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절기 감기가 극성이라더니 나라고 그 신세를 면하는 것은 아니었나보다.
아무리 훌쩍거리며 코를 들어마셔도 콧물은 질질 흐르고, 나는 또 바쁘게 티슈를 뽑아 들었다. 하필이면 걸린게 코감기라 여간 답답한게 아니다. 에휴 짜증나, 대충 콧물을 풀고 바닥에 한가득 어질러져 있는 휴지들을 주섬주섬 휴지통에 쳐박는데 문자가 왔다.
- ㅁㅎ
누가 기성용 아니랄까봐 딱딱하기 그지 없는 자음 두개만 덜렁 보낸다. 내가 분명 문자를 보낼땐 모음까지 붙여서 보내라고 했을텐데!? 하지만 그것에 이미 익숙해진지 오래인 나는 개의치 않고 자연스럽게 답장을 보냈다.
- 그냥 집에서 빈둥빈둥~~
- 돼지 납셨네ㅋㅋ
- 감기때매 그런다 우씨..
- 감기?
그래 감기. 그렇게 대강 문자를 보내고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러고보니 매일 훈련이다 뭐다 항상 밖에서 생활하다시피 지낼텐데 옷은 제대로 챙겨입는지, 밥은 제대로 챙겨먹는지 모르겠다. 명색이 여자친구인데, 너무 무심했나 모르겠네. 다른 동료분 여자친구들은 심심하면 경기장 찾아와서 도시락 챙겨주고 한다며 만날 때마다 툴툴거렸는데, 감기 낫는대로 뭐라도 싸들고 찾아가봐야겠다.
W. 베베
깜빡 잠이 들었는지 오전 9시를 가리켰던 시곗바늘이 어느새 오후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휴대폰을 집어들어 확인해보니 부재중 통화가 세통이 와있다. 전화오는 것도 모를 정도면 푹 잤던 모양이다. 더듬더듬 발신버튼을 누르고, 신호음이 얼마 가지 않아 전화 받는 소리가 들린다.
- 야!!! 뭐했는데 전화를 안받아!!!
- 미안미안……. 잠깐 졸아서.
- 난 또 무슨일 있는 줄 알고 걱정했잖아!!
- 미안해~
평소엔 죽어도 아닌척하면서도, 내가 살짝이라도 저의 범위에 벗어나면 안절부절 못하는 남자친구가 귀엽고 사랑스럽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때다 싶었는지 우리엄마도 안하는 잔소리까지 구구절절 늘어놓는데, 그 마저도 좋아서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응응, 대답했다.
- 감기는 괜찮아?
- 응~ 코감기라서 숨쉴때 빼곤 괜찮아!
- 으휴……. 칠칠맞게 콧물흘리면서 다니지 말고 약 잘 챙겨 먹어.
밥 거르지 말고, 귀찮다고 휴지 아무데나 버리지 말고! 끝까지 잔소리다. 그래도 좋네, 목소리 들으니. 그러곤 이제 연습하러 가야 한다며 전화를 끊는다. 멍하니 앉아있던 나는 뒤늦게 쪽쪽, 들리지도 않을, 전화기 너머의 남자친구한테 뽀뽀 한번 날려주고. 분명 그럴리가 없지만, 왠지모르게 감기가 다 나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좋다. 이래서 이 맛에 연애하는구나, 싶었다.
열이 났다.
정말 성용이 말대로 약 좀 잘 챙겨먹을걸. 코감기가 좀 나으려니까 아예 감기란 감기는 나에게로 왕창 달겨든 것 같다. 어제까지만해도 괜찮았는데, 밤새 무슨일이 있었는지 이젠 온 세상이 핑핑 돈다. 부모님은 해외에 나가계시고, 친구들은 연락도 안되고, 남자친구는 훈련중일테고. 나 아프다고, 투정부리고 당장 부를 사람이 없다. 아파서 그런지 더 서럽다. 힝……. 그렇게 혼자서 끙끙거리던 차에 휴대폰이 울리고, 누군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 여보세요?
- 또 번호확인도 안하고 받았구만, 나야 나.
- 아……. 응, 왜?
- 그냥, 모처럼 시간이 나서.
다들 여자친구한테 전화하길래 나도 생각나서 전화했어. 그리고는 어색한 웃음을 흘린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분명 부끄러워서 저러는 거다. 웃겨, 아픈 와중에도 그런 소소한 모습들이 귀여워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랬어? 잘했어. 목이 부어서 목소리가 이상하게 나온다.
- 감기는 아직도 안나은거야?
- 응……. 코감기는 좀 괜찮은데, 지금 막 열나.
- 열? 많이 나?
- 쪼끔…….
어질어질하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걱정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꾸만 응석을 부리게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전화가 끊기고, 나는 저 멀리 장판으로 휴대폰을 던지듯 밀어냈다. 하필이면 주말이라 연 병원도 없고……. 자고나면 좀 괜찮겠지하는 마음으로 눈을 감는데 눈물이 났다. 고작 감기가 뭐라고. 꼭 죽을병에 걸린 사람처럼 서럽게 눈물이 터져 나온다. 내가 애도 아니고, 다 커서 이게 무슨 꼴인지 싶다. 에휴, 잠이나 자자. 그러곤 다시 눈을 꾹 감았다.
W. 베베
별안간 나는 소리에 번뜩 눈이 떠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일단 우리집은 맞고, 소리의 근원지는 부엌 쪽이었다. 순간 엄마인가 싶었는데, 엄마는 한국에 없었다. 친구들 중에서는 우리집 도어락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이 없으니 친구도 아닐테고. 이러저러한 추측들이 머릿속을 잔뜩 헤집는 와중에도 소리는 쉼없이 터져나온다. 정말 누구지 싶어 걸음을 옮기려니깐 머리가 띵-하게 울린다.
- 괜찮아?
- 어?
풀썩, 침대에 주저 앉아서 지끈거리는 머리를 진정시키는데 왠 익숙한 남자목소리가 들린다. 설마, 하고 고개를 들어보니 성용이가 보였다. 요즘 훈련이다 뭐다 많이 바쁠텐데 어떻게 왔대……. 내가 멍하니 쳐다보고 있으려니깐, 내 이마에 제 손을 갖다대며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입을 연다.
- 열 많이 나네.
- 응? 아.
- 그러니까 내가 몸조심 하랬지.
약도 잘 안챙겨먹고, 밥도 안먹고, 아무데나 막 돌아다니니깐 감기가 나아, 안나아! 그러면서 짐짓 엄한 얼굴로 나를 다그친다. 아무렴어때, 그래도 내 앞에 허리를 숙여 나와 눈을 마주하는 사람이 '그'임에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그러다 듣다말고 내가 목을 꼭 끌어안으니 으이구, 하며 저도 내 허리에 팔을 감는다. 온지 얼마 안되었는지 품이 차가웠지만 든든했다.
- 바쁜데 이렇게 와도 돼?
- ……아프지나 말아.
진짜 감기 낫기만 해. 내 어깨에 얼굴을 박은 성용이가 웅얼거리며 말했다. 다 나으면 어떻게 할 건데? 사뭇 진지한 투로 말하니 고개를 들어 허리에 감은 팔을 풀고 나를 빤히 바라본다.
- 어떻게 하긴.
- 응?
- 확,
……뽀뽀하는거지. 그러곤 쪽, 내 뒷통수를 당겨 입을 맞춘다. 성용이로선 많이 참은 것이란 걸 알아서, 나는 기특하다는 듯 성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으유, 이뻐. 붉게달아오르는 귀가 보였지만 나는 못본 척, 그냥 웃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눈을 감은 성용이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나 역시 눈을 감았다.
감기 옮아도 몰라.
괜찮아.
정말?
네가 간호해주면 되지.
한참전에 쓰던 글인데 이제야 올리네요 저때 한참 감기걸려서 고생했었는데...이미 감기는 다 나은지 오래지만요 중간부터 이어써서 어색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슴다 차차 수정해나갈테니 애교로 봐주세요>. 다음엔 소농민으로 갈까 생각중입니다어이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