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갖가지 장미들이 피어있는 정원. 따사로운 햇빛을 받으며 의자에 늘어지게 앉아있는 남자가 있었다. 막 잠의 늪으로 빠져들려는 찰나, 누군가 그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다.
"형! 알베르토 형!"
'이런.'
"형, 놀자! 자지 말고!"
"맞아, 형 게을러! 엄청!"
"다른 사람 찾아."
"아, 그러지 말고!"
그의 잠을 깨운 건 그의 남동생 두 명이었다. 이제 겨우 12살, 7살이 되는 남동생들은 툭하면 그에게 달려와 놀아 달라고 보챘다. 알베르토는 계속 가라고 대꾸하기도 귀찮아
입을 꾹 닫았다. 둘째 남동생이 심통이 나서 소리쳤다.
"형 너무해! 아버지랑 멀리 전쟁놀이하러 나갈 때는 언제고! 치사해!"
알베르토는 그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첫째 남동생도 안절부절 못하는 기색이었다.
"어... 미안해, 알베르토 형. 얘는 내가 데리고 갈게. 야, 조용히 해!"
첫째 동생은 어린 동생의 손을 잡고 재빨리 정원 너머로 사라졌다.
'녀석. 이제 주변이 돌아가는 상황도 아는구나.'
알베르토는 그제야 몸을 일으켜 굳은 어깨를 폈다. 사실 막내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반란이 끝난 이후 진이 빠져 알베르토는 웬만하면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쉬었다.
그 전에는 잘 놀아줬던 동생들과 노는 것도 그만두었다. 어쩌면 몸의 피로는 이미 다 풀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란 중에 본 끔찍한 광경이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물론 반란에 참여한 경험은 그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게 했다. 하지만 그 잔상이 그에게 피곤함을 낳고 있었다.
***
린데만 가가 반란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이 은밀히 퍼질 때, 그의 아버지는 곧장 편지를 써 반란군에 자원했다. 남들은 귀족이란 이유로 몸을 움츠릴 때 몬디 공작은 과감하게
선택을 했다. 그래서 몬디 가는 반란군에 합류한 첫 번째 세력이 되었고 린데만 가와 더불어 반란군의 주축으로 자리잡았다. 린데만 가가 사령관이었다면 몬디 가는 돌격 대장이었다. 일단 몬디 가가 앞장서서 적군과 부딪쳐 문을 뚫으면 그 다음 린데만 가가 이끄는 본군이 돌진하는 식이었다. 알베르토 자신도 돌격대에 많이 참여했고 성과도 많이 낳았다. 끔찍한 광경이 많았지만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던 순간이 더 기억에 남았기에 그는 잔상을 하나씩 지워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
그는 저택 안에 들어가서도 정원이 잘 보이는 곳에 있는 의자에 다시 앉았다. 장미로 가득한 정원. 사실 이 저택의 정원에는 장미 밖에 없었다.
몬디 가의 문장은 장미 한 송이를 물고 있는 사냥개이기 때문이었다. 처음 정원을 보는 자들은 입이 떡 벌이지며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을 풍경이라며 칭찬하겠지만, 알베르토에게는 날 때부터 본 정원이라 지루한 풍경일 뿐이었다. 요 근래 집에만 틀어박혀 있어서인지 더 지루하게 다가왔다.
"슬슬 이 짓도 지겨워지는 걸......"
반란이 끝난 이후 많은 일이 일어났다. 폭군은 죽었고, 그의 아들마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소녀의 몸으로 왕좌에 오른 여왕은 린데만 가의 결혼으로 조금씩 위세를 떨치려 하고 있었다.
'다니엘 그 녀석이 부군이 될 줄이야.'
반란군에서 같이 활약했지만 난리 통에 둘은 개인적인 대화를 별로 나누지 못했다. 그저 얼굴만 알고, 서로 좋은 인상을 받은 상태로 헤어졌다. 다니엘은 이제 여왕의 부군이
되어 그녀에게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둘 사이에 제이콥이라는 왕자도 탄생해 린데만 가의 위상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러다 시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도련님, 초대장입니다."
"초대장? 올 데가 없는데. 누가 보냈지?"
"수도에서 보냈습니다."
"수도?"
내용은 대략 이랬다. 수도에서 연회가 열리니 귀족 신분은 아무쪼록 참석해 달라, 그리고....
"여왕님도 참여하실 것입니다....."
알베르토는 잠시 다리를 꼬고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다가 손가락을 딱, 튕기더니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
연회 날, 수도. 거리는 마차로 꽉 차 있었다. 알베르토가 탄 마차는 거리 한가운데 서서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이런, 10분 정도 늦었다고 이 상태라니!"
"아이고, 죄송합니다. 저도 난감합니다."
"벌써 시작했을 시간인데...."
그냥 오지 말 걸 그랬나, 하고 후회가 들었다. 알베르토는 고개를 들어 성을 보았다. 곳곳에 불빛이었다. 그는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는 마차에서 훌쩍 내렸다.
"삯이오. 거스름은 됐소."
"이걸 전부 다 말입니까?"
마부가 눈을 크게 뜨며 양손 가득한 돈을 바라보았다. 알베르토는 이미 저만치 멀어진 뒤였다.
"고맙습니다요! 오늘 축복 받으실 겁니다! 축복 받으십시오!"
멀리서 들려오는 마부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는 마차 사이를 뛰어갔다.
***
연회장에 도착하니 이미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알베르토는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옆의 시종에게 말을 걸었다.
"사람이 정말 많군. 내가 그렇게 많이 늦진 않았지?"
"글쎄요, 여왕님께서 이미 대공들과 정식으로 인사를 하셔서... 축사도 끝났습니다."
"이런, 기껏 뛰어왔더니."
연회장은 빽빽이 들어찬 사람들의 열기로 후끈거렸다. 열기와 말소리가 뒤섞여 알베르토는 머리가 갑자기 띵해졌다. 그는 사람이 없는 구석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북적이는 곳을 왔더니 적응이 안 되는군....'
공교롭게도 그가 찿은 곳은 정원으로 뚫려 있어서 그는 정원으로 향했다. 정원에는 누군가 눈을 감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연보라색 긴 드레스에 목과 등이 파인 선을 따라 보라색 깃털이 장식돼 있어서 바람이 불때마다 떨리듯 움직였다. 상체를 감싼 초록 꽃잎 장식이 달빛에 도드라졌다.
그녀는 다른 이가 정원에 들어섰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았다.
"여기서 뭐하시죠, 아가씨?"
그녀는 눈을 뜨고 그를 바라봤다. 당황한 눈빛이었다.
"....아가씨?"
"그래요, 아가씨. 왜 그런 눈빛이죠? 아가씨가 싫은가? 아가씨같이 젊은 여자가 아줌마라고 불리길 원하는 건 처음 겪는데. 물론 그래서 더 좋기도 하지만요. 제 이름은 알베르토 몬디입니다."
알베르토는 의자를 가져와 그녀와 살짝 거리를 두고 앉았다.
".....그 유명한 몬디 가의 장남이시군요... 여기 언제 오셨죠?"
"방금."
".....알만 하네요. 알겠어요."
그는 턱을 괴고 능글맞게 웃으며 그녀를 쳐다봤다.
"내가 잘생긴 거? 아니면 당신이 아름다운 거?"
"꼭 여자를 많이 만나보신 것처럼 말하네요."
"실제로 그렇죠. 미치광이 왕이 폭정을 휘두르기 전이지만."
".......그래요."
알베르토는 그녀의 얼굴이 살짝 굳은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별 거 아니겠지, 하고 넘겼다.
"자, 이제 왜 여기 혼자 있는지 말해줄 때군요."
"그냥, 쉬고 싶어서요. 저기 가면 사람들이 자꾸 말을 거니까요. 꼭 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지금은 조금 쉬고 싶어요. 춤도 못 추고. 물론 다시 들어가긴 할 거예요."
"이런 자리가 처음이죠?"
"맞아요, 어떻게 알았죠?"
"옷차림."
"내 옷이 뭐 어때서요?"
"색깔이 화려하지도 않고 확 튀지도 않으니까요. 원래 이런 자리 좋아하거나 익숙한 여자들은 작정을 하고 꾸미죠. 춤도 잘 추고."
그녀가 웃음 터뜨렸다. 꾸밈이 없어 보기 좋다고, 알베르토는 생각했다.
"웃으니까 더 아름답군요, 아가씨."
"날 언제 봤다고 이렇게 얘기하죠?"
"당신이 마음에 드니까."
이 말만큼은 정말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장난으로 받아들여 웃어넘겼다.
"고마워요, 덕분에 기분이 풀렸어요. 정말 고맙게 생각해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옷매무새를 만졌다.
"안으로 들어가려고요? 나랑 얘기하기 싫을 리가 없는데."
"정말, 사람이 기품이 있어야지. 놀랄 준비나 해요. 여기서 1분 정도 기다렸다 들어와요."
그녀는 손을 살짝 흔들더니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알베르토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좀처럼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뭐, 까짓것 1분 기다려 볼까."
알베르토는 손가락을 딱, 튕기고 속으로 60까지 세기 시작했다. 왠지 1분이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59, 60!'
그는 60을 세자마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사람들이 아까보다 웅성대고 있었다.
'저건..... 다니엘?'
다니엘은 그가 못 본 사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우선 당연히 전장에서의 옷차림보다 훨씬 좋은 옷차림이었다.
거기에다 당당한 자세, 여유로운 미소와 어우러진 그의 초록색 눈동자에서 품위가 느껴졌다.
'저게 아침마다 말하던 기품이란 건가......'
반란군으로 있을 때 린데만 공작과 다니엘은 아침마다 항상 그들의 가언을 서로 주고받으며 결의를 다졌다.
"잠깐. 기품? 기품?"
알베르토는 순간 그녀가 정원에서 한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정말, 사람이 기품이 있어야지.'
갑자기 다니엘이 환히 웃으며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다니엘의 손을 잡은 사람은.......
"이런, 망할."
정원에서 만난 그녀. 그녀는....
"여왕님이시잖아."
***
몬디 공작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예상대로 그의 아들 알베르토였다.
"그래, 연회는 잘 보냈느냐? 편지로 몇 번이나 수도에 올라와 아버지 좀 도우래도 꿈쩍도 안하던 녀석이 연회 초대장 한 장에는 기꺼이 움직이는구나. 이래서 아들 키워봤자
소용없다니까. 아들 녀석만 셋이니!"
알베르토는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들 녀석이란!"
몬디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
알베르토는 방 안을 미친 듯이 돌아다니다가 침대에 엎어졌다.
"젠장, 젠장! 너무 경솔했어!"
그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아침에 퀭한 눈으로 나와 그의 아버지에게서 청천 벽력같은 소리를 들었다.
"오늘 성에 가서 여왕님을 뵐 거다."
"네? 어젠 그런 말씀 없으셨잖습니까!"
"네가 그냥 방으로 들어갔지 않느냐. 말할 기회가 없었다."
알베르토는 거의 끌려가디시피 성으로 갔다.
***
"집무실에서 뵙고자 하십니다."
"알겠소."
그는 문 앞에 다다르자 더 이상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 피할 수 없다면 즐길 수밖에.'
문이 열리고 여왕이 보였다. 의자에 앉아 다니엘과 함께 일을 하고 있었다.
"여왕님과 린데만 대공을 뵙습니다."
"와줘서 고맙군요."
여왕이 알베르토는 슬쩍 보고 웃었다.
"연회로 바쁘셨을 텐데 벌써부터 일하시는군요."
"어쩔 수 없죠. 그나저나 어제 많이 놀랐겠군요."
"예?"
"알베르토를 아십니까?"
몬디 공작과 다니엘 모두 당황했다. 특히 다니엘이 더 심했다. 순간 다니엘의 눈에서 불꽃이 튀겼다.
"아... 솔직히 말씀드리면 정말 그랬습니다, 여왕님."
여왕이 다시 웃음 터뜨렸다. 어제 정원에서처럼 꾸밈없이.
"어젯밤의 무례함을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아니에요, 벌써 잊었어요."
"제가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계속 갚아나가고 싶습니다, 여왕님."
알베르토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제처럼 능글맞았지만, 어딘가 깊었다. 여왕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자의 축제일에 아름다우 아가씨들이
바로 내 곁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맨 처음 아가씨가 내 옆을 지나갈 때
사랑은 우리를 마주보게 하였습니다.
-단테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中
***
얼마 뒤에 여왕은 알베르토와 결혼했다. 다니엘은 질투심이 끓어올라 어쩔 줄 몰라 했다.
"여왕님이 우리에게 경고를 주신 거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아버지."
"한동안 우리 린데만 가의 세력이 대단했지. 제이콥이 태어났을 때는 벨랴코프 가도 움츠러들 정도였으니까. 우리에게 싸울 상대를 하나 더 만드신 거다. 힘의 균형을 맞추려고. 여왕님께서 이제 정치판의 말들을 조금씩 움직이시는구나."
다니엘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으나 질투심은 여전했다. 알베르토와의 결혼이 완전히 계산적이지는 않다는 걸, 다니엘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
이윽고 여왕과 알베르토 사이에서 아들 마르티노가 태어났다. 제이콥과 연년생이라서 다니엘과 알베르토의 경쟁은 더 심해졌다. 하지만 자신의 아들로는 경쟁하지 않았다.
제이콥과 마르티노는 후계자였다. 물론 첫째는 따로 있었지만 성을 떠나 살고 있었기에 정치적 힘은 전혀 없었다.
그들 스스로 정치적 격동을 만들었던 이들이었고, 그 과정의 힘겨움을, 그것들을 감당하기에는 제이콥과 마르티노는 너무 어리다는 걸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다니엘과 알베르토가 경쟁하는 것은 여왕의 총애와 사랑이었다. 그들은 경쟁상대의 앞에서 웃어 보일 줄은 아는 나이였다.
하지만 뒤로 돌아서서 각자의 길을 갈 때는....
'능글맞은 녀석.'
'아졸한 자식.'
이러했다.
이렇게 물밑에서 진행되는 경쟁을 관망하는 자, 그건 일리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