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의 우리
w.1억
- 내가 결혼하기 싫다고 했어. 나도 청춘이란 게 좀 있어보고 싶어서 그랬다. 왜..
"……."
- 남주혁이랑 연애하는 것도 질려. 한사람만 바라보면서 어떻게 살아.
전화를 멋대로 끊은 열린이의 어머니는 병실 의자에 앉아서 남편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아무 생각도 안 하는 듯 허공을 본 채로 가만히 있던 어머니는 드디어 입을 열어, 듣지 않는.. 아니, 아마도 듣고있을 남쳔에게 말을 건다.
"잠깐만 혼자 있을 수 있지?"
아무 대답도 없는 남편의 손을 꼭 잡은 어머니는 뭔가 결심한 듯 손을 놓아주고선 자리에서 일어난다.
제 10화_
작은 희망을 꽃들에게
주혁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뒤돌아 어머님에게 작게 물었다.
"오래.. 기다리신 거예요?"
"아니야. 조금밖에 안 기다렸어."
"퇴근하고 친구 좀 만나고 오느라구요.. 잠깐 앉아계실래요? 차 한잔 드릴게요."
"그래 고마워."
주혁이 주방으로 간 사이 열린이의 어머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마지막으로 왔을 땐.. 같이 찍었던 사진들이나, 열린이의 물건들.. 그리고 열린이의 냄새까지 났었는데. 이제는 아무것도 없다. 열린이의 어머니는 주방에 있는 주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열려다가 다시금 입술을 닫아버린다. 왜 이렇게 뻘쭘한 걸까. 괜히 소파에 앉아서는 불안한 듯 손을 만지고 있다. 주혁이 머그컵을 열린이의 어머니에게 건네주었고, 어머니는 '고마워'하고 웃으며 컵을 받아든다. 반면 주혁은 불편한지 소파에 앉지도 못 하고 옆에 서서 안절부절한다.
"앉아. 왜 그렇게 멀뚱히 서있어?"
"아, 네."
"바쁜데 내가 찾아왔나. 미안해. 연락을 하고 찾아왔어야 됐는데."
"…오셨으면 연락을 하시죠. 사람도 없는데 기다리시고.."
"그래도 바쁠 텐데.. 부르면 좀 그렇잖아. 안 오면 그냥 가려고했어."
"……."
"열린이랑 헤어졌어?"
주혁은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열린이의 어머니는 주혁이 말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하지만, 궁금해서 참을 수 없는 듯 일어서서는 주혁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열었다.
"왜."
"……."
"10년 동안 고비가 왔어도, 꿋꿋하게 만났잖아. 혹시 열린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거야?"
"아닙니다. 그런 거.."
"그럼? 뭐 때문에 그래. 결혼 얘기까지 오고갔잖아. 이번엔 결혼한다고 그랬잖아. 얼마나 기다렸는데!.."
"……."
"미안해. 부담주려고 그러는 건 아니고.. "
"어머님."
"……."
"10년이면 짧지 않다는 거 알아요. 아는데.. 그 긴 시간동안 서로 잘 맞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그게 맘처럼 쉽지가 않더라구요. 1년 더 버티고, 더 버티고.. 더 버티자 해서 10년을 만났어요. 근데 이제는 서로 너무 지쳐버려서 잘 대화하고 끝낸 거예요. 죄송해요."
"열린이한테 마음이 없어졌어? 열린이가 결혼하기 싫대?"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이년을...!"
"제가 결혼하기 싫다고 했어요."
"뭐..?"
"계속 결혼하자는 거 제가 싫다고 그랬어요. 지금은 서로 애인도 있구요."
한참을 말 없이 서서 주혁을 올려다보던 어머니는 힘이 풀리는지 손에 든 가방을 놓쳐버린다.
"내 딸이 뭐가 어떻다고 결혼하기 싫다고 그래. 내 딸이 못난 곳이 어디있다고! 왜 결혼이 하기 싫은데. 내 딸! 주혁이 너만 10년을 바라보면서 살았어."
"……."
"아빠가 아파서 병원에 있든 말든.. 자네 밥 차려준다고, 자네 맛있는 거 해준다고, 옷 사준다고 얼굴 한 번 안 비추던 애야. 근데 내 딸이 뭐가 그렇게 부족해서, 뭐가 미워서 결혼이 하기 싫어. 3년 전에 울면서 임신했다고, 애 지워야겠다고.. 무서워서 내 손 잡고 가고싶다고 하는 애는 안 불쌍하니? 밥 먹다가도 네 걱정만 하고, 지 죽은 애 생각나서 며칠을 울었어."
주혁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놀란 듯 꽤 볼만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근데 왜! 내 딸이 왜 싫어!"
열린이의 어머니는 끝까지 눈물 한 번 흘리지않고서 주혁에게 말하다가, 결국엔 뒤돌아 가방을 챙겨 집에서 나갔고.. 주혁은 잠시 생각이 많아진 듯하다.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 이게 무슨일이냐는 듯 말이다.
"……."
"열린씨!"
"선호씨..!"
대문 앞에서 커피를 들고 서있는 그는 내가 다가오니 바로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춘다. 따뜻한 커피를 내 손에 쥐어주고선 말한다.
"병원에 다녀올래요?"
"웬 병원이요..? 선호씨 어디 아파요?"
"아뇨. 열린씨 아버님 보고싶을 거 아니에요."
"……."
"앞으로 더 자주 가요. 열린씨 요즘 너무 예쁜데 아버님도 자주 봐야죠. 나만 보기 아까운데."
타요- 하며 조수석 문을 열기에, 괜히 선호씨가 대견해서 뒤에서 꼭 끌어안았더니, 그가 내 손을 잡고선 말한다.
"뒤늦게 후회한다고 돌아오는 건 없더라구요."
"……."
"그래서 저는.. 열린씨가 아버님 자주 뵈러 갔으면 좋겠어요. 제가 이 말을 하지 않았어도 그랬겠지만.. 문득 생각이 날 때마다 뵈러가면 아버님도 더 좋아하실 거예요."
선호씨의 얼굴이 제일 먼저 보였고, 그 다음으로는 병원에 누워있는 아빠가 떠올랐다. 눈물이 나려는 걸 꾹 참고 그의 등에 얼굴을 묻었더니, 그가 장난스레 웃으며 말한다.
"콧물은 묻히면 안 돼요~"
"안 묻었거든요..."
"차에서는.. 심심할 텐데.. 잠깐 복도 의자에라도 앉아있을래요?"
"그래도 돼요?"
"네. 그럼요."
"그러다.. 어머님이랑 마주치면.."
"응?"
"열린씨만 괜찮다면 전 상관없는데.. 혹시라도 불편할 수도 있으니까요."
"무슨 그런 걱정을 해요. 그럼 인사시키면 되지!"
"그래요. 그럴게요. 열린씨가 그러라면 그래야지."
웃으며 그가 내 손을 잡았고, 아빠 병실 앞에 도착 하고 나서야 손을 놓을 수 있었다. 밤이라서 병원은 조용했고, 아빠는 왜인지.. 혼자 눈을 감고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아빠가 눈을 천천히 떴고, 나는 그런 아빠에게 웃으며 물었다.
"엄마는 어디가고 아빠 혼자있어?"
"……."
웃으며 고개를 젓는 아빠에 의자에 앉아서는 아빠의 양손을 잡아주었다. 생각해보니까.. 아빠는 매일 내 편이었는데.. 엄마한테 잔소리 들어도 매일 엄마 혼내는 건 아빠였는데.. 그런 아빠는 숨도 겨우 쉴 만큼 많이 아프다.
열린이 병실에서 나오자, 병실 문을 열려고 하던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바쁜지 의자에 앉아서 스케줄을 보던 선호는 열린이 엄마를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ㅕㅆ다.
"아, 저희 엄마예요.. 내 애인이야, 엄마."
"아, 안녕하세요. 열린씨 남ㅈ.."
"인사는 됐어요."
선호씨의 말을 끊고 병실로 들어가려는 엄마의 손목을 잡았다.
"엄마 왜 그래."
"네 인생 알아서 살아. 엄마도 지친다."
결국엔 문을 닫고 사라진 엄마에 열린이 당황스러운 듯 선호의 눈치를 보며 말한다.
"미안해요.. 원래 안 그러시는데.. 안 좋은 일이 있었나봐요."
"괜찮아요. 저는 신경 쓰지 마요. 하나하나 다 신경쓰고 살면 힘들어요."
"…치."
"뭐? 아줌마가 집에 찾아왔었다고???"
"얼마 안 기다렸다고 하는데. 몇시간은 기다린 것 같더라."
"뭐라고 하시는데..?"
"화내시더라."
"엥? 아줌마가 너한테 화를? 너한테 화 한 번도 안 내시는 분이잖아. "
"내가 잘못한 게 맞지. 어머님한텐.."'
주혁은 많이 힘들어보였다. 동연이 맥주 한모금 마시고선 주혁의 눈치를 보았다. 얘가 오늘 왜 이럴까.. 어머님 찾아왔다고 이렇게 풀이 죽었다고? 얼마나 뭐라고 하셨길래.
"길열린 말이야."
"어."
"예전에 나 몰래 애 지웠대."
"뭐???진짜????아니.. 임신을 했었다고??"
"3년 전에."
"넌 몰랐어?"
"어. 어제 어머님한테 듣고 알았어."
"…아니. 길열린 걔는 왜..."
"걔는 날 왜 이렇게 쓰레기처럼 만드냐. 진짜..."
"……."
"나 진짜.. 개쓰레기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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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