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소설
w. 아우디
백현이가 없으면 안절부절 못하는 나의 하루는 백현이가 해주는 모닝콜로 시작된다. 매일 똑같이 경수야 일어나, 소리를 들어도 백현이가 해주면 아직도 꿈인 것처럼 달콤하다. 이불 속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았지만 집 앞에서 나만 기다릴 백현일 생각하면서 기지개를 켰다. 가족들은 아직 다 자고 있었다. 나는 새하얀 교복 셔츠를 입으면서도 백현이가 생각났다. 백현이는 더러운 걸 극도로 싫어한다. 그런 백현이가 날 보고 경수가 흙구덩이에 빠져도 좋을 거라고 했었다. 아직 졸린 척을 하면서 눈을 부비며 밖으로 나갔다. 구름이 해를 가려서 아직 새벽 같았지만 날씨가 아무렴 백현이만 있으면 된다. 오늘처럼 인적이 드문 등교길에서는 둘이 깍지를 끼고 걸었다. 백현이는 교문 지도를 서야 하기 때문에 우린 매일 학교에 일찍 갔다. 백현이는 모두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학생 회장이다. 내가 학생 회장인 것도 아닌데 그런 백현이가 자랑스러웠다."경수야. 학원 숙제 다 했어?""풀려고 했는데 하나도 모르겠어. 백현이가 알려줘."사실 난 공책에 학원 숙제를 이미 다 풀어놨다.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맡는 바는 다 해내는 나였다. 그렇지만 백현이가 쉬는 시간마다 우리 반에 달려와서 설명해주는 게 좋아서 거짓말을 했다. 한 시라도 다른 사람에게 백현이를 뺏기는 게 싫다. 특히 백현이네 옆반 여자애들이 백현이에게 말을 안 걸면 좋겠다. 걔네들은 백현이가 날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니까 찝쩍댄다. 이 바보들아, 백현이는 내 거야.학교 안까지 다 도착한 우리는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하고 각자의 반으로 돌아섰다. 아침 자습 시간까지 얌전히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같은 동아리인 찬열이 교실 밖으로 나를 불러냈다. 기대에 부푼 표정으로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냐길래 모른다고 했다. 혹시 오늘이 화이트데이인가? 그럼 큰일이다. 백현이에게 사탕을 받을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뭔데! 오늘 무슨 날이야?""오늘 동아리 면접 보는 날이잖아. 부장이 돼서 넌 도대체 생각은 있는 애냐..""맞다. 그게 그렇게 중요해?""어. 할 말 있어. 이따 이쁜 여자애들 위주로 뽑자."지금까지 지켜본 찬열이는 외모지상주의자다. 외모지상주의라기보다는 예쁜 여자애들을 참 좋아하는 것 같다. 일 학년 때 예쁜 선배들이 많다면서 날 동아리에 데려간 것도 찬열이었다. 동아리에 들 생각이 추호도 없었지만 마음이 약해서 거절을 못하고 찬열을 따라갔었다. 찬열이는 그때 춤을 엉터리로 췄다. 웨이브를 하는데 마치 행사용 키다리 풍선이 흐느적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선배들 역시 외모지상주의여서 멋쟁이 찬열이를 뽑았고, 나도 얼떨결에 동아리에 속하게 되었다. 이 학년이 돼서 부장을 맡은 건 순전히 아이들이 나에게 부장 자리를 떠넘겨서였다. 모두가 입을 모아 나 아니면 아무도 하지 않겠다고 못된 소리를 했다.7교시가 되어 난 찬열이와 강당으로 갔다. 치마가 짧은 신입생 여자애들과 왁스로 머리를 바짝 세운 남자애들이 아주 많이 모여있었다. 찬열이는 여자애들을 보면서 좋아했지만 나는 그 아이들이 하얗게 분칠을 한 걸 보고 무서워졌다. 친구들도 날 만만하게 보는데 새로 들어올 후배들이 나를 우습게 보면 어쩌나 벌써부터 걱정이 됐다. 궁극적인 해결책을 위해 난 호랑이 선배가 되기로 했다. 아무리 키가 작아도 날 무시 못하게 나만의 카리스마로 후배들을 압도할 거다. 맨 처음 들어온 여학생들은 찬열이가 좋아서 면접을 보러 온 애들이었다. 팬더처럼 눈을 까맣게 칠해서 아주 무섭게 보였다."너넨 여기 왜 들어오고 싶어..?""찬열 오빠!! 잘할게요 붙여주세요!!!"내 말은 무참히 씹고 찬열의 이름만 외치는 애들이었다. 춤을 보고 심사를 해야 하는데 박찬열 타령만 하니 그냥 탈락시킬 수밖에 없었다. 다른 여학생들도 정도의 차이었을 뿐 찬열을 향해 요상한 눈빛을 쏘아대는 등 별다른 게 없었다. 후반에 가서야 춤 좀 춘다 하는 여학생 무리가 들어와서 찬열을 기쁘게 했다. 찬열이는 특히 그 아이들이 골반을 튕길 때 아주 흡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찬열이 내 귀에 대고 얘넨 전원 합격을 시켜야 마땅하다고 했다."아까 가운데 있던 여자애 내 스타일이다."찬열이를 좋아하는 애들은 찬열이 얼마나 예쁜 사람을 밝히는지 안다면 찬열일 계속 좋아할까? 사십 명이 넘는 아이들을 상대하고 나니 나는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빨리 백현이랑 집에 가고 싶었다. 백현이는 학생부의 수장이라서 지금 열심히 학생회의를 주도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렇게도 바라던 맨 마지막 조가 들어왔다. 거기가 아파 보일 정도로 교복 바지를 타이트하게 줄인 남학생 뒤에 키 큰 아이들이 줄줄이 쫓아들어왔다. 일 학년인데도 저렇게 키가 크다니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어릴 때 우유만 많이 먹었어도 더 클 수 있었는데. 아이들에게 아까 했던 질문을 묻고 나서 춤을 보기로 했다. 찬열이와 나는 계속 귓속말을 하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맨 앞에 선 태민이란 아이가 프로라고 불러도 될 만큼 춤을 잘 춰서였다. 태민의 뒤에 있는 애들은 그냥 백댄서 같았다. 특히 맨 뒤에서 한 템포 늦게 동작을 시작한 애는 안타까울 정도였다."너네 장난 아니다. 전원 합격이야.""전원 합격이요?""응. 너네가 마지막 조거든. 앞에 춘 애들은 엉망이었어. 거기 뒤에 선 친구는 조금 부족하긴 한데, 그래도 혼자만 떨어지면 기분 나쁠 테니까."부족하긴 했지만 혼자 떨어지면 불쌍할 것 같아서 착한 내가 붙여주기로 했다. 사실은 붙여주지 않는다면 잡아먹을 기세로 노려보는 그 살기 어린 눈빛 때문에 붙여준 거나 다름 없었다. 역시 남다른 포부를 가진 일 학년들은 무섭다."찬열아. 아까 맨 뒤에 까만 애 이름이 뭐야?""어디 보자.. 김종인 같은데?""날 째려봤어. 무서워."후배들이 생각 외로 춤도 잘 추고 키도 컸지만 그래도 난 선배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다. 누가 뭐래도 난 이 동아리의 부장이다.책가방을 챙겨서 교실을 나왔을 땐 백현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신발장에서 내 신발을 꺼내들고 나를 향해 흔드는 백현이었다. 세상 어디에 백현이만큼 자상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애인은 복 받은 거다. 마치 나처럼. 내가 조르는 바람에 백현이랑 난 학교 근처 분식집에 가기로 했다. 배가 안 고팠지만 벌써 백현이랑 헤어지기 싫었다. 꽤 넓은 분식집 구석에는 아까 봤던 1학년 남자애들 무리가 난리법석을 피우면서 실내를 시끄럽게 하고 있었다. 그쪽을 흘끗 쳐다보다 아까 강당에서 나를 째려보던 종인이라는 애와 눈이 마주쳤다. 계속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살짝 지적을 했다고 앙심을 품은 게 분명했다. 나는 애써 그 시선을 피하면서 백현이에게 말을 걸었다."백현아.""왜.""백현아아.""왜, 경수야.""좋아서.. 나 오늘 너무 지쳤어. 동아리 애들 심사 봤어.""그랬어? 그래서 우리 경수가 피곤해보였구나.""진짜? 지금 나 못난이 같아? 다크서클도 있어?""아냐. 귀여워."백현이가 내 볼을 꼬집으려다 다른 눈들을 의식하고 손을 내렸다. 쟤네만 없으면 백현이한테 예쁨 받을 수 있었는데.. 나는 다시 그쪽을 쳐다봤다. 절대 인사를 받으려고 눈치를 준 게 아니었는데 태민이 저벅저벅 걸어와서 나에게 직각 인사를 했다."도경수 선배.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어? 어... 나도 잘 부탁해.""저희는 이만 가봐야 돼서요. 다음에 또 뵈요."평소에 잘 받지 않던 선배 대접은 조금 어색했다. 애들이 단체로 우르르 나가는 와중에도 종인의 눈은 나에게로 향했다. 정말 선배 알기를 함부로 하는가본데, 군기를 확실히 잡지 않으면 안 되겠다. 걸리면 완전 나한테 끝장이다. 눈에 힘을 주고 저만치 멀어져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노려보고 있는 내 손에 백현이가 포크를 쥐어줬다.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안 먹어?""먹여줘."백현이가 포크로 떡볶이를 찍어서 내 입 앞에 가져다댔다. 나는 입을 아, 하고 벌렸다. 하지만 백현이는 일부러 내 입 주변에 떡볶이 소스를 묻히고 혼자 좋아했다. 나도 백현이를 따라서 헤실거리며 웃었다. 백현이가 좋으면 나도 좋다. "백현아. 여기로 가까이 와봐."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분식집 아줌마의 눈치를 보다 백현이의 입술에 내 입에 묻었던 새빨간 떡볶이 소스를 묻혀줬다. 백현이가 왜 나를 보면서 그렇게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았다. 멋있는 백현이의 얼굴에 빨간 게 잔뜩 묻으니 우스꽝스러웠다. 내 입에 묻은 걸 백현이가 휴지로 닦아줬다. 우린 서로를 보며 마냥 웃다가 떡볶이도 다 먹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난 백현이를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처음 만났다. 작년까지만 해도 우린 같은 반이었다. 평범한 친구들을 만나 평범하게 수업을 듣고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내게 백현이는 유일하게 특별한 사람이었다. 반 아이들을 잘 이끌어서 일 학년때도 반장이었던 백현이가 처음으로 나에게 말을 걸었을 땐, 내가 필통을 깜빡해서 수업 내내 손만 꼼지락거리고 있을 때였다. 옆자리가 아니었는데도 나에게 볼펜을 내민 백현이었다. 누구에게나 그런 호의를 베푸는 사람인 줄 알았다.시간이 갈수록 백현이는 나에게 더 친절했다. 숙제를 해오지 않으면 자신의 것을 베끼라면서 선뜻 공책을 내어주고 체육 시간엔 내가 살짝 넘어져도 달려와서 괜찮냐고 물어봐줬다. 누가 이렇게 날 걱정해주긴 엄마 빼곤 처음이었다. 백현이랑 정말 좋은 친구 사이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시험 기간이 되었을 때, 백현이랑 같이 우리 집에 가서 공부를 했다. 식탁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흔들거리며 책장을 넘기는데 백현이가 물끄러미 나를 쳐다봤다."왜..?""내 앞에 말고 옆에 앉았으면 좋겠어."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의 말을 못 들어줄 이유는 없었다. 책을 모두 다 옮기고 백현이의 옆에 앉아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화학식만 주구장창 외워야 하는 과학 공부는 너무 지루했다. 하품을 하고 책 위에 엎드리려는데 백현이가 졸려? 하며 내 손등을 쓰다듬었다. 그때 잠이 확 깼다. 백현이는 아마 요술쟁이가 아닐까 생각했다."너가 만지니까 안 졸려. 신기하다."이럼 잠 깨겠네, 하면서 백현이가 내 손등을 감싸쥐었다. 오른쪽 손을 움직이지 못해서 문제도 못 풀고 가만히 있어야 했지만, 내 손등에 땀이 찰 정도로 오래도록 손을 쥐고 있었지만 백현이는 커피보다 더 센 각성제였다. 우리가 맞닿은 느낌은 너무 생생해서 난 그날밤 잠도 이루지 못하고 백현이 생각만 했다. 어떻게 친구가 이렇게 좋을 수 있는지 웃음만 나왔다.시험이 끝나고 나선 백현이네 집에 놀러갔다. 백현이의 예의바름과 품성은 가정에서부터 우러나온 듯 했다. 가족 모두가 나에게 상냥하게 대해주셨다. 나는 백현이 방에 들어가서 좁은 침대 위에 배를 깔고 누웠다. 베개엔 백현이의 체취가 잔뜩 묻어있었다. 그 냄새가 좋아서, 계속 맡고 싶어서 한참이나 베개에 코를 묻고 있었다."경수 뭐 해? 죽었어?""여기서 네 냄새 나."내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백현이가 헝클어진 내 앞머리를 정리해주며 내가 여깄는데 왜 베개 냄새를 맡아, 하고 웃었다."너가 너무너무 좋아서 그래."내 말에 웃고 있던 백현이의 표정이 굳었다. 나도 덩달아 풀죽은 얼굴이 돼버렸다. 백현이가 한숨을 내쉬더니 내 옆에 누웠다. 우린 아무 말도 없이 천장만 바라봤다. 먼저 입을 뗀 건 백현이었다."경수야.""으응.""우리 친구야?""응. 우리 친구야.""정말 우리 친구 맞아?""친구야. 완전 짱 좋은 친구야.""틀렸어. 친구 아니야.""아니면 뭔데?"백현이는 대답 대신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댔다. 지그시 눈을 감은 백현이와 달리 난 바보처럼 눈을 계속 뜨고 있었다. 그날부터, 백현이와 난 친구가 아니게 되었다. 동아리실의 위치를 설명하기 위해 선발된 신입생 아이들을 다 집합시켰다. 내가 가자마자 껌을 짝짝 씹고 있던 남자애들 무리가 나에게 인사를 했다. 나보다 한 뼘은 더 큰 애들이 일제히 인사를 하니 부담스러웠다. 난 애써 의연한 척을 하며 인사를 받아주었다."선배 근데 왜 여자애들은 없어요?""걔넨 찬열이가 따로 부르겠다고 해서.. 애들아. 나 좀 봐줄래?""보고 있잖아요.""그치..? 동아리실은 오층에 있어. 씨에이 시간에 거기로 오면 돼. 선배가 너네 이름을 잘 몰라서 그러는데.."내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한 아이가 '저는 오세훈이고요 순서대로 이태민, 하병진, 도푸름, 임준우 맨 끝에 선 애가 김! 종! 인! 이에요.'라며 힘차게 말했다. 그렇게 크게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데 왜 굳이 복도가 떠나가도록 김종인이라는 이름을 강조했는지 모르겠다. 종인이는 이번에도 역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오늘은 꼭 주의를 줘야겠다."종인이만 남고 먼저 다 가봐."애들이 다 돌아가고 나서 난 종인이와 마주보고 섰다. 이제 와서 내 눈을 계속 피하는 게 날 무시하는 것 같았다. 어쭈? 마음을 굳게 먹고 한 소리 하기로 했다."내가 저번에 춤 지적한 건 너가 미워서 그런 게 아니야. 나를 막 노려보면 어떡해? 그래도 나는 너보다 선배야.""..네? 죄송한데 제대로 못 들었어요 형.""혀엉? 왜 나한테 선배라고 안 해? 선배라고 안 하면 가만 안 둘 거야.""저는 이게 더 편해서요. 가만 안 두면 어떻게 돼요?"
다음엔 뭐라고 말할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선배라고 안 하면 어떻게 하지, 사실 잘 모르겠다. 우물쭈물하다가 그냥 얼버무렸다.
"그,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볼게."
바보처럼 말을 더듬지 말았어야 했다. 종인이는 날 보고 씩 웃더니 그냥 뒤돌아서 가버렸다. 태민이랑 다른 애들은 나한테 인사도 하고 갔는데 종인이는 그냥 갔다. 이제 나는 후배들에게마저 만만한 선배가 돼버린 걸까?
***
부제: 청춘 게이 백도와 어떤 무서운 후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암호닉 감사히 받았어요 독자님들은 이제 저의 에너지예요 ^ㅇ^~♡ 빠지신 분 계시면 꼭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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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원래 텍파 꼭 삭제해주세요 13화가 누락돼있어요 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