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의 화살
프셰므스와브는 수도를 떠났다. 수도에는 자신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많아서 위험했다. 그는 항구가 있는 도시로 향했다. 항구에는 매일 새로운 사람들이 들락날락했고 다른
나라의 사람들도 많이 이용했다. 몸을 숨기기에 좋은 장소였다. 하지만 지금 프셰므스와브에게는 넝마가 된 옷과 낡고 더러운 망토뿐이었다. 돈 비슷한 것도 없는 마당에 집을
구하거나 뭘 사먹는다는 건 어림도 없었다. 게다가 집을 사거나 빌리려면 이름을 대야했다.
한때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했으나 지금은 모두가 증오하는 이름. 옛날 그에게 자부심과 힘을 주었던 이름은 이제 저주받은 꼬리표에 불과했다.
그래서 프셰므스와브는 거리에 녹아들었다. 크롬피예츠 가의 귀공자가 아니라 어느 초라한 구두장이로. 프셰므스와브 크롬피예츠가 아니라 가브리엘 프셰맥으로.
하지만 복수심만은 그대로였다.
***
바닷바람과 드나드는 이방인들의 입으로 수도의 소식이 그의 귀에 들어왔다. 폭군은 죽었다. 이어서 그의 아들이 뒤를 이었는데, 얼마 못 가 요절했다. 평소에 병약했다는 게
이유였다. 그리고 폭군의 딸이 오빠의 뒤를 잇게 되었다. 여왕은 정치적 목적으로 벨랴코프 가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이윽고 린데만 가, 몬디 가와 차례로 결혼하며 반란군
세력에 힘을 보탰고, 백성들의 여론도 챙겼다. 삶은 조금씩 윤택해졌고, 사람들은 여왕을 칭송했다. 여왕을 지지하는 린데만 가와 몬디 가도.
'아니, 사람들은 모르고 있어. 그들은 위선자야. 아네타와 나의 행복한 꿈의 앗아간.'
프셰므스와브에게 다니엘은 겁쟁이였다. 그는 불길을 헤치고 사람을 구하려들지 않았다.
또 프셰므스와브에게 알베르토는 잔인한 방관자였다. 그와 그의 가족, 집, 아네타에 대해 알려들지 않았고 앞으로도 모를 것이었다.
누군가의 사라진 유년과 등에 칼이 꽂힌 채로 죽은 어린 여자 아이를 발밑에 놓고서, 그들은 영웅이 되었다.
그리고 그 가짜 영웅들과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여자는 바로 여왕이었다.
'모두 용서할 수 없다. 모두.'
프셰므스와브에게 두 번은 없었다.
***
굽이 닳은 구두를 이리저리 돌려보고, 막 고치기 시작하려 할 때쯤, 누군가 그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여어, 가브리엘! 나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평소에 묵묵히 일만 하는 그에게 미소 짓는 모습을 보기란 어려웠다.
"왔냐. 오랜만이다, 안드레아스."
"그러게 말이다."
둘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서로 가볍게 안았다.
"이번 항해는 어땠냐?"
"내 신발 꼴 보면 모르겠냐, 완전 장난 아니었지."
"야, 이건 좀 심하다. 하나 사."
"그럴 돈이 있으면 벌써 샀지. 그리고 너도 한 번 봐야 하잖아."
"돈 없다는 말을 그렇게 어렵게 하냐?"
안드레아스는 기어이 구두를 그에게 들이밀었다. 고치려하던 구두를 내려놓고 안드레아스의 구두를 고치기 시작했다. 바닷소금 냄새가 훅 끼쳤다. 안드레아스는 열정 넘치는
선원이었다. 거친 바다와 동고동락하는 사람 아니랄까봐 평소에 감정 표현도 풍부하고 표정도 확실하게 지었다. 프셰므스와브가 안드레아스의 구두를 솜씨좋게 고쳐 준 뒤로
안드레아스는 그의 단골이 되었고, 밝고 붙임성 좋은 안드레아스로 인해 둘은 친구가 되었다. 안드레아스는 프셰므스와브가 현재 갖고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아, 모험은 어디에! 모험이 날 부르는 데 어디서 부르는지........"
"또 그놈의 모험 타령."
"바람 빼지 마라."
"도대체 그 모험이란 게 구체적으로 뭔데? 뭐 괴물이라도 찾고 싶냐?"
"내가 애냐, 괴물 찾게. 뭔가...."
"뭔가?"
"새로운 거 찾고 싶다는 거지. 새로운 땅. 아무도 못 가본 데에 가는 거지. 아무도 살지 않는 데에 첫발을 딛고. 아,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멋있는 것 같다."
"미."
"야!"
"구두나 가져가. 다 됐어."
"벌써?"
"낡아서 가죽이 아니라 천이더라. 바늘이 아주 쑥쑥 들어가."
안드레아스는 구두를 신어보더니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역시는 역시네. 좋다."
"당연하지, 임마. 이제 어디 갈려고?"
"모험 찾으러 가야지."
안드레아스는 프셰므스와브를 향해 씩 웃었다.
***
여왕은 요사이 왕실역사책을 붙잡고 씨름하고 있었다. 낡고 두꺼운 책을 끊임없이 들여다보고 얼굴을 찌푸리는 모습을 보며 다니엘과 알베르토는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며칠째 여왕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엄마가 보고 싶다며 칭얼대는 자신의 아들을 좋은 말로 달래고 있었지만 실상 자신들도 울고 싶었다.
"아버지, 오늘은 카를로스 선생님한테 데려다 주시면 안 돼요?"
"왜?"
"오늘 역사 수업 조금만 짧게 해달라고 아버지가 부탁 좀 해주세요, 네?"
"그래, 알았다. 하지만 데려다 주는 것만. 수업은 선생님 몫이니까."
알베르토는 잔뜩 실망한 마르티노와 함께 왕궁교사장에게로 갔다.
"아, 몬디 대공. 마르티노 왕자님도 오셨군요."
"오늘도 수고해주게."
"염려 마십시오. 근데 여왕님께 안 가보십니까?"
"여왕님이라니?"
"아까 제이콥 왕자님께서 말씀하셔서.... 린데만 대공께서 여왕님께로 가셨다고."
"여왕님께서 린데만 대공을 찾으셨나?"
"그건 아니고 대공께서 그냥 그런 기분이 드셨다고 하셨습니다만."
알베르토는 짭게 인사하고 여왕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문을 열어보니 여왕이 린데만 대공과 책을 사이에 두고 열심히 얘기하고 있었다.
"알베르토? 아까 시종을 보냈는데 방에 없다고...."
"잠깐 어디 갔었나 봅니다. 상당히 바쁘게 사시는군요."
린데만 대공이 웃으며 말했다. 뭔가 이겼다는 표정이었다. 알베르토는 화를 꾹 참았다. 하지만 다니엘의 눈에는 그게 다 보였다.
'어쩐지 예감이 틀릴 것 같지 않더라니.'
다니엘이 문을 열자 여왕이 웃으며 마침 부를 참이었다고 말할 때 그의 기분을 날아갈 것 같았다. 게다가 이런 승리라니.
"무슨 얘기를 하고 계셨습니까?"
"여왕님께서 정원을 개방하려고 하십니다."
"정원을 말입니까? 갑자기 왜..."
"책을 한참 읽어봤는데 옛날에는 성의 정원을 개방해서 백성들과 함께 즐기곤 했다는군요. 나도 그렇게 할 생각이에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어떤 목적으로 들어올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그래도 하고 싶어요. 아니, 하고 말거예요."
여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정원을 내려다봤다.
"내 아버지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이 일이 잘 되면 백성들이 아버지를 완전히 잊을 수 있을 거예요"
다니엘과 알베르토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들은 그저 따를 수 밖에 없었다.
***
여느 때처럼 구두를 고치고 있는 프셰므스와브의 귀에 행인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자네, 수도에 갈 거지? 이번에 정원 개방한다면서?"
"당연하지. 살아서 또 언제 성에 들어가서 정원을 구경해 보겠는가?"
"언제 갈 건가? 나도 같이 가세."
"2주일 후에 열리니까 한 하루 전에 가서 방 잡고 기다리지, 뭐."
프셰므스와브는 눈이 번쩍 떠졌다. 드디어 복수의 기회가 찾아왔다. 줄곧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나 성에 잠입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성을 개방한다니.
그는 그날 밤으로 백방으로 무기를 구했다. 하지만 그는 구두장이였고 암시장에 뛰어들기엔 적은 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돌아다녔고 결국 활과 화살을
구했다. 가지고 있는 모든 돈을 썼지만 활은 시위가 낡아있었고 화살을 두 대뿐이었다. 그마저도 화살 하나에는 화살촉이 없는 지경이었다.
하지만 프셰므스와브에게는 복수를 시행하기에 더할 나위없었다. 수도로 떠날 날이 가까워왔다.
***
여왕은 오후의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부군들과 앉아 있었다. 정원은 넓고 날씨도 좋았다. 주위의 만류에도 여왕은 보초병도 세워놓지 않았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들어와
즐기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여왕은 빨강과 검정이 조화된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머리에 빨간 장미꽃 장식이 도드라졌다. 크기가 그렇게 크지 않아서 얼굴을 한층 생기 있게 했다. 다니엘과 알베르토는
여왕에게 자꾸만 시선이 갔다. 일리야마저 여왕의 얼굴을 자주 흘금거렸다. 오랜만에 태양 아래서 여왕을 보니 새삼스레 그녀의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요사이 여왕의 화장은
짙어져 있었는데, 과하지 않게 그녀의 눈매와 입술을 강조했다. 여왕은 소녀와 여자의 중간에 있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등 파인 드레스와 사람들을 바라보는 저 편안한 미소라니.
"그러고보뇌 제가 드린 머리핀이군요."
알베르토가 장미꽃 장식을 가리켰다.
"아, 오늘 눈에 띄어서요. 아름답네요, 고마워요."
눈부시게 웃는 여왕의 모습. 다니엘은 말없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알베르토는 복수했다는 기분이었다. 일리야는 늘 그렇듯 둘을 관망하며 팔짱을 끼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아 불편하다는 기색이었다.
"어머니!"
한 목소리로 여왕을 부르며 제이콥과 마르티노가 여왕에게 뛰어왔다.
"어머니, 저쪽에서 못 보던 꽃을 발견했어요!"
"어머니께 보여드리고 싶어요."
'어쩜, 자기 아버지를 이렇게 닮았을까.'
제이콥은 따뜻한 느낌의 초록색 눈동자, 마르티노는 갈색 빛의 검은 눈동자를 물려받은 데다 얼굴 곳곳에 자기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 가득했다.
빨리 가자고 보채는 제이콥과 마르티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
프셰므스와브는 흥분되는 가슴을 다스리려 심호흡을 크게 했다. 자신이 성 안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모자 달린 낡은 망토를 뒤집어 쓴데다 품 안에 활과 화살까지 가무고 있자니 정원을 마음껏 돌아다닐 수 없었다. 가능한 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데로 다니며 눈동자를 열심히 돌렸다. 햇살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망토 안도 점점 더워졌다.
'젠장, 너무 더워.'
프셰므스와브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덤불 옆의 그늘에 가 섰다. 그 때 도란도란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린 남자아이 두 명, 그리고 중간에는.
"여왕."
그는 덤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분명 여왕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저 아이들은 왕자들이겠군.'
둘 다 고급스러운 옷차림에 사랑받고 자란 얼굴이었다. 프셰므스와브는 조용히 화살을 시위에 멨다. 화살은 두 개였다.
'하나는 여왕, 하나는 린데만 가의 왕자에게 쏠 것이다. 린데만 가의 겁쟁이에게 상실을 맛보게 해 주지. 나머지 왕자 하나는 굳이 맞히지 않아도 돼. 눈앞에서 자기 엄마와
형이 죽는 걸 본 아이가 제대로 자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세 사람이 목소리까지 들리는 거리에 들어왔다.
"제이콥, 그 꽃이 어떻게 생겼니?"
"그건 보시면 알거예요."
'왼쪽 아이가 린데만 가의 왕자....'
제이콥을 확인하자 그는 여왕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조용히 시위를 당겼다.
순간 그의 집이 떠올랐다. 집을 날 듯 뛰어다니던 어린 시절, 눈부신 장식품들, 벽지와 천장의 꽃들, 샹들리에, 그리고 아네타......
지금은 불에 타 없어진 모든 것들.
'잘 가라.'
화살이 날아갔다. 그 순간.
"안 돼애애애!"
웬 남자가 나타나 여왕을 확 끌어안았다. 화살은 그의 등에 꽂혔다.
'말도 안 돼!'
여왕의 비명 소리가 정원에 퍼졌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조그만 있으면 사람들과 병사들이 몰려들 터였다. 프셰므스와브는 급히 다른 화살을 시위에 메려했다.
'왕자! 린데만 가의 왕자를 쏴야 한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시위는 끊어져 있었다. 그가 너무 오랫동안 세게 당긴 탓이었다. 그사이 사람들이 몰려와 여왕과 왕자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피를 본 사람들이 겁에 질려
우수수 문으로 빠져나갔다. 방법이 없어 결국 프셰므스와브는 무리에 섞여 밖으로 향했다. 일대에는 혼란이 벌어졌다.
그는 즉시 수도를 떠났다. 수도에 머물러 있어봤자 잡힐 가능성만 키울 뿐이었다.
***
항구의 거리에 돌아온 프셰므스와브는 그 어느 때보다 숨죽여 지냈다. 혹시 병사 비슷한 사람이라도 지나갈라치면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로 구두를 고쳤다.
온 나라가 여왕의 암살 기도 사건으로 들썩거렸다.
'대체 누구란 말인가? 대체 누가 막아선 거지?'
프셰므스와브는 허탈함과 분노로 자주 한숨을 쉬었다. 갑작스레 여왕과 왕자들을 발견해 주위를 살피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이제, 두 번째는 없는 건가?"
그는 낮게 읊조렸다. 그리고 얼마 뒤, 프셰므스와브는 놀라운 소식을 접했다.
바로 여왕의 다섯 번째 결혼이었다.
새하얀 화폭 위로 깜빡이며 명멸하는 꿈
달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과도 같은 두 시간.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극장문을 나서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