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우리 조금 안일한 이야기를 해볼까?
생각보다 착하고 보기보다 여린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왜 그녀가 어처구니없다 생각하면서도, 이 결혼이 구시대적인 발상과 자본주의의 폐허라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이 곳에서 생에 몇번 입어 볼 일도 없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평소에는 즐기지도 않는 예쁜 화장을 하고 있는지 우리 한 번 들어볼까?
그녀가 사랑하는 그녀의 아버지는 늘 이야기하곤 했어.
'근사한 남자에게 사랑받으며 살아야 한다'고 매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곤 했어.
어머니를 일찍 여읜 그녀에게 반쪽짜리 사랑을 주는 것만 같다고 필요없는 걱정을 하던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남자에게 평생 사랑받으며 사는 것이 소원이라고 입이 닳도록 말했지.
완벽한 짝이라고 생각하셨던 거야.
누가봐도 잘난 저 남자가 그녀에게 완벽한 짝이라고 그는 생각했던 거야.
어디로보나 빠지는 게 하나 없으니까. 사업적으로도 마찬가지고.
결혼 행진곡이 들려온다.
그녀의 아버지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는 그런 그에게 웃어보이며 이내 고개를 돌리고 저 멀리 서 있는 신랑을 바라봐.
점점 더 가까워지는 그와 그녀의 거리.
검은 턱시도와 순백의 웨딩드레스.
그녀에게 단 한 순간도 웃어보인적 없던 그가 이내 그녀의 손을 건네받으며 보기 좋은 미소를 지어.
그래, 다 그 미소 때문이었는지도 몰라. 그의 그 미소 때문인지도 몰라.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그의 그 미소때문에 그녀는 지치고 지치고 또 많이 지치겠지.
"결혼식이라는 거 말이야, 그거 별거 아닌 줄 알았는데"
그녀가 천천히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얘기해.
"별거 아닌 줄 알았는데, 정말 많이 생각나더라. 아주 생생하게..."
그래, 아주 생생하게.
신랑: 정택운
신부: 차은성
축 결혼
*
피로연은 간단하게, 신혼 여행은 생략.
허울 좋은 핑계들로 만들어낸 이 결과가 은성이는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해.
신혼집 앞에 다다르자 택운은 아무렇지도 않게 은성을 지나쳐서는 문을 열고 들어가.
은성이는 그런 택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이내 천천히 그의 뒤를 따라 현관으로 향해.
누가 먼저 손을 봤는지 이미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는 커다란 집 현관에 멀뚱히 서서
은성이는 어느덧 정장 마의를 벗고 있는 택운을 바라보고 있어.
그 시선이 느껴졌는지 택운은 제 옷을 팔에 걸치고는 뒤돌아서서 아직 신발도 벗지 않은 은성을 쳐다봐.
뭘 그렇게 쳐다보냐는 식으로 그가 눈을 깜빡거리자 은성이는 조금 당황해서는 이내 구두를 벗고 입술을 움직여.
두 손에 짐가방을 들고 대충 신을 벗어던진 그녀가 그에게 물어.
"그... 침실이 어디예요?"
택운은 대답 없이 그녀를 뜯어보다가 이내 고개를 까딱이며 간단하게 말해.
"네 방은 저기"
"네?"
은성이는 조금 놀란 듯 되물어. 왠지 '네 방' 이라는 어감이 별로 좋지 않게 다가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택운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작은 한숨을 내뱉어.
"같은 방이라도 쓸 줄 알았나?"
"아니, 그게 아니라!"
문득 울컥하는 마음에 은성이 짐가방을 내려놓으며 이야기해.
택운은 은성이의 말을 들을 생각도 없는지 이내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자신의 방으로 발걸음을 옴겨.
딱 봐도 견적이 나온다고 은성이는 생각해.
이 결혼 생활이 자신이 안일하게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힘들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어.
차갑다 못해 날카로운 그의 말투도, 쳐다볼 생각도 하지 않는 그의 두 눈동자도,
분명 견디기 힘들어져 아프게 울게 될 지도 모른다고.
애초부터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의 정략결혼.
사실은 아직 해보고 싶은 게 너무나도 많았던 그녀.
그리고 자신이 노력하면, 정도 들고, 서로를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모든 바람들이
한 순간 그의 차가운 시선에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져버려.
그러다가도 문득 생각나는 결혼식장에서 본 그의 미소에 은성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푹- 숙여.
왜 그 모습이 머릿속에 박혀서 떠나지 않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다만 좋지 않은 전조라는 것만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어.
"쉴 거니까 시끄럽게 하지 마"
방으로 들어가며 택운은 은성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렇게 얘기해.
차마 은성이 대꾸를 하기도 전에 그의 등 뒤에서 문이 쾅- 소리 나게 닫혔고
은성이는 현관 앞에 덩그러니 남아서는 무거운 짐가방을 대충 내려놓으며 작은 한숨을 내뱉어.
아- 진짜 바보같은 일이라고 그녀는 다시금 되뇌이고,
이내 아까 도망쳤어야 했다는 터무니없는 후회를 하기 시작해.
"노력하면 나아질까?"
은성이 작은 목소리로 자기 자신에게 물어.
"내가 이 악 물고 노력하면 조금 나아질까?"
참기만 하는 게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다는 것을 은성이는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문득 스쳐지나가는 아버지의 얼굴과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하면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도 어려울 거라고 그녀는 생각해.
"한 번 해보기라도 하자!"
이내 은성이 다시 짐가방을 양 손에 하나씩 들고는 이야기해.
힘겹게 제 방 문을 열고는 침대 아래 가방을 내려놓고는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해.
혹여나 큰 소리가 날까 방문도 살살 닫고 뒤집어질 것 같은 속을 애써 내리 누르며 그녀는 옷가지를 정리해.
그러다 불현듯 설움이 물밀듯이 밀려와서 차마 아닌 척 할 수 없어서 이내 침대에 털썩- 주저 앉으며 깊은 한숨을 뱉어내.
"그래...."
은성이는 천장을 바라보며 가만히 눈을 깜빡여.
"노력이라도 해보자. 노력.... 이라도"
*
너를 이런 식으로 미워할 수 있다는 게 기분 좋아
네가 이것을 받아들이니까 마음이 놓여
내가 너한테 꺼지라고 말하면 너는 나한테 뭘 집어던지기는 하지만
떠나지는 않거든. 그게 안심이 돼.
[알랭 드 보통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