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사고가 났다. 한적할리 없는 도심의 한적한 횡단보도. 멀리서 달려오는 브레이크가 고장난듯한 덤프트럭. 초록불에 건넜는데도 치이는 몸뚱아리.
여느 회귀, 빙의, 환생에서 아주 자주 등장하는 환생트럭이었다.
그런고로 살아온 인생 19년, 고3 문제집 보다 열심히 본 핸드폰 어플 속 수많은 로판 덕후의 감으로 눈 떠서 옹알이를 뱉자마자 알 수 있었다.
와, 나 빙의 아님 환생이다.
왜냐면 저렇게 휘황찬란한 샹들리에는 그렇다쳐도, 사용인 언니들이 집에서 신발 신고 돌아다녔으니까.
당연히 한국은 아닐 거 아냐.
애기는 할 일이라곤 일어나서 우유를 먹고 칭얼거리고 볼 일을 보고 자라고 토닥이면 자는 것이다.
즉 속 알맹이에 19살의 처자가 있던 말던 싼 볼일에 대해 품평도 들어야하고 남에게 씻기고 닦이는 것이었다.
"아가씨의 변은 오늘도 건강하시네요. 무럭무럭 잘 크고 계신 것 같아요."
사촌 언니가 낳았던 사촌 조카가 왜 이리 우나 싶었는데 그래.... 너 기저귀 갈 때 우와 하던 내가 죄인이었다.
기저귀 타임이 되면 너무 수치스러워서 조금만 짜증이 일어도 감정이 감당이 안되는지 울음이 나왔다. 뿌애애앵. 진짜 말 그대로 뿌애애앵...
너무 싫다... 그러고 나면 자괴감에 꼭 현자타임이 왔었는데 그러지 않기 위해서 다른 생각을 하기로 했다.
이를테면 이 곳은 내가 읽은 로판 중 하나의 세계일까, 아기씨라는데 나 부자인가? 그럼 공부 안해도 되나. 수능을 앞두었던 내 몸은 어떻게 되었을까. 고장난 에잇톤 트럭 같던 환생트럭에 치였으니 죽거나 사지가 멀쩡하지 않거나...
별로 좋은 생각 같지는 않으니까 다른 생각을 하기로 했다. 예를 들면. 부모님?이라기엔 나는 회빙환 (회귀,빙의,환생) 주인공 마냥 조실부모 하여 부모님이 없네.
조실부모 하여 어렵게 자랐던 도깨비 신부는 19살에 도깨비를 만났었다. 걔 처럼 조실부모 하였지만 우리 이모는 남은 보험금과 재산을 갈취하지 않고 오히려 투자해서 불려주었기에 금전적으로 어려움은 겪은 적 없는 나는 환생트럭에 치였다.
설마 나 주인공? 하는 생각도 스쳤지만 커봐야 아는 일이지 않을까....
" 여주 아가씨, 맘마 먹을 시간이예요. 맘마."
일단 내 이름이 대한민국에서도, 여기서도 김여주인걸 보면 ... 어쩌면 로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물려준 젖병을 쭙쭙 빨며 하녀들을 쳐다봤다. 유모도 있고, 보조하는 하녀도 둘 혹은 셋이나 붙어있고 로판풍 고증 모를 드레스를 입고 오는 어머니와 레이스가 달린 양복을 입는 아버지가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난 귀족 같은데. 세계관은 로판이 맞는데 하녀 언니들의 머리색도 빨갛거나 금발이거나 연한 갈색이거나 어쨌는 천연으로 나오기 힘든 색인건 알겠는데.... 이목구비들이 어째 한국인들이다. 서양의 무언가일것 같은데 머리색과 눈썹이 기막히게 잘 받는데도 불구하고 동양의 얼굴.... 마치 위화감 없는 웹툰을 보는 것 같다. 그래 원래 그림체가 이런 세계겠지.
문득 염색하길 좋아하던 친구가 떠올랐다. 김아미. 아이돌을 좋아했던 내 친구. 돌려돌려 최애판인 주제에 그 날의 최애가 염색을 하면 따라했다. 좋아했던 아이돌은 방탄소년단이라고 빌보드도 막 가던 그룹이었는데.... 머글인 나는 주입식으로 그들의 이름을 외웠다. 아미의 머리색은 화려했다. 본래의 건강한 두발과 두피. 그리고 두발자유인 학교 규칙에 감사해야 할 정도로. 밝은 갈색은 물론, 민트, 자몽,빨강,백금발,주황 등등. 아미의 머리가 흑발일 때는 앨범 컨셉으로 전부 흑발일 때 밖에 없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봤을 땐,
'여주 여주! 나 머리 했다.'
'이번은 보라색이네.'
'웅. 우리 석진이가 보라색으로 했길래~'
'아.'
보라색이었지. 갑자기 검은 옷을 입고 보라색 머리인체 내 장례식장에 올 아미가 생각났다. 언발란스한 모습이 웃기다. 아니, 사실 안웃기다.
아미야, 나 꿈 이뤘어. 환생트럭에 치였다. 많이 울지마.
***
세월은 가고, 가는 세월 동안 나 혼자 멈춰있을 수는 없었기에 나는 이 곳에서 살았다. 내 신분은 사업 수완 좋은 백작가의 유일한 외동딸. 사는 곳은 로판 인생 처음 들어 보는 다한 제국. 살아보니 묘하게 한국와 로판 그 사이라 K로판 그 자체인 세계관이었다. 이제는 한국인의 얼굴을 하고도 화려한 색채를 가지고 서양식 드레스를 입는게 익숙해졌다. 또 웃긴게 온 나라라고 한복 혹은 다른 동양의 옷을 입는 나라가 있더라. 근데 한국 설정은 한복 밖에 없는지 먹거리는 내 취향이 아니였다.
아무튼 이 세계에 빙의한지 19년이 지났고, 이곳은 20살에 데뷔탕트를 치른다고 했다. 19살 동안 나는 후계 수업으로 경영 수업을 받긴 하였으나, 이미 보석이 나오는 광산이 수십개, 철광이 나오는 광산이 열댓개, 수도 상점가 핫플레이스의 건물의 반이 우리 집 소유라... 장사 하다가 망해도 내가 죽기 전엔 안망할 것 같다. 인생 버프가 이렇게 좋은데 ...고민이 있다. 한식이 먹고싶어.
나 원래 파스타 귀신이고 고기라면 환장하고 자타공인 빵순이라서 평생 양식vs평생 한식 양자택일에서 무조건 전자였는데 이것도 19년 먹으면 질리는 거였다. 몸은 바뀌었어도 혀가 기억하는 맛은 잊기가 힘들었다. 입맛을 뚝 끊어버린 내 덕에 백작가는 비상이 열렸다. 부모님은 하나뿐인 딸이 밥을 거르니 맛있게 먹었던 가게의 요리사들은 죄다 초빙하는 돈지랄을 벌이셨다.
전직 황궁 요리사도 초빙하여 밥을 먹이셨지만 그래봤자, 조금 더 맛있는 파스타, 조금 더 맛있는 스테이크였다.
요리사들을 초빙하는 것이 안먹히자 집안의 요리사들에게 신메뉴를 개발하게 하셨다. 아니, 신메뉴가 있다면 백작저로 와달란 공고에 석달 내내 새로운 메뉴만 먹었다. 그런데 한식과 비슷한 것은 없었다.
그쯤하니 금지옥엽 오호호호 백작가 외동딸의 정신보다 아차싶은 유교걸의 정신이 나와서 입 맛이 없어도 먹는 척 했다. 너무 좀 그러면 매운 소스를 뿌려먹고.
그 사이에 사교계엔 백작가의 여식은 입맛이 특이하단 소문이 돌았는지 알고 지내던 영애들이나 부모님의 거래처들에게서 독특한 식재료를 받기도 했다.
예를 들면 여기가 로판이긴 하구나....싶게 상기 시켜주던 몬스터 식재료들을. 예를 들면 슬라임으로 만든 스무디 같은... 단풍잎 게임도 아니고 뭐야, 이게.
그러던 어느 날, 하녀 메리가 그랬다.
"아가씨, 이번에 북쪽의 공작이 칩거를 깨고 황궁 무도회에 참석한다는 말이 있어요. 아무래도 황녀전하의 생신이잖아요. "
" 응. 근데 나는 그 날 아플 예정이라...."
황녀니 뭐니 관심 없다. 이 나라의 하나 뿐인 황녀는 몸이 좋지 않아 황궁 밖으로 나온 적이 없었다. 나 조차도 얼굴은 못 보고 내 또래인것만 아는 수준이었다. 공작은 작년인가 재작년에 사고로 어린 공작이 즉위한 건 알았다. 그러나 역시 본 적이 없다. 이번 무도회는 얼굴을 감추던 유명인 둘이나 등장하니 사람이 미어터지겠군. 안 가. 하지만 이어지는 말이 너무 군침이 돌았다.
"에이, 그래두 북쪽의 공작이 온다는데 진귀한 먹거리가 나오지 않을까요? 듣자하니 아직 중앙으로 유통되지 않은 식재료를 활용한 음식도 있다더라구요. "
북부 사람들은 매운 음식을 좋아하잖아요.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도시락 라면이 러시아에서 인기가 있던 거였잖아. 잘하면 한식 특유의 감칠맛이 나는 매운맛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면이 있으면 좋겠다. 고추가루 뿌린 음식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김치!! 김치찌개!!!
그게 나의 본의 아닌 칩거를 깨고 어떻게든 무도회에 가게 하려는 꾀임인줄도 모르고 드레스를 맞추고 신나게 황궁 무도회에 입성했다.
***
"영애, 아프셨다는 말을 들었어요. 이번 저희 티파티에 특별한 디저트를 내놓을까 하는데...."
"아, 제가 아직 몸이 안좋아서요."
"영애, 저번에 갔던 영지에서 새로운 음식을 발견하였는데 괜찮으면 투자건과 함께 대화를..."
"아, 전 이번에 투자자에서 빠지려고요...."
"영애, 정말로 슬라임 양식장을 갖고계십니까?"
"네????"
약 6개월 가까이 음식만 찾으며 칩거를 하였던 백작가의 외동딸이 칩거를 깨고 황궁 무도회에 참석 했다. 라는 소문이 돌았던 건 아닐까. 저 멀리 공작 추정인 남자도 보이고 2층 테라스에 얼굴은 안보여도 화려한 상아빛 드레스를 입은 황녀 추정인 여자도 보이는데 왜 죄다 나한테 들러붙었지...
아, 계급적으로 내가 만만하구나. 젠장.
몰래 숨으려고 해도 너무 요란하게 등장해서 요란한 옷을 입고 있어서 그럴 수가 없는게 문제라 누굴 탓 할 수도 없었다.
어디가서 무시 당하지말라는 마음이 크셨는지 이정도면 반역으로 간주 될 만큼 황족 마차보다 더 화려하고 휘황찬란하게 보석으로 장식된 마차를 타고 황궁에 도착했다. 마차가 덜컹이다가 떨어진 보석만 주워도 1년은 먹고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내 드레스를 보았다. 내가 보았던 드레스는 그냥 평범한 하늘색의 장식 없고 자수만 있던 드레스였는데 자수는 어디가고 허리춤부터 치마 끝단으로 이어지는 얇은 레이스엔 크리스탈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크리스탈이면 다행이지 다이아일지도 몰라... 이게 얼마인가 싶어 주섬주섬 치맛자락을 만져보기까지 했다. 너무 과해....
한 걸음 걸으면 영애, 하면서 말을 걸어오는 것도 열번이 넘자 승질이 났다. 한국에서 자란 사회인의 미소를 탑지했던 유교걸은 어디가고 귀족 그것도 나라에서 제일 돈 많은 백작가의 금지옥엽 외동딸의 인성이 올라오고 있었다. 전생에 읽었던 로판의 악녀언니들에게 빙의해서 그 승질머리로 다 쳐내고싶다는 생각이 끓어오르는 탓에 인상이 험악해지고 답이 짧아지자 점점 다가오는 사람이 줄어들어 먹거리가 모인 곳에 겨우 도착했다.
수백개의 크고 작은 크리스탈을 엮어 만든 화려한 샹들리에. 쳐다보면 빛이 크리스탈에 비치고 부서지기 바빠 너무 반짝거려 까마귀가 환장하게 생겼다. 그 아래 사이사이 금촛대와 신선한 과일과 빵을 두고 식전 요리부터 코스로 차례대로 나오는 전형적인 서양의 식탁. 맛있긴 맛있지. 꾸덕한 크림소스와 들어간 트러플의 향이 스민 관자요리라던가, 개월 수를 따져 도축한 어린 소로 만든 스테이크라던가 토마토 소스로 만든 뇨끼라던가......근데 나는 조개 구이가 먹고싶고, 스테이크보다 삼겹살 쌈장에 찍어 먹다가 마지막엔 김치랑 볶은 밥이 먹고싶다고요....
그나마 떡 같은 식감의 뇨끼라서 조금 먹었는데 떡이 아니다. 그냥 쫄깃한 밀가루 같았다. 이런 거 말고 엽떡 먹고싶어....
"하....시발 김치찌개 존나 먹고싶다."
차마 육두문자를 참을 수 없어 뱉었다가 이상한 말 한다고 오해 받음 어쩌지 하는 맘에 입을 막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익숙한데 한번도 실물은 본 적 없는 외운 얼굴 하나가 옆에 서서 날 보고 울고 있었다.
아니 왜 방탄이 여기서 나와?
19년 만에 처음 장르를 의심하는 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