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산소
지금이 정녕 가을이 맞는건지 뼛속까지 스며드는 찬바람에 벌써부터 패딩을 꺼내입은 사람들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데, 나는 오늘도 무슨 멋을 부린답시고 니트에 짧은치마. 거기에 고작 얇은 자켓하나 걸친게 끝이였어. 친구와 만나기로한 약속장소에서 가만히 서있다가 스타킹을 뚫고 들어오는 바람에 오들오들 떨며 아무곳이라도 들어가있어야지 안그럼 당장 얼어죽을게 분명했기에 급하게 눈에 보이는 서점으로 들어갔어. 책이락은 담쌓은 사이라 간단하게 잡지만 몇장 넘겨보다가 얼마 후 도착했다는 친구의 카톡에 다시 매서운 바람이 부는 밖으로 나갔어.
"에에에에에취!!!"
"야 너 아까부터 무슨 재채기를 그렇게해?"
"나도 몰라 자꾸 나오… 에에취! 콜록콜록."
"너 감기걸린거 같은데."
감기? 하긴 이 날씨에 이 옷차림으로 감기에 안걸리는게 더 이상하지. 그러고보니 아까부터 콧물도 나오고 머리도 지끈지끈거리는게 몸살감기가 오려나봐. 친구가 갑자기 나하고 거리를 두더니 걱정하는듯이 일찍들어가보라며 귀가를 재촉했어. 너 말로만 걱정해주는거 아니지? 진심인거지?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다 쉴새없이 나오는 기침때문에 일단 집으로 돌아가는게 좋겠다싶어서 친구와 만난지 세시간만에 헤어졌어. 근데 너 왜 좋아해? 남친만나러 가니…?
집에 도착하자마자 따뜻한 물로 목욕을하고 저번주에 꺼내놨던 전기장판위에 누워 이불을 끌어올려 입술까지 덮었어. 머리끝까지 덮고싶었는데 나도 숨은 쉬어야하니까……. 가만히 누워서 티비를 보다가 점점 올라가는 온도에 나도 모르게 잠이들었나봐. 문득 눈을 떠보니 집안이 온통 깜깜했거든. 시끄럽게 떠들고있는 티비가 그나마 주위를 밝혀줬어. 시계를보니 11시가 조금 넘어있더라. 티비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때문에 머리가 울려서 티비를 끄려는데 리모콘이 보이지않아서 몸을 일으켰더니 순간 핑 도는게 아무래도 몸살이 제대로 온거같았어. 전기장판의 온도때문인지 몸은 불덩이고 숨쉬는것도 힘들어서 제대로 일어서기가 힘들었어. 혼자 살아서 챙겨줄 사람도 없기때문에 이렇게 아프면 정말 서럽다? 이 늦은 시간에 누구한테 연락하기도 좀 그렇고 그냥 내 힘으로 병원이나 가야겠다 싶었어. 다행히도 집근처에 24시간하는 병원이 있었거든.
"ㅇㅇㅇ님 바로 진료실로 들어가세요."
워낙 늦은 시간이였기 때문에 환자는 나 뿐이더라구. 덕분에 바로 진료실로 들어갈 수 있었어.
"열이 높으시네요. 목도 많이 부으셨고."
"신종플루 뭐 이런건 아니죠…?"
"하하, 네 그냥 가벼운 몸살감기에요. 주사 한방이면 금방 나아요."
"……주사요…?"
"싫으세요? 그럼 약만 처방해드리구요."
"네에… 약만…주세요."
이 나이먹고 주사가 무섭다는건 솔직히 창피하지만 그 뾰족하고 날카로운게 내 살을 뚫고 들어간다는데…… 나만 무서운거 아니잖아? 할 수 없이 그냥 약만 받아가기로 했어. 카운터로 나가 처방전을 받고 계산 후 병원 1층에 있는 약국으로 갔어. 자동문 열리는 소리에 앉아있던 약사가 깜짝놀라 일어났어. 아마도 졸고있었나봐. 그 모습이 웃기기도하고 귀엽기도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을 지으며 처방전을 내밀었더니 민망하긴 했나봐? 바로 조제실로 들어가더라.
"ㅇㅇㅇ님."
"아, 네."
약국에 배치된 티비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곧 약이 나왔는지 내 이름을 부르는 약사에게 바로 다가갔어. 3일분이라며 아침, 점심, 저녁으로 나뉜 약들을 설명하면서 왜인지 자꾸 내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약사가 이상해서 빤히 쳐다봤더니 눈이 딱 마주치자 귀가 새빨개지는 약사였어.
"식후 삼십분……!"
"네?"
"삼, 삼심분 후에 드시구요. 삼천원 입니다…."
"아, 여기요."
"네, 네… 빨리 나으세요!!"
"…아,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아무래도 이 약국 조금 이상한거 같아…. 이 약 먹으면 제대로 낫는거 맞겠지…?
***
3일 후 타온 약을 다 먹었는데도 감기가 덜 나아서 다시 병원으로 향했어. 지난번과 똑같이 진료 후 처방전을 받은 뒤 그 약국으로 들어갔지. 내 앞순서로 진료를 받았던 사람이 약을 받고 계산중이였는데 그 사람이 돈을 내미려고 할때 약사와 눈이 마주쳤어. 그러자 또 귀가 새빨개지더니 건네받은 돈을 툭 떨어트리지 뭐야. 왜저래?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처방전을 내밀었더니 급하게 받아들고 재빨리 조제실로 들어가버리고 말았어. 수줍음이 많은 사람인가……?
"ㅇㅇㅇ님, ㅇㅇㅇ님!"
티비에서 나오는 수지언니의 비타500 광고를 보다가 갑자기 먹고싶은 생각이 들때쯤에 내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약사의 목소리가 울렸어. 한번만 불러도 알아듣는데, 나 귀 안먹었는데.
"여기, 식후 삼십분. 삼일분이구요, 삼천원입니다."
"아 저 비타오백 한병만요."
"네?????"
"……? 비타오백…."
"아아아, 아 여기요. 그럼 삼천오백원…."
"여기 사천원이요."
사천원을 건네고 오백원을 거슬러받으려고 손을 내밀었는데 그만 약사와 손이 닿아버렸어. 뭐 그럴수도 있지 하면서 대수롭지않게 여기고 약을 챙기려는데 약사 상태가 영……. 이제는 얼굴까지 새빨게졌어. 아무래도 저 약사 나랑 똑같은 감기같은데?
***
또다시 3일 후 이 놈의 감기는 왜 떨어질 생각을 안하는거지? 그냥 주사를 맞을까… 얘들아 요즘 감기 독하다. 조심해라. 휴, 어쨌든 나는 다시 병원으로 가서 진료를 받았지 뭐. 그리고 약을 받으러 약국으로……. 자동문이 열리기도 전에 내가 오는걸 미리 봤는지 들어서는 순간부터 약사의 표정이 되게 굳어있었어. 내가 싫나… 남몰래 마음의 상처를 입고 의기소침해서 의자에 앉아있는데 가방에서 진동이 울렸어.
"여보세요?"
- ㅇㅇㅇ 빌린 돈 갚아라.
"야 김종대. 너는 무슨 전화를 걸자마자."
- 아아 빨리 갚으라고!!!
"나 아프거든? 지금 병원갔다가 약국왔거든?"
- 헐 니가 아프다고? 니가?
"죽을래? 걱정안해?"
- 아프지말고… 참지도말고… 펜잘…
"그만해."
- 쨌든 내 돈 언제 갚을거야.
"이따 우리집으로 와 저금통 깨줄게."
- 스마트폰 둬서 뭐하냐? 폰뱅킹 모름?
"돈받기싫음?"
- 이따만나 자기.
"자기? 이게 미쳤나."
뜬금없는 김종대의 전화에 나도 모르게 조금 큰소리로 통화를해서 슬쩍 주위 눈치를 봤는데 다행히 아무도 신경을 안쓰는거 같았어. 아, 한사람 빼고. 전화를 끊자마자 내 이름을 부르길래 카운터로 갔더니 이 약사 표정이 아까보다 더 안좋아. 뭔가 엄청 화난거 처럼 보이는데?
"저기요."
"네?"
"방금 통화하신거 남자친구에요?"
"네? 뭐라구요?"
"…남자친구…."
"아닌데요?"
"아……."
달라는 약은 안주고 쌩뚱맞게 방금 통화한게 남자친구냐고 물어오는 약사때문에 제대로 당황했어. 곧 그런 놈이랑 사귀는거처럼 보였다는게 화가나서 퉁명스럽게 대답해버렸어. 그러자 평소처럼 새빨개진 얼굴로 약을 건네더라구.
"조금 천천히 나으셔도 좋을거같아요…."
"……?"
"아, 죄송해요……. 저기."
"왜요?"
"약봉투… 잘 확인하시고… 어, 음, 안녕히가세요."
"네, 수고하세요."
와 대박. 처음에는 나보고 빨리 나으라면서 이제는 천천히 나으라고? 저게 약사가 할말이야? 나 싫어하는게 맞나봐. 또다시 마음에 상처를 입은채 약봉투를 들고 재빨리 집으로 돌아왔어. 집에 돌아온 뒤에도 자꾸만 생각나는 약사때문에 어이가 없어서 이불위에 약봉투를 툭 던졌는데 봉투에서 약이 아닌 이상한 종이가 떨어져 나왔어. 이게뭐지? 하며 펼쳐보니 전화번호와 이름, 연락기다린다는 말이 써있었어.
"도경수… 가 누구야?"
도경수? 어디서 많이 들어본거같은데. 도경수… 도경수우……. 그 때 약봉투에 약사 도경수 라고 적혀있는게 보였어. 아, 생각났다. 그 약사 가운에 도경수라고 적혀있었던거 같아. 에? 그럼 그 약사가 넣은거라고? 그 동안 약사의 행동이 머리속에 재생되면서 드디어 깨달았어. 날 싫어하는게 아니였구나. 그나저나 나 연락해야되는건가? 곰곰히 생각하다 일단 번호 저장은 했는데… 역시 바로 연락하기엔… 어떡하지? 오랜 고민끝에 일단 보류로 해놓고 친구들과의 단톡방에 이 대박사건을 알리기위해 카톡을 들어갔는데 그새 동기화되서 약사가 친구목록에 등록되어있었어. 헐 그럼 친구추천에 나 뜬거아니야?
안녕하세요
헐
아.. 네 안녕하세요..ㅎㅎ
연락기다린다해놓고
제가 먼저 해버렸네요ㅋㅋ
ㅋㅋㅋ죄송해요 생각좀 하느라..
아..
저 별로에요?
네????
아니요!!!!!!! 아니에요!!!!!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럼 좋다는거죠?
네..?
감기 심한거같은데
3일 후에 또 만나겠네요^^
그 때 봐요^^
아니나 다를까 내가 추천에 떴는지 바로 등록했나봐. 게다가 바로 카톡. 이 사람 내 얼굴보고는 말도 제대로 못하더니 얼굴안보인다고 말 엄청 잘하네? 근데 뭐, 좀… 설레네? 감기 좀 늦게 나아도 될거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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