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의 우리
w.1억
제 16화_
너에게 다가가는 길
"카페를 내놨다고? 왜?"
동연의 목소리가 꽤나 커서, 손님들이 주혁과 동연을 바라보았다. 주혁은 괜히 주변을 둘러보고선 동연에게 작게 말했다.
"길열린이랑 같이 하겠다고 차린 카페잖아. 결국엔 길열린이는 없고 나 혼자인데. 무슨 소용이겠어."
"헤어지면 그만이라고 했던 건 너였잖아! 손님도 이렇게 많은데 왜!"
"그냥."
"또라이 새끼.. 너 성경이 누나도 마음에 안 들면 그냥 헤어져! 시간 질질 끌지말고."
"그래."
"진짜??? 아니! 이렇게 쉽게 마음 변할 거면 왜 소개 받았냐?"
"네가 받으라며."
"그거야 그런데..!"
"이번주에 캠핑 가자고 했던 거. 길열린 애인도 오고 그러는 건 아니지."
"미쳤냐? 길열린 애인이 왜 오냐.. 그리고 그 캠핑.. 못 가. 다들 시간 안 된다고 그래서."
"…아."
"뭐야 되게~ 실망한 표정인데~?~?~?"
"뭐래. 애인은 뭐하는 사람인데."
"백화점 부회장인가 대표인가 그럴 걸?"
"뭐????"
주혁이 놀란 듯 소리쳤고, 이번엔 모두가 주혁을 보았다. 동연은 주혁의 반응이 재밌는지 키득이며 웃다가도 장난스레 말한다.
"하긴.. 열린이가 예쁘잖아~ 털털해서 인기도 많고? 크으.. 그 사람이랑 결혼하면 맨날 놀러가서 맛있는 거 사달라고 해야겠다."
"일절만 해라."
"뭐어."
"할 거 없으면 집에 가서 청소나 해."
"네가 오라며! 심심하다고!"
"가라고."
"길열린이 왜 널 싫어하는지 알겠다. 인마!"
동연이 사악하게 웃으며 얘기를 하다가도, 주혁의 표정이 좋지않자.. '미안..'하며 머리를 긁적인다.
열린을 소파에 눕힌 선호는 다시금 어머님 맞은편에 앉았다. 어머니는 선호를 스캔하듯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한다.
"저건 예전부터 그랬어. 나랑 술마셔서 버티는 날이 없다니까."
"그래서 귀여워요."
"귀엽긴.."
어머니는 씁쓸하게 열린을 바라보다가 다시 선호를 보았다. 선호가 해맑게 웃으면, 어머니는 '웃기는'하고선 괜히 따라서 웃어보인다.
"자네도 술이 꽤 약한가보네."
"약한편은 아닌데.. 긴장을 해서 그런 것 같아요."
"내가 열린이 엄마라서?"
"당연하죠."
"내가 이렇게 사납게 구는데도 열린이랑 같이 있고싶나?"
"네."
"대답은 참 잘하네. 그럼 어머니랑 단둘이서 사나?"
"아니요. 어머니는 3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냐.."
"어머니도 자작하는 걸 좋아하셨는데. 그때는 몰랐어요. 자작한다는 게 이렇게 마음이 아픈 일인가 싶더라고요.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워보이던지.. 돌아가신지 3년이나 지났는데 기억에 남는 어머니 모습이 자작하는 모습이에요."
"……."
"평생을 잔 채워드린 적 없었는데. 돌아가신 후에야 잔을 채울 수가 있더라고요."
"줘봐."
"네?"
"자네가 내 잔을 채워줘보라고."
선호는 생각도 못한 말에 바로 술병을 집었다. 취한듯 얼굴이 빨개져서는 방긋 웃는 선호가 귀여운지 어머니는 소리내어 작게 웃는다. '웃으니까 더 예쁘세요'선호의 말에 어이가 없는지 어머니는 콧방귀를 뀐다.
술도 다 마셨겠다.. 출근도 해야하니 집에 가려는지 짐을 챙기던 선호는 소파에 누워서 잠든 열린이의 머리칼을 쓸어준다. 식탁 정리를 하던 어머니는 선호의 모습을 바라보다 또 작게 웃다가도 선호가 어머니를 바라보자 눈이 마주쳐 뻘쭘한 듯 표정을 굳힌다. 아무래도 웃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은 모양이다.
"괜찮으시다면 내일 모셔다드릴게요."
"됐네. 나는 버스가 더 편해."
선호는 대화를 어떻게 이어갈까 고민을 하는 듯 했고, 어머니는 선호를 신경을 쓰지 않는 듯 식탁 정리를 하기 바쁘다. 열린이의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선호는 그 핸드폰을 주워 열린이의 옆에 놓는다. 그러다 핸드폰 진동 소리에 핸드폰 화면을 보았을까.
[지금 만날 수 있어? 집 앞으로 갈게.]
주혁에게서 온 카톡이였다. 12시가 넘었는데 만나자고? 그것도 집 앞에서.. 인상을 쓴 선호는 곧 뒤돌아 어머니에게 웃으며 말한다.
"가보겠습니다. 어머님."
"그래."
"……."
"저기."
"네?"
"옷은 따듯하게 입고 다녀라. 요즘 감기 독하다니까. 패딩이라도 입으라고."
"……."
"가보게."
어색한 듯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가버리자, 선호는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미친."
주혁은 아직도 카톡을 읽지않은 열린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내가 어제 취해서 카톡을 잘못 보낸 거야. 잘못한 거지.. 근데 안 읽는 것도 너무한 거 아니냐.
"넌 엄마 반만 닮았어도 그렇게 힘들어하지 않았을 거다."
"…어어 엄마아... 벌써 가?"
"그래. 집 청소를 덜 했어. 집에 가서 얼른 다 해야지."
"나도 같이 갈까?"
"됐어. 뭘 와?"
"엄마 가는 길 심심할 거 아니야.."
"됐어."
엄마가 간다며 나를 지나쳐 가기에 드디어 바닥에 발을 딛고선 엄마를 쫄레쫄레 따라갔더니, 엄마가 현관문을 열다가 갑자기 멈춰서서는 나를 바라본다.
"네 애인."
"응?"
"괜찮은 놈 같더라."
"……."
"간다."
저 말을 끝으로 쿨하게 나가버리는 엄마에 나는 뒤늦게 문을 열고 엄마의 뒷모습에 대고 소리쳤다.
"거봐!! 내가 선호씨 엄청 좋은 사람이라고 했잖아!!!"
"안녕하세요. 대표님..!"
"아, 네.. 그!"
"네?"
"요즘 잘나가는 패딩이 뭐예요? 무난한 걸로 하나만 주세요."
"아, 그럼 혹시 이건 어떠세요?"
"네. 그거 주세요. 아, 아니다.. 세벌 주세요."
당연한 듯 카드를 꺼내 직원에게 건네자, 직원은 선호의 눈치를 보며 바로 결제를 한다. 옆에 서있던 도환은 왠지 자꾸 기분이 좋아서 콧노래를 부르는 선호를 한참 바라보다가 조용히 묻는다.
"웬 패딩입니까. 항상 코트만 입으시다가."
"춥잖아?"
"..에?"
"요즘 감기 독하대. 너도 좀 따듯하게 입고 다녀라. 점심 뭐 먹을래? 나가서 짜장면이나 먹고올까."
"에..?"
"아 뭔가 탕수육도 끌리는데.. 아, 다 먹으면 되겠다!"
어쩐지 이상하단 말이지... 도환은 인상을 쓴 채로 선호를 바라보았고, 선호가 '왜?'하고 도환을 바라본다. 도환은 고갤 저으며 직원이 챙겨주는 패딩이 담긴 종이가방을 받아냈다. 선호가 그 종이가방을 뺏어들며 말한다.
"네가 짐꾼이야? 이런 거 앞으로 들어주지 마. 나도 손 있거든?"
"……."
"아, 이거 한 유치원생 사이즈랑 이 친구가 입을 사이즈도 하나 주세요. 제 패딩이랑 다른 색으로요. 조카 사이즈는 네가 봐서 골라라."
"……."
"이건 네가 들 수 있지? 조카랑 같이 입으라고."
선호가 쿨하게 뒤돌아 가버리자, 도환이 대표님! 하고 선호를 부른다. 선호는 휘파람까지 불며 도환의 말을 무시하고선 앞장서 걸어간다.
남주혁한테 온 카톡을 아직도 안 읽었다. 그냥 방을 나가버리면 되는데.. 왜 그게 안 될까. 뭐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하려고 불러낸 거래.. 참나. 미안하지만 난 네가 무슨 소리를 해도 선호씨면 충분해서 넘어갈 일도 없어. 오늘은 늦게 온다는 선호씨 덕에 선호씨 집에서 기다릴 수 있었다. 주인 없는 곳에서 이렇게 있으니까 결혼한 것 같고 너무 좋네 뭐! 현관문 앞에 숨어서 그를 놀래킬 생각을 하니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문이 열리고 와악- 하고 내 목소리가 나오기 전에 그의 워!! 하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뭐예요 진짜!!"
"바보예요? 밖에서 안에 다 보이는데."
"아..."
"귀엽게 아주 그냥."
그는 오자마자 나보고 귀엽다며 안아주었고, 괜히 얄미워서 등을 살짝 때리니 아프다며 난리다.
"이게 뭐예요?"
"패딩이요."
"갑자기 웬 패딩이에요..?"
"음.. 갑자기 그냥 사고싶어서."
"에?"
"저녁 뭐 먹을까요?"
보면.. 참.. 선호씨도 엄청 뜬금없다니까. 한 번 입어보라기에 패딩을 입어보자 또 귀엽다며 난리다 난리. 어쩜 날이 갈수록 나한테 진심인 것 같고 그러냐.. 사람 마음 이상해지게.
"오늘 밤에 영화 볼래요? 새로 나온 영화 엄청 재밌대요."
"어.. 그럼.. 저 밥만 먹고 뭐 좀 후딱할게요. 다 하고 그러고 영화 보러 갈까요?"
"아, 바쁜 거면 괜찮아요! 내일도 있고, 모레도 있잖아요!!"
"오늘 보고싶어요."
"에이.. 다음에 봐요! 일이 먼저야."
"치.. 변했어."
"헐 뭘 변해요 진짜."
"그럼 그 영화 꼭 나랑 봐요. 다른 사람이랑 먼저 봐버리면 저 울어요."
"알았어요 ㅋㅋㅋㅋ."
밥만 먹고 나는 집에 왔다. 일하느라 바쁜 것 같아서 자리를 비워주기는 했다만.. 침대에 누워서 남주혁의 카톡을 봤다. 나도 참 웃기다니까.. 차단을 하든지.. 읽든지.. 신경을 쓰지를 마! 나 왜 이러냐. 혜선 언니는 또 어디 놀러가고 없고.. 집에 혼자 있는데 뭔 잡생각이 이렇게 나는지. 남주혁과 행복했던 추억들은 하나도 안 떠오른다. 선호씨에게 가고싶다는 생각만 가득한 게 신기했다. 사람 인연이란 게 진짜 있나보네. tv에 시선을 둔 채로 한참을 있었던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주혁에게서 온 카톡이 너무 거슬려서 핸드폰을 봤을까. 참 웃긴다. 남주혁에게서 전화가 온다. 그리고 더 웃긴 건.. 카톡은 무시할 줄 알면서 전화는 무시를 못하는 것이다.
"…여보세요."
- 길열린.
"……."
- 잠깐 만나서 얘기 좀 하자.
"…무슨 일인데."
- …잠깐이면 돼.
너의 부름에 바로 알겠다고 대답을 해버린 내가 너무 싫었다. 너랑 안 좋게 헤어졌어도 그래도.. 너는 내게 소중했기 때문에 거절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남주혁."
"무슨 집 앞에 나오는데 한참 걸리냐."
"뭘 쏟아서 닦느라."
너랑 나란히 서있는데 뭐가 이렇게 어색할까.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것도 아닌데 너무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할 얘기가 뭔데."
"뭐가 그렇게 급하냐."
"…추우니까 빨리 말해."
"그냥. 요즘 힘드니까 너부터 생각이 나더라."
"…뭐가 그렇게 힘든데."
"그냥.. 다."
"……."
"힘드니까 네가 너무 보고싶었고, 너한테 투정부리고 싶었어."
"……."
"난 너랑 다시 만나고 싶어. 솔직하게 말해서.. 헤어져서 다른 사람 옆에 두고서 맘 편한 적 없잖아. 우리. 시위 그만하자."
"…뭐래."
"……."
"난 너랑 헤어지고 선호씨 만나고서 난생처음으로 사랑이란 걸 받아본 것 같았어. 네가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너무 잘해주고, 다음에 또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하고 맨날 생각해.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야. 선넘지 마. 너도 만나는 사람이랑 잘 해보라고. 친구로서 연락하는 건 괜찮은데. 이렇게 만나서 이상한 소리 하면 절대 못 만나. 힘들어도 나한테 기댈 생각하지 마. 우리 이제 그런 사이 아니잖아."
"천천히 다시 한 번 생각해봐. 너도 내가 있어야, 나랑 같이 있어야 진짜 너잖아."
"……."
"기다릴게."
"r기다리지말고 그 여자랑 계속 만나."
"……."
"너랑 엮이는 게 지겨워지기는 싫어. 계속 이런다면 너 못봐."
너를 두고 뒤돌아 걸었다. 쓸데없는 얘기로 나를 붙잡는 네가 싫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네가 미웠다.
"저기요?"
"……."
술에 취한 혜선을 백화점 앞을 지나다 어디론가 가는 도환을 보고 불렀다. 도환이 뒤돌아 혜선을 보더니 곧 술 냄새에 티 안 나게 한숨을 쉰다.
"어딜 그렇게 가요? 설마 지금 퇴근을 한 건 아닐 텐데."
"네. 아니에요."
"…아하."
"술 마셨으면 집에 바로 가세요."
"그럴 거야."
"……."
"야.. 나도 참 불쌍하지않냐. 술 마시고 혼자 집 가는 거."
"택시 타고 가세요."
"…됐고. 나 집에 좀 데려다주라."
"……."
"내가 가다가 없어지면 너탓인데? 그래도?"
"그래요."
"아싸."
혜선이 웃으며 도환에게 다가갔고, 도환이 택시를 잡으려고 하자.. 혜선이 놀란 듯 묻는다.
"너 차 없어?"
"네."
"왜?"
"없는데 이유가 있어야 되나."
"……."
"타요."
뻘쭘한 듯 혜선이 급히 택시를 탔고, 도환도 따라 택시를 탄다. 택시를 타고 집에 가는 길에 택시 안은 꽤나 조용했다. 정적을 깬 건 혜선이였다.
"나 오늘 소개받은 남자한테 차였다."
"……."
"그래서 그냥 혼자 술마셨는데. 혼자 집까지 가버리면 너무 슬플 것 같았거든. 근데 마침 네가 앞에 있네."
"……."
"너도 힘들 때 나 보이면 막 말걸어."
"……."
"너도 힘들 때 있을 거 아니야."
혜선의 목소리만 택시 안에서 울렸고, 도환은 혜선의 말을 듣는 척도 하지 않고선 창밖만 보고있다.
"그래요? 집에서 혼자 뭐해요 그럼? 심심하겠다."
- 괜찮아요~ 내일 선호씨 보는데요 뭐!! 추운데 주머니에 핸드폰 넣고! 차에서 얼른 필요한 거 꺼내서 집 들어가요.
"알겠어요. 연락할게요."
- 네에.
전화를 끊은 선호는 집 앞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사람을 보고선 멈춰섰다가 곧 지나쳐 차에서 서류를 챙겨 대문을 열려고 했을까. 쭈그리고 앉아있던 사람이 고갤 들어 선호를 보고선 손을 붙잡았다. 선호가 놀라 흠칫- 떨며 자신을 잡은 사람을 보더니 곧 손이 심하게 떨린다.
"……."
"오빠.. 아직도 여기 사네..? 혹시나 해서 와봤는데.."
목발을 짚고있는 그녀의 왼쪽 다리는 인공다리였다. 선호는 숨이 거칠어졌다.
"나 이제 한국에서 살아.. 잘 지냈어?"
"함부로.. 내 손잡지 마."
선호가 급히 손을 뿌리쳤다.
"오빠.."
"네가 왜 날 찾아왔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가라."
선호는 유비를 지나쳐 대문을 열고선 들어섰고, 유비는 대문에 손을 댄 채로 하염없이 선호를 부른다.
선호는 새벽 3시가 넘어서까지 잠이 오지않는지 침대에 누워서는 눈을 멀뚱히 뜨고있다. 선호가 급히 침대에서 내려와 서랍 안에서 불면증 약을 꺼내 먹는다. 불안한 듯 식은땀까지 흘리던 선호는 고갤 돌려 탁자 위를 본다. 탁자 위에는 표정이 그려진 귤이 있다. 아마도.. 열린이 혼자 선호를 기다릴 때 해놓은 것 같았다.
"……."
그래도 열린씨 덕분에 웃네.
제 17화_
너에게 다가가는 길(2)
"남주혁 진짜 돌았구나."
"그러니까."
"무슨 네가 당연하게 자기를 받아줄 거라고 생각했나봐. 어이가 없네."
"그러니까.. 나중에 따로 만나게 되면 잘 좀 말해줘. 나 너무 행복하다고 대신 좀.. 내 말은 듣지도 않아."
"…그래. 그렇게 미친놈일 줄은 몰랐지."
"…에휴."
언니는 남주혁을 미친놈이라고 불렀다. 맞는 소리라서 하지 말라고는 안 했지만.. 괜히 어제 되게 힘들어하는 모습 떠올리니까 미안한 것 같기도 하고.. 마음이 이상했다. 그냥 쓸데없는 동정심.. 그런 건가. 생각을 안 하면 되는데.. 자꾸 생각이 나버리네.
"너 오늘 김선호랑 데이트하냐?"
"영화 볼 것 같은데?"
"저녁 먹자고 할랬더니.. 치."
"ㅎㅎㅎ미안해...내일 먹자!! 아니면 야식 먹을까?"
"콜."
타이밍 좋게 딱 선호씨에게 집에 도착해 주차를 했다고 하기에 급히 겉옷을 입으며 언니에게 말한다.
"나 간다~~ 야식 고!"
"고."
곧 볼텐데도 핸드폰을 놓지않고 열린과 카톡을 하던 선호는 이모티콘을 찾아 보내려 잠시 자리에 멈춰섰다. 그러다 누군가 앞에 서는 것 같자, 선호가 시선을 돌려 앞을 본다.
"오빠 왔네.. 나 4시간 동안 문 앞에서 기다렸어!.. 연락은 왜 안 돼..? 나 차단했어?"
"너."
"…응?"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도대체."
"왜 3년만에 나타났는지 그게 궁금한 거야?"
"……."
"오빠가 나 엄청 미워한다는 거 알아. 당연한 거지.. 나같아도 내가 너무 꼴보기 싫을 거야.. 근데 오해는 풀었음 좋겠어서!.. 미국에서 한국 넘어오자마자 오빠한테 바로 연락한 거고, 찾아온 거야. 나 3년동안 오빠 계속 못잊었어. 오빠 만날 생각하면서 버텼거든."
"나 애인있어."
"……."
"너도 다른 사람 만나라."
"오빠는 나 사랑하잖아."
"아니. 너 없이도 잘 살아왔고, 지금 애인이랑 너무 행복해."
"나 추운데.. 일단 집에 들어가서 얘기하면 안 될까? 다리도 너무 아프고.."
"안쓰럽다는 생각도 안 들어."
"…오빠."
"이렇게 자꾸 찾아오지 마. 애인 자주 오니까. 오해할 만한 상황 안 만들었으면 좋겠다."
유비는 울고있었고, 선호는 그런 유비가 신경쓰지이도 않는지 매정하게 들어가버린다. 대문 앞에 서서 울기만 하던 유비는 곧 자신과 눈이 마주친 열린을 한참동안 바라보다 시선을 돌린다. 열린이는 애인 집 앞에서 울고있는 여자가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하다가도 대문을 열고 들어선다.
"집 앞에 여자가 울고있ㄷ.. 뭐해요?"
소파에 앉아서 뭐라도 본 것처럼 표정이 심각해져있는 그를 보니 걱정이 돼서 그의 옆에 앉았다. 그럼 그는 말도없이 그냥 나를 안았다. 그는 너무 불안정해 보였다.
"……."
"숨 천천히 쉬어요."
"……."
"무슨 일 있었어요?"
"……."
"귀신이라도 봤나~? 힘들면 말 안 해도 돼요."
그의 등을 토닥여주었고, 그가 천천히 진정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아프다. 열도 나고.. 힘이 없길래 죽 끓여주자 그는 억지로라도 내가 만든 거라고 다 먹어주었다. 항상 웃기만 하던 그가 힘이 빠져서는 앉아있는데 얼마나 안쓰럽던지.
"왜 아프고 그래요. 속상하네에.."
"열린씨."
"네."
"자고 갈래요?"
"…응?"
"오늘 나랑 같이 자줄래요."
"…그래요."
"……."
"그대신 내일 다 나아요."
"알겠어요."
여전히 힘이 없다. 그냥 몸이 아픈 게 아니라 마음도 많이 아픈 것 같아서. 내가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그냥 그의 옆에 있어주는 방법밖에 없다.
새벽 2시가 되어서야 그가 잠에 들었다. 식은땀을 계속 흘리고, 악몽이라도 꾸는지 계속해서 인상을 쓰는 그가 너무 걱정이 됐다.
"……."
악몽을 꾼 선호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한다. 불안한 듯 허공을 보던 선호가 급히 고갤 돌려 열린을 확인한다.
"……."
열린이 옆에 있다는 것에 안심을 한 선호는 웃음을 흘렸다가도 다시금 눈을 감았다.
"일어났어요? 더 자요."
"아뇨오... 선호씨 아픈 건요? 출근할 수 있겠어요?"
"덕분에 아픈 거 싹 사라졌어요. 열린씨 질리도록 봐줘야 하는데. 출근 준비를 해야 돼서.."
"오늘 퇴근하면 맛있는 거 먹어요. 맛있는 거 사줄게요."
"제가 살게요. 어머님 시간 되시면 같이 먹으면 좋고."
"엄마랑요.......?"
"표정이 왜 그래요 ㅋㅋㅋㅋ"
"엄.... 불편할까봐...하하..."
"열린씨가 불편하면 어쩔 수 없죠."
선호는 슈트를 입으면서 열린을 한참 바라보았고, 열린이 따라서 선호를 보다가 일어나 선호에게 안긴다. 선호가 열린이 귀여운지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한다.
"나 열린씨한테 엄청 고마운 거 알아요?"
"뭐가요?"
"평소에 잠을 진짜 잘 못자는데.. 열린씨랑 자면 항상 푹 잘 수 있는 것 같아요. 오랜만에 엄청 잘 잤어요 진짜."
"나돈데~~"
"진짜 결혼해야겠는데?"
"그렇게 말해놓고 도망가기만 해요."
"난 열린씨가 결혼하자고 하면 당장 할 수 있는데."
입에 발린 말이어도 좋았다. 선호씨가 하는 말은 모두 진심으로 느껴져서 기분이 좋았다.
"대표님."
"어."
"대표님 뵙고 싶다던 분이 안 가시고 계속 밖에서 기다리시다가.. 앞까지 찾아왔습니다. 경호원들이 제재하고 있기는 한데.. 유비라고 하면 알 거라고 하시던데요."
"유비?"
"네."
선호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책상 위를 검지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다가 유비라는 말에 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춘다.
대표실 앞까지 온 유비에 경호원들이 결국 유비의 팔을 잡아당겼고, 유비가 넘어지면서 치마 속으로 인공다리가 보였다. 그에 모두가 놀란 듯 유비를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선호는 곧 경호원들에게 하지 말라는 듯 손짓을 하며 말한다.
"아는 사람이야."
소파에 앉은 유비는 선호를 한참동안이나 바라보았다. 선호가 화난 것 같아서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유비가 먼저 이 정적을 깼다.
"따뜻한 차라도 주지.."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우리 할아버지가 알려줬지. 맞다.. 대표 된 거 축하해. 그리고 이렇게라도 시간 내줘서 고마워! 나 할 말 되게 많았는데.. 오빠 만나니까 할 말 생각이 안 나..."
"그럼 가."
"어?"
"제발 이유비."
"나 그때 죽으려고 한 거 아니었어. 그냥 화가 나니까.. 내가 조금 다치면 오빠 반응이 어떨까 싶었던 거였어. 내 다리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나도...! 나도 기분 안 좋아!"
"그래. 차라리 네가 날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넌 그냥 아련하고 아픈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건데. 네가 다 망쳤어."
"……."
"무슨 낯짝으로 찾아와. 난 너처럼 독 품은 사람 사랑한 적 없으니까. 가라."
"내가 독을 품어? 오빠 나랑 몇년을 서로가 없을 것처럼 사랑해왔어. 우리 아빠가! 어머님이 그렇게 반대를 하시는데 그럼 내가 어떻게 해!? 내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결혼을 할 수가 없잖아."
"너 다른 남자 있었잖아."
"뭐? 아니.. 그건.. 아빠가 화가 나셔서.. 내가 어쩔 수 없이.. 그 남자랑은 아무것도 안 했어. 그냥 만나는 척만... 그리고 그 사람이 오빠 친구일 줄은 몰랐지...!"
선호는 예전의 일을 떠올렸다. 선호의 친구 집에서 웃으며 나오는 유비가 찍힌 사진을 건네주던 어머니는 너무 슬퍼하셨었다.
"꺼져."
"……."
"네 숨소리만 들어도 소름끼쳐서 죽어버릴 것 같으니까. 제발.."
"……."
"제발 좀...사라져주라.. 응?"
"……."
"너 때문에 4년 동안 지옥에 살 듯 죄책감에 살아오다가 겨우 사랑하는 사람 만나서 잘 살고있어."
선호의 시선에 유비의 다리로 향했다. 그때의 기억이 또 떠올랐다. 결혼하자며 조르던 유비에게 부모님께 허락을 먼저 맡자며 진정을 시키던 선호는 1년 동안 유비를 케어해왔다. 우리만 좋으면 됐지 않았냐며 화만 내던 유비는 운전을 하다가 선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선호에게 들으란 듯이 속도를 높였고, 곧 큰 소리가 들려왔다.
'다 너 때문이다.'
'…….'
'아직 청춘인 애를 왜 놓아주지도 않고!! 결혼 그게 뭐라고! 어!?'
다리가 절단 됐다는 말에 모두가 선호를 탓했다. 유비의 어머니는 선호의 뺨을 내리쳤고, 선호에게 이명이 들린다. 그렇게 밤마다 선호의 꿈에는 다리가 절단 되어서 울고있는 유비와, 자신을 욕하는 유비의 어머니가 나온다.
그와 저녁을 먹으러 나왔을까. 느낌이 좋지 않았다. 술냄새가 났고.. 그 다음으론 익숙한 사람의 냄새가 났다. 고갤 돌려 대문 옆을 보면.. 남주혁이 술에 취해서 있었다.
"뭐하냐 너?"
"너 보려고 왔는데."
"그냥 대화 하자고 해도 싫은데. 술까지 마시면 별로야. 나 약속 있어서 가봐야 되니까. 오늘은 가라.."
"취소해."
"미쳤어? 용건이 뭔데."
"나 여기 근처에 카페 차린다."
"…뭐?"
"너 더 보고싶어서."
"……."
"난 정말 아니냐."
"……."
"난 너 아니면 안 되는데? 이미 너한테 익숙해진 게 너무 많아. 네가 옆에 없으니까 잠도 안 오고.. 내가 널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나 진짜 미치겠거든. 내가 무릎이라도 꿇고 싹싹 빌까? 내가 어떻게 하면 다시 마음 돌릴래."
"나 마음 못돌려. 그러니까 제발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집에 가."
"네가 그랬잖아. 나랑 만나면서 청춘 다 버렸다고. 나 때문에 잃은 청준.. 내가 다시 채워줄게."
"제발 술마셨으면.."
남주혁의 뒤로 선호씨가 보였다. 선호씨가 나와 남주혁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보았다. 설마 나랑 남주혁이 하는 대화를 다 들은 건 아니겠지.. 불안했다.
"선호씨 그게.."
"잘됐네."
"……."
"이 사람은 아냐?"
"……."
"너랑 나 10년 동안 연애한 거."
돌이킬 수 없었다. 숨이 턱 막혀왔다. 아무말도 못하고 가만히 남주혁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가 입을 열었다.
"네. 알고있습니다."
"……."
"근데 그게 문제라도 되나요."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제 18화_
잊어가고, 잊혀가고
"다음부터는 이렇게 찾아오는 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
그의 말이 끝나고 우리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저기 ##선호씨.."
"……."
"화 났어요..?"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차 안에선 정적이 흘렀고.. 불안했다. 내가 선호씨에게 거짓말을 한 거니까. 이건 내가 사과하는 게 맞는 거잖아.
"미안해요.. 속일 생각은 없었는데. 10년이나 만났다는 얘기 꺼내면 선호씨 마음이 불편할까봐요.. 다시는 그 친구랑 만날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 그런 거짓말 했어요.. 미안해요.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변명같고 그렇겠지만.. 나 선호씨 사랑하는 건 진심이에요."
"둘이 만난 것도 그런데.. 10년이라니.. 언제 헤어진 거예요?"
"몇달 됐어요.."
"열린씨."
"네."
"이런 상황이 오지 않았다면 계속 비밀로 했을 거예요?"
"아니요..! 꼭 말해야겠다는 생각은 했어요.. 근데 작정하고 속일 생각은 없었어요.. 기회가 되면 꼭 말하려고 했어요. 정말 미안해요.. 나 진짜 선호씨 밖에 없어요. 내가 어떻게 해야 선호씨 기분이 풀릴까요.."
"나 지금 많이 화났거든요."
"진짜 미안해요.."
"진짜 너무 화나는데. 나 아무래도 열린씨가 너무 좋은가봐."
"……."
"화내야되는데 화를 못 내겠다."
"……."
나는 정말 내 인생의 전부를 줘도 될 만큼 좋은 사람을 만난 게 분명했다.
성경의 집 앞에 도착한 주혁은 차에서 내려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성경이 나오자마자 주혁이 담배를 짓밟아 끄고선 성경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다' 연인 사이에 저 말이 맞나. 성경은 고갤 끄덕였다. 멋대로 잠수를 탄 건 너였지.
"누나."
"응."
"내가 며칠동안 생각을 좀 해봤는데."
"헤어지자고?"
"…내가 아직 연애하고 그럴 정신이 하나도 없다. 미안해."
"…길열린 그 친구 때문이잖아."
"……."
"너 길열린 그 여자랑은 10년 만났다면서. 나랑 헤어지고 다시 그 여자랑 잘해보려고?"
"어떻게 알았어 그걸?"
"너희 동창이랑 아는 사이라서 물어봤어. 남주혁 네가 지금 혼란스러워서 그러는 것 같은데. 정신차려 10년을 만나서 헤어졌으면 또 결국엔 반복이 돼."
"그래. 그건 나도 알고있어. 그래서 누나한테 더 미안하고.. 그래서 더 누나랑 못 만나겠다는 거야."
"그건 다 핑계야."
"……."
"그래. 네 말대로 그러자. 난 결국엔 그냥 소품 정도일 뿐이었던 거잖아?"
성경이 화난 듯 집으로 들어섰고, 주혁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담배를 꺼내 들었다.
"아직도 화가 덜 풀렸어요오...?"
그의 손을 잡고 얼굴을 들이밀어도 그는 입술을 티나지않게 내밀고선 나를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아, 삐진 것도.. 아니 화난 것도 이렇게 귀엽네. 정말.. 선호씨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말했더니 선호씨가 당황한 듯 했다.
"와 열린씨."
"너무 귀여워서 어쩔 수 없었어요."
"아, 하지 마요. 진짜.."
"ㅋㅋㅋ알았어요 미안해요 ㅋㅋㅋ."
"……."
"진짜 진짜.. 너무 미안해요..!"
계속 선호씨한테 사과를 했더니, 선호씨가 한참 나를 바라보다가 마른세수를 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만 미안해해요.. 열린씨가 미안해하면 나도 마음이 좋지만은 않단 말이에요.."
"……."
"그냥.. 제가 열린씨를 너무 좋아해서 졌어요. 제가 졌습니다."
진지하다가도.. 장난을 치면 안 되는데 그의 얼굴을 보면 웃음이 나와버린다. 그럼 그가 '웃지 마요'하고 또 삐진다.
그의 기분을 하루종일 풀어주고선 집에 가는 길이었을까. 집 앞에는 혜선 언니가 아닌 다른 여자가 서있었다. 우리집에 볼일이라도 있나 싶어서 여자에게 다가가면.. 익숙한 얼굴이라 놀랄 수밖에 없었다.
"……."
"…성경씨."
"멋대로 찾아와서 미안해요. 할 말이 있어서요."
"…무슨."
"저 얼마전에 열린씨랑 주혁이 만나는 거 알았어요. 아는 동생이 열린씨 동창이더라구요."
오랫동안 나를 기다린 것 같았다. 저 말을 하고서는 아무말도 않는 성경씨에 난 괜히 고갤 숙였다. 성경씨가 한참동안 가만히 있다가 겨우 입술을 떼어내는 듯 했다.
"그리고 저.. 주혁이랑 헤어졌어요."
"……."
"주혁이가 열린씨를 못 잊었대요."
"……."
"전 이해해요. 열린씨가 미워도.. 주혁이는 이해해요. 오랫동안 만난 사람을 어떻게 잊겠어요. 열린씨도 그럴 거 아니야."
"…아뇨. 저는 다 잊었어요."
"정말요?"
"……."
"다시 한 번 생각해봐요. 감정이 본인을 속이고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해요?"
"……."
"열린씨도 지금 만나는 애인한테 상처 주지 말고 빨리 정신차려요."
성경씨는 술에 취했다. 그렇지.. 술에 취하지 않는다면 나한테 이런 소리를 하러 올 수도 없을 거야.
"카페에서 그냥 친구라고 소개할 때부터.. 느낌이 좀 그랬어요. 남주혁한테 나는 그냥 자신을 위로해줄 사람일 뿐이구나.."
"……."
"주혁이가요. 착한 친구인데. 일부러 못되게 구는 것 같았어요. 열린씨 못 잊어서. 그러니까요. 잘 생각해보고 다시 만나봐요. 나는 이제 진짜 끝이야. 주혁이를 많이 사랑했어서 슬픈 게 아니라.. 정이 많아서 그래요. 오해 하지 마요."
성경씨가 내 앞에서 울었다. 주혁이랑 다시 만나라는 말에 나는 화를 내지도 못했다. 성경씨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기 싫었기 때문이다. 성경씨가 그렇게 쓸쓸하게 가버리고 나서는.. 집에 들어와서 허탈하게 소파에 앉는 나를 보고 혜선 언니가 물었다.
"왜 이래? 데이트 하고 와놓고선?"
"남주혁 애인이 집 앞에 있더라. 남주혁이랑 나랑 연애한 것도 알고있었어."
"뭐?"
"헤어졌대."
"……."
"나보고 다시 만나라는 것 같은데. 화도 못 냈어."
"…미친년이네. 그래도 뭔 낯짝으로 찾아와?"
"…모르겠어. 그 사람도 상처받은 것 같아서 뭐라고 할 수도 없었어. 속인 것도 나랑 남주혁이잖아."
불행은 여기서 끝나길 바랬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화려한 순간만 지나갈리가 없었다. 이틀만에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오빠 이렇게 계속 나 밖에서 기다리게 할 거야?"
그때도 있었던 여자가 그의 집 앞에서 그를 부르고 있었다. 마침 그에게서 전화가 오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전화를 받으니, 그도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 오늘은 밖에서 볼까요.
"아, 네에.. 그래요!"
- 10분 뒤에 전화하면 집 앞으로 나와요.
"네에."
아마도 저 여자와 마주칠까봐 전화를 준 것 같은데. 이미 나는 저 여자를 두 번이나 보았다. 아마도.. 내가 저 여자를 보면 안 되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아니.. 확실하다.
"열린씨한테 꼭 말을 해야될 것 같아서요."
"뭔데요?"
대충 그가 나에게 할 말이 있다는 건 알고있었다. 아까부터 계속 표정이 안 좋았으니까. 그도 무언가 용기를 내서 말을 하는 것 같아서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을 기다렸다.
"몇년 전에 저랑 결혼을 하려고 했던 친구가 요즘 저를 찾아와요."
무언가로 머리를 세게 맞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냥 알아서 처리를 하려고 했는데.. 그래도 열린씨한테는 꼭 말을 해야될 것 같았어요."
"……."
"열린씨만 괜찮다면.. 얘기 해도 될까요."
그의 말에 고갤 끄덕였고, 그는 나한테 미안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한참을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연 그의 표정은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그 친구랑 저는 결혼을 하기로 했고.. 제 친구랑 따로 만난다는 걸 알고선 저는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우울증이 있던 그 친구는.. 제 말에 일부러 교통사고를 냈고, 사고 때문에 다리를 잃었어요."
"……."
"그 일 때문에 저는 그 친구의 주변 사람들에게 돌을 맞았구요. 그 일로 인해서.. 불면증이 생겼어요. 잠을 제대로 잘 수 있는 날이 꽤 드물죠.. 겨우 잠들면 꿈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 친구가 다리를 잃은 게 내 탓이라며 저를 괴롭혀요."
"……."
"그 친구한테 마음을 다시 주는 일은 없어요. 그 친구한테서 영원히 벗어나고 싶었던 게 저였으니까요."
"……."
"너무 걱정 마요. 저 열린씨 만나면서 많이 강해졌어요."
"제가 뭘 해줬다고.. 그렇게 말해요.."
"열린씨랑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안 좋았던 일들은 생각도 안 나요. 그리고 확실하게 열린씨한테 마음을 다 줘도 되겠다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니까요."
"……."
"그러니까요."
"……."
"진짜로.. 아무 걱정마요. 저는요.. 지금 열린씨 없이는 못 살아요."
그라서 믿고싶었던 거였을까. 그의 말에 무작정 고갤 끄덕이는 내가 웃겼다. 그라면 믿어도 될 것 같은 마음이 컸다. 힘들었던 얘기를 길게 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짧게라도 하는 게 힘들었는지 두손을 떨고있는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고마워요. 힘들었을 텐데 말해줘서."
"…고맙긴요. 난 열린씨한테 미안해서 죽겠는데.. 저야말로 고마워요."
그래.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끝까지 감췄겠지. 그리고 나를 떠났겠지. 그와 함께 있을수록 남주혁은 계속해서 비교가 되었고, 그러면서 계속 잊혀지기 시작했다.
주혁은 끈질기게 열린이의 집 앞에 몇시간을 서있었다. 성경과 끝내고 이제는 정말 열린과 다시 함께 해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할 뿐이다. 밤 10시가 넘어서도 오지않는 열린에 주혁이 괜히 불이 켜져있는 집 안을 본다. 혜선이 누나만 집에 있다고 했었는데.. 얘는 뭐하느라 이렇게 늦는 거야. 추워서 산 핫팩을 흔들어보이던 주혁은 곧 저 멀리서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열린을 보고선 반가운 듯 웃다가도 인상을 쓴다. 밤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고? 뭐야.. 근데 애인이라는 놈은 데리러 오지도 않아?
"야 길열린 너 미쳤냐. 밤 늦게.."
"나 어떡해.."
"……."
"나 진짜 어떡해.."
"무슨 일 있어..?"
"선호씨 때문에 너무 마음이 아파.. 혼자서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까. 너무 속상해서 미쳐버릴 것 같아."
"……."
이제 알았다.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너는 이미 나를 버렸고, 새로운 사람에게 정착했다는 것을.
내 품에 안겨서 다른 남자 때문에 울고있는 너를 보니 생각이 들었다.
나는 더이상 너에게 매달릴 수도 없다. 너는 나에게 마음이.
"길열린 취했다. 얼른 들어가라."
"……."
"그리고 미안하다."
전혀 없다.
내가 바보같은 행동을 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버렸고, 그런 내 자신이 미워졌다.
3주가 지났다. 집 앞에 자주 찾아왔던 남주혁은 더이상 집 앞에 찾아오지 않았고, 연락도 오지 않았다. 그냥 잠깐 창피해서 연락이 안 오는 건가 싶었다. 남주혁은 늘 그랬으니까. 선호씨는 며칠을 못 봤다. 바쁘게 일만 하던 선호씨를 이해하고 하염없이 선호씨만 기다렸을까. 드디어 선호씨랑 데이트 할 수 있는 날이 왔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선호씨에게 잘 잤냐고 연락을 하고선 거실로 나왔을까.. 혜선 언니가 갑자기 유난을 떨며 내게 다가오는 것이다.
"야야 대박 대박!"
"왜왜왜."
"네 남자친구 이사 하던데?"
"이사???"
너무 뜬금없어서 언니가 꿈을 꿨나 싶었다. 그래서 웃음이 나왔었는데....
"에?"
정말로 그가 이사를 한다. 그의 집 앞에 짐을 싣는 화물차가 있었고.. 나는 급히 옷을 주워 입고선 선호씨의 집 앞으로 향했다.
"선호씨!..."
"열린씨?"
"뭐예요? 이사 가요???"
내 말에 선호씨가 고갤 끄덕였고, 너무 뜬금없는 이사에 당황스러워서 한참 서있으니.. 선호씨가 멀리서 소리를 지른다.
"점심시간 전에는 끝난대요."
뜬금없어도 저런 모습이 괜히 또 멋져보여서 웃음이 나왔다.
점심시간 전에 이사가 끝나고 그의 차를 타고선 정리가 덜 된 그의 집으로 향했다. 엄청 큰 집에서 살던 그는 평범한 크기의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아, 큰집 보다는 더 나은 것 같아요. 거기는 너무 컸었어.. 청소 하는 것도 일이고.."
"왜 안 물어봐요?"
"뭘요? 말도없이 이사한 거?"
"네."
"그냥.. 뭐.. 궁금은..한데~ 물어보면 알려줄 거예요?"
"전에 만나던 친구가 못 찾아오게 이사한 것도 있구요."
"아.."
"열린씨랑 같이 이 집에서 살고싶어서 이사한 게 더 커요."
"에? 어유우우 그래요~ 자주 놀러올게요. 평소처럼!"
"그거 말구요."
"응?"
"열린씨랑 이 집에서 같이 살고싶어요. 잠깐 동거 그런 거 말구요. 결혼이요."
"…네?"
"열린씨가 부담스러우면 안 받아도 돼요. 저 혼자 섣부른 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충분히.."
"……."
"열린씨랑 같이 있으면 그게 바로 제 자신이 되는 게 좋았어요. 그리고.. 열린씨를 옆에 두고 보듬어주고싶다는 생각이 늘 들고요.."
"……."
"결혼해줄래요?"
그가 주머니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내 열어보았고, 그 안에는 반지가 있었다. 참나 진짜.. 우리가 만나봤자 얼마나 만났다고 벌써부터 결혼이야.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가도 눈물이 났다. 내가 그렇게 원하던 결혼 하자는 말을 사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에게 듣다니. 그것도.. 내가 더 사랑하고 싶었던 사람에게 듣다니. 그게 너무 좋았다. 그리고 여태동안 남주혁이랑 만나면서 힘들었던 것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눈물이 터져버렸다.
"왜 울어요..!"
"너무 고마워서요.."
"아, 난 또 거절하는 게 미안해서 우는 줄 알고.."
"아니예요! 선호씨랑 결혼할 거예요...!"
"아직 울면 안 되는데."
"ㅇ...ㅔ?"
"어머님한테 허락 맡으려면 1년은 고생해야 될 것 같은데."
"…아."
"이미 신혼집도 구했다고 하면 바로 허락해주시려나?"
"에이씨.."
"ㅋㅋㅋ."
이렇게 쉽게 결혼을 해도 되는 걸까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금방 접을 수 있었다.
"……."
정말로 이 사람은 날 버리지않겠구나, 내 운명이구나.. 라는 걸 한 번에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그냥 이 사람을 보니 느껴졌다. 참 이상했다.
"와.. 대박이네.. 벌써부터 결혼을? 길열린 신났겠네.. 그 남자도 대단하다.. 열린이가 얼마나 좋았으면 바로 결혼을 하자고 하냐?"
"그러니까. 대박이지? 나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 길열린이 이제서야 승승장구 하신다~~"
"와 그런 프로포즈 좋은데? 나도 나중에 집이랑 반지 사서 딱! 그런 멘트 쳐야겠다. 길열린 결혼 그렇게 하고 싶어 하더니.. 드디어 하네.."
동연의 집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떠들던 동연은 곧 문 열리는 소리에 놀라 흠칫- 몸을 떨며 문을 연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우 깜짝이야 언제 왔냐???"
"……."
"어... 들었냐..."
"……."
"그게.. 말이지.. 그게...하하..그...음..."
"됐어."
"어?"
"이제 나랑 상관 없잖아."
"……."
"맥주 꺼내 마신다."
"어...그래."
주혁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방에서 나가 주방으로 향하자, 동연과 혜선을 서로 눈을 맞췄다. 곧 혜선이 어깨를 으쓱- 하면.. 동연이 주혁의 눈치를 보다 말한다.
"왜 저래 갑자기.."
"몰라."
"누나는 언제 연애해?"
"……."
"왜.. 내가 누나 화나게했어???"
"…아냐."
"뭐야 왜 부끄러워해?"
"대충 뭐 그런 사람이 있는 것 같아.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할 수도 있고...?"
"아니 뭔데...!! 아니 쌍으로 왜 이러는 거야???"
갑자기 등골이 오싼한지 닭살이 돋은 도환이 조카 밥을 먹여주다가 곧 닭살 돋은 팔을 보았고.. 곧 조카가 궁금한 듯 웃으며 묻는다.
"왜애?"
"갑자기 그냥 기분 나쁘게 소름이 돋네."
"으응... 그때 그 술취한 언니는 왜 안 와?"
"응?"
"선생님이 그런 사이를 썸이라고 한대."
"…그 말은 그럴 때.. 쓰는 게 아닌데."
"…아아~"
"근데 너... 선생님한테 뭐라고 말했어....?"
-
-
안녀엉.. 사계절의 우리도 참 길어따... 쉬는 타임이 너무 많았어서 ㅠ_ㅠ 쉬지만 않았으면 후딱 끝나는 건데..
질질 끌어서 미안해써요 헤헤헤헤...
그럼 우리 다음!! 글!!에서! 보아요!!! 하!! 사계절의 우리.. 안녀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