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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컥.
…얼른 나와!
…응.
…ㄲ..않게 조심하고.
…응. 빨리 가자.
철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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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다. 넓은 침대에서 홀로 눈을 떴다. 잠결에 뭔가 들었던 거 같은데.. 뭐, 개꿈이겠지.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손으로 쓸어내리고 창문을 바라봤다.
오늘은 해가 떴네. 실명할 것만 같은 강한 햇빛에 눈을 찡그렸다. 살짝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고 휘청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햇빛이 쨍쨍하는 게 어제처럼 춥지도 않고 따뜻하다. 드르륵, 창문을 열었다. 따스한 햇살이 내 발끝을 비춰준다.
오늘은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거 같은 예감이 든다. 그냥 그렇다고.
"…상혁씨?"
상혁씨의 방문을 조심스레 두드렸는데 답이 없다. 아,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어제처럼 방에 무작정 들어가면 싫어하실 텐데….
상혁씨.. 아직 자고 있는 거 아니죠? 입만 뻐끔거리다 그냥 뒤돌아버렸다. 문고리를 잡았으면서, 문고리를 돌릴 힘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문은 열지 않았다.
부엌으로 와 매일 그래왔던 거처럼 아침을 준비했다. …그건 그렇고, 상혁씨가 조금 늦는 거 같은데.. 진짜 방에 들어가 봐야 하나.
상혁씨의 방으로 향해 봐야겠다. 그런데, 그런데 왜 발이 떨어지지 않을까. 왜 상혁씨의 방으로 가는 길이 내게는 어둡고 무서운 걸까.
자꾸만 어제 상혁씨의 욕이 떠오른다. 내 눈앞에서 선명하게 아른거린다. …그런 생각은 접어두자, 성이름. 나는 고개를 도리 저었다.
크게 심호흡을 한번 했다. 늦으면 네 탓인 거야, 알고 있지? 그러니까 얼른 깨우러 가자.
"저기…, 상혁씨.. 지금 안 일어나면 지각이에요."
똑똑, 아무리 노크를 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아-, 분명 오늘 일어났을 때는 좋은 일이 일어날 거 같더니만.
투덜거리다 상혁씨 저 들어갈게요..? 하고 차가운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느껴지는 상혁씨의 향. 그런데, 어딘가 조금 이질적이다.
여자 향수 냄새가 나는 듯한 느낌. 뭐지?…. 그냥 내가 조금 예민한 건가. 상혁씨를 깨우러 침대에 가까이 갔더니 보이는 건 엉망으로 놓여진 이불이었다.
상혁씨가 방에 없었다. 어, 그럼 어디 계신 거지... 당황해서 상혁씨 방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책상 위에 놓여진 포스트잇을 발견했다.
내가 집어든 노란색의 포스트잇에는 가지런하게 글씨가 써져있었다. 눈을 껌뻑이며 쓰여진 내용을 천천히 읽어 나갔다.
' 오늘 먼저 나가. 늦게 들어올 거 같으니까 기다리지 말고. 그리고 계란말이 맛있더라. '
…계란말이? 아, 엊그제 해놨던 거.. 그날 아침에 안 먹고 가셨는데 오늘 먹으셨나 보다. 맛있게 먹었다는 말에 괜히 뿌듯해졌다.
근데 오늘은 왜 그렇게 일찍 나가셨나 모르겠네. 손가락으로 볼을 긁다가 포스트잇을 챙겨서 상혁씨의 방을 나왔다. 귀엽다, 상혁씨 글씨.
포스트잇을 챙겨 거실로 나왔다. 멍하니 시계를 바라보니 9시였다. 오늘 일찍 일어났는데 상혁씨는 이미 나갔고.. 뭐 할까. 청소라도 해야하나.
"위이잉-"
청소기로 구석구석 꼼꼼히 청소를 했다. 오랜만에 걸레질도 하고. 먼지가 쌓인 책장, 선풍기 모두 청소를 했는데도 2시였다.
설거지는 그릇이 쌓이자마자 바로바로 해놔서 없고…. 풀썩-, 소파에 앉아 티비를 켰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보지만 모두 봤던 방송들.
넓은 거실에 홀로 있는 나. 집에는 나 이외에 그 누구도 없고. 나와 결혼한 사람은 나를 좋아하지도 않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사랑하는 이와 기상하는 게 아닌 한기가 도는 텅 빈 방안에 나 홀로 일어나고.
공허하다. 공허해. 텅 비었다.
그와 결혼한 지 반년이 지났지만 외로움이 익숙해지지 않는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더 고독해지는 느낌뿐.
외롭다. 쓸쓸하다. 울적하다.
만약 내가 그와 처음 만났을때, 그때 결혼하지 않겠다 했으면 지금 나는 어땠을까….
우울한 생각을 할 때는 정말 끝없이 우울해지는 거 같다.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렇게 감정 소비하지 말자. 뭐라도 하자.
…근데 뭘 해야 하지? 뭘 해야 외롭고 쓸쓸하지 않을까? 나는 리모콘으로 티비를 껐다. 그리고 손가락을 마주 잡았다.
잠시 고민하다 내가 내린 결론은 밖에 나가는 거였다. 상혁씨와 결혼한 이후로 밖에는 자주 나가지 않았으니까.. 나가더라도 잠깐 장을 보는 정도.
나가서 신선한 바람을 쐬고 오자. 서점에 들르는 건 어떨까? 책 냄새에 취해보는 거야. 아니면 길거리 음식을 먹으러 갈까? 그거도 괜찮을 거 같은데. 음, 그리고 또….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뛴다. 얼른, 얼른 나가야지. 마침, 상혁씨도 늦게 오신다 했으니까 조금 늦게 집에 들어와도 괜찮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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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듯한 물로 샤워를 했다. 바디워시를 손바닥에 덜어서 온몸에 거품을 냈다. 하얀 거품. 몽글거리는 거품을 손으로 만지며 놀다가 샤워기를 틀어 몸을 깨끗이 씻었다.
물로 몸을 헹굴 때마다 내 목을 죄여오던 무언가가 거품과 같이 흘러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답답하지 않았다. 기분이 좋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서 나는 숨이 막혀오지 않았다. 화장대 위 서랍을 열어 내가 좋아하는 복숭아 향 바디미스트를 뿌렸다.
은은하게 향기가 퍼져나갔다. 방 안은 복숭아 향으로 가득했다. 분홍빛의 복숭아 향. 어딘가 생기가 도는 것만 같다. 배시시, 웃음이 났다.
바디미스트를 뿌리고 나선 옷장 깊숙이 박아둔 원피스를 꺼내들었다. 내가 정말 아끼고 좋아하는 옷. 하얀색의 원피스는 조명을 받아 더 빛났다.
순백의 웨딩드레스 같은 느낌. 맞아, 나도 웨딩드레스를 입었던 날이 있었는데…. 그날은 많이 떨렸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를 대충 말리고 헤어 에센스를 발랐다. 미끌미끌하면서도 끈적한 헤어 에센스를 머리끝에까지 자세하게 발라줬다.
썬크림을 바르고 입술에는 분홍빛이 감도는 립스틱을 살짝 발라주었다. 오늘만, 딱 오늘만 멋 부려보자.
준비를 다 마치고 커다란 거울 앞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원피스의 옷자락이 하늘하늘거린다. 됐다.
"다녀올게요."
철컥.
아, 정말 오랜만이야. 바깥공기를 이렇게 마시는 일이. 강하게 내리쬐는 햇빛에 나는 손 그늘을 만들었다. 오늘 날씨 진짜 좋다.
그나저나 어디부터 갈까? 나온답시고 무작정 나온 건데 어디로 가야 될지 모르겠네... 서점? 음식점?
'카톡'
진동과 함께 카톡 소리가 내 귀에 울려 퍼진다. 누구지? 가디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이홍빈? 얘가 갑자기 왜….
이홍빈
성이름 오후 3 : 22
어디야? 오후 3 : 23
오후 3 : 23 나 지금 잠깐 밖에 나왔는데.
오후 3 : 24 근데 그건 왜?
이홍빈
아니 그냥ㅋㅋ 오후 3 : 26
혹시 원피스 입었어? 오후 3 : 26
당황스러움에 주위를 둘러보자 저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는 홍빈이 보인다. 종종걸음으로 그에게 달려가자 홍빈이 오랜만이라면서 나를 반긴다.
"성이름 진짜 오랜만이야. 안 본 지 벌써 반년이 됐나…. 뭐하고 지냈길래 연락도 없었어?"
"…어, 음 그냥...? 사정이 있어서 그랬어, 미안해." 그러자 그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내게 말한다.
"아니, 미안해할 필요는 없고.. 정 그렇게 미안하면 나랑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점심 안 먹었지?"
응. 이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럼 됐어. 라며 내 손을 낚아채듯 잡는 홍빈이다. 남자와의 스킨쉽이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별게 다 긴장되네..
얼른 가자. 나 배고파. 그에게 칭얼대자 알았다며 씩 웃는다. 진짜, 이홍빈 저 미소 하나도 안 변했다니까.
' 내게 단 한 번도
단 하루조차도
그 웃음이 거짓이 아닌 적이
넌 없지만
괜찮아
내가 너를
사랑했으니까
새벽 - 희망고문 '
♡ 암호닉 ♡
라일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