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MNT-Juliet
아침부터 세훈은 호들갑이었다. 너 왜 이렇게 멀쩡하냐면서 놀란 표정을 짓는데 그냥 그 면상에 어퍼컷을 날리고 싶었다. 내가 안 맞아서 서운한 모양이다. 맞았으면 내가 맞은 만큼 세훈을 때려주려고 했었다. 우린 하필 등교길의 피크 타임인 종치기 5분 전에 걸려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다. 이렇게 많은 인파 속에 경수 형을 찾는 다는 건 불가능처럼 보였기에 형을 찾는 걸 포기하고 묵묵히 걸었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야, 김종인! 하며 나를 덮쳤다. 태민이었다. 어제 다섯 마디도 안 되는 대화를 나눈 게 다인데 일진들은 원래 친한 척을 잘하나보다. 실로 무서운 능력이 아닐 수 없다. 세훈이 우리 둘을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봤다."너 오세훈이지? 반에 들어왔을 때 나만큼 잘생긴 놈이 하나 있길래 좀 긴장했어.""하하.. 그렇구나.."태민은 빈말인지 뭔지 세훈보다 잘생긴 나-물론 세훈은 나와 반대 의견이겠지만-를 놔두고 허튼 소리를 했다. 세훈은 별다른 대답을 못하고 그냥 어색하게 웃었다. 세훈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태민은 내 뒤에 붙어있다 나 두발 걸리면 좆 돼, 하며 아이들이 몰려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무리에 묻혀서 교문을 통과하려는 모양이었다.
순정소설
w. 아우디
"뭐야. 어떻게 된 거냐? 둘이 친해졌어?""궁금해? 궁금하면 따라왔어야지 이 의리도 없는 새끼야."세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있는데 담임이 교문에서 우릴 막아섰다. 넥타이를 안 맨 놈은 구석에 가서 서있으라고 했다. 체육 선생인 건 알았지만 담임이 학생 주임일 줄은 몰랐다. 이번 일 년은 벌점과 청소의 핍박 속에 시달릴 것 같다. 난 훈계를 받을 때까지 똥 씹은 표정으로 담임을 기다렸다. 하지만 담임은 오지 않고 2학년으로 추정되는 파란색 명찰의 한 선배가 학생 명부를 들고 우리 앞에 다가섰다. 깔끔하게 생겼지만 이목구비가 흐릿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이름을 말하라기에 1학년 7반 이태민이라고 했다. 벌점을 피할 수 있는 나만의 노하우였다."걔 아까 걸렸어. 그러고 보니까 너 명찰도 안 했네?""명찰 내일 박을 거예요.""됐고 너네 둘 다 벌점 2점."고작 일 년 선배 주제에 온갖 선생님 흉내는 다 냈다. 운 안 좋게 걸린 거부터가 빈정 상하는데 그 선배는 명부로 머리 염색한 거 아니냐며 내 머리를 때렸다. 나는 절대 염색을 한 게 맞았지만 억울했다. 이태민 같은 머리색 정도는 돼야 나 염색 좀 염색했다, 하고 티가 나는 거다. 속으로만 궁시렁대고 있던 나와 달리 세훈은 대담하게 저항을 했다."아 뭔데 머리 때려요.""일 학년 주제에 말이 많다.""담부터 지킬게요. 보내줘요."나 대신 세훈이 총대를 매주니 속이 시원했다. 거기까진 좋았지만 담임이 와서 우리의 머리를 한 대 더 때렸다. 성적이 떨어지면 이건 다 당신네들이 파괴한 내 뇌세포 때문이다."이것들이. 어디 전교 회장 선배한테 대들고들 있어? 백현이 이만 들어가봐.""네, 선생님. 수고하세요."전교 회장 좋아하시네. 저렇게 권력을 함부로 부리는 전교 회장 따위는 끌어내려도 무방할 것 같다. 내가 전교 회장이라면 일단 넥타이는 안 하고 와도 된다는 멋진 교칙을 세울 것이다. 우리는 담임에게 한 번 더 훈계를 듣고 나서야 교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쉬는 시간의 분위기는 아이들의 취침으로 인해 근엄했다. 깨어있는 건 뒤늦게 들어온 나와 세훈, 그리고 음악에 심취해 책상에 앉아 고개를 흔들고 있는 태민뿐이었다. 우리가 들어오는 걸 봤는지 태민이 이어폰을 빼고 나에게로 왔다."김종인. 너 댄동 면접 볼 거지?""댄동?""댄스 동아리. 어제 보니까 공고문도 지가 갖고 있더만.""그게.. 고민 중이야.""뭔 고민을 하냐? 댄동 들어갔다는 거 자체가 간지 작살이라고.""그래? 그렇게 대단해?""매년 지역 대회 상 탄 거 모르냐? 꼴통 학교라서 이런 거라도 잘하는 거지. 나랑 푸름이랑 병진이랑, 준우랑 같이 면접 볼 건데 너도 껴. 그리고 너, 잘생겼으니까 너도 껴준다."태민이 세훈을 가리키며 말했다. 잘생겼으니까 껴주는 건 무슨 논리인지 모르겠다. 나는 때릴 뻔한 애니까 미안해서 껴주고 오세훈은 잘생겼으니까 껴주고? 세훈은 별로 끼고 싶지 않은 눈치였지만 태민의 제안을 거절했다간 쥐어터질 걸 예감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다음 주 금요일까지 점심 시간에 모여서 연습을 하기로 했다. 나는 내 춤 실력이 들통나면 태민이 나를 퇴출시키지 않을까, 생각했다. 도중에 그만 두든 아니든 일단 경수 형을 위해서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야. 컴퓨터 그만하고 편의점에서 생리대 사다줘. 누나 아파서 그래."수행평가를 컨닝할 때만큼의 집중력을 발휘해서 각종 아이돌 안무 영상을 보고 있는데 둘째 누나가 날 귀찮게 했다. 누나는 나에게 뭘 잘 시킨다. 집 앞 편의점 알바는 이미 날 생리대 셔틀로 취급하고 있을 지경이었다. 나 이거 안 보면 죽어, 라는 말로 부탁을 거절하고 다시 영상에 집중했다. 이거라도 안 보면 춤도 못 추고 쪽팔려서 죽을 테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보다가 딴 길로 새서 숙녀시대 누나들의 무대 영상을 본 게 화근이었다. 둘째 누나가 내 뒷통수를 퍽 치며 이걸 안 보면 죽는 거냐며 뭐라고 했다."아.. 왜 때리는데!! 씹색!""씹색?!!""시.. 십색 크레파스.. 갔다올게."누나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왔다. 밖은 이미 어둑어둑했다. 집 앞 편의점 알바를 괜히 마주치기 싫어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나왔다. 우리 동네에서 학원이 가장 많이 밀집된 쪽이었다. 얼굴을 푹 숙이고 생리대를 사서 나오는데 도로 건너편 건물에서 나오는 경수 형을 보고 난 다시 후진했다. 교복을 입지 않고 맨투맨에 청바지만 입은 형은 다리가 더 짧아보였다. 귀엽다는 말 말고는 다 필요없다. 이런 때에 형을 마주치다니 우린 정말 하늘이 정한 운명 아닐까 싶었다.형을 계속 염탐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아까 아침에 본 학생 회장 뭔백현 나부랭이가 형에게 달려왔다. 둘이서 아주 고만고만한 게 친구인 모양이었다. 친구 이상일 리가 절대 없었지만, 뭐 눈엔 뭐만 보인다더니 백현이 형의 손목을 그러쥐는 폼부터가 묘했다. 친구 사이에 손목은 왜 잡지? 왜 저렇게 조심스럽게 붙잡는 걸까? 이럴 땐 오세훈의 냉철한 상황 판단이 필요했다. 집에 가서 당장 세훈에게 전화를 해야겠다. 형과 백현은 같은 학원 버스를 타고 유유히 멀어져갔다. 1초라도 형을 더 보고 싶은 내 마음을 아는지, 멀어져가는 버스는 야속했다."누나. 여기 부탁한 거.""너는 생리대를 만들어서 오니?""누나가 사오든가!!"누난 엄마보다 잔소리가 심하다. 집에오자마자 방문을 쾅 닫아버리고 세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훈도 나와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안무 영상을 보는 중인데 면접 그거 그냥 안 하면 안 되는 거냐고 불평했다. 태민의 두 눈에 이글이글 불타오르던 그 욕망의 불꽃을 생각하면 그런 생각이 다시 사라질 텐데 말이다."나 아까 나가서 형 봤다."- 또 뭔 지랄을 하려고.."근데 형이랑 아까 아침에 우리 머리 때린 놈이랑 친군가봐. 그 사람이 형 팔목을 잡는데 엄청 조심스럽게 잡았다? 왜 그러지? 경수 형 좋아하나? 둘이 학원 버스도 같이 탔어."- 븅신. 니가 호모라고 다 호모냐? 이 미친 호모 새꺄. 끊어.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오세훈한테 전화를 했는지 모르겠다.
시험 기간에도 새지 않는 밤을 샜다. 밑에층에서 올라올까 바닥에 이불을 깔아놓고 열심히 안무를 따라했다. 하지만 막상 말도 안 튼 아이들과 모여서 춤을 추려니 뻘쭘하고 민망했다. 병진이는 그래도 우리 반이라 몇 마디 나눴지만 준우라는 녀석과 푸름이는 말을 걸기가 꺼려졌다. 일을 벌여놓은 태민은 정작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푸름이 어색함이 줄줄 흐르는 중인 정적을 깼다."어이. 김종인. 이태민은 왜 안 오는 거지?""급식 먹을 때까지만 해도 나랑 같이 먹었는데.""이 자식 또 식후땡 하러 갔군."안 그러게 생겨서 담배를 피나보다. 태민과 가까이 하면 내 혈중 니코틴 수치가 높아져서 생명이 위태로워질 거 같으니 앞으로 얘기할 때 멀리 떨어져서 얘기해야겠다. 그때 태민이 카세트를 플레이어를 들고 들어왔다. 아주 들뜬 것 같았다. 다짜고짜 노래를 틀고 실력 확인을 할 테니 한 사람씩 춤을 춰보라고 했다. 세훈이 먼저 하겠다며 설쳤을 땐 손발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지만 막상 내 차례가 오니 아무것도 못 하겠는 거다. 게다가 세훈이 예상보다 잘해버려서 부담감만 커졌다."김종인 안 춰?""마지막에 출게.""올. 히든 카드."히든 카드고 자시고 차라리 맨 처음에 할 걸 그랬다. 나머지 애들은 내 기대를 꺾으며 다 완벽한 춤실력-배틀이라도 하는 줄 알았다-을 뽐냈다. 원래 좀 추던 애들인 게 분명했다. 나는 위축됐지만 일단 사나이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한다. 심호흡을 하면서 비장하게 스텝을 시작했다. 얼마 안 돼서 세훈이 친하지도 않은 병진의 어깨를 마구 때리면서 웃었다. 병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지켜보던 태민이 노래를 멈췄다."야. 존나 못 춰. 기본기가 안 됐어. 이런 실력으로 어떻게 면접을 봐.""그러게..""너 학교 끝나고 어디 가?""집에 가야지.""안 돼. 넌 일단 남아."쪽팔림의 고비는 지나갔지만 아무도 태민의 열정을 막을 순 없었다. 학교가 마치고 아이들이 모두 귀가하는 가운데 난 강당에서 태민에게 시달려야 했다. 태민은 몸소 시범까지 보이며 나를 들들 볶았다. 자칭 댄싱머신 이태민 선생이 나에게 남긴 주옥 같은 말씀들은 이러했다."춤은 배 힘으로 추는 거야. 근력이 받춰줘야 되지. 오늘부터 윗몸일으키기 백 번 해.""출 때 진정한 간지를 판가름하는 건 아이솔레이션이다. 머리, 팔, 다리를 다 따로 컨트롤 할 수 있어야 돼. 일단 넌 너무 엉망이니까 스트레칭부터 해야겠어.""계집애냐? 이렇게 딱 절도 있게 끊으라고."태민이 나에게 가르치려는 게 너무 많아서 감당하기 힘들었지만 도경수 이 세 글자만 되뇌여도 나는 행복했다. 내가 이만큼 의지 있는 사람인지 처음 알았다. 형 눈에 들어서 난 당당히 동아리에 들어가고, 형에게 총애를 받는 후배로 거듭날 거다. 태민과의 혹독한 트레이닝으로 하루하루가 갔다. 평소 잘 움직이지도 않는 근육들을 쓰려니 피곤했다. 밤에도 자고 학교에서도 자고 깨어있을 땐 방과후뿐이었다. 어느날은 태민과 땀을 한 바가지 흘리고 바닥에 널부러져 동아리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근데 넌 춤도 못 추면서 왜 들어가려고 했냐?""어, 그게 왜냐면. 재밌을 거 같아서.""춤은 재미가 아니야. 나처럼 춤을 사랑해봐."태민이 농담을 하는 줄 알고 고개를 돌려 태민을 바라봤지만 진지한 표정이었다. 정말 춤을 사랑하나보다. "있잖아. 동아리 부장한테 전화해봤어?""어. 여섯 명이서 같이 면접 볼 거라고. 왜?""그냥.. 부장이면 춤도 되게 잘 추겠다.""잘 추는 게 아니라 존나 만만하니까 부장 하는 거지. 잡일은 부장이 다 하는 거거든."감히 형을 만만한 사람 취급하다니 참을 수 있다. 태민이니까."내일 면접인 게 안 믿긴다.""동아리 들어가면 선배놈들이 나 존나 싫어하겠지? 지들보다 잘 춰서."난 속으로 태민과 다른 생각을 했다. 동아리 들어가면 경수 형이 날 무지 좋아해주겠지? 형도 나한테 반하는 거 아니야? 나도 모르게 실실댔는지 태민이 왜 쪼개냐며, 내 말이 우습냐며 얼굴을 툭 쳤다. 형 때문에 좋아서 쪼갠다 인마, 속으로 대답했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왔다. 6교시 종이 치자마자 심장이 벌렁벌렁 떨려서 춤을 다 까먹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됐다. 형을 가까이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떨렸다. 세훈은 심호흡을 하고 있는 내게 추다가 자빠지라며 악담을 했다. 강당 앞에는 대략 50명 정도 되는 아이들이 모여있었다. 몇 명 안 올 줄 알았는데 인기가 생각 이상이었다. 우리 차례가 왔을 때 태민이 우리를 다 모아놓고 파이팅을 외쳤다. "야. 걱정 마. 쟤네 다 진정한 춤을 모르는 애들이야. 우리가 발라버리자."긴장이 돼서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강당 안으로 들어갔다. 경수 형이 바닥에 앉아서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고갤 들어 우리를 훑어보는 형을 본 순간 넋을 놓고 웃어버릴 뻔 했다. 첫인상이 바보처럼 보이면 안 된다. 일부러 웃지 않기 위해 입에 잔뜩 힘을 줬다. "몇 반이야?""탈레반이..""탈레 뭐?""아니 이 친구가 헛소리를... 7반이요."또라이 오세훈 새끼가 탈레반이라고 대답하려는 걸 입을 틀어막아서 내가 대신 대답했다. 미우나 고우나 내 친구인 세훈이가 언제쯤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경수 형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옆에 앉은 친구의 귀에 뭐라고 속삭였다. 제발 얘네 떨어트리자라는 말만 아니면 된다."너넨 여기 왜 들어오고 싶어?""춤을 사랑해서요. 춤 안 추면 죽을 것 같아요."태민의 대답이 형을 활짝 웃게 만들었다. 형이 가장 귀여울 때는 웃을 때다. 둘째로 귀여울 때는 찡그릴 때고 셋째로 귀여울 때는 숨쉴 때다. 우는 건 안 봐서 모른다. 내가 다른 생각에 잠겼을 때 이미 노래는 시작됐다. 뒤늦게 맨 뒤에 자리를 잡고 섰다. 태민이 센터에서 현란한 스텝을 밟았다. 그러다 멈춰서면 둘째 줄의 준우와 푸름이 다음 동작을 이어가고 또 그 다음엔 나와 세훈이 이어가는 식이었다. 마지막 동작은 대망의 군무였는데 난 오로지 태민이 강조했던 동작들을 곱씹으며 끝까지 무사히 해냈다. 앞에 앉아있던 선배들은 놀란 눈치였다. "너네 장난 아니다. 전원 합격이야.""전원 합격이요?""응. 너네가 마지막 조거든. 앞에 춘 애들은 엉망이었어. 거기 뒤에 선 친구는 조금 부족하긴 한데, 그래도 혼자만 떨어지면 기분 나쁠 테니까."경수 형이 나를 지목하며 말했다. 형은 내 상상대로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나는 형이 거기 뒤에 선 친구, 하며 나를 쳐다봤을 때 알아버렸다. 이제 형도 내 사랑의 포로가 될 것이라는걸.
***독자님들 오타 알려주시구요 암호닉 정리는 제가 다음 번에 시간 나면 꼭 해드릴게요
암호닉 너무 잘 받았어요 꿀잠 주무시고 한 주 즐겁게 보내세요
일교차가 심한데 감기 조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