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범벅 짝사랑 민윤기를 다시 만난다면-7
w. 쮼
이번 계절 학기의 위기는 아무래도 조별 과제인듯하다.. 나는 할 것도 많고, 지금 넣어 놓은 공모전도 2개나 되는데, 대체 왜 왜 왜 나와 석진 선배만 과제를 하는 것 같냐구요.. 니들만 바빠? 나도 바빠! 나도 곧 졸업이야!
"후, 그래서 오늘도 못하신다..?"
대체 이 추운 겨울에 어딜 싸돌아 다니셔서 무슨 사고가 나셨길래 이틀 내내 자료도 못 찾는 이유가 대체 뭔데요, 예?
나는 지금 단단히 화가 났다. 석진선배와 같이 듣는 그 필수 교양, 그 쓸데없이 조별 과제도 있는 그 교양. 그 교양에 조원 두 명 모두 사정이 있다는 말에 회의를 두 번이나 미뤘다. 결국 모두와 합의한 결과, 회의는 카톡으로 하였고, 그 말도 안되는 카톡 회의는 2학년인데 아직도 피피티를 못 다룬다는 조원 한 명과, 대놓고 자료 조사만 가능하다는 그 뻔뻔한 두 명 덕분에 그 둘이 자료 조사를 맡고 나와 선배가 피피티를, 그리고 발표는 나중에 정하기로 했다. 그런데 한 명은 자료 조사까지 못할 이유가 도대체 뭔지 개인 사정 때문에 오늘까지 주기로 한 자료를 내일 주겠다는 카톡을 보냈다. 이러니 내가 화가 나 안나.. 안 그래도 요새 과제와 공모전 준비로 바빠서 윤기랑도 만나지 오래됐는데, 속상하고 화난 마음이 드디어 터져버렸다.
"나도! 나도 바쁘다 이 자식들아...."
"여주야, 일단 진정해. 우리 일단 내일까지 기다려보자. 오늘 피피티 만들기로 한 건 받은 자료로만 해보자."
"선배, 지금 이 말 믿어요..? 당장 다음주가 발표에요.. 선배랑 저랑 오늘이 제일 시간이 맞아서 만난 건데.. 저희도 조금이라도 자료 찾는 게 낫지 않을까요?"
"하...그래, 그럼 일단 사례는 우리가 찾자.
결국 자료조사와 피피티 모두 나와 선배가 끝을 내고야 말았다. 못 할 것 같다는 카톡을 읽씹을 하니 자기도 찔렸는지, 겨우 시간을 내 했다는 핑계와 함께 자료를 보내 줬다. 하지만 뒤 늦게 날라 온 자료마저 복붙이었으니, 미리 선배와 내가 하길 잘한 듯 했다. 아, 윤기 보고 싶다. 요새 과제와 공모전 밤샘으로 온다는 윤기를 마다했다. 마음 같아선 너무 보고 싶었지만, 지금 이 퀭한 몰골로는 도저히 윤기를 볼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윤기도 바쁜 걸 뻔히 아는데,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첫 연애니까 더 오래가려면 상대의 시간도 배려해줘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분명 선배와 오전 수업이 끝나자마자 밥도 안 먹고 시작했는데, 시간을 보니 9시였다. 지쳐서 카페에 조금 더 있다가 간다는 나에게 선배가 내일 보자며 카페를 나갔다. 얼음이 녹아 밍밍해진 아메리카노를 끝까지 들이켜 마시고 핸드폰을 들여다 봤다. 핸드폰엔 미쳐 읽지 못한 윤기의 문자가 있었다.
[오늘도 얼굴 못 보나?] -pm6:13
9시면.. 윤기 오는 데만 한 시간.. 그럼 10시쯤일 테고, 우리 집까지 데려다 준다고 우기면... 머리 속으로 윤기와 만날 시간을 계산하니 역시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응, 미안ㅠㅠ 오늘도 과제가 너무 늦게 끝났어.. 집 가서 전화할게, 내일은 꼭 보자!] 라는 문자를 남겼다. 윤기도 속상하겠지.. 솔직히 마음 같아선 윤기 집에 찾아가고 싶었다. 윤기 본가가 지방이라 자취를 해서 지금 이 시간에 찾아가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세한 주소는 잘 모른다. 전 학교와 윤기가 다니는 음악 작업실 그 사이 어디 쯤이라는 거 말곤 모른다. 새삼 내가 윤기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호석이! 호석이는 알 거 아니야!
호석인 윤기와 같이 음악을 하는 사이라 자취방에 가끔 자고 가기 때문에 주소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가 얼른 호석에게 전화를 했다. 조금은 긴 통화음이 지나고 호석이 어? 웬일이야~? 하며 밝게 전화를 받았다. 어디 놀다가 전화를 받은 것인지, 주변의 시끄러운 소음이 들려왔다. 덕분에 내 통화하는 목소리도 자연스레 커졌다.
"아, 그 혹시 윤기 집 어딘지 알아?"
"어? 음 잠시만"
잠시만이라는 말과 함께 시끄러운 어딘가에서 나왔는지 주변 소음이 점점 사그라들었다.
"어, 여주야 아까 뭐라고? 윤기 뭐?"
"아, 그 혹시 윤기 집 어딘지 알아? 내가 지역만 알고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데, 윤기 보러 가려구... 그 이벤트로!"
이벤트라는 말에 호석이 흥미롭다는 듯이 웃었다. 무슨 이벤트를 할 거냐고 묻던 호석이 윤기를 일주일 넘게 못 봤다고 하자 한참 크게 웃다가 문자로 찍어서 보내주겠다는 말과 함께 끊었다.
[주소는 여기! 이벤트 화이팅! 가는 데 2시간 넘게 걸릴텐데, 얼른 출발해라~]
2시간..? 윤기는 늘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이면 온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우리 학교 위치를 제대로 알지 못한 호석의 실수겠거니 싶었다. 지도 앱을 켜 윤기 집 주소를 검색하자, 2시간 10분이라는 시간이 보였다. 게다가, 도보 20분..? 지하철과 버스의 콜라보레이션까지... 온갖 환승은 다 하는 듯한 안내에 당혹감이 몰려왔다. 그럼 윤기는 매일 2시간을 걸려서 왔다고..? 우리 집은 더 멀텐데... 이번엔 내 위치를 우리 집으로 바꿔보았다.
'2시간 35분'
아, 아..? 이번엔 더 긴 시간에 어이가 없었다. 그럼 그 동안 윤기는 중간에 꼭 택시는 탔다는 건데.. 얘 도대체 왜 이런 걸 말 안 한 거야... 윤기의 집을 제대로 찾아 볼 생각도 안하고,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이면 온다는 윤기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윤기를 만나면 꼭 무리해서 오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옅게 화장을 하곤 가방을 챙겨 카페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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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시간을 걸쳐 윤기의 집에 도착해 문 앞에서 어떻게 할지 고민을 하다 보니,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이 먼 거리를 윤기 혼자 그렇게 걸었을 걸 생각하니 어이가 없으면서도 고마웠다. 너가 날 이만큼 좋아하는 구나, 늘 행동에서 묻어 나는 걸 알았지만, 다시금 너의 사랑을 확인한 것 같아 감동을 받았다. 내가 너의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우겼던 날, 네가 왜 그렇게 단호하게 거절했는지도 알게 되니 내 얼굴엔 헛웃음과 설렘의 웃음이 동시에 비집고 나왔다. 윤기는 여우야, 라는 말이 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넘치는 감동과 알 수 없는 감정은 윤기의 집 초인종을 누르는 충동으로 나왔다. '띵동-' 밝고 경쾌한 소리에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두근거리는 내 심장과 반대로 집 안은 조용했다. 윤기가 집에 없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어 조금 당황했다. 늦은 밤이라 당연히 윤기가 집에 있을 거라 생각한 내 실수였다.
"아직 밖인가? 아 전화할 걸 그랬네.."
핸드폰을 들어 윤기에게 전화를 거는데, 내가 걸자마자 진동 소리가 근처에서 들렸다. 진동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니 윤기가 벽에 기대 나를 보고 있었다.
"어? 뭐야, 윤기 언제 여기 있었어?? 왜 아무 소리 안 들렸지? 너 온 지도 몰랐다."
"...내가 술을 마셔서 그런가... 이젠 말도 하네"
"엥? 윤기야 술 마셨어?"
윤기에게 다가가자 얼마나 마신 건지 술 냄새가 훅 났다. 뽀얀 얼굴이 발그레 달아 오른 것이, 술을 꽤 많이 마신 듯 보였다. 술도 못하는 애가 왜 이렇게 많이 마신 거야, 걱정을 하며 윤기를 부축하고자 팔을 잡으니 윤기가 고개를 돌려 나를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그제서야 내가 나인 걸 눈치 챘는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봤다.
"뭐야.. 너 오늘 못 본다며..."
"그냥, 너무 보고 싶어서.. 혹시 내가 갑자기 와서 좀 그런가..? 나 갈까?"
"아니, 가지마...나 너 안아도 돼?"
내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윤기가 나를 크게 안아왔다. 따뜻한 윤기 품속에 안기자 윤기의 시원하고도 뽀송한 향과 술 냄새가 함께 풍겨왔다. "너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속상하게." "힘든 일 있었어?" "작업할 게 너무 많아서 그래?" 나의 물음에도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던 윤기가 갑자기 나를 더 세게 안아왔다. 갑작스런 압박에 심장이 턱하고 멈출 것 같이 숨이 막혔지만, 어정쩡했던 손을 겨우 들어 윤기의 허리를 감았다. 그러자 윤기가 세게 안던 팔을 살짝 풀곤 얼굴을 내 어깨에 파묻었다. 목 근처에서 윤기의 더운 숨이 느껴졌다.
"나 보고 싶었어?"
"응...너가 자꾸 오지 말래서..참고 있었어.."
"미안, 나도 보고 싶었는데, 진짜 너무 바빴다.."
"진짜 너무해 김여주. 나를 아주우 피를 말리게 하려고..."
대뜸 말을 늘리는 윤기가 귀여우면서도 나보다 덩치가 큰 윤기의 갭 차이에 또 쿵쿵거리는 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난 이렇게 심장이 빨리 뛰는데, 너도 그럴까? 윤기의 심장 소리를 느끼고 싶어 윤기의 허리를 더 세게 감았다. 그러자 너도 내 허리를 다시 세게 안았다. 우리는 마치 일주일 동안 보지 못한 걸 채우기라도 하듯 서로를 빈틈이 없을 정도로 세게 안았다. 쿵-쿵-쿵-쿵- 가까이 붙어있으니 윤기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아니, 어쩌면 내 심장 소리가 너무 큰 걸지도.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은 채로 가만히 있자, 복도 등이 꺼졌다. 우리의 적막에 다른 집 소음이 복도로 새어 나왔다. 하지만 차가운 겨울 밤 어두운 공간이 꼭 우리 둘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만들어 냈다.
"근데 윤기야, 나 금방 가봐야 하는데.. 너 취해서 힘들면 내가 부축해줄까?"
"아니..가지마. 밤도 늦었는데..우리 집에서 자고 가면 안돼?"
"어?"
집에 자고 가라는 말에 놀라 허리에 감은 손을 풀고 몇 발자국 물러났다. 내 발걸음에 복도 불이 켜졌다. 내가 포옹을 풀자 윤기가 내 어깨에 묻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 봤고, 윤기의 붉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취해서 붉어진 건지 부끄러워서 붉어진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고 굳건했다. "아무 것도 안 할 거야, 겁 먹지 마. 그냥.. 오늘 하루만 같이 있자.. 우리 사귀고 제대로 본 게 하루밖에 없잖아..응?" 물을 머금은 듯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는 윤기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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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네 집에 처음 갈 때는 무언가 긴장이 되고 편하지 않은데, 남자의 집이라니. 심지어 남자친구의 집이라니, 이상하게 자꾸 긴장이 되고 몸이 뻣뻣한 기분이었다. 윤기가 편하게 갈아입으라고 준 츄리닝도 차마 갈아입지도 못하고 껴안은 채로 바닥에 앉아 있었다. 왠지 무언가를 만지면 안될 것 같은 그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윤기가 씻으러 들어간 화장실에서 들리는 물소리만 가득했고, 알 수 없는 긴장감과 떨림에 생각이 많아졌다. 내일 아침 1교시 수업인데 내가 어쩌다 여기 와있는 거지. 애초에 윤기를 보겠다는 충동으로 아무 것도 재지 않고 와버린 내가 신기할 따름 이었다. 나름 편입을 준비하면서 MBTI가 J로 바뀐 줄 알았는데, 사랑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이런 내가 퍼뜩 웃기다는 생각에 고개를 젓고는 윤기의 방을 천천히 둘러 보았다.
윤기의 방은 꼭 윤기를 닮아있었다. 온통 무채색, 옷도 무채색 옷이 많은 윤기였는데 집 마저 무채색이었다. 검정색 스탠드, 회색 침구류와 실버 알람 시계까지.. 파스텔 톤의 내 방과는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 윤기를 짝사랑(아니 사실 삽질이었지만) 어쨌든 윤기를 좋아했을 당시 윤기와 내가 참 많이 다르기에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생각도 내가 용기를 내지 못했던 이유들 중 하나였다. 물론 이마저도 결국 내가 남의 눈치를 봐서 든 생각이지만... 하지만 이젠 그런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무채색인 너와 파스텔 톤의 내가 만나 꽤 근사한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누가 듣는다면, 아직 사귄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판단이 성급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안 갈아입고 뭐하고 있어? 방 바닥 찬데, 침대에 앉지"
샤워를 끝마치고 화장실 문을 열자마자 내 걱정을 해주는, 나를 보기 위해 2시간 반이나 걸려서 달려오는, 그리고 확신이 없던 내게 솔직하게 자기 감정을 고백한 이 사람을 내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 나도 씻고 갈아입으려고"
정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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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가 건네준 츄리닝을 들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샤워를 마치고 츄리닝으로 갈아입고 문을 여니 윤기가 침대를 등받이 삼아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꾹꾹 눌러 닦으며 윤기 옆에 가 앉았다. 윤기에게서 나는 향과 내게서 나는 향이 똑같아 기분이 제법 좋았다. 윤기 샴푸는 윤기 몸에서 나는 향과 비슷했다. 뽀송한 비누향. 살짝 더 달달한 향인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옆에서 윤기의 책을 바라보자 윤기가 나를 쳐다 보았다.
"근데 윤기야, 너 왜 나한테 거짓말 했어? 우리 학교까지 1시간이면 온다며, 내가 오늘 와보니까 2시간은 넘게 걸리더라?"
"너가 알면 부담스러워서 오지 말라고 했을 거잖아. 아니야?"
"그래도.. 중간에서 만나면 되잖아. 너 피곤한데"
"내가 좋아서 그렇게 한 거야. 그리고 너 내가 작업할 거 생겨서 신난다고 전화한 걸 내가 완전 바쁘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너 데려다 주고 네 얼굴 볼 시간은 있거든? 누구랑은 다르게 나는 일이 하나 밖에 없어서"
윤기가 일주일을 넘게 약속을 거절한 게 섭섭했는지 툴툴거렸다. 하지만 그런 윤기 마저 밉지 않고 귀여웠다. 사람이 귀여워 보이는 건 이제 정말 끝이랬는데, 아무래도 난 윤기에게 끝이 난 듯 하다.
"미안, 진짜 공모전이랑 조별과제까지 너무 바빴어.. 그래도 나 너 보러 여기까지 왔잖아, 이건 잘했지?"
"응, 그건 잘했네"
잘했다며 내 젖은 머리를 슥슥 쓰다듬는 윤기에 다시 심장이 콩닥거렸다. 아까는 술에 취해 발그레한 얼굴이 귀여웠는데, 씻자 마자 깬 것인지 뽀얀 얼굴이 제법 아쉬웠다. 술 취한 윤기 귀여웠는데,
"근데 윤기야, 너 술 벌써 깬거야? 술 못하는데 깨는 건 금방 깨네. 나중에 나랑 둘이서 술 마시자. 너 취한 거 보고 싶어."
"왜, 너 또 혼자 술에 취해서 기억 다 삭제해 버리려고?"
"아씨 분위기 깨지 마. 아니 난 너 취한 거 한번도 본 적 없는데, 벌써 깬 게 아쉬워서."
"나 사실 술 잘 마셔. 학교에선 술 강제로 먹이는 게 싫어서 조금만 마셔도 울렁거리는 척 한거야. 너 나랑 마시면 너만 취한다?"
내가 또 모르는 윤기의 모습이었다.
"치, 그건 마셔봐야 알지, 근데..나 나름 네 여자친군데 모르는 거 진짜 많은 것 같아.."
"그래서 서운해?"
"응, 내가 제일 잘 알아야 하는데, 오늘 너네 집도 그렇고 술 주량도 모르고.. 호석이보다 아는 게 없네"
"천천히 알아가면 되잖아. 오늘은 벌써 두 개나 알게 됐네?"
"아씨, 누구 놀려? 그냥 너를 내가 제일 잘 알고 싶다는 말이잖아.. 진짜 은근 속상해..."
윤기는 나에 대해 많이 아는 것 같은데 내가 윤기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은 꽤 상심이 컸다. 나름 내가 널 열심히 짝사랑해왔는데, 너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얼마 없다니.. 이 얼마나 충격적이고 슬픈 일인가.. 게다가 몇 달 전까진 나한테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던 너는 나에 대해 많이 아는 거 같은 기분이 자꾸 들었다. 이런 걸로 지고 이기는 게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섭섭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호석이보다 내가 모르는 게 많다는 건 자존심이 상하니까. 괜히 입을 대빨 내밀며 칭얼거리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윤기가 책을 덮고 몸을 내게로 돌렸다.
"여주야 나는 너가 날 잘 알던 모르던 그냥 네가 좋아. 너는 이거 하나만 알면 돼."
"그리고.."
말을 잇지 못하고 진득하게 날 쳐다보던 윤기가 입을 다시 열었다 "난 참을성이 별로 없는 것 같아." 말을 끝낸 윤기가 바로 몸을 기울여 내게 입을 맞췄다. 윤기의 두 손은 어느새 내 볼에 얹어져 있었다. 저번 뽀뽀보다는 조금은 긴, 하지만 너무 깊지는 않은 입맞춤이었다. 훅 들어온 윤기의 얼굴과 서로에게서 풍기는 뽀송하고 달달한 향이 내 심장을 세게 쥐고 뒤흔들었다. 얼굴은 분명 빨개져 있겠지. 가볍지도 깊지도 않은 입맞춤을 끝내고 윤기가 다시 몸을 돌렸다. 갑작스런 뽀뽀가 지나가고 놀라서 윤기의 옆을 보니 윤기의 귀가 빨개져 있었다. 괜히 집에서 키스도 아닌 뽀뽀도 아닌 긴 입맞춤을 하니 어색함이 맴돌았다. 아니 그러게 누가 대뜸 고백하고 뽀뽀하랬나.
"큼, 그 너는 침대에서 자. 나는 바닥에서 이불 깔고 자면 돼."
"아, 어..응 그래. 응"
괜히 큰소리로 기침하며 일어나 이불을 꺼내는 윤기를 멍하니 바라보다 나도 일어나 이불을 펼치는 윤기를 도왔다. 아까의 상황이 생각나 조금 웃겼다. 뚝딱거리는 우리 둘의 모습이 웃기고 간질거렸다. 자꾸 웃음이 새어나와 히죽대며 웃자 윤기도 뒷 목을 긁으며 멋쩍게 웃었다. 이불을 모두 펼치고 다시 침대에 기대 앉았다. 일주일 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눌 셈이었다. 공모전 두 개를 한꺼번에 지원해 몸이 남아나지 않는 것 같다는 나의 불평과 조별과제는 꼭 제대로 되지 않아 화가 났다는 나의 화까지, 나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공감해주는 윤기였다.
"아, 근데 오늘 누구랑 술 마신 거야?"
"아, 호석이랑. 오늘 작업 거의 끝나서 잠깐 만났어."
"아, 그래서 호석이가 그렇게 웃은 건가? 내가 너 집 주소 물어보려고 호석이한테 물어봤거든"
"아, 어쩐지 내가 걔네 집이 더 가까워서 집 가려니까 안된다고 우기면서 집 보내길래 왜 그러나 했더니만.."
결국 또 타인의 도움으로 만난 우리 둘이었다. 우리 둘은 큐피드가 많다. 어쩌면 정말 온 우주가 우리를 도와주는 것일지도... 말도 안되는 생각까지 하며 윤기와 도란도란 나눴다. 처음으로 친한 형에게 부탁 받은 곡 작업까지 곧 마친다는 윤기에게 축하도 건네고, 빌린 거라 허름하다고 오지 말라는 작업실까지 가겠다는 허락까지 받아내며 그렇게 밤이 깊어갔다.
오늘의 윤기 외전 |
D-3 [윤기야, 나 오늘 공모전 하기로 한 팀원들이랑 회의 있어서 늦게 끝날 것 같아ㅠㅠ 집에서 전화할게!] [윤기야, 오늘도 과제랑 공모전 준비 중ㅠㅠ 오지마ㅠㅠ 나 진짜 늦게 끝나ㅠㅠ] [윤기야..나두 보고싶다ㅠ 근데 오늘 진짜 안될 것 같아 미안해ㅠㅠ]
하... 5일 정도 저런 문자들로 여주를 보지 못했다. 나는 진짜 괜찮은데, 자꾸 오지 말라는 너의 문자에 차마 가지도 못했다. 요새는 오지 말라고 거절한 건 정말 거절한 거니까. 여주를 곤란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여태 보고 싶은 마음을 꾹꾹 참았다. 하지만 괜히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웃으면서 오래 보고 싶다고 나를 붙잡던 너가 나를 밀어내는 게 꽤 많이, 아니 존나 존나 많이 서운했다. 친구들과는 한 달을 못 봐도 아니? 솔직히 일 년을 못 봐도 아무렇지 않은데, 너라는 존재는 자꾸 보고 싶었다. 참 이상하지 너를 붙잡길 포기하고 군대에 들어가 훈련을 받을 때도 너 생각이 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고백을 하고 사귀고 나서 너의 손을 잡고 너의 입술에 입을 맞추니 사람의 욕심이 날로 부풀어버린 게 틀림 없었다.
여주에게 다시 오늘은 데리러 갈까? 라는 문자를 보내 놓은 채 괜히 피아노를 똥땅거렸다. 친한 형이 몇 주 전에 부탁한 곡 작업을 곧 끝내야 하는데, 오늘은 집중이 되지 않았다. 한숨을 쉬며 작업실을 나왔다. 어차피 빌린 곳이라 내 타임이 곧 끝나갔기 때문에 나와야 하기도 했다. 여주를 만난 후로 줄곧 참던 담배를 주머니에서 찾아 꺼내 들었다. 답답한 마음을 담배 연기로 날려 보냈다.
아, 김여주 보고싶다 진짜로..
D-2 [윤기 너도 바쁜데, 무리해서 오지마!ㅠㅠ 나 진짜 오늘은 시간이 안 될 것 같다ㅜ 집 도착하면 전화할게!]
어제의 마지막 문자를 기점으로 너에게선 전화도 오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면 전화 한다며.. 내가 먼저 전화하니 잠에서 깬 듯 웅얼거리는 너의 목소리에 잠을 방해할 수는 없어 얼른 통화를 끝낸 것도 아쉬웠다. 정말 이기적이게 그냥 물고 늘어질 걸 그랬나.. 아니지 피곤한 애를 내가 뭐라고 괴롭혀. 속에선 이성과 감정이 싸우는 소리만 들렸다. 벌써 저녁인데, 수업은 이미 끝났을 너에게서 연락이 없는 걸로 봐선 또 바쁜 듯 보였다. 사귀고 만난 첫 날 공모전 두 개 응모하는데 괜찮을까 라고 카페에서 묻던 너를 말리지 않았던 내가 원망스러웠다. 자신이 없다는 너에게 용기를 불어준 그 때의 내가 짜증났다.
"이래서 타임머신이 필요한 건가"
정말 말도 안되는 말까지 지껄이며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너에게 문자를 보냈다. 별로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보고는 싶으니까.
[보고싶다 여주야]
한 시간이 지나도록 오지 않는 문자에 한숨을 내쉬었다. 곡 작업을 하다가도 자꾸 너 생각에 방해가 되었다. 솔직히 이제는 서운함에서 불안함까지 왔다. 혹시 내가 현관 앞에서 한 뽀뽀가 너무 급작스러웠나? 아님 벌써 내가 질렸나? 내가 뭘 잘못한 게 있는 건가.. 분명 너가 바쁜 거라 그런 걸 알면서도 불안함이 싹트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분명 나는 내가 서운함을 느끼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애초에 누가 내게 오고 가고는 아무렇지 않은 일이라고 머릿 속으론 그렇게 생각해왔는데, 너는 예외인 듯 하다. 아주 아주 큰 예외
[나도ㅎㅎ 근데 오늘도 진짜 못 만날 것 같아.. 미안해ㅜ 대신 오늘은 영상 통화 하자! 사랑해♥]
참나, 사랑해에 하트를 붙이면 내가 화가 풀릴 줄 알았어? 응. 맞아. 조금 웃음이 나왔어. 저 하트 이모티콘이 뭐라고 몽실몽실 둥실둥실 마음이 떠올랐다. 진짜 어이없어, 내가 이렇게 가벼운 사람이었나? 오늘도 내 욕심을 눌러 담고 아무렇지 않은 척, 나는 너의 시간을 모두 이해하고 배려하는 그런 너그러운 남자친구 인척 [괜찮아, 어제도 너 뻗었잖아. 많이 피곤하지? 화이팅해] 키보드를 꾹꾹 눌러 문자를 보냈다.
D-0
결국 일주일 아니, 8일 동안 여주와 만나지 못했다. 아니 연애 초반엔 원래 맨날 만나는 거 아니었나? 내가 연애에 서툴러서 잘 모르는 건가? 아니 우리가 장거리도 아니고, 택시만 타면 한 시간이면 가는 거리를...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너를 배려하겠다는 마음이 괜히 화살이 되어 나를 쿡쿡 찔렀다. 여주야 너가 바빠서 쓰러지기 전에, 내가 널 못 봐서 쓰러지겠어...
어이없고도 주책 맞은 생각에 고개를 젓고 호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막바지에 이르러 다 끝나가는 작업도 재미 없고 씁쓸하니 술이라도 마실 생각이었다. 학교 근처에서 약속을 잡곤 작업실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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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그니까.. 혹시 내가 정 떨어졌을까?"
"아오, 아니라고.."
"근데 왜 나 자꾸 안 만나려고 하지.. 근데 또 사랑한다고는 문자도 해..."
"아~~ 너네 존나 꿀 떨어지는 거 자랑하려고 불렀으면 나 가면 안될까?"
"그러니까 호석아.. 3시간이 지났는데도 내 문자에 답을 안해.. 무슨 일 생긴 거면 어떡해?"
나 혼자 연거푸 술 한 병을 연달아 마시자 취기가 빠르게 올랐다. 아까부터 자꾸 여주를 찾는 나 때문에 호석이 평소 내지 않던 짜증도 조금 냈다.
"그럼 전화를 해"
"쫌팽이 같아 보이면 어떡해.. 요새는 집착하는 거 싫어한대.."
중얼중얼 불만을 토로하던 내 말이 끝나길 무섭게 호석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 동기 김여주]
호석의 핸드폰에 니 이름이 써진 걸 보고 벙쪘다.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내 문자도 답장하지 않던 너가 호석이한테? 왜? 무슨 이유로? 나한테는 안 했는데 왜? 호석이 내 눈치를 보다 전화를 받았다. 술집의 소음 때문에 여주의 음성이 들리지 않았다. 호석이 나를 슬쩍 보더니 밖으로 나갔다. 어이가 없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 핸드폰을 바라봤다. 혹시 여주에게서 부재중이 찍혀있을 까봐. 그런데, 내겐 바빠서 오늘도 못 볼 것 같다는 문자 하나 와있었다. 아니 뭐지?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나한텐 바쁘다고 문자 하나 보내놓고, 호석이한테는 전화? 짜증도 나고 화도 나고 슬프고 기분 나쁜 감정들이 머리를 괴롭혔다. 하... 한숨을 내쉬자 술에 취한 내 입에선 더운 입김만 나왔다. 통화를 마쳤는지 호석이 웃으며 들어왔다. 웃는 호석의 모습이 꽤나 얄미웠다.
"뭐야, 왜 니한테 전화가 오냐?"
"참내, 내가 진짜 어이가 없다 어이가~~"
"뭔데"
"넌 안 그렇게 보여서 집착이 많다? 그냥 뭐 대충 과제하는데 춤 관련해서 물어 볼게 있었대."
호석의 말에 온갖 긴장감이 풀리듯 화가 가라앉았다. 무슨 생각을 한 것도 아닌데, 다행이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진짜 김여주 만나면 가만 안 둬. 하루 종일 너만 보고 있을 거야...
"아.. 뭐, 재즈 교양 듣는다더니, 그건가.."
"에휴, 야 이제 그만 마셔. 나도 좀 마시자"
그렇게 1시간 넘게 더 술을 마시다가 술집을 나왔다. 집까지 가긴 귀찮았기에, 학교 근처에서 자취하는 호석의 집에서 잘 생각이었다.
"아, 근데 민윤기. 오늘은 너네 집에서 자. 오늘 우리 집 안됨"
"엥, 왜? 갑자기?"
"응, 완전 갑자기. 엄마가 온다네?"
"너네 어머니 광주 살잖아. 여길 이 밤에?"
"응 갑자기! 그러니까 택시 타고 집 가! 안녕! 나 간다! 집에서 좋은 시간 보내라~"
술 기운에 달아오른 얼굴을 진정 시키고자 얼굴을 꾹꾹 누르며 택시에 올라탔다. 에라이, 집에서 혼자 좋은 시간은 무슨.. 호석이도 가버리고 여자친구는 바쁘고 괜히 우울해져 택시 창문 밖 풍경만 바라봤다. 획획 지나가는 검정색 빌딩과 가로등 불빛들이 아름답게 빛이 났지만 마음은 싱숭생숭 퍼렇게 어두워져만 갔다.
"아직 밖인가? 아 전화할 걸 그랬네.."
빌라에 도착해 계단을 오르고 우리 집으로 향하는 복도에 네가 보였다. 그렇게 많이 안마셨는데, 취기가 돌아서 그런지 헛것도 보이나 싶었다. 진짜 이 정도면 상사병 아니야? 진짜 내가 미친 건가? 복도에 기대 너를 바라보는데, 패딩 주머니에 아무렇게 쑤셔 넣었던 핸드폰이 울렸다. 그러자 너로 추측되는 환영이 나를 쳐다 보았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곤 내게 총총 달려오는 게 정말 너 같았다.
"엥? 윤기야 술 마셨어?"
"술도 못마시는 애가 왜 이렇게 많이 마신거야"
부축을 하려 내 팔을 붙잡는 감촉에 드디어 너가 정말 너인 걸 깨달았다. 말도 없이 여길 어떻게, 아니 것보다 우리 집 주소를 어떻게 알고?
"뭐야.. 너 오늘 못 본다며..."
나의 서운함이 잔뜩 묻은 멋없는 투덜에 너가 살짝 미소를 보였다.
"그냥, 너무 보고 싶어서.. 혹시 내가 갑자기 와서 좀 그런가..? 나 갈까?"
"아니, 가지마...나 너 안아도 돼?"
사실 물어본 건 형식. 너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덜컥 너를 안아버렸다. 너를 안자, 너에게서 달콤한 향이 났다. 그래, 이 향이지. 달콤하면서도 부드럽고 따뜻한 복숭아 아이스티 같은 향. 따뜻한 복숭아 아이스티는 좀 웃기네, 하지만 너에겐 그런 향이 났다. 내가 너를 안고는 아무 말도 안 해서 네가 걱정을 했는지 걱정 어린 말투로 질문을 와다다 쏟아부었다. "너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속상하게." "힘든 일 있었어?" "작업할 게 너무 많아서 그래?"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괜히 너가 미워져 너를 더 세게 안았다. 너도 숨이 막혔는지 헉-하는 소리를 내다가 손을 올려 내 허리를 감았다. 나른하고 따뜻한 감정들에 기분이 좋았다. 포옹 하나로 서운했던 못난 마음들이 사르르 녹아 없어졌다.
"근데 윤기야, 나 금방 가봐야 하는데.. 너 취해서 힘들면 내가 부축해줄까?"
"아니..가지마. 밤도 늦었는데..우리 집에서 자고 가면 안돼?"
이건 나의 무리수. 그냥 나의 충동. 내 말에 너가 눈을 또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 보았다. 포옹을 풀어버린 게 아쉬웠다. 저번엔 너가 아쉽다고 나 데려다 주겠다고 했으면서, 집에서 있는 건 왜 안돼. 게다가 밤도 늦었잖아. 오늘은 내가 취기가 돌아서 못 데려다 주겠는데.. 서운함을 표출하고 싶었지만 그런 멋없는 사람이고 싶지 않았다. 그냥 천천히 널 꾀어내면 되겠지. 그치?
"아무 것도 안 할 거야, 겁 먹지 마. 그냥.. 오늘 하루만 같이 있자.. 우리 사귀고 제대로 본 게 하루밖에 없잖아..응?"
이건 나의 유혹. 그래도 너한테 아무 것도 안 한다는 건 약속. 나의 말에 너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붉어진 너의 귀가 귀엽다는 생각을 하곤 집 문을 열었다. 청바지를 입은 너에게 편하게 있으라며 츄리닝을 건넸다. 나한텐 딱 맞는 건데, 넌 좀 크려나? 목이 좀 늘어난 츄리닝이라 걱정이 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모든 상황이 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들이니까. 술도 깰 겸 먼저 씻는다며 화장실에 들어갔다. 사실 술은 이미 깬 것 같았다. 너를 우리 집에서 보는데 심장이 조금만 쿵쾅대야 말이지.. 정신을 조금 차리고자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곤 나왔다.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니 너가 바닥에 앉아 내 방을 구경하고 있었다. 보일러 방금 틀어서 아직 바닥 찬데.. 청바지도 불편하겠다..
"안 갈아입고 뭐하고 있어? 방 바닥 찬데, 침대에 앉지"
"아, 나도 씻고 갈아입으려고"
너가 머리를 탈탈 털어 말리는 나를 지나쳐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도 아까 네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침대에 기댔다. 여자친구가 자취 방에 온 건 처음이라, 괜히 두근 거리고 설레었다. 화장실에서 물 소리가 들리는데, 자꾸 긴장이 되고 최면에 걸린 듯 온 신경이 화장실로 향했다. 콩닥거리는 심장이 주체가 되질 않아 책을 꺼내 들었다. 하얀 건 종이고, 까만 건 글씨요... 문장이 하나도 들어오지도 않는데 그냥 하염 없이 책을 바라봤다. 이렇게라도 하면 진정이 될까 싶어서.
너가 씻고 나왔는지,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화장실에선 내가 쓰던 샴푸와 바디워시 향이 확 풍겼다. 겨우 집중한 책에서 다시 신경이 너에게로 쏠렸다. 아무래도 내 충동과 유혹은 모두 내 덫인 듯 했다. 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머리를 말리며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네 몸에서 나던 따뜻한 복숭아 향은 어디로 가고, 내게서 나던 비누 향에 달달한 향이 합쳐지니 심장이 미칠듯이 두근거렸다. 여기서 혼자 얼굴을 붉히면 진짜 변태가 되는 거야. 책의 모든 문장을 외울 듯이 한 글자 한 글자 소중하게 되뇌었다. 그런 나를 너가 빤히 쳐다 보는 것이 느껴지는데, 아까 호기롭게 너를 집으로 들어오게 한 내가 다시 미워졌다.
결국 내 꾀에 내가 넘어간 거지 뭐.
나름의 내 신경 안정을 위해 책을 덮지 못하고 손에 꼭 들은 채로 너를 바라보았다. 물기에 젖은 머리카락과 촉촉한 얼굴, 그리고 입술.. 애써 시선을 너의 눈에 고정하며 딴 생각을 눌렀다. 얘는 왜 귀엽고 예쁘고 다 하지 어이가 없다. 나는 그리고 어쩌다 주접 왕이 되어 버린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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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근데 나 나름 네 여자친군데 모르는 거 진짜 많은 것 같아.."
"그래서 서운해?"
"응, 내가 제일 잘 알아야 하는데, 오늘 너네 집도 그렇고 술 주량도 모르고.. 호석이보다 아는 게 없네"
"천천히 알아가면 되잖아. 오늘은 벌써 두 개나 알게 됐네?"
"아씨, 누구 놀려? 그냥 너를 내가 제일 잘 알고 싶다는 말이잖아.. 진짜 은근 속상해..."
내 마음을 알지도 못하는 네가 나에게 투덜거렸다. 아니 분명 나 못 본다고 밀어낸 건 넌데, 왜 너가 서운하다고 하는 거야? 오히려 서운하다고 찡찡거릴 입장은 나 아닌가? 입이 대빨 나와가지고는 투덜거리는 네 모습은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진짜 귀엽고 어이없어. 너는 지금 네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알아? 웨이브 진 머리에서 물이 똑똑 떨어지는데, 나한테 꼭 맞는 츄리닝이 너한텐 커서 한쪽 넥라인이 어깨에 간당히 걸쳐져서는, 뭐가 그리 서운하다고 오리처럼 입은 내밀고.. 진짜 못 산다 내가.
'촉'
아까 너한테 아무 것도 안 하겠다는 약속은 미안, 원래 약속은 깨라고 있는 거라는 말도 있잖아. 여기서 쓰는 말이 아닌가? 어쨋든.. 이건 내 욕심이자 욕구, 그리고 나를 일주일 동안 애태운 벌.
( ⁰▱⁰ )
길지도 짧지도 않은 어정쩡한 긴 입맞춤을 끝내고 너의 표정을 바라보자 딱 저 표정이었다. 목과 귀가 새빨개지는 걸 실시간으로 보는데 조금은 웃겼다. 엄청 패기 있게 뽀뽀를 했는데, 여기가 우리 집에 단둘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니 괜히 양심에 찔렸다. 저런 표정을 보는데 더더욱. 덕분에 내 귀와 목도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결국 기침을 크게 내곤 딴 소리를 했다.
"큼, 그 너는 침대에서 자. 나는 바닥에서 이불 깔고 자면 돼."
"아, 어..응 그래. 응"
우리는 참 서툴렀지만, 그래도 달달한 그런 이십대 초반의 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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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 어쩌다보니 밤을 새버린.... 왜..어째서 벌써 새벽 5시 반이죠..?
독자님들을 위한 아침 선물입니다ㅎㅎ 날아간 거 겨우 기억을 복구해서 더듬더듬 썼어요ㅜ 처음보다 조금 잘 안 써졌지만,, 재밌게 봐주세욥!! 제가 생각한 완결까지 얼마 안 남았네욥.. 절반 조금 넘게 연재 중이라니 뿌듯합니다!! 이게 다 독자님들의 댓글 덕분이에요!ㅎㅎ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드디어 윤기의 인더숲짤을 쓰다니.. 이 날 만을 기다렸습니다ㅎㅎㅎ 인더숲 윤기... 제가 제일 사랑하는 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