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내 어린 시절은 암담했다. 남들처럼 떠올리기만 해도 따스하고 눈물이 지어질 만큼 아름다웠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공주였다. 흔히들 생각하기에 마냥 행복할 것 같은 공주. 하지만 나만은 그렇지 않았다.
내 어머니는 나를 낳다가 돌아가셨고, 내 아버지는 어머니의 죽음을 모두 내 탓으로 돌리며 점점 광증이 심해지셨다.
그렇다. 내 아버지는 폭군이었다.
나를 미워하는 아버지와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 만약 나를 돌봐주던 오빠가 없었다면, 나는 미쳐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아니면 높다란 탑에서 뛰어내렸겠지.
***
오빠, 사랑하는 나의 오빠. 안경 너머로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단 한 번도 차가운 적이 없었다. 그 눈빛이 없었다면, 상상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오빠는 몸이 약했다. 그 약한 몸으로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가 미쳐가는 과정, 그리고 어린 나까지 돌봐야했다니. 오빠는 나보다 더 슬픈 존재였다.
하지만 오빠의 그런 사정을 모두 알아차리기엔 그 때의 나는 너무 어렸다. 안타깝게도.
***
우리 둘은 갇혀 살았다. 성에서 가장 높은 탑, 그 조그만 방에. 창문만은 시원스레 커서 바깥 풍경은 마음껏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창문은 언제나 내게 죽음의 유혹이기도 했다. 어린 내가 뛰어내려도 충분할 크기였으니까.
만일 오빠 없이 혼자 갇혀 있었다면 나는 몇 번이고 뛰어내렸을 것이다.
그 방에 갇혀 살았을 때의 낙은 하나 더 있었다. 누가 알았는지 우리들을 위해 달콤한 간식을 문 앞에 놓고 가곤 했다. 사실 따끈한 때보다 식어빠진 때가 더 많았지만 우리에게 그 간식은 정말 행복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빠는 항상 나를 더 많이 먹였다. 오빠가 음식이 더 많이 필요했는데도.
***
그 날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 오빠나 나에게나 평생 잊지 못할 하루였다. 서로의 첫사랑을 만난, 그 날.
"오빠, 나 나가고 싶어......."
"요즘 나가고 싶단 말을 자주 하네. 하지만 안 된다는 거 알잖아."
"그래도..... 너무 답답하단 말이야."
"오빠도 나가고 싶어. 하지만...."
"언제까지 하지만, 이라고만 할 거야! 어차피 우리 살아있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도 안 하잖아!"
"스텔라!"
"사실이잖아..... 아무도 우리에게 신경 쓰지 않아...."
내 눈에선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빠는 내 눈물을 닦아주면서도 안절부절 못했다. 그 날 내 얼굴이 너무 슬퍼 보였나보다.
"그래, 나가보자. 그 대신 아주 조용히."
"정말?"
"그래."
나는 신나서 한껏 멋을 냈다. 그래봤자 가장 깨끗한 옷을 꺼내 입은 것뿐이었다. 그 옷은 그냥 연보랏빛의 하늘하늘한 봄 드레스였는데, 아직도 내 옷장에 있다.
오빠는 그냥 겉옷만 갈아입었을 뿐이었다. 우리는 정원을 헤쳐 나가 성 바깥으로 나갔다. 야트막한 동산이 나왔다. 봄빛을 맞아 연둣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오빠와 나는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오빠는 점점 느려지더니 그냥 걸었다. 나는 기분이 좋아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소리도 알아채지 못했다.
애잔한 현악기 소리를.
오빠는 걸음을 잠시 멈추고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나무 뒤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나는 그런 오빠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도 천천히 나무로 다가갔다.
커다란 챙이 달린 버드나무 모자, 가볍고 하이얀 천이 모자를 빙 둘러 연주자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아, 비파였다. 그 애잔한 소리는 비파에서 나는 소리였다. 곱고 가는 손가락이 현을 튕기며 소리를 자아내고 있었다.
"소리가 참 어여쁩니다."
소리가 멈추더니 연주자가 급히 일어서서 도망가려 했다.
"자, 잠깐."
오빠가 그 사람의 팔을 붙잡았다. 순간 얼굴을 가리던 천이 일렁이며 그림 같은 얼굴이 얼핏 드러났다.
"이름이라도..... 가르쳐 주십시오."
"장...대옥이라합니다. 장대옥(張黛玉)."
"장대옥....."
그 날 오빠의 목소리는 내가 여태껏 들어본 오빠의 목소리와 매우 달랐다.
"나는 시경(詩經)이라 합니다."
"그렇다면.....혹시......"
"잠깐!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 순간, 한 남자가 끼어들었다. 단호하지만 기품 있는 목소리였다. 마치 학처럼 고고한 자태와 옷차림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여인은 내 누이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나는 단지, 비파 소리가 어여뻐서....."
"오라버니, 이 분은......"
잠시 귓속말이 오간 뒤, 남자는 오빠에게 깊이 허리를 숙였다.
"몰라보았습니다. 용서를....."
"아닙니다. 오해할 만 했습니다."
"그럼, 여기 이분은...."
맑고 깊으 눈이 나를 향했다. 나는 순간 내 속의 뭔가가 울리는 것 같았다.
"내 누이입니다."
그는 나에게도 허리를 숙였다.
"그대의 이름은?"
"장위안(張玉安)입니다."
***
그 날 이후로 우리 넷은 자주 어울려 다녔다. 서로 마음이 잘 맞았음은 물론이고 오빠와 나에게는 그 남매와의 만남이 일탈이었던 까닭이다.
시경 오빠와 엇비슷한 나이였던 위안은 나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그는 항상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내 눈에, 내 마음에 매우 좋았다.
오빠는 대옥 언니가 비파 연주하는 것을 좋아했다. 아마 위안의 책 읽는 모습이 내게 그랬듯이 오빠에게도 언니의 모습이 그랬을 것이다.
알고보니 대옥 언니도 몸이 약했다. 언니는 강한 햇볕에 오래 있는 것도 힘들어 했다. 그래서 항상 그늘 속에서 그 가냘픈 손가락으로 연주를 했다.
우리 넷 모두 알고 있었다.
그 비파 연주는 항상 시경 오빠를 향한 것임을.
시경 오빠와 대옥 언니의 눈길이 너무도 자주 얽힌다는 것을.
두 사람이 서로 끌린 것은 서로 가지고 있는 가냘픔 때문이었을까?
***
반란이 일어났다. 아버지의 폭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잔혹했고, 불만은 쌓이고 쌓여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도를 모르고 광기를 지원한 크롬피예츠 가(家)의 전횡도 끊임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 날 오빠와 나는 작은 방에서 서로를 위로하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창문은 핏빛으로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방문이 벌컥, 열렸다. 우리들은 밖으로 끌려갔다. 이윽고 아버지가 쓰던 왕좌에 도착했다. 오빠는 비틀거리며 왕좌 앞에 섰다.
"새 왕이시여, 폭군이 죽었습니다. 저희들을 새로이 다스리실 이는 이제 당신이십니다!"
우리 둘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
오빠는 그렇게 새로운 왕이 되었다. 몸도 약한 오빠가 반란 후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어쩜 그렇게 단호하게 처리할 수 있었을까. 나에게는 힘든 내색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나는 오빠의 파리한 안색을, 억지 미소를 알아챌 수 있는 나이였다.
***
나는 오빠를 위해 뭘 해줄 수 있을까,하고 고민했다. 그러다가 생각해 낸 것이 차였다. 오빠는 다행히 내가 우려낸 차를 맛있어했고, 나는 여느 때처럼 정원으로 차를 가져갔다. 하지만 정원에는 오빠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자세히 보니 대옥 언니였다.
오빠와 언니는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대옥 언니와 위안을 꽤 오래 보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난리 통에 우리는 서로 소식조차 들을 수 없었다.
"여기저기 핏물이야. 아무리 닦아도 끝이 없어......"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언젠가 자연히 다 될 일이어요."
"대옥아, 네가 너무도 그리웠다. 지치고 힘들 때 떠오르는 얼굴이 너더구나."
언니는 말없이 시경 오빠 품으로 파고 들었다.
"대옥아, 이제 매일 내 곁에 있어다오. 매일....."
"언제나 그럴 것이어요...."
시경 오빠가 대옥 언니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모습을 끝으로 나는 정원을 빠져나왔다.
그런 와중에 위안을 마주쳤다.
아마 그가 대옥 언니를 데려다 준 모양이었다. 우리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도 나도 마음이 시려오는 것을 동시에 알 수 있었다.
그래, 그와 나는 이제 이루어 질 수 없었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하지만 괜찮았다. 시경 오빠와 대옥 언니는 가슴시리도록 아름다운 한 쌍이었다.
나와 위안은 감히 깨뜨릴 수 없었다.
***
나라는 조금씩 기운을 차려갔고 거리에는 오빠의 칭찬이 가득했다. 하지만 대옥 언니와 오빠는 여전히 맺어지지 못하고 있었는데,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혔기 때문이었다. 슬픈 일이지만 장 가(家)는 한미한 가문이었다. 반란군에 가담했으나 역할이 미미했으며, 아버지가 있었을 때 정치적 힘이 세지도 않았다. 이런 때에도 정치적 힘을 겨룬단 말인가?
그 와중에 오빠가 쓰러졌다. 더 이상 오빠의 몸이 버텨내지 못할 수준까지 온 것이다.
나도 정성껏 오빠를 간호했지만 대옥 언니는 더했다. 나와 위안이 몇 번이고 뜯어말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언니는 그만 두지 않았고, 안 그래도 창백한 얼굴이 핏기마저 가셔 눈처럼 새하얘지고 말았다.
***
몇날 며칠이 지나고, 하필이면 위안과 대옥 언니의 아버지, 장 남작마저 병상에 드러눕고 말았다. 둘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집으로 잠깐 돌아갔다.
이제 오빠의 병수발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그 날 오빠의 얼굴은 왠지 더 좋아보였다. 나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이리 가까이 좀 오겠니?"
"오빠, 뭐가 불편해? 뭐 해 줄까?"
오빠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너도 어느새 훌쩍 컸구나. 내 걱정을 하다니."
"당연하지. 그 말 하려고 불렀어?"
시경 오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경을 쓴 오빠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눈물을 참으며 간신히 웃어보였다.
"난 죽을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오빠 안 죽어. 내가 알아. 절대 안 죽어. 약한 소리 하지 마."
"아냐, 난 죽을 거야. 억지 부리지 마."
"안 죽는다니까! 오빠, 나 혼자 두지 마. 오빠 죽으면 나 어떻게 살아?"
나는 어느새 펑펑 울고 있었다.
"이런 너를 두고 가야 하다니...... 이런 너를 두고......"
"그러니까 죽지 마. 언니는? 난 그렇다 치고 대옥 언니는?"
"그 사람...... 그 사람......."
오빠는 말을 잇지 못했다. 결국 우리는 서로 울었다.
"네가, 그 사람 지켜다오. 염치없지만, 부탁한다. 약속해 주겠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텔라, 따스한 삶을 살아라. 봄볕이 찾아오는 삶을 살아라. 매서운 겨울이 찾아와도 언젠가 찾아올 봄볕 같은 사람들을 사귀려무나. 약속해 주겠니?"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시경 오빠는 품 안에서 봉투 두 장을 꺼냈다. 하이얀 종이로 싸 놓았는데, 하나는 색깔 고운 연보랏빛 비단 끈이, 하나는 하얀 끈이 매어져 있었다.
"하얀 끈이 달린 것은 그 사람 것이다. 연보랏빛 끈은 네 것이고. 처음 만났을 때, 대옥은 하얀 옷을 입고 있었지. 너는 연보랏빛 옷을. 스텔라, 너와 위안이 사랑하고 있는 거 알고 있다. 대옥도 알고 있어. 내가 떠나면 서로를 품에 안아라. 우리 둘은 항상 너희 둘이 마음에 밟혔다. 이제 마음이 편해졌구나."
"오빠아아."
"내 몫까지, 은애하며 살아라."
"오빠아아아아아."
나는 고개를 묻고 울었다.
***
그 날 오빠는 죽었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나는 온 몸으로 다아 소리 내어 울었다.
대옥 언니는 문 앞에 다다라 오빠의 모습을 본 순간 정신을 잃었다.
위안은 소리 죽여 울었고.
우리는 그렇게 시경 오빠를 보냈다.
***
장례식이 끝나고, 나는 그제야 오빠가 나에게 준 봉투를 뜯어보았다. 그건 한 편의 시였다.
翩翩飛鳥 훨훨 새들 날아와
息我庭梅 뜨락 매화나무에 앉았네.
有烈其芳 매화꽃 향기 가득하니
惠然其來 사모해 찾아왔다네.
爰止爰棲 가지마다 네 보금자리,
樂爾家室 즐거이 지내 거라.
華之旣榮 꽃 피어 화려하니
有賁其實 열매도 풍요로우리.
-정약용 ‘매조도(梅鳥圖)’
"오빠.... 이러면 내가 어떻게 오빠를 보내....... 오빠아....."
나는 다시 한동안 운 뒤 위안과 대옥 언니를 찾아 발길을 옮겼다. 저 멀리 위안과 함께 서 있는 대옥 언니가 보였다.
나는 대옥 언니의 모습을 보고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 언니! 그건 언니가 아니었다.
가냘픈 나비의 유해.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살얼음.
나는 순간 언니에게 오빠의 편지를 전해주면 안 된다는 느낌이 퍼뜩 들었다. 나는 몸을 돌리려 했지만 오빠가 마지막에 부탁하던 얼굴이 떠올라 결국 언니에게 편지를 전하기로 했다. 가까이서 본 언니의 얼굴은 더 엉망이었다.
"대옥이 언니."
"........너로구나."
"언니, 이거...... 오빠가 언니에게 주라고 한 거예요."
언니는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받았다. 언니에게 봉투를 건네줄 때 뭔가 안에 막대기 같은 게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부채?"
언니는 부채를 펴보았다. 부채엔 비파와 언니가 오빠를 위해 자주 연주해 주던 곡의 악보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편지. 편지를 읽는 언니의 손이 떨리다 못해 파들거리더니 몸을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언니는 그대로 혼절했다.
위안과 나는 급히 언니를 집으로 데려갔다. 집으로 가는 마차 속에서 위안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가끔 그의 고아한 옆모습을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
집에 도착하고 나서 나는 언니의 편지를 읽어보았다.
憶君無所贈 그대를 생각하여 무언가 드리고 싶으나 드릴 것이 없네.
贈次一片竹 여기 한 조각의 대나무 부채를 드리려하니
竹間生淸風 대나무 부채 사이 맑은 바람이 불면
風來君相憶 바람을 느낄 때마다 서로 생각합시다.
-이색 ‘군상억(君相憶)’
나는 힘없이 편지지를 내려놓았다. 위안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한참 말없이 서로 쳐다보았다. 뭐라 말할 것인가?
나는 살짝 그의 손가락을 잡았다. 하지만 얼마 못가 내가 그만두었다.
위안은 대옥 언니의 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집을 나와 성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