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 첫 이동 수업 시간, 태연은 짐을 싸들었다. 툭, 뒤쪽에서 어떤 애가 태연의 짐을 티날만큼 세게 쳤다. 태연이 우르르 쏟아진 책을 보고 그 애를 쳐다봤다. "미안." 얄밉게 사과답지 않은 사과를 하고 그 애는 무리들과 함께 사라졌다. 순간 윤아의 얼굴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저 애도 윤아네 무리인가, 태연은 책들을 다시 주워들었다. 두개 반씩 합쳐 진행하는 수업, 태연은 언제나 그랬듯이 존재감 없이 조용히 뒷문으로 들어섰다. 맙소사, 들어서자 마자 보이는 건 맨 뒷자리에 임윤아, 그 앞에 권유리였다. 유리가 먼저 태연을 발견하고 '김태연!' 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윤아가 고개를 홱 돌려 태연을 쳐다보았다. 순간 윤아는 슬쩍 웃었다가 금새 입꼬리를 내렸다. 태연은 속으로 지옥이 있다면 이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엉겁결에 고개를 두 번 끄덕거렸다. 반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태연에게 쏠렸다. 태연이 그 시선들을 느끼고선 고개를 떨군 채 앞 쪽으로 향했다. 윤아는 태연의 기분을 눈치챘다. 수업이 시작됐다. 수업을 듣는 데에 열중이던 윤아는 갑자기 뒤로 돌아 속삭이는 유리 때문에 성질이 났다. "야, 야." "..." "야, 융." "아, 뭐." "탱구, 탱구." 윤아는 조금 고개만 들어 태연이 앉은 쪽을 쳐다 보았다. 태연의 바로 뒤에 앉은 애가 태연의 교복 자켓 등을 칼로 긁고 있었다. 윤아는 확 열이 뻗쳤다. 태연도 분명 그걸 느끼고 있는게 분명한데, 태연은 가만히 앞만 보고 있었다. "쟤 이름 뭐냐?" "정채경. 존나 거슬리지 않냐." 윤아는 뭐라 말하려다 순간 멈칫했다. 그러고는 거기서 시선을 뗐다. "냅둬, 알 바야." 유리가 뭐라뭐라 얘기하는데 윤아는 그냥 신경을 끄기로 맘먹었다. - "아 맞다, 오늘 물리가 내 팔뚝 꼬집었다?" "..." "진짜, 제대로 꼬집었어. 내 살을 이만큼 막- 진짜. 어땠냐면," "..." "막, 어? 야. 이게 뭐야?" "...뭐..?" "너 자켓 왜이래? 태연아, 이거 왜 이래?" "응?.. 어, 어떤데?" "이게, 하, 이렇게 되도록 몰랐단말이야?" "..뭐, 뭐가 어떤.." 자켓을 벗어 살펴보려던 태연을 뒤로 한 채 미영은 벤치에서 일어섰다. 태연은 미영의 팔을 잡아 멈춰 세우고 물었다. "어디 가?" "너, 일부러 나 화나라고 그러는거야?" "...응?" "내가 너 이러고 다니는거 알면 너한테서 떨어져 줄까 봐?" 태연은 눈썹을 꿈틀대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다시 자신의 자켓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미영의 눈에는 그 모습이 평온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미영의 속이 더 들끓었다. "나 먼저 가볼게." "..어, 저..!" 태연은 화가 난 채로 빠르게 걸어가는 미영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자켓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미영은 곧바로 자신의 반으로 가지 않았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 점심시간이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 윤아가 자신의 자켓을 들고 태연의 반으로 쳐들어왔다. 태연은 처음엔 자신을 찾아온 줄 알고 뒷걸음질 쳤으나, 윤아는 그런 태연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창가 쪽 분단으로 향했다. 그러고선 엎드려 잠에 취해있던 한 애의 의자를 냅다 걷어찼다. 그 애는 자던 와중에 뒤로 엉덩 방아를 찧었고, 욕을 내뱉었다. 태연의 짐을 일부러 쳐 넘어뜨리고, 자켓에 칼집을 내 놓은 애였다. "니가 이랬지." "아아아, 씨발..." "채경아. 이거 니가 이랬지." 윤아가 들어 채경에게 보여준건 윤아의 자켓이었다. 태연의 자켓보다 훨씬 심하게 긁히고 찢겨 있었다. 태연은 그 자켓을 보자마자 미영이 화난 채 뛰어가던 뒷모습이 떠올랐다. 윤아를 말려야했다. "아, 개소리야." "채경아, 내가 만만해보여?" "아니, 내가 안.." "어쩐지 맘에 안들더라." 윤아가 주저 앉아 있는 채경의 옷 뒷덜미를 콱 잡자 채경이 윽! 하고 윤아의 팔을 잡았다. 윤아가 채경의 머리를 마구 때렸다. 무차별 폭력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유리는 뒷문에 서서 망을 보며 아이들에게 이건 정당 방위임을 세뇌시켰다. 태연은 그 자켓, 채경이 한 게 아니라 미영이 한 것이라고 얘기하며 말려야 함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윤아는 여전히 채경의 뒷덜미를 꽉 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퍽 퍽 소리가 날 정도로 앞 뒤 가리지않는 폭력을 하고 있었다. 약간 즐거워 보이기도 했다. 태연은 계속 그 장면을 볼 수가 없었다. 윤아는 손을 마구 휘둘러 채경의 머리를 계속 해서 때렸다. "야, 하아, 채경아. 나 봐봐." "아으윽...." "저거 니가 했어, 안 했어?" "아으으.. 내가 안 했," 윤아는 채경의 머리를 또 연달아 네 다섯 번 정도를 때렸다. "아악! 악!" "다시 물어볼게. 저거 너가 했지?" "어, 어. 아악.." "근데 왜 아니래? 어?" "아!!! 아악!!!!" 윤아는 머리를 조금 더 때리고 뺨 두 대를 더 때렸다. 그러고 나서야 사람을 때리는 소리와 비명 소리는 멈췄다. 교실에는 흐느끼며 앓는 소리만이 들렸다. "채경아, 까불면 죽어. 응?" 채경은 머리를 감싸고 주저 앉은 채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윤아는 자켓을 채경에게 집어 던졌다. 그러고선 교실 안을 한 번 훑으며 태연을 찾았다. 태연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 뭐야. 걔가 이걸 봐야 됐는데. 걔가 이걸 봐야 속이 조금 시원해질텐데. 윤아는 태연이 이 광경을 모두 목격했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윤아는 유리와 태연의 반을 나섰다. - 태연은 곧장 미영의 반으로 뛰쳐 들어가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있는 미영에게 다가갔다. 미영은 태연을 발견하자 마자 무리에서 조금 멀어져 태연에게 왔다. "태연아앙." "너, 너." "응." "가, 가서 사과해." 미영은 사과 하라는 태연의 말을 듣더니 고개를 돌려 반 친구들 눈치를 봤다. 그러고선 태연의 팔을 잡아 끌며 복도로 데리고 나왔다. "왜 그러는데?" "너가 해, 했잖아. 윤아 옷." 미영은 윤아 옷이라는 말에 표정이 굳어 태연을 쳐다봤다. 태연의 표정 또한 미영 못지 않게 딱딱했다. 서로의 기류가 심상찮았다. "무슨 소리야." "다, 알아. 너가 한거." "뭐?" "빨리 가서, 니가, 말려." 태연이 화가 잔뜩 난 채 숨이 거칠었다. 그래도 더듬지 않으려고 또박또박 말을 끊어 전했다. 계속 머리를 얻어 맞던 그 애의 모습이 생각 났는지 태연은 눈을 여러번 깜빡거렸다. "태연아, 왜 이렇게 화가 났어. 좀만 진정해." "걔, 걔가 지금 때려. 맞고 있어." "누굴?" "너 말고 다른 애가!" 미영은 붙잡고 있던 태연의 팔을 놓았다. 태연은 거세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 말고 다른 애?" "..." "난 너를 위해서 그런건데." "..." "넌 내가 맞았으면 좋겠어? 그 양아치한테?" 속으로는 아니야, 그게 아니야. 라고 얘기하는데. 태연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미영은 태연을 노려보다가 말했다. "그래, 니가 원하는대로 맞고 올게." "아, 아." "그러면 화 안낼거니." 미영이 태연을 지나쳐 윤아의 반으로 향하려 하자 태연은 미영의 팔을 잡아 세웠다. 미영이 뒤를 돌아 봤다. 태연이 팔을 잡고 있던 손을 스르륵 내려 미영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선 미영을 쳐다보며 꽈악 힘을 주었다. 미영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자, 태연은 손을 놓고 말했다. "드, 들어가." "..." "얼른.." 태연은 입을 꽉 물더니 미영을 지나쳐 시야에서 사라졌다. - 태연이 반에 들어오자마자 채경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얼굴이 시뻘게진 태연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열을 식혔다. 아직도 숨은 계속 들떠서 흐허어, 허허어, 하면서 쉬어졌다. '내가 맞았으면 좋겠어?' 잊고 있던 것이 퍼뜩 생각 난 듯 했다. 태연 스스로야, 윤아에게 맞던 게 익숙하다고 할 수 있지만. 미영은 그렇지 않았다. 미영은 깡 있고, 평범하고 성격 좋은 학생이다. 그리고 스스로가 잘못이 있어 맞는다고 생각하는 태연과는 달리 미영은 아닌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태연은 자신의 옷을 그렇게 만든게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누군가를 쉽게 의심하는 성격도 되지 않았고, 그럴 배짱도 없었다. 옷이 찢겨져 있으면, 누가 이랬을까를 생각하기 보다 그 사람이 이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싶었다. 그렇게 속이 넓은 성격이라기 보단 하도 예전부터 괴롭힘을 당해와서 괜한 부스럼을 긁고 싶지 않은 거였다. - 종례 시간, 담임이 교실로 들어서고 그 뒤엔 채경이 뒤따라 들어왔다. 태연은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살짝 들었다가 다시 쭈그렸다. 채경은 입술과 볼이 부은 채로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태연은 채경을 계속 쳐다보았다. 어쩌면 좋지, 하고 생각하던 찰나 뒷 자리에 앉은 애가 태연의 어깨를 퍽 하고 쳤다. "앞에 봐, 너." 태연은 영문도 모른 채 어깨를 감싸 쥐고 앞을 보았다. 왜지? 왜 내 어깨를 쳤지? 내가 뭘 잘못했지? 태연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럼 청소 시작하고, 야자 시간 꼭 맞춰서 들어와라." 담임이 교실을 나서고, 순식간에 교실은 왁자지껄 해졌다. 태연은 주섬거리며 짐을 쌌다. 야자? 꼭 해야 하는건가. 태연은 반장에게 다가가 물어보려 입을 뗐다. 첫 마디가 나오기도 전에 뒤에서 누가 또 등을 퍽 하고 쳤다. 태연이 순간 홱 돌아 쳐다보자 아까 어깨를 쳤던 뒷자리 애가 서 있었다. "비켜." "..." "니가 길 막고 있잖아." 태연은 어리둥절해 옆으로 비켜섰다. 태연이 비키지 않고도 충분히 교실은 넓었다. 지나다니기 좋을 만큼. 맞은 등이 아팠다. - 둘은 아무 대화 없이 걸었다. 태연은 자켓을 팔에 걸치고 터벅터벅 걷고 있었고, 미영은 태연의 뒷 목에 팔을 올려두고 같이 걷고 있었다. "아직도 화났어?" 태연은 고개를 저었다. 미영은 태연의 뒷머리를 만지며 입을 삐죽댔다. "아앙.... 근데 왜 말을 안해애.." "..." 미영이 태연의 와이셔츠 깃을 붙잡고 흔들거렸다. 태연은 아무 말 없이 미영을 쳐다보다가 픽, 웃고 다시 앞을 봤다. 미영은 그런 태연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따라 웃었다. 그러고선 태연의 귀 옆에 바짝 붙어 속삭였다. "예뻐." "..." "진짜 진짜, 엄청." "...크흠, 흠.." 태연이 괜히 헛기침을 했다. 미영은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런 존재가 내 앞에 나타나다니! 미영은 졸졸 따라가며 얘기했다. "그러니까아- 쫌 웃어- 얼마나 보기 좋냐?" "..." "넌 애가 표정이 없어. 나 힘들게." "..." "태연아앙, 누가 괴롭히면 꼭 나한테 말해? 응?" 태연이 멈춰섰다. 미영도 같이 그 뒤에서 멈췄다. "다, 다시는 그러지 마." "에이, 왜 그래애. 또." 태연이 미영을 똑바로 쳐다보며 얘기했다. "약속." "싫어." "..." "누가 너 괴롭히면 내가 가만히 안둘거야." "야." "니 맘만 있냐? 내 맘도 있지." 태연이 아무 말도 없이 쳐다보자 미영이 씨익 웃었다. "알았어. 안 그럴게. 약쏙." "...안 지킬 것 같아." "웅, 안 지킬거야." 태연이 땅을 쳐다보며 한숨을 작게 쉬었다. 미영의 눈썹이 빳빳해지며 미영이 말했다. "너 괴롭히면 누구든지 가만 안 둬." "..." "차라리 날 괴롭히라해. 넌 절대 안 돼." "왜.." "나는 워낙에 드세서 괜찮지만, 너는 안 돼." "..." "아- 내년에 꼭 같은반 되게 해주세요- 하앙.." 태연은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당연히 미영은 그 표정이 싫었다. 미영이 태연의 볼을 살짝 툭, 건드렸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태연의 아파트 단지 내로 들어섰다. "천천히 가." "..." "더 천천히 가." 태연은 미영의 칭얼거림에 속도를 늦춰주다가 아예 미영의 걸음에 맞춰 천천히 걸었다. 미영은 계속 태연을 쳐다보고, 태연은 땅만 보고. 그래도 둘이 걷는 속도는 같았다. 서로와 헤어짐을 싫어하는 마음이 통한 것처럼. 미영은 그런 태연이 귀여워 또 피식 웃었다. - 양이 좀 많나요? ... 틈틈히 써서 자주 올려보도록 할게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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