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준비한다고 열심히 쓰다가 용량 초과해서 (눈물) 올립니다. 소재 다른 걸로 바꿔서 이미 쓴 거라 업로드 해요.
대기중인 단편: 금왈, 바다를 올려다보아라.
※바다를 올려다보아라에서 암호닉 신청하셨던 분들은 그대로 쓰시면 돼요.
-보이세요?
무어가.
-물결이요. 그들의 생김새는 끔찍해요. 잠잠히 주시할 수도 없을 만큼.
왜 끔찍하지?
-전 오랫동안 부둣가에 서있었어요. 눈을 감고.
…….
-삼면이 담긴 부둣가를 향해 몰려오는 바다가 혐오스러워요.
아이들은 파도를 좋아하잖아.
-부서지는 파도 말이에요?
그래. 부서지는 하얀 파도.
-저는 그렇지 않아요. 더이상 헤엄 칠 수도, 심지어 볼 수도 없어요.
왜 그들을 밀어내.
-생각보다 바다는 제게 품을 내어줄 만큼 친절하지 않았어요.
그 이유는 제게 있기에.
성난 바다 위론 징그러운 물결들뿐이죠.
저를 삼킬 듯 몰아치는 물결이 보이세요?
그것들을 볼 용기가 없어요.
이 아래서 내 업보가 날 지켜보고 있으니까.
그 눈이 두려우니까.
제가 바다를 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세요.
낡은 문고리를 돌려 2층 다락방 창고를 연다. 문이 열리자 뛰어나오는 회색 쥐. 소스라치게 놀라 들고 있던 상자를 놓을 뻔 한다. 곧 놈은 1층 거실 밖으로 꽁지 빠지게 도망친다. 하얀 침대 위로 빈 상자를 놓는다. 그리고 소세지를 반 자른 모양의 창문 잠금 장치를 열었다. 근처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새 공기가 돌았다. 요란스러운 일을 겪은 집 치고 내부가 정갈하다. 하나, 둘, 셋. 남은 가구들 위로 쌓인 먼지들을 털어낸다. 책장에 꽂힌 책을 잡아 꺼내 상자에 넣었다. 노인의 손길이 끊긴 중고품들은 값 싸게 팔릴 예정이다. 침구들 제외한 책장과 옷장은 보금자리를 이탈할 준비를 끝냈다. 이삿짐 센터의 장정들이 마저 들고 1층으로 내려간 후에 우당탕 거리는 소리가 멎었다. 마당에 고인의 짐을 실은 트럭이 달달 거렸다. 운전석 창문에 빼꼼 나온 험상 궂은 남자는 다락방 쪽으로 고개를 든다. 콧등에 작은 면도칼 흉터. 저 흔적으로 꽤나 오해를 샀겠군. 그는 투박한 손을 올려 슥 흔든다.
"이만 갑니더."
"수고 하셨습니다. 물건들 잘 부탁드립니다."
트럭과 인적은 떠나고 이 황량한 집에 홀로 남았다. 쓸쓸하기 보다는 오히려 혼자라는 상태, 내게 극도로 필요했다. 어르신도 아셨을까. 며칠만 머무를 곳이라 가죽 캐리어 하나만 들고 왔다. 텅빈 주택에 내 짐 하나, 책이 든 상자 하나, 침대 하나. 침대에 걸터 앉아 창 밖 바다를 본다. 정오의 황홀한 바다는 푸르다. 바람도 푸르다.
"시원하다."
이곳은 어르신의 고향. 내 첫 번째 재판의 피해자. 그는 고인이 되어 이승에선 온기를 찾을 수 없다. 노인이 내게 맡긴 메세지를 사후에 듣고 일을 진행하러 내려 왔다. 허무맹랑한 판결에서 분노했던 어린 김석진은 5년 전 사람이었다.
'의의 제기 합니다. 판사님! 다시 한 번 숙고해주십시오.'
문득 생각 난 현장에 눈을 감는다. 어떤 방식이라도 가증스러운 얼굴의 베일을 벗기고 싶었다. 형을 피해간 피고인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되갚아주려 했지만 어리석었다. 희망을 잃는 노인은 밤새 앓는 통곡을 했다. 같이 열병을 앓았다. 답답하고 들끓는 정의를 변질시키는 열병이었다. 그 후, 법의 이상이 깨진 검사는 제도 모르게 화풀이 대상을 찾아다녔다. 잘못을 저질렀든, 오해에 지목이 되었든 죄의 여부는 상관 없다. 그 자리. 피고인의 좌석에 섰다면, 그리고 재판을 맡은 검사가 김석진이라면 모두 수감 되었다. 정당한 알리바이는 돈으로 찔러 목격담을 만들면 끝. 죄가 없는 피고인마저 세뇌로 죄책감을 안겨줬다. 끝까지 몰아서 떨어뜨려줄게. 절벽 끝에 선 기분을 너도 느껴봤으면 좋겠어. 몇몇은 재판 도중 없는 죄를 고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재판이 끝나고 마지막, 놈들은 무효라고 외치지만 이미 일은 석진의 손에서 끝나버린다. 거봐,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청렴하지 못한 검사는 타락에 물들어 검은 법전을 들고 다녔다. 목에는 넥타이 대신 더러운 명성을 달고. 악하다 판단한 자들은 모조리 골로 보내는 데에 몰두한 난 비정상이었다.
5년. 세월이 흘러 어느새 나는 차장 검사가 되어있었다. 승진 발령 소식을 듣고 짐을 정리하며 부러움의 눈빛을 받아냈다. 지긋지긋하게 쌓인 서류들을 정리하다 동봉된 바랜 파일을 발견했다.
아아, 과거에 사는 인간은 미래를 살 수 없었다. 승진이 예정된 날, 사직서를 냈다. 승승장구하던 검사가 승진 앞두고 청천병력같은 일을 내자 벙 찐 국장의 모습이 잊혀 지지 않는다.
'김 검사. 지금 나랑 장난 하자는 건가? 많이 힘들어서 그래? 그럼 좋게 말로 해.'
'접수해주십시오.'
'난 자네 사표 수리 안 해. 그런 줄 알아. 한 달이야. 그 안에 마음 바뀌면 말 해. 김 검사 같은 인재 못 놓아.'
'돌아올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그대로 매정하게 돌아서 자리를 정리했다. 발령이 아닌 진정으로 내가 해야 될 일을 하기 위해. 며칠 전 노인이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제대로 작별 인사 못해보고 전해들은 것은 그 하나. 미쳐버린 담당 검사 자식에게 남긴 말이 있다고.
'나 대신 마무리 못한 것들을 정리해주시게.' '먼저 가서 미안하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어.'
서둘러 그의 집에 찾아갔을 땐 모든 게 싸해졌을 적. 5년 전 사건 현장에 온 나는 노인의 바다를 보고 있다. 검은 머리칼을 밀어내는 바람을 맞으며 나는 이곳에 있다. 노인의 손자가 살해당한 바다에. 노인의 바다에. 삐그덕 거리는 울타리를 넘어 갯벌이 보인다. 계단 끝에 앉은 하얀 단발의 작은 몸집. 흰 옷을 입은 하얀 머리 여자 아이는 저택을 향해 돌아본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마을 안쪽으로 달려간다. 야윈 몸이 거침없이 낯선 길로 뛰어갔다. 작은 손에 반짝거리는 조약돌 쥐고. 이윽고 사라진 뒷모습에서 눈을 떼 상자 안 책을 꺼냈다. 세 책의 제목.
'바다.', '죄책감.', '고양이.'.
끼니를 떼울 생각 접고 침대에 앉아 '바다'의 첫 장을 넘긴다. 노인은 무슨 까닭으로 이 먼 곳까지 나를 불렀을까.
남긴 책들이 무슨 뜻을 가진 데드 사인일까.
그리고 당신이 자살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김석진. 그리고 바다 아이.
~바다를 올려다 보아라.~
1.
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 지 모르겠다. 친구 놈들은 제 살 길 바빠 내 안부에 대해 통 연락이 없다. 사실 내가 다 끊어낸 연들이니까. 간단하게 토스트를 구워 블루베리 잼을 바른다. 노인의 가구를 좋은 곳에 쓰이도록 보내니 휑한 집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적다. 낯선 곳에서 보내는 하루는 누군가 기냐고 물으면 정말 길었다 말 할 수 있다. 그 심심한 물음조차 할 사람이 없는 게 문제였다. 노인은 얼마나 쓸쓸했을까. 같이 싸웠던 그 때는 서로의 등에 기댈 수 있었다. 아들처럼 대해주던 노인의 손길은 투명해져 버린 지 오래. 그립다. 그의 넘어갈 듯 삼키는 들숨도. 내 소유로 이전된 집 앞에 나와 어슬렁거렸다. 실업자가 된 기분은 애매모호하다. 홀가분하다지만 조그마한 후회감은 없지 않았다. 입에 토스트를 물고 백수처럼 추리한 옷 모양새로 바다 냄새를 마셨다. 새벽, 사건을 조립해 나가는데 책은 도움 되지 않았다. 집 앞 바닷가에 어제 하얀 단발이 앉은 자리에 앉았다.
시체 두 점이 발견 됐었다. 하나는 멀쩡하지만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희끄무리한 살점. 또 하나는 푸르딩딩한 부운 사람, 노인의 손자. 아이의 몸에 딱딱한 붉은 립스틱 자국이 있었다. 검찰관들이 손자 아이가 아닌 시체 하나는 아무렇게나 버려뒀다. 바다에서 죽는 사람들은 흔했으니. 그래, 이곳이다. 수거해 가는 손자를 차마 따라갈 수 없어 주저앉은 노인을 달래었다. 아이가 되는 노인이 다시 웃음을 되찾길 바랐다. 승소 하나만 보고 사건의 실마리가 될 증거들을 모아 피고인을 잡아냈다. 바다 마을 유일한 고아원의 원장. 근처에 남자 아이가 다녔던 유치원. 증거들이 연결 고리가 되어 번개 맞은 듯 한 머리 스타일의 여자 원장을 범인으로 지목하기 쉬웠다. 개처럼 발목을 물고 뜯었어야 했는데 너무 어렸던 내가 후회됐다. 처음 맡은 사건에 정신머리가 없었다. 항상 후회한다. 좀 더 열심히 했더라면, 좀 더 명석했다면 허점을 파고들지 않았을까. 모든 걸 의심하고 내 마음 조차 믿지 않았어야 했는데. 그 여자 알리바이는 너무나 정당했다. 목격자들이 줄줄이 증언하고 원장은 소년과 닿을 수 없었다는 걸 밝혔다. 그렇다면 립스틱은 어디서 묻어왔는지. 그곳에서 흐름이 끊겨버렸다. 고로 원장은 재판장에서 석방이었다. 촉은 무조건 저 여자를 향해 있지만 더이상 변론할 수 없어 좌절했다. 원장이 돈으로 증언자들을 매수하는 걸 알고도 포착하지 못한 내 잘못이었다. 올바른 정의가 돈을 이길 줄 알았다. 비웃는 원장의 입술에 붉은 립스틱이 갈라졌었다. 기고만장한 가해자들의 모습이 상기되자 나도 모르게 발을 굴렸다.
분명 이곳에 파묻힌 진실이 있을 거라 굳게 믿는다. 분명 유서라던지, 유가족이라던지. 아, 가족 분들은 다 뿔뿔이 흩어졌다고 했었지. 5년 전 노인이 외로운 싸움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손자의 억울한 죽음을 풀기 위해서. 미스테리 한 행방의 손자가 타살을 당함은 분명했다. 손자가 즐겨 수영하던 곳이라 빠져도 나올 길은 있었을 테요, 인적이 없는 것도 아니며 누군가 직접적인 해를 가하지 않아 흔적이 없어 미칠 노릇이다.
사건 당일, 아무도 소년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마을과 동떨어져 있는 노인의 집이라 측근엔 뻘에 조개를 캐러 오는 동네 아낙네들 밖에 없다. 소문이 퍼져 동네 아이들은 부둣가 근처를 오지 않았다. 마지막 시체를 거두던 날, 유입되는 바닷물에 서서히 떠나는 한 아주머니를 붙잡고 물었으나 부둣가에 서있는 하얀 소녀만 보았다고. 살인 사건이 발표되기 전. 그 전부터 사람들은 이미 거리를 두고 있었다. 소문이 발길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니다. 무언가 있었다. 머리를 비우자. 이때까지 내가 일을 겪으며 배운 방법이다. 뇌가 과부하 되면 제대로 된 판단을 하기 어렵다. 시간은 한 달이니 여유롭게 찾아도 된다. 감정에 휩쓸려 마음만 급해서 될 일이었으면 5년을 걸쳐 우린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겠지. 부둣가에서 제일 먼 뻘에 모여 도란도란 얘기하는 해녀들. 마치 그 날 일이 없었던 것처럼 화사한 분위기. 하지만 소란스러웠던 5년 전 사건과 관련된 내가 내려왔다는 소식이 빠르게 흘러갔는지 눈빛들이 곱지 않았다. 이 부둣가 근처는 배제된 구역인 마냥. 아무래도 마을 사람들에게 다가가 묻는 것은 쉽지 않을 듯 하다. 접촉하기 쉬운 아이들을 대상으로 소년에 대해 알아내야겠다. 정장을 벗고 친근한 이미지로 말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시간을 쉽게 흘려보냈다.
여기서 마을 쪽으로 좀 더 걸어가면 고아원이 있다. 원수나 다름없는 그 여자가 그대로 있을 지 궁금해졌다. 입에 묻은 빵부스러기를 털어냈다. 바람에 이리저리 날려 부시시한 머리를 감추랴 얼굴 가리랴 대충 검은 후드집업 모자를 써 지퍼를 올린다. 검사 본성이 어디 가지 않고 주위를 샅샅이 살피며 걸었다. 평소와 다를 듯 없이 평화로운 마을. 하나 변한 게 있다면 고아원에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다. 철문이 녹슬어 자물쇠는 잘려 나가있다. 쉽게 들어갈 수 있는 내부에 주춤했다. 아직 들어갈 단계가 아닌 기분이 꺼림칙하다. 고아원에서 가까운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공이 뻥하고 날아왔다. 잡아 품자 코 흘리는 꼬맹이가 쪼르르 걸어 나온다.
"어! 아저씨다."
"……."
5년 전 유치원 아이들 중 한 명인가. 언제 이렇게 커 언제적 일을 기억하고 있지. 아이들에게도 인상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아이들도 관련이 있을까? 그 시절엔 부모들이 감싸도는 바람에 유치원생들을 잡고 취조를 할 순 없었다. 지금은 다르다.
"여기 원장 선생님 어디 가셨니?"
"아줌마 이사 가셨어요!"
"어디로?"
"아주 멀리 멀리요. 자고 일어났는데 다 사라지고 없었어요. 도시라던데 잘 몰라요."
아뿔싸. 도준가? 일이 없다 큰 소리 떵떵 치던 여편네가 야반도주 씩이나. 켕기는 거라도 있는가보군. 일이 끝나면 행방부터 캐야겠다.
"이제 고양이 소리가 안 들리잖아요."
고양이?
"원장 선생님이 고양이를 키우셨니?"
"되게 많이요. 밤마다 우는 소리 장난 아니었어요."
질색하는 남자 아이는 어느덧 공만 뚫어지게 본다.
"어이, 꼬맹이."
"공 주세요!"
"하나만 말해주면 공을 주도록 하지."
"뭔데요?"
"어른들에게 내가 너와 대화 했다고 말하지마."
"알았어요! 얼른 주세요."
공을 낮게 던져 안겨주자 새처럼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남자 아이. 손자 녀석도 죽지 않았다면 저 아이처럼 듬직하게 컸을 텐데. 힘차게 운동장을 접수하는 아이 뒷모습을 바라만 보다 자취를 감춘다. 바람을 등지고 해안선을 따라 걸었다. 노을을 따라 걷다 보니 멀리 보이는 건 노인의 저택과 가까운 부둣가. 근처 모래사장에 하얀 단발이 앉아서 조개 입을 열었다. 볼을 물들이며 방긋 웃는 하얀 소녀가…
눈 깜빡인 사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몰려오는 하얀 파도만이 남아.
2.
신은 말할 것이다. 죽음은 정말 간단하노라. 나는 검사 인생에서 첫 사건을 특별하다 여긴다. 이 마을에서 살인자로 보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자회를 자주 가지며 돈독한 것까지 누구나 평화로운 마을이라 여기겠지. 바다에 익사하는 일은 흔하다. 하지만 찜찜하게 발견된 소년의 발자취가 우리의 뇌리를 사로잡았다. 지금 뭘 위해서 소년의 죽음을 캐내고 있느냐가 중요했다. 이미 죽은 사실은 되돌릴 수 없는 것. 소년의 따뜻함이 마지막이었던 부둣가에서 소년은 무얼 하고 있었는지. 죽임을 당할 이유가 무엇인지. 혹은 소년이 스스로 몸을 던졌는지. 그 어린 아이가 죽을 이유가 없지 않는가. 차갑게 식힌 머리는 소년이 자신을 살해했을 가능성까지 배제하지 않는다.
침대에 누워 '바다'의 112번째 장을 넘기자 끼인 사진 두 장이 떨어졌다. 빛바랜 소년과 노인. 활짝 웃는 소년과 얼굴에 주름살이 웃는 노인. 왜 이렇게 되버렸을까. 부둣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한껏 기쁨을 표현하는 그 둘. 누가 찍어줬을까. 두 번째 장엔 그저 부둣가 일부와 검은 바다가 꽉 찼다. 누군가를 근접하게 찍으려고 한 각도이다. 실패했는지 인물이 아닌 다른 게 찍히자 실망스럽다. 침대에서 일어나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본다. 태양을 담은 바다, 저 멀리엔 부둣가. 주위를 맨발의 하얀 단발이 아른거렸다. 그 하얀 조약돌 같은 모습을 놓치기 전에 급히 옷을 챙겨 나간다. 하얀 울타리를 넘어 간척 사업이 중단된 모래사장으로 뛰어왔다.
"허억…. 헉."
온데 간데 없는 실루엣에 바다만 두리번거렸다. 노랗게 물든 바다…. 껄끄러웠다. 인식할 새 없이 바다를 보면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아래에 무슨 비밀을 가지고 있는 거야.
"아저씨."
새하얀 목소리에 돌아본다. 조개 한 아름 안고 있는 하얀 단발의 소녀. 몸마저 하얘서 구름을 연상시켰다. 키는 짐작해서 160. 붉은 눈매에 눈동자가 명랑했다.
"여기 사니?"
끄덕인 동그란 머리가 시멘트에서 모래로 내려와 조개의 무덤을 만든다.
"날 것으로 먹으면 큰일 나는데."
"먹어도 괜찮다고 했어요."
"누가?"
"조개들이요."
허락해줬어요. 씩씩하게 조개들을 묻는 아이는 덩치가 작았다. 그 아이 동심이 부러웠다. 야윈 손목이 가히 잡을 수 없이 가늘다. 작은 바위에 앉아 지켜본다.
"아저씨 알아요."
"언제부터."
"처음 바다에 왔을때부터 줄곧."
우리 구면이잖아요. 평평하게 무덤의 높이를 골라내는 소녀가 그 위에 섰다. 모든 게 하얘서 눈이 부셨다. 태양을 등져 그림자 진 얼굴이 또렷하다.
"울지 마세요."
"운 적 없어."
"울면 모래들이 슬퍼할 거에요."
"모래가 왜?"
"눈물이 닿으면 아저씨 마음이 전달되니까요."
바로 여기에. 5년 전, 사건 수사할 적 힘겨워 이곳에 잠깐 앉아 흐느꼈었다. 그 때 봤던 걸까. 지금은 모래에 찍힌 샌들 자국. 그 위로 눈물이 스며들었었지. 아이가 짐짓 어른인 척 하는 모습에 실소가 지어진다.
"어쭈, 꼬맹이. 어려운 말 하는데?"
애써 밝은 척을 했지만 붉은 눈동자는 웃어주지 않는다. 호기심과 생동감만이 감도는 소녀는 손을 내민다.
"친구 해요."
"동정하는 거야?"
"아니요. 나도 친구 없어."
나도 왕따야. 물끄럼 자신의 손을 잡길 기다리는 아이. 의아함을 지우고 한 없이 작은 손을 잡는다. 갓 바닷물에 들어갔다 온 듯한 체온에 숨 죽여 놀랐다. 저체온증인가.
"할 일 없으면,"
"할 일 없으면?"
"저 좀 도와주실래요?"
말간 눈이 간절하게 나를 필요로 했다. 꿈쩍도 안 하고 있으니 옹골진 손아귀가 나를 질질 끈다. 힘을 따라 부둣가쪽으로 간다. 신나 보이는 여자 아이의 하얀 머리칼이 바람을 타고 춤을 췄다. 바람의 한 조각인 듯 아이의 옷이 날렸다. 하얀 단발 사이로 목에 걸린 초커가 눈에 띈다. 고양이용 목걸이. 부둣가에는 접근 금지라 노란 테이프이 이리 저리 흩어져있었다. 마을과 조금 떨어진 이 부둣가. 노인의 소년이 죽은 뒤론 발길이 뜸해졌을, 아니, 이 소녀만이 맴돌았을 곳. 유난히 수심이 깊은 구역은 아래가 캄캄하다. 부둣가 앞에 왔지만 아이는 발을 들이지 못했다. 눈을 꼬옥 감고 내 가디건만 붙잡고 있을 뿐. 익숙한 두려움이 가슴 아렸다. 행복한 추억 하나 없는 부둣가에 나는 소녀와 노인 대신 발을 딛어야했다.
그리고 등 뒤로 들리는 떨리는 목소리. 거세게 부는 바람에 검은 머리카락이 젖혀졌다. 물결은 더욱 촘촘히 날 향해 다가온다.
"보이세요?"
"무어가."
"물결이요. 생김새가 아주 끔찍해요. 잠잠히 주시할 수도 없을 만큼."
"왜 끔찍하지?"
천천히 부둣가 앞머리로 걸어간다.
"전 오랫동안 부둣가 앞에서 서있었어요. 눈을 감고."
"……."
"삼면이 담긴 부둣가를 향해 몰려오는 물결이 혐오스러워요."
"아이들은 파도를 좋아하잖아."
"저는 그렇지 않아요. 더이상 헤엄 칠 수도, 심지어 볼 수도 없어요."
"왜 그들을 밀어내."
"생각보다 제게 품을 내어줄 만큼 친절하지 않았어요."
제가 다시 바다에게 안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세요.
소녀의 말이 끝나자 돌연 듯 발목을 잡는 물컹한 손. 하마터면 바다에 빠질 뻔 했다. 곧바로 뒤로 넘어졌지만 뒷걸음 쳐 가빠르게 하얀 아이를 데리고 부둣가에서 벗어나 부리나케 도망쳤다. 조물주가 만든 거룩한 세상에서 탈출할 양으로 뛰었다. 소녀와 나는 아직 그곳에 살고 있다. 그리고 아직 파헤쳐지지 않는 비밀에 마음 졸여야했다. 과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서로 기댄다. 쭈뼛 선 털들이 고개 숙이지 않는다. 뒷덜미까지 돋아서 위험을 알렸다. 식은땀이 바다에서 부는 바람에 말랐다. 손에 잡힌 소녀는 위태로운 어른을 잘 따른다. 그리고 허기진 얼굴로 말했다.
"배고파요."
아까 전 무서운 감각을 잊은 듯한 얼굴이 무서웠다.
*
"할머니. 국수 두 그릇이요."
"멀끔하게 생긴 양반이 쯧쯔."
백수인 나를 나무라는 걸까. 오늘 옷이 많이 후줄근하긴 했다. 몰락한 도시 남자로 보이려나. 두 양은 그릇을 상에 올린 할머니는 마루에 앉아 텔레비전 뉴스를 본다. 앞에 앉은 아이는 창백한 얼굴로 상을 내려다본다. 내 쪽으로 한 쌍의 수저만이. 조용히 수저통에서 아이용 젓가락과 숟가락을 꺼내 차분히 아이에게 내민다. 그제서야 웃는 백색의 소녀는 허겁지겁 젓가락을 받아들어 삼키듯 면을 먹는다. 조리된 것들은 못 먹을 것 같이 생겼는데 국수는 잘 먹는다. 아까 발목에 남은 끈적함에 입맛이 떨어졌다. 그저 아이를 지켜보기만 한다. 국수집 할머니는 곁눈질로 보지만 휙 고개를 돌렸다. 인정이 얇군. 내가 이곳 지리를 알지 못 해 여기 저기 찌르고 다녔지만 이 아이는 마을에서 구석진 국수집을 찾았다.
"굳이 이렇게 먼 곳을 필요가 있었나 싶어."
"딱 한 번 왔었어요."
"누구랑?"
"여기서 국수 먹었어요."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 마지막이었어요. 여기가 마지막이었어요. 국수를 먹다 말고 너는 어깨를 들썩였다.
"엄마."
"……."
"그게 끝이었어요."
위로해줄 수 없었다. 지켜보는 것으로도 족해보였다. 그릇에 고개를 박고 억눌린 소리를 내는 아이의 얼굴을 볼 용기가 없었다. 꼭 노인 같았다. 노인의 모습 같았다. 나도 울고 싶다. 어른이라 울지 못함은 정당하지 않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흘러 5년 전 감정적인 김석진이 아니라 어색하다. 공감 능력이 떨어졌다. 아이를 알지 못하는 나는 아직 판단하기 이르다.
"늦었다. 정리되면 집으로 돌아가."
"요 몇 년간 씨가 말렀더마 어디서 계속 고양이 울음 소리가 나누?"
빗자루를 들고 나가는 할머니의 뒤를 따라 나간다.
대답 없는 아이. 흰 가디건 주머니에서 만원 두 장을 꺼내 상 위로 올린다. 잔반이 차갑게 식었다. 닫히는 문 사이로 작은 하얀 목소리.
'엄마…. 엄마-. 엄마……."
내일은 좋은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 가엾은 아이를 위해.
3.
죄책감에 잠을 자기 힘겹다. 발목에서 스멀스멀 올라온 죄책감이 가슴에 닿자 과거의 일들이 쏟아져 내렸다. 내 지독함으로 죄인이 아닌 사람들도 옥에서 썩어 들어갔다. 바다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고함. 벌떡 일어나 열린 창문을 닫았다. 정신세계가 핍박해지고 메말라간다. 이 죄책감은 씻어 내릴 수 없을 지독함이다. 피날레로 바다 아이의 울음까지. 짙은 안개가 바다를 감싼다. 늦은 시간까지 뜬 눈으로 '바다'를 읽는다. 역시나 단서는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장을 넘겼다. 그 안의 내용은 시시콜콜했다. 알맹이 없이 그저 바다의 외양, 내양을 관찰하는 내용. 그저 잡을 수 있는 글자라도 있을까 묵독한다. '바다'를 읽는 것은 쉽게 끝났다. 말쑥한 얼굴로 화장실을 찾았다. 심리적 부담감이 눈 밑에 달려 새카맣다.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으며 거울을 매섭게 노려봤다. 김이 어려서 얼굴이 가려진다. 사람들은 모두 서로를 해치며 살아간다. 그 중에 나도 포함이 된다. 해칠 뿐만 아니라 회복을 하려 노력을 한다. 지금 나는 그 시점에 와있는 사람. 일찍 깨닫지 못해 후회를 하는. 과거를 정리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나를 의심해보지만 나는 잘 하고 있다, 시작이 반이다. 욕조에 들어앉아 머리를 정리한다.
-첫 번째. 동네 아이들은 마을을 뒤흔들었던 사건 검사인 나를 기억 하고 있다.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어떤 말로 영향을 끼쳤을지 예상 된다.
두 번째. 왜 그 시간대에 소년을 본 사람이 없는가. 소년은 왜 늦은 오후까지 부둣가에 있었을까.
세 번째. 마을에서 하얀 단발 머리를 본 적이 없는데 소녀는 나를 알고 있다. 부둣가에서 서성이는 아이는 소년과 무슨 관련이 있나. 목에 목줄은 뭔가.
네 번째. 잘못이 없다는 원장은 왜 마을을 떠나야했는가.
다섯 번째. 노인은 왜 죽음을 택했는가.
코드는 총 네 개만 찾으면 된다. 마지막 결론은 자동적으로 나오게 될 게 뻔하니까. 부둣가 하얀 단발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 일은 순조롭지 않다. 이 모든 일을 맞출 만능열쇠가 있을 텐데 그 열쇠 하나를 모래바닥에서 찾기 힘들다. 아니면 이미 내 손에 쥐어졌는지도 모른다. 몸을 물 아래로 뉘여 본 수면의 물결은 노란 불에 흔들렸다. 의식치도 못 했던 바다 물결의 혐오가 전해왔다. 잘못하면 바다에 빠질 뻔 했다. 발목에 스멀스멀, 하얀 아이가 두려워하는 무언가가 내게도 동해졌음에 틀림없다. 어기적거리다 목욕을 끝냈다. 렘수면에 들기 힘든 이 밤. 두 번째 책, '죄책감'을 읽기 시작한다.
4.
성난 바다 위론 징그러운 물결들뿐이죠.
저를 삼킬 듯 몰아치는 물결이 보이세요?
그것들을 볼 용기가 없어요.
이 아래서 내 업보가 날 지켜보고 있으니까.
그 눈이 두려우니까.
그 이유는 제게 있기에.
"거기에 들어가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