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제 : 무용지물)
"내가 너 때문에 이 학교에 들어오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에?"
"너 나 모르지"
"..."
"그래도 괜찮아, 지금부터 기억해. 김한빈이야."
김한빈의 물음에 대답을 못한 건 김한빈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디서 만난 것 같긴 한데 자세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가 경기할 때 상대편 선수들 얼굴을 하나하나 외울 만큼 머리가 좋지 않으니까 야구장은 아닌 것 같고. 김한빈은 날 어디서 본 지 아는 느낌인데
"우리 어디서 만났었나?"
"글쎄"
"뭐야. 대충 너 말하는 거 보니까 작년 중학야구대회 결승전에서 만나긴 한 거 같은데"
"기억 못해줘서 서운하니까 말 안해줄래. 너가 알아서 기억해봐"
픽 웃으면서 대답하는 김한빈의 모습에 내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심장의 고동을 느끼면서 멍하니 김한빈을 바라보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려 하는 느낌에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뭐야... 미쳤나봐. 얼굴은 또 왜 이렇게 달아오르고 난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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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우여곡절 끝에 다행히도 나는 김한빈과 함께 학교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는 도중에 김한빈에게 들은 정보라곤 그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이 학교의 야구부라는 점, 또 나와 같은 반이라는 점뿐이었다. 반에 들어서자마자 담임 선생님은 우리를 보고 마지막으로 남은 창가쪽 맨 뒤에 나란히 빈 자리를 가르켰다.
"자, 그럼 조례는 여기까지고! 자리는 한달 동안은 이렇게 앉는걸로. 그럼 따로 방송 나올 때까지 자유시간!"
담임 선생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지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내 자리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하긴 길 잃어버렸다고 전화 걸 땐 언제고
아무런 설명도 없이 끊으라고 통보해버렸으니깐...
"너 진짜 죽을래? 내 얘기는 듣지도 않고 전화 끊어버리고, 다시 건 전화는 받지도 않고"
"아아 미안, 어찌 됐든 무사히 도착했잖아."
"다 됐고, 김한빈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김지원은 김한빈을 아는 듯 내 옆자리를 보고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오다가 우연히 만났어. 얘도 야구부래."
"어 그건 나도 아주 잘 알지. 우리 초면은 아니잖아?"
"뭐 그렇지. 김지원이랑 같은 고등학교 팀에서 야구를 하게 되다니 영광이네."
능청스럽게 대답하는 김한빈에 김지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둘이 아는 사이인가?
뭐 대회에 한 두번 나가는 것도 아니고 남자애들의 친화력은 알 수 없으니까 아마 자주 마주치다가 친해졌겠지.
"둘이 아는 사이인 거 같은데 내 자리에 앉아서 편히 얘기 좀 해."
"뭐?"
동시에 인상을 찌푸리며 반문하는 둘에게 씩 웃어주곤 교실을 나왔다. 아침부터 지각만은 피하려고 밥도 거르고 나왔는데 길까지 헤메고.. 너무 배고픈데 매점이나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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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김한빈 니가 우리 감독을 찾고 다닌다는 소문은 들었어. 이 고등학교도 따라서 들어 온 거지?"
지원은 여자가 나간 후 하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한빈에게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지원의 표정을 보니 한빈이 맘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그럼, 내가 얼마나 찾아 다녔는데. 내 첫사랑"
한빈은 지원을 보고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실실 웃지마. 난 너 마음에 안들어. 1학년 여름 대회 때 너가 던진 공에 맞아 부상당하고 슬럼프에 시달린 것만 생각하면..."
"뭐 야구가 그런 스포츠잖아. 앞으로 자주 볼 사이인데 악수 한번 하고 푸는 게 어때?"
지원의 입장에서 한빈은 미워할 수 없는 선수였다. 자신이 한빈의 공에 맞아 부상을 당했을 때 한빈이 일부러 내 쪽으로 던진게 아니었단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부상을 당해 입원치료를 받을 때 누구보다 먼저 지원에게 찾아와 사과한 한빈이었기 때문이다.
"그딴 걸로 풀릴까 보냐"
말은 그렇게 해도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한빈의 손을 잡아주는 지원이었다.
"그나저나 넌 쟤가 왜 좋냐?"
"예쁘잖아."
한빈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지원은 소리 내며 크게 웃었다. 쟤가 예쁘다고? 너 눈이 어떻게 된 거 아니냐? 뭐가. 예쁘기만 하고만.
"하여간 쟤가 눈치만 좀 빨랐으면 김한빈이 자기를 좋아한다는 건 단번에 눈치 챘을거야. 쟤 찾으려고 아주 야구부 인맥 다 동원했더만."
"어쩔 수 없었어. 야구부 져지를 입고 있긴 했는데 어디 학교인지는 볼 겨를도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찾으려한 너도 참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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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수업이 끝난 후 다른 친구들은 처음 해보는 야자에 투덜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빨리 나가자며 재촉하는 김지원의 말에 가방을 챙기는 중이었다. 등교 첫 날부터 부활동이라니...
"김한빈 일어나! 너도 야구부잖아, 얼른 가방 챙겨."
김한빈은 마지막 교시인 수학 시간이 지루했던 건지 수업 도중부터 졸더니 결국 수업이 끝날 때 쯤엔 엎드려 자기 시작했다. 얘는 나안테 야구부라는 사실 말 안했으면 어쩌려고 저렇게 맘 편히 오래 자냐...
"아... 벌써 끝났어?"
"진작에 끝났지. 얼른 가자, 감독님안테 너네 혼날 수도 있어. 난 매니저라서 늦게 가도 상관없지만"
"그럼 나 걱정돼서 깨워 준거야? 역시 우리 매니저밖에 없네."
아무렇지도 않게 내 눈을 바라보고 웃으면서 저런 말을 하는데 도저히 김한빈의 눈을 마주치며 대답할 수 없었다. 나름 3년동안 야구부에서 지내면서 남자에 대한 면역력은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큰 오산이였다. 김한빈 앞에만 서면 모두 무용지물이였으니...
매니저로서 들어오게 된 야구부에서의 역할은 중학교 때와 다를 게 별로 없었다. 뭐 감독님과의 역할 분담으로 부담이 적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은 감독님의 옆자리가 불편한 자리일 수 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게 부활동 첫 날부터 어떤 간 큰 신입생이 30분이 넘도록 집합하지 않았거든. 덕분에 주장과 부주장, 매니저인 나 우리 셋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난 거 같은 감독님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누가 안 온 거야? 우리 학교 야구부에서 지각은 금물이라고 분명 들었을텐데... 감독님이 다른 건 몰라도 지각은 절대 안 봐주시거든."
"명단 보니까 1학년 구준회인거 같은데, 제가 한 번 반에 갔다 와볼까요?"
"그래, 매니저가 갔다 오는 게 좋겠다. 번거로운 일 시켜서 미안해."
차례대로 부주장인 윤형선배, 그리고 나, 주장인 진환선배의 말을 끝으로 나는 구준회의 반으로 달려갔다. 진짜 도대체 누구야? 부활동 첫날부터 지각하는 간 큰 놈은? 학교 안은 오자가 시작된 건지 고요했다. 아까 보니 우리 옆 반이던데..
"저기, 여기 구준회라고 있어?"
"아 구준회라면.. 저 쪽 끝에서 자고 있는 애 보이지?"
"아, 응 고마워!"
뒷문을 열고 맨 뒷자리 아이에게 조심스레 구준회의 행방을 물으니 황당하게도 어쩜 이렇게 태평하게 자고 있을 수 있는 건지.. 그나저나 이렇게 태평한 애가 김한빈 말고 또 있다니..넌 이제 감독님께 깨질 일만 남았구나.
"야 구준회, 일어나봐 야구부 가야지."
툭툭 쳐도 안 일어나자 그 다음엔 툭툭, 이래도 안 일어나? 오기가 생겨 엎드려 자고 있는 구준회의 어깨를 흔들자 탁- 내 손목을 잡아오는 것이였다.
"뭐야, 너"
"나 여기 야구부 매니저야. 감독님이 부르셔, 얼른 가자.'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보는 구준회에 흠칫했지만 아무래도 아까 감독님의 옆에 섰을 때의 살기가 아직도 느껴지듯이 생생해서 다른 손으로 내 손목을 잡고 있던 구준회의 손목을 잡으며 일으켰다. 언뜻 봐도 180은 거뜬히 넘어 보이는 구준회는 여자 중에서도 작은 편인 내려다 보며 무표정인 채로 말했다.
"아 너가 그 유명한 우리 야구부 매니저로 들어온다는 걔야?"
"그 유명한 사람이 나인지는 잘 모르겠고, 일단 빨리 나오기나 해"
"김한빈은 봤냐?"
"글쎄 쓸데 없는 말은 필요 없고 빨리 나가야 한다니까?"
"김한빈 취향 한번 독특하네. 역시 나랑 잘 맞는다니까."
다급해진 내 목소리에도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하는 구준회의 첫인상은 이렇다. 재수없어, 짜증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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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프티콘] [맘삐] 님들 암호닉 감사합니다♡♡
1화에서 댓글 달아주신 분들도 모두 감사합니다 ㅎㅎ 오늘은 준회랑 진환이 윤형이까지 등장! 찬우랑 동혁이는 좀더 기다려야 할 것 같네요ㅠㅠ
그럼 오늘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