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
한 번 떠나보낸 기회는 다시 찾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밧줄은 그대로 방 안에 있었다. 니콜라이는 어쩔 줄 모른 채 다시 그림에 열중했다. 또다시 시간을 흘러 나라에 축제가 열렸다.
‘축제? 축제라면.... 집안사람들이 모두 나갈 거야. 맞아, 거리를 구경하러 나가잖아.’
예상대로 축제날이 찾아오자 집안에는 평소와 다르게 인기척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저택 밖으로 나가는 것은 위험했다. 분명 집사는 집에 남아 있을게
뻔했다. 니콜라이는 창문 너머, 멀리서 보이는 축제의 빛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마침 집사가 저녁 식사를 들고 방문을 열었다. 니콜라이는 저녁 식사를 받아들고 문 뒤로
집사의 걸음이 멀어지는 소리를 유심히 들었다. 허겁지겁 저녁을 해치우고 밧줄을 찾았다. 어차피 집사는 하루에 세 번밖에 오지 않았다. 아마 이 방에는 아침에 올 터였다.
“이번에야 말로.... 거리로....”
다부진 결심을 하고 니콜라이는 아래로 내려갔다. 지난번에 찾은 길로 나갔다. 주먹을 꼭 쥐고 개울을 건넜다. 뒤를 돌아 저택을 보았다. 아래에서 보니 저택은 더욱더 무시무시하고 거대해 보였다.
그는 거리의 빛을 향해 힘껏 내달렸다.
***
거리는 활기차고 시끌벅적했다. 만면에 웃음으로 가득한 표정들이 거리에 가득했다. 니콜라이는 인파에 떠밀리다시피 걸으며 바깥을 구경했다. 색색의 거리.....
니콜라이는 순간 그가 종이와 연필을 챙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보같이! 아, 바보같이!”
속상해서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그 대신 거리의 모든 것을 그의 눈에, 머릿속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웃음소리, 음악소리, 꽃향기.... 니콜라이는 정신없이 모든 걸 만끽했다.
“어머니도, 지금 함께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슬픔이 밀려오기도 전에 갑자기 인파가 그를 덮쳤다. 사람의 파도에 떠밀려 웬 장소에 도착했다.
“으윽, 나 죽네! 이러다 여왕님 얼굴도 못 보고 압사당하는 거 아냐?”
‘여왕님?’
“저, 여왕님이 여기 계시나요?”
니콜라이는 옆의 노인에게 물었다.
“오늘 연설을 하실 거라네, 젊은이. 다른 곳에서 온 모양이구만. 여왕님께서도 오시고, 다른 부군들도 오실 거라네.”
‘다른 부군? 그럼....형!’
만약 여기서 들킨다면? 그를 본다면? 니콜라이는 두려움에 갑자기 심장이 미칠 듯 뛰었다. 그는 냅다 반대쪽으로 뛰었다.
“악! 내 발!”
뒤의 화내는 소리는 지금 그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저 멀어져야 한다, 는 생각뿐이었다. 멀어질수록 사람 수가 적어지더니 거리엔 자신만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니콜라이는 그러다가 어떤 건물에 들어가게 되었다. 니콜라이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너무 오랜만에 뜀박질을 했다. 어릴 때 그림을 시작한 이후로 뜀박질을 거의
하지 않은 탓이었다.
“괜찮나? 여기 물 좀 마시게.”
잔득 상기된 얼굴로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모습에 남자는 뭘 더 물을 수 없었다. 일단 담요를 가져와야겠다는 생각에 잠시 자리를 비웠다.
하지만 그 사이 니콜라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
니콜라이는 방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쓰러졌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오랜만의 달리기 때문이었기도 했지만 두려움이 더 컸다. 한참동안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들키지 않았겠지? 들키지 않았겠지? 잠깐, 그런데..... 웬 컵이지?’
니콜라이는 그제야 한 나이 지긋한 남자에게 물을 얻어 마신 기억이 났다. 워낙 정신이 없던 차에 컵을 들고 그대로 도망친 것이다.
“이런.... 도둑질이라니....”
니콜라이는 한 번 더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
축제로 번쩍이던 거리의 빛은 잔상이 오래갔다. 하지만 캔버스에 담아낼 순 없었다. 집사가 보면 그가 밖에 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콜라이는
캔버스가 아니라 그의 습작 노트에 바깥을 그렸다. 노트는 뺏지 않았기에 그곳에 그릴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물감은 아니지만 색연필과 물감을 섞어 틈이 나면 노트에 거리를 그렸다. 항상 그릴 순 없었다. 집사가 의심하지 않게 평소에 그리던 양을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집사는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했고 그대로 며칠이 지나갔다. 하지만 그의 방에는 컵이 여전히 있었고, 바깥에 대한 그의 갈증은 채워지지 않았다. 이제 제법 담대해진 그는 기회를 틈타 다시 밖으로 나갔다.
***
축제의 열기는 가셨지만 밤공기로 가득한 거리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이번에는 노트와 연필을 잊지 않고 챙긴 데다 컵을 돌려줘야 한다는 목표가 있어 그의 발걸음은 더욱 힘이 실려 있었다.
“여기 어디쯤인데..... 아, 저기다.”
축제 때는 몰랐지만 건물은 주변 건물보다 크기도 컸고 외형도 특이했다. 위에서 보면 완전한 동그라미였는데, 사방에 아치문이 있었다.
“아, 저기......”
“무슨 일로?”
“저, 이 컵....”
“아, 그 축제날에 만난.... 몸은 좀 어떻고?”
“이제 괜찮습니다. 컵을 맘대로 가져가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네, 그 때는 정신이 없었잖나.”
“그런데, 여긴 어디죠?”
“정말 모르나? 여긴 이 나라의 사원일세.”
니콜라이는 어렸을 적 들었던 어머니의 얘기를 떠올려 보았다. 이 나라는 물을 섬긴다. 절대 사라지지 않고, 사람들을 살리고 비추는 물. 지금 자신이 있는 이 사원은 그 물을 섬기기 위한 건물이었다.
“‘이나바우어’군요. 그 지붕이 없다는.....”
“맞네. 들어가 보겠나? 안에 아무도 없다네.”
사제의 안내로 니콜라이는 안으로 들어갔다.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별이 박힌 하늘이 그대로 드러난 위쪽, 아래쪽에는 동그란 모양으로 커다랗게 물을 받아놓은 접시 모양 조각이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마치 하늘이 아래에 있는 것 같았다.
멍하니 바라보는 니콜라이의 표정을 보고서 사제는 미소 지었다. 사제는 가까운 곳에 니콜라이를 앉히고 돌아갔다. 의자도 물을 따라 둥그렇게 배열되어 있었다.
니콜라이는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 자연스레 노트를 꺼냈다. 그의 손이 바삐 움직였다. 연필 한 자루뿐이었지만, 니콜라이는 금세 빠져들어 그림을 그렸다.
누군가 들어온 줄도 모른 채.
***
대충 밑그림이 완성되자 그제야 니콜라이는 다른 누군가를 눈치 챘다.
니콜라이는 심장이 멎어버렸다.
그녀는 마치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 같았다.
마치 별세계에서 떨어져 잠시 쉬고 있는 미지의 존재.
긴 소매의 진주빛 긴 드레스. 은은히 빛나는 구슬장식. 차분히 감고 있는 눈동자. 긴 속눈썹에 저 경건한 표정.
니콜라이는 정신이 아득해져만 갔다. 손에서 연필이 떨어지며 큰 소리가 났다. 그녀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굴이 화끈거려 눈길을 피해버렸다.
허둥지둥 연필을 주우려다 연필이 그녀 쪽으로 굴러갔다. 말릴 새도 없이 그녀는 연필을 집어 들었다.
“여기.....”
“가, 감사합니다.”
떨리는 손으로 연필을 받고선 자리로 돌아갔다.
“그림 그리나요?”
“네? 네, 네.....”
“구경해도 되나요?”
“네, 뭐.....”
그녀가 옆에 앉았다. 심장을 진정시키며 그림을 그렸다. 그녀를 다시 보면 연필을 다시 놓칠 것 같아 흘금거리지도 못했다. 니콜라이는 정신없이 그림을 완성했다.
“다 된 건가요?”
“아, 맞아요...”
조금 더 길게 말한다는 게 그거였다. 니콜라이는 자신의 그림에 집중하는 그녀의 모습을 조심스레 보았다.
“정말 잘 그렸네요. 정말이에요.”
“아,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다른 것도 있네요? 이건 축제 때 거리네요. 세상에.....”
눈을 빛내며 노트를 넘기는 그녀의 모습이 니콜라이의 가슴에 따스히 번졌다. 다른 사람에게 그림을 보여주고 칭찬을 받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아이들이고, 이건 가게들이고....”
조금씩, 니콜라이는 그림을 설명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간간이 질문이 오갔다. 그는 너무나도, 행복했다.
“정말 대단해요. 당신 그림은 뭔가 달라요. 뭔가 꼬집어서 말할 순 없는데... 뭔가 특별해요. 정말로. 색이나 빛을 표현하는 거나... 혹시 다른 그림도 있나요? 보고 싶은데.”
“무, 물론이죠. 당연히 다른 그림도 있어요.”
“언제 볼 수 있나요?”
“내일이라도 당장...”
“그럼, 내일 만나도 되나요?”
니콜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작게 웃었다. 그럼 이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건물 밖으로 걸어갔다. 사제들이 예를 갖춰 인사하는 것이 의아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작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
다음 날 밤, 니콜라이는 종일토록 고르고 고른 그림을 들고 사원으로 뛰어갔다.
‘나를 기다리고 있어. 그렇게 시리도록 아름다운 사람이.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멎는 사람이. 계속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나올 만큼, 그렇게나 찬란한 사람이.. 날 기다리고
있어!’
들키면 안 된다는 걱정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사원에 도착하자 곧이어 그녀도 도착했다.
“저번엔 노트였는데 이번엔 캔버스네요.”
“네, 개울을 그린 거예요. 어떤지.....”
“이것도 정말 아름다워요. 물이 정말 흐를 것만 같아요. 굉장히 신비로운 걸요.”
문득 그녀가 그림 한 쪽을 짚었다.
“이거 당신 이름인가요? N.J”
“....아, 맞아요. 제 이름 니콜라이 욘센이거든요.”
“니콜라이 욘센.”
그녀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잠깐 멍해 있다가 대답했다. 한동안 그림을 두고 얘기했다. 그림을 보는 그녀는 여전히 너무나 아름다웠다. 미소 짓거나 살풋 웃을 때면 눈이 부셔 잠시 눈을 감아야했다. 시간이 얼마나 간지도 모른 채 얘기하다 그녀가 먼저 일어났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저, 이 그림 정말 마음에 드는데 가져가도 되나요?”
“그럼요, 그럼요! 정말 고마워요....”
“내가 고맙죠.”
“저, 내일도 볼 수 있을까요? 또 그림 가져올게요.”
그녀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멀어져 가는 뒷모습마저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어? 사제님들이 또 저렇게 인사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니콜라이는 사제에게 다가갔다.
“어제에 이어서 또 왔나?”
“저기, 저 사람이 대체 누구길래 그렇게 인사를 하시죠?”
사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정말 모르는군....”
“누구길래.....?”
“저 분은, 이 나라의 여왕님이시네.”
‘여왕님.... 여왕님?’
그녀는 여왕이었다.
그에게 있어 별세계의 아름다움이고, 빛인 사람. 심장을 멎게 하는 사람. 눈부시게, 시리도록, 아름다운 사람...... 그녀는 여왕이었다.
그리고
형의 여자였다.
***
밤이 찾아왔다.
‘아마 그 사람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겠지.’
운명이란 가혹했다, 너무도. 니콜라이는 눈물을 삼키고 창문을 열었다.
***
여왕은 니콜라이의 뒷모습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너무도 쓸쓸해 보였다.
“무슨 일 있나요?”
“....아니에요.”
“... 오늘은 그림이 없네요?”
“오늘은..... 안 들고 왔어요. 저,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면 안 되나요?”
“뭔가요?”
“여왕님..... 당신을, 그려도 될까요?”
“나를요?”
“제발, 부탁드려요. 아니, 부탁드립니다....”
물기가 맺힌 니콜라이의 눈을 보곤 그녀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앉았다.
“저, 옆으로 앉으면 안 될까요?”
‘당신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요. 심장이 멎으니까.’
그녀의 옆모습은 고아하고 은은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니콜라이는 그동안의 그림 실력과 집중력을 쏟아내어 그림을 그렸다. 눈앞의 아름다움을 반만이라도 담을 수 있기를
기도하며 그렸다. 그림을 반쯤 완성하자 니콜라이는 손을 멈췄다.
“다 된 건가요?”
“반만. 반만 완성되었어요.”
“왜 마저 그리지 않고....?”
“여기선 완성할 수 없어요, 도구가 부족해서.....”
그녀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왕님, 전, 제가 멀리 떠나게 됐어요. 아주 멀리.. 오랫동안....”
니콜라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다시 만날 때 이 그림을 완성해서 드릴게요.”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당신 웃음의 햇살과 작은 눈물방울들
당신의 걸음은 너무도 부드럽고 따스하다
.....
우리는 당신을 보내고 싶지 않다
.....
작별 인사를 고할 순간이 찾아왔다
당신 없이 사는 동안 우리는 천천히 죽어갔다
바람에 잎이 날리듯
우리가 작은 천사를 다시 만날 때까지
당신의 미소가 당신의 얼굴에 머무르기를
-앤 라이즈 앤더슨, '비탄’ 中
***
일리야는 며칠을 애쓰며 처리한 서류들을 깔끔히 정리해 여왕의 집무실로 가져가는 중이었다. 이렇게라도 여왕의 관심을 끌고 싶었다.
최선을 다해서 여왕을 도와주는 것, 이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였다. 애석하게도 그는 남편이 아내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런 태도를 보고 자라지 못한
탓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때가 별로 좋지 못했다. 출신이 비천한 부군들이 들어오자마자 태도가 바뀌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었다.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절박하게 비춰지는 것이 싫었다. 집무실에는 여왕이 늘 그렇듯 여러 종이를 뒤적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전해 드릴 서류가 있어서 왔습니다.”
여왕은 서류를 찬찬히 설명해주는 일리야의 모습을 보았다. 요즘 들어 그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자신에게 건네주는 서류들에서 전에 없던 정성이 느껴졌고,
말투나 태도도 전처럼 지나치게 사무적이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눈동자의 차가움이 조금씩 누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여왕은 이제 조금 마음을 열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쨌든 그와 그의 가문에 도움을 받은 건 명백한 사실이었으니까.
마지막으로 일리야는 여왕이 서명하는 것도 도와주었다.
“그럼 이제 나가보겠습니다, 여왕님.”
“그래요.”
여왕은 다시 필요한 종이를 찾으려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일리야가 나가지 않고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일리야는 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일리야가 보고 있는 건 벽의 그림이었다.
“이 그림 때문이군요. 우연한 기회에 얻은 거예요. 당신 마음에도 드나 보군요.”
그녀는 그의 옆에 서서 그림을 다시 감상했다.
“솜씨가 정말 좋아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딘가 마음이 끌리는 데가 있어요.”
일리야는 그녀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그림에 집중하며 엷은 미소를 띠고 있는 그녀의 표정.
“.....이제 나가보겠습니다.”
그는 곧장 방으로 갔다.
대체 왜? 대체 왜 그 그림에 그의 저택 근처의 개울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림의 한 구석의 이니셜.
‘N.J......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이니셜만 같고 다른 사람일 수 있어. 다른 지방 사람이 그 근처를 돌아다니다가 그릴 수도 있어.’
하지만 그의 직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
모두 잠든 밤, 일리야는 검은 망토를 쓰고선 홀로 성을 떠났다. 말을 달려 저택에 도착하자 집사가 놀라 달려왔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이고르, 따라오게. 아버지께는 알리지 말도록.”
둘은 곧장 빈방으로 들어갔다.
“이고르, 혹시 그 자식에게 이상한 낌새 같은 거 없었나?”
“글쎄요, 별다른 건 없었습니다만. 늘 그렇듯 계속 그림만 그리니까요.”
“잘 생각해 봐.”
“음.... 요즘 그림이 조금 달라진 것 같습니다. 그전엔 벨랴코프 부인을 그린 그림이 많았는데, 요사이 퍽 많이 줄었습니다. 전체적으로 그림 수가 몇 장 준 것 같기도 합니다.
계속 어떤 그림 한 장에 매달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올 때면 항상 하얀 천으로 덮어 놓는데, 한 번은 제가 온 기척을 못 느꼈는지 한 박자 늦게 천을 덮더군요.
얼핏 그림을 보았는데, 누군가의 옆모습이었습니다. 벨랴코프 부인이라기엔 닮은 구석이 없었습니다.”
“........그 자식 방 열쇠 가져와.”
일리야는 옆의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
니콜라이는 붓질을 계속했다. 어떤 색으로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없었다. 하지만 포기할 순 없었다. 이 그림이 그 시린 아름다움을 간직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는 잠시 그림을 바라보았다. 여왕의 옆모습....
“당신은 아마 영원히 모르겠죠...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니콜라이는 순간 낮게 읊조릴 수밖에 없었다. 입 밖으로 내지 않으면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으니까. 집안이어도 상관없었다. 지금은 모두 잠든 새벽이고 그 정도 용기는
부려보고 싶었다.
순간, 서늘한 바람 한 줄기.
니콜라이는 고개가 뻣뻣해졌다.
누군가 있다.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초록 눈동자!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지팡이에 얻어맞아 바닥에 엎어졌다. 몇 번 더 가격이 가해졌다.
“혀, 형. 잘못했어. 제발 그만해!”
다시 지팡이가 날아왔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니콜라이는 뭔가 따뜻한 것이 머리에 흐르는 걸 느꼈다. 피였다.
“난 네 형이 아니야.”
일리야의 눈동자는 초록 횃불처럼 이글거렸다. 검은 옷으로 온몸을 휘감고 있어 일리야는 마치 정체모를 야수 같았다.
“잘못했어, 형. 다신 안 그럴게. 제발 살려줘.... 제발..”
“날 그딴 식으로 부르지 마!”
수차례 맞는 와중에도 니콜라이는 필사적으로 손을 보호했다. 일리야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일리야는 갑자기 손을 멈추고 낮게 웃었다.
조롱과 분노, 증오로 뒤범벅된 웃음이었다. 그리곤 뒤를 돌아 캔버스 끝을 톡톡 두들겼다.
“이 여자... 어디서 만났지? 아주 잘 그렸군그래....”
니콜라이는 온몸이 떨렸다.
“그러니까..... 내 아내 말이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다신 안 나갈게. 다시는....”
일리야는 지팡이로 어깨를 내리쳤다.
“존대(尊待).”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안 나가겠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사과는 필요 없어.”
일리야는 한 쪽 발로 니콜라이를 내리눌렀다. 얼굴에 말라붙은 피와 대조되는 파란 눈동자.
‘처음엔 내 어머니... 이번엔 내 아내....“
“잘 들어. 앞으로, 한 번만 더 내 아내를 만나면, 그 때는 네 손을 짓이겨 버릴 거다.”
니콜라이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쪽 발에 더 힘을 실었다.
“대답.”
“네, 알겠습니다.”
일리야는 캔버스를 들고 방을 나갔다.
“이고르, 이 개자식을 사흘 동안을 굶겨. 방 안 뒤져서 밧줄 같은 거 있나 찾아봐. 그리고 누가 보든 상관없으니까 창문에 판자 박아.”
“그렇게 하겠습니다.”
***
일리야는 말을 타고 가까운 들판으로 향했다. 말에서 내려 그림을 힘껏 던졌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그는 분노에 차 포효했다.
“왜! 왜 하필 그 자식이야! 왜! 왜 항상 그 자식이냐고!”
순간 바람이 불며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달을 바라보는 일리야의 눈 깊은 곳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을 불길이 타올랐다.
+)여행 일정이 갑자기 3일 동안 잡혔어 ㅠㅠㅠㅠ 그래서 두 편 한꺼번에 올려. 토요일에 돌아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