암호닉 방 다시 가주세요~
5.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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