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탐내는 자들.
Two Hearts
w.그루잠
prologue.
-profile.
1.코드네임: 탄소.
2.주거지: 이탈리아.
3.상세정보: 신체; 키 167cm. 48kg. 목석같이 무뚝뚝함. 다루기 어려움. 참을성이 뛰어남. 특이 사항없음.
4.특기; 총 종류에 상관없이 장거리 저격 확률 90%. 나이프 활용도는 떨어지나 장거리에 강함.
5.母: X 父: O 비공개.
6. 대지에서 살인으로만 경력 10년.
나에 대해 상세하지는 않지만 이정도라면 내 모든 것을 파악한다. 나의 심심한 정보가 적힌 프로파일을 넘겨본다. 쇼트컷에 흑갈색 머리. 아무것도 없는 밋밋한 얼굴을 한 내 증명사진. 단정하게 셔츠를 입고 찍은 나는 웃지 않았다. 실핏줄없는 흰 자에 구슬같은 검은자. 검증 페이지 위로 크림슨 하트의 붉은 도장이 찍힌 것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마지막 내 정보가 적힌 짧고 간결한 글귀를 읽는다.
7. 하자 없는 건장한 남자.
속으로 코웃음을 친 껄끄러운 거짓에 파일을 덮었다. 날 데리러 오기러 했던 항구에 서서 옷깃을 다듬는다. 바다 아래에 도착한 스멀스멀 올라오는 작은 잠수함. 가볍게 짐을 실어 문을 닫는다. 할 일을 끝낸 동시에 자동적으로 바닷속으로 잠식해 깊은 수면에 잠기는 잠수함. 목적지까지 은밀하게 운송되는 잠수함을 방파제에 서서 지긋이 바라본다. 형체가 사라지자 구름이 이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맑은 푸른색과 구름이 쏜살같이 한쪽 방향으로 달아나는 하늘. 구름 한 점 없는 공간을 가로질러 금방이라도 요원이 헬기를 몰고 내려올 것 같았다.
그래. 오늘따라 날씨가 꽤 맑다.
내 이름은 탄소.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5살 때 보모에게서 자라던 약한 나. 얼굴을 그 어린 나이에 딱 한 번 만져보고 다음엔 제대로 보지도 못했던 아버지. 그가 일하는 곳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따라간 적이 있었다. 그곳은 바다의 어느 비밀스런 곳에 위치한 전국 해양의 서열 1위.
해양 마피아, '크림슨 하트'의 기지였다.
아버지의 보스를 아래서 올려다 보았다. 거대한 몸집과 환한 얼굴. 이목구비가 뚜렷한 그는 남성미를 가득 안고 바다를 지휘했다. 파도 바람에 흩날렸는 그 남자의 흰 색 머리.
그때, 내 꿈은 정해졌었다. 그 남자의 수중 아래 웬만한 섬 크기의 흰 수염고래가 크림슨 하트 기지 밑을 헤엄쳤던 모습이 내겐 인상적이었고 강력한 자극제였다. 아래의 고래를 보는 나를 이름모를 남자 아이가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잊고 나는 육중한 몸집의 고래를 우와하고 내려다봤다. 한 번 꿈틀거릴 때마다 바다에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주는 고래.
나는 고래가 되고 싶었다. 크림슨 하트의 보스가 되고 싶었다.
본가로 돌아온 그 아이는 자라서 끝내 남장을 하고 청부살인업계에 발을 내민다.
세월은 거칠게 흘렀다.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추잡한 일을 맡아왔지만 자랑스럽게 생각했지. 경력. 이것은 곧 경력이다. 밑바닥부터 시작했다. 그런 으슥한 곳에서 일을 하다 내게 숨막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어느날 내게 일을 맡긴 고용주는 크림슨하트 요원. 대륙 마피아간의 분쟁에서 공을 세우자 은밀하게 제안했다. 그 날 나는 잠에 들지 못했다. 첫 살인을 했던 날보다 더 잠이 오지 않았다.
꿈을 이루기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다. 나는 지금도 달린다.
그의 손을 잡아 온 거대한 지하실에서 나는 오랜 시간동안 묵었다. 훈련, 대련, 잠. 일과는 쳇바퀴처럼 돌았다. 그럼에도 버텼다. 그 수 많은 사람들의 눈빛을 견디고 총구를 상대방의 면전에 갖다붙혔다. 그리고 탕-.
그 훈련소에서 크림슨 하트 요원들은 나를 상세히 관찰하고 프로파일링했다. 크림슨 하트의 일원으로 확정되기 전 많은 시험을 쳤으나 다행스럽게도 옷을 벗는 일이 없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불안불안 가까스로 버텨오고 있던 중 나는 좋은 소식을 들었고, 오늘 내가 성인이 되는 날. 크림슨 하트 기지에서 나에게 훈련소에서 맺은 결실의 연락을 주었다. 이어 요원 한 명을 보낸다는 말로 대화는 끊겼다. 정말 죽을 듯이 기뻤으나, 너무 감정표현을 묵혔던지라 표정이 굳어 고개만 끄덕였다.
그게 끝. 내 표현의 끝이였다. 감성스런 태도나 말을 한다면 여자로 오해받기 쉽상이였으니까. 내 꿈을 위해서는 여자의 삶은 포기하는게 당연한 일이였다. 감정을 숨기는 것도 당연했다. 모든걸 반대로. 여자인 나를 세상에서 숨긴다.
소녀는 남자들이 풍기는 수컷냄새를 실컷 맡으며 수컷인 척하는 여자로 살기로 결심했다.
크림슨 하트는 18세기 영국의 폭군 헨리 8세에 대항하여 만들어진 작은 조직. 눈덩이처럼 굴리고 불어나 다른 대륙의 조직들과 연합을 하여 우람하게 성장했다. 그들은 육지 위 권력자들을 뒤에서 군림하였다. 하지만 높은 자리에 올라 갈수록 피로 지저분해지는 책임감에 조직의 우두머리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바란건 이것이 아니다. 그는 손대는 족족 피칠갑한 길을 걷게되었다. 그 남자는 더러운 육지에서 벗어나 바다로 나아가길 원했다.
어느새 꿈꿔왔던 미래와 달리 자신의 조직이 대지의 일에 개입할수록 망쳐놓는 느낌이 들었다.
하얀 머리칼의 그는 좀더 아래로 내려오는 대신, 아름답고 깊은 것을 가지길 원했다. 순수한 바다. 푸른 바다를 갖길 원했다.
고래는 수족이 없어지는 대신 광대한 바다를 자유로히 헤엄치길 원했다.
그는 대지의 조직들과의 연을 끊은 후 바다로 나아갈 준비를 했다. 그에 따르는 조직원들과 조직이 만들어진지 반 백 년만에 바다 위로 커다란 배를 띄웠다.
조직을 다스리는 흰 머리는 조직의 명칭을 Crimson Heart라 작명했다. crimson; 피 비린내 나는. 피 비린내나는 고래의 심장을 상징한다.
그리고 고래는 원래 육지의 동물이었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그는 육지에서나 바다에서나 언제나 동물들의 왕이었음에.
지금의 크림슨 하트 보스는 몇 세기 걸쳐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를 지배한다. 온갖 비밀스러운 일들을 어떤 방법이로든 처리하는 위대한 12명의 마피아 패밀리의 보스들.
그들 위를 군림하여 해양을 거느리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니까 너무 긴 말을 요약하자면, 고래를 상징하는 크림슨 하트는 역사깊은 위대한 해양 마피아 패밀리라고.
그것도 전 세계를 주무르는.
그런데 말이야, 크림슨 하트 패밀리 족보에는 여자가 단 한 명도 없어. 크림슨 하트는 여자를 받아주지 않는다. 오직 남성들만. 그저 대를 이을 수단으로 쓰였다고 말하는 아버지의 옛말이 귀에 생생하지만 상관없다. 그깟 거 평생 숨기고 살면 되지 않아?
현재로 돌아와서 항구에 선 나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는다. 저 멀리 넘실거리는 파도 너머 수평선을 가로지르는 새끼 고래. 그 놈의 형상에 문득 가슴이 설랜다.
어느덧 꿈의 장소가 내 눈 앞에 당장 가까이 와있는 것 같아. 어릴 적 아버지와 보았던 그 고래, 엄청난 포스의 아버지의 보스. 내가 보았던 그 흰 머리 남자는 오 년 전, 이미 명을 다했다고 한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 현재 다른 사람이 그의 자리를 이어 받았다. 상상이 되지 않아. 그 흰 색 머리가 평생 자리를 지킬 것 같았는데.
과거를 되짚다 머리 위로 강하게 휘몰아치는 바람. 겉잡을 수 없이 흩날리는 짧은 머리카락과 얼굴에 와닿은 칼같은 바람에 눈을 찌뿌렸다. 애써 위를 올려보니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헬리콥터의 문을 열고 외친다.
"착륙합니다."
prologue; 바다의 제왕, Crimson Heart.
"……."
"아프시면 소리내셔요. 이 상합니다."
"아닙니다. 이 정도론 끄떡없습니다."
크림슨 하트의 요원은 헬리콥터를 항구에 정착시킨 후 크림슨 전통 통과의례를 진행 중이다.
나는 오기로 남자 앞에서 신음 소리를 본능적으로 참아왔다. 이를 물고 다리에 모든 힘을 준다. 요원은 거의 근육 부분이 드러난 손가락에 흘끔 내 눈치를 봤다.
근데 속은 이미 난리 부르스가 나서 속으로 소리를 질렀지만 참았다. 진심으로 존나 아프다. 말로 표현 못할만큼. 아버지를 불러 지껄이고 싶지만 난 크림슨 하트 패밀리니까 체면을 지켜야한다. 지금 부들거리는 내 왼 손 약지에는 타투를 하듯 다도로 크림슨 하트를 새기고 있다. 참다 눈물이 찔끔 나와도 파돗바람에 빠르게 말려졌다. 가만히 앉아 살을 파는 칼날을 느끼며 잡을게 없는 오른 손을 쥐었다 폈다를 계속했다.
파도 소리로 침묵을 무마했다. 요원이 일이 끝난 내 손가락을 관찰하며 '여자라면' 애 떨어질뻔한 말을 한다.
"남자치곤 손가락이 너무 얇네요. 손도 그렇게 큰 편도 아니고. 여자 손같이 말이죠."
벌써 크림슨 하트 요원한테 의심받으니 티나지 않게 흠칫, 했다. 하지만 내가 쌓아온 경험으로 차분한 표정을 유지한다. 평소에 그런 말을 자주 들어서 어떻게 위기를 넘길지 이미 대처하는 말이 입에 붙었다. 내 손을 좀 더 관찰하려는 요원의 행동에 기분나쁜 척, 손을 빼내어 평소에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붕대를 꺼냈다. 피가 질질 흐르는 손가락을 감으며 자리를 일어났다.
"그런 소리 많이 들었지만, 요원님. 총잡는 남자한테 실례입니다."
"죄송합니다. 상대를 분석하는게 습관이라서요. 그럼 이만 출발해볼까요?"
요원은 자리를 정리한 후 내 서류가방을 들고 일어난다. 헬리콥터를 향하는 요원의 발걸음을 따라가 안으로 몸을 실었다. 요원이 시동을 키자 안전벨트를 매고 헤드셋을 꼈다.그가 기어를 올려 슬며시 중력이 약해지는 기분이 들자 가슴이 벅차오르는거다. 마치 헬리콥터 밑 요동치는 물결 아래로 잠식하는 것처럼. 내가 이때까지 설레어도 믿을 수 없는 꿈이 실현되는게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 감정을 얼렁둥땅 넘겼으나 바다만 보면 심장이 빠르게 뛰는게 아버지를 닮았는가보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나를 잠시 보고 갑자기 전투기속도로 운전하는 요원. 순간 안전벨트를 꼭 쥐고 몸이 흔들렸다.
"지금부터 자연스럽게 헬리콥터에 몸을 맡기세요."
요원은 그 말을 끝으로 비장한 얼굴을 한다. 속도를 최고치로 올리더니 엄청난 반동에 그대로 나는 헬리콥터 창문에 머리를 박았다.
*
"도착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
어질어질한 정신머리. 어깨를 흔들어재끼는 거친 손길로 눈을 떴다. 아마 내가 기절했는듯 하다.
요원은 이미 크림슨 하트 기지 안 비행장에 착륙해서 내린지 오래된 것같았다. 나는 내가 잠깐 기절한 줄 알았다. 분명 새벽이었는데 어째서 해가 중천에 떠있는가. 경계를 풀고 자서 쪽팔림이 밀려왔다.
"처음은 그렇습니다. 다들 항상 정신을 잃었거든요."
"…그럼 다행이네요."
"보스께서 기다리십니다. 탄소님께서 잠수함으로 보내신 짐들은 이미 탄소님의 방에다 보냈으니 걱정마십시오. 어서 내려오세요."
"……."
비몽사몽한 채로 안전벨트를 풀고 헤드셋을 빼 헬리콥터에서 내렸다. 요원을 따라 문을 열고 올라가니 크림슨 하트의 진귀한 풍경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넓디 넓은 옥상 간판.
은색으로 된 나라처럼 거대한 넓이. 이 크림슨 하트 기지는 물 위에 떠있다. 옥상간판 중앙에 솟아있는 문을 열고 흰 복도를 걸어가면 가운데에 설치된 금칠 엘레베이터. 윗층으로 올라가는 건 하나밖에 없다. 그곳은 아마 보스가 나를 기다리는 곳.
기지 옥상 바로 위로 보이는 보스의 방. 보스는 자신을 제외하곤 다 엘레베이터를 이용하여 올라오라했다고 한다. 벌컥벌컥 여는게 마음에 안 든다나 뭐라나. 요원은 궁시렁 대며 복도 안을 구두소리를 내며 걸어간다. 그를 따라 온 위치에 엘레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이 외에도 보스의 방 밑으로 해서 15층까지 구성된 안의 구조. 그리고 수백 개의 방들이 있다. 희고 푸른 색 복도의 벽, 얇지만 단단한 문으로 구성된 각방들. 복도의 사이사이 창문 사이로는 바다에 반사되어 들어오는 상쾌한 햇빛. 필요한 모든 것들을 소유한 거대한 건물이 지금 깊은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이다.
어렸던 내가 본 크림슨 하트는 바다 위에 뜬 거대하지만 작은 나라같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크림슨 하트의 패밀리와 요원들에게 필요한 것들은 모두 이 거대한 선박안에 있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짜릿하지 않은가? 이제 내가 뼈를 묻을 멋진 곳이라니.
기쁜 마음을 삼키고 도착한 엘레베이터 소리에 복도를 조금 더 걷는다. 요원이 보스의 방을 열고 들어가자 바다 최고 크림슨 하트의 위엄 넘치는 보스는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다. 흰 정장을 입은 자몽색 머리가 방문과 돌아선 채 와인색 쿠션의자에 반쯤 누워있었다. 반응이 없다. 커다란 창문을 보니 눈을 감고 있는 보스가 비춰진다.
"보스, 왔습니다."
"……."
"보스. 왔다니까요."
"……."
"보스,"
요원이 답이 없는 보스에 못 들으셨나 싶어 다시 한 번 부르자 요원의 얼굴에 서류 수십 장들이 날아왔다.
종이의 날에 요원이 코를 맞아 얼굴에 인상을 쓰며 쭈그려 앉았다. 공중에 흩어져 내리는 종이들을 주워 모아 들자 그제서야 보스가 입을 열었다. 돌아간 의자. 잠들었는지 눈을 느리게 껌뻑이며 꾸역꾸역 말을 하는 남자. 부시시한 자몽 머리는 신경을 잔뜩 날카롭게 세웠다.
"내가 문 열기 전에 노크하라고 몇 번 말했을까. 익사하고 싶으셔? 사방이 온통 물인데 담궈드려?"
"…죄송합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보스에 요원이 움찔했다. 모은 종이를 빠르게 보스의 책상 위 옮겨 두고 나를 앞세운다. 얕은 잠에 인상을 짓는 보스에게 대면시켰다. 고동색 책상에 다리를 올린 남자는 하품을 쩍 한다.
이 사람은 예나 저나 자기 맘대로 한다니까. 내 얼굴이 안 보이는듯 눈을 부릅뜨며 노려보는데 그에 나는 무표정으로 쳐다봤다.
"저 왔습니다. 보스."
"누구 왔는데 그게 별 일인가. 어쩌라고. 아주 대명인사 납시었어?"
"잠에 젖어서 제 얼굴이 안 보이시나 봅니다."
"잠이 너보다 중요하지. 암. 지금 네가 잠자는 고래의 코털을 건드리셨다고. 내가 지금 굉장히 화가 나요, 씨발."
"보스. 접니다."
"네가 누군데?"
"저요. 민탄소."
그제서야 심봉사가 앞이 트인 것처럼 눈이 커지더니 우당탕. 천하의 크림슨 하트 보스가 필기구를 엎은 것도 모르고 허둥지둥 달려온다. 내 얼굴을 여기저기 돌리고 만지작거리다가 볼을 쭈욱 잡아당긴다. 아 씨, 그렇게 나이를 먹어도 바뀐 게 없어. 아버지. 지금 크림슨 하트 요원도 있는데 이게 무슨 황당한 꼴이야. 뒤의 요원의 표정은 안 봐도 뻔할 뻔자다. 세상에 보스가 왜 저러지 싶을 거다.
한숨이 나온다.
"탄소? 내 아들? 내 새끼?? 이게 얼마 만이야!!"
"이거 좀 놔 주시겠습니까. 보스."
"아빠한테 경어체 쓰지말라고! 아가 더 예뻐졌다. 뭘 먹어서 이렇게 예쁘니? 우리 아들."
"알았으니까 나중에, 나중에 감동서린 재회해요. 보스 제발 체통 좀 지키세요."
우쭈쭈 거리면서 머리카락도 막 쓰다듬는다. 머리카락이 왜 이리 짧냐고 징징대는 소리도 하고 난리다. 요원은 경악서린 표정 그대로 얼어버렸다. 내가 보스의 자제인줄도 몰랐을텐데.
아들보고 예쁘다고 하는 모순도 저런 모순이 없을 거다. 거기다 어설프게 아들이라고 하는 소리가 참 뭐시기하다. 지금 나 대놓고 여자인거 들키라는 건지 원. 굉장히 피곤하다. 아 뒷골이야.
보스는 아까와 상반되게 얼굴이 활짝 피어 활기 찬 인간으로 바뀌었다. 거기다 멍청함도 첨가해서. 패밀리가 생각하는 보스는 아마 무기력한데 무서워서 건들 수 없는 존재. 하…. 무슨 생각으로 보스는 나만 보면 일명 '빠돌이'가 되는지 모르겠다.
아, 내가 말 안 했나?
"우리 아들은 항상 새침해. 응? 아빠한테도 그렇고 다른 사람한테 굉장히 무뚝뚝하고. 그래서 어디 장가가겠어? 물론 장가보낼 생각은 1도 없지만 말야."
크림슨 하트의 보스, 해양 마피아 보스들의 왕인 민윤기는 내 아버지이다. 거기다 딸 바보.
내가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겠단 선포를 했을 때가 딱 아버지가 보스 직에 올랐을 때. 아마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일 것이다.
그때 그렇게 아버지가 날 말리고 내가 딸보고 아들이라 불러야한다니라며 열불을 냈었다. 딸내미가 위험한 길을 걷게 하고 싶지 않다며 발목을 잡고 매달렸다. 아버지는 제발 다시 생각해봐달라고 울먹울먹거렸지. 아버지는 내 앞에 자존심을 세우지 않으셨다. 여자는 여자답게 사는게 제일 좋은 거라며 나를 예쁘고 잘키우고 싶다고 했으나 거부했다. 10살짜리 소녀는 아버지를 외면하고 어두운 길로 들어섰다. 아버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여기까지 왔으니 아버지는 나를 신기하게 보고있을 것이다. 그래도 내 의견에 따라서 여자인 걸 숨겨주고 나름 신경쓰는 모습을 보니 많이 안타깝다. 근데 아버지가 서류 확인 도장을 찍으셨을텐데. 왜 그렇게 반대하시던 분이 쉽게 순순히 해주셨지?
아버지 속은 알다가도 도통 모르겠다니깐.
"원래 성격이 그렇습니다. 조금 피곤하니 들어가서 쉬어도 되겠습니까."
"그래 그래, 내 새끼. 들어가서 푹 쉬어. 아들 방은 3층이야~. 아버지 방이랑 조금 멀어서 아쉽긴 하지만. 자고 일어나서 15층 맨 끝방으로 가야돼."
"알겠습니다…. 알겠으니까 놔주세요."
"방에 가보면 아버지가 선물 둬놨으니까 한 번이라도 열어봐줘. 응?"
내 얼굴을 만지작 거리던 손을 놓고 나를 보내는 보스는 해맑게 웃었다. 저 사람, 일 제대로 하는거 맞겠지?
기를 빼앗기고 나가려는데 내가 눈 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하트 뿅뿅을 날렸다. 세상에. 굉장히 앞날이 험해질거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내 착각이겠지. 엘레베이터를 타고 아버지가 말한 3층에 도착해 복도를 거니는데 어떤 방문이 눈을 사로잡았다. '접근 금지'라고 크게 개판으로 쓰여진 방문.
살짝 열고 들어가니까 내 물건들이 정리되어있었다. 아마 내 방문 앞을 개판으로 쓴 사람은 민윤기. 보스임에 틀림없다.
샤랄라한 공주풍으로 꾸며버린 내 방에 들어가있으니 머릿속이 진짜 개판이 되는 느낌. 아버지. 아버지가 내 머릿속을 마구 헤집어놓은 느낌. 침대 위 선물상자가 커다랗게 놔있었으나 정장을 벗지도 못하고 그대로 침대 위에 엎어져서 잠에 빠졌다.
피곤하다.
벌써부터 기가 빨리면 안 되는데 이상하게 약해지는 것 같아.
*
"…보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절대로 그러지 마십시오. 명색이 크림슨 하트 보스이신데 이러시면 큰일납니다."
탄소가 나가자마자 말을 따발총으로 내뱉는 요원. 민윤기는 그러든가 말든가 탄소가 나간 여운을 즐기다 제자리로 돌아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흥얼거리던 보스는 책상을 잡고 바짝 끌어 당겼다.
보스는 순식간에 표정을 탈바꿈했다.
"신경꺼라. 나 지금 존나 화났는데 이정도면 많이 참은거거든."
"……."
"누가 민탄소 들여보내래. 누가 내 허락없이 동의한거야. 씨발, 누가 그러래."
"간부들이 직속으로 내려온 명령받아서 통과시킨 것 같,"
"씨발 존나 답답해. 됐고, 민탄소 소속팀장. 김태형 맞지?"
"…예."
웃음을 쫙 뺀 민윤기는 책장에서 낡은 파일을 꺼내 촤르륵 넘기다 코드네임 V(뷔)라 쓰여진 파트에서 멈췄다.
V. 김태형. 본명 김태형의 프로파일을 찬찬히 내려다보며 표정을 굳혔다.
요원은 갑자기 변한 분위기에 바짝 긴장하여 서서히 민윤기가 꺼낼 말들을 기다렸다. 꿀꺽 삼킨 침에 목울대가 울렁거리고 민윤기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김태형 profile.
1. 코드네임: V.
2. 신체정보: 비공개.
3. 특이사항: 걸어다니는 크림슨 하트 비밀병기.
4. 특기: 크림슨 하트 최고의 검사. 장도, 단도 모두 활용가능. 날아오는 총알을 칼로 막거나 벨 수 있음. 단거리에 훌륭한 능률 보임. 총기쪽엔 흥미 없음.
5. 상세정보: 겉은 고삐가 살짝 풀린 망아지이나 책임감있음. 속은 둥근데 모난 구석이 있음. 교우관계는 좋음. 동료애가 굳건함. 색을 좋아함.
6. 가족관계: 부모: X. 형제 하나 존재. 김석진.
"김석진…."
민윤기는 중얼거리다 반듯하게 흰 정장을 갖춰입은 김태형의 증명사진을 뚫어져라본다. 흰 머리. 구리색 피부. 깊은 눈매와 굵고 높은 콧대. 선명한 입술선.
한참 무언갈 생각하다 종이에 무언갈 적는다.
김태형의 자료들을 넘기고 눈이 세모로 긴 남자에 대해 정리된 자료들을 훑었다.
-박지민 profile.
1. 코드네임: 지민.
2. 신체정보: 비공개. 특이사항: 없음. 만년 2인자.
3. 특기: 두 손으로 동시에 칼, 총 사용가능. 체력이 남들보다 뛰어남. 장거리에 승률 높음.
4. 상세정보: 정호석, 김석진 관련된 일 이후 눈빛이 변함. 몸에 애교가 배였음. 그 일 이후로 감정기복이 심함. 동료에 대해선 마음이 여림.
민윤기는 자료를 정리해 제자리에 넣는다. 드륵. 자리에 일어나 고급진 무늬, 붉은 벽지가 깔끔히 발린 벽 가운데에 걸린 액자 쪽으로 걸어갔다.
얼굴을 잘려낸 세 명과 자신, 정호석, 김태형, 박지민 나란히 앉아 찍은 사진. 7명이었던 패밀리는 와장창 깨져버렸다. 약 5년 전, 전쟁으로.
자몽색 머리는 주머니에 나이프 세 개를 꺼내 사진을 향해 던졌다. 와장창하고 깨진 액자의 유리. 각각의 나이프는 정확히 이미 없는 세 명의 얼굴을 찔러들어갔다.
힘의 후유증으로 덜덜 거리던 나이프가 곧 움직임을 멈췄다.
"평화로울 때가 제일 위험한 법."
"전해. 팀이 결성됐다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눈칫껏 요원은 방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요원은 엘레베이터를 타고 최하층인 15층 맨 끝 김태형과 박지민이 있을 방에 조심히 들어간다.
그리고 민탄소가 크림슨 하트 패밀리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을 그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대낮에 흰 침대에 대자로 누워 몽롱한 표정을 짓던 김태형. 정장바지는 두고 상체탈의를 한 그에게서 술냄새가 나 절로 표정을 찡그렸다. 그럼에도 감정을 숨긴다. 요원은 태형의 신경을 건들여 칼에 찔려 죽기는 싫었다.
눈을 깜빡이는 V. 흰 머리를 넘기며 야시시 올려다보는 눈길. 요원은 지지 않고 똑바로 내려다 본다. 픽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은 김태형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쉽게 져주는 태형이 낯설다.
"무슨 일이야."
"새로 온 크림슨 하트 패밀리 일원이 합류합니다. 팀은 이렇게 3명으로 구성합니다. V님께 탄소님을 가르치라하셨구요."
"…보스가? 나보고 맡으라 했다고?"
"크림슨 하트 적응 단계입니다. V님이 도와주십시오."
시원하게 구릿빛 근육진 상체를 보이는 김태형이 일어나 와인잔을 들어 천천히 돌렸다. 뭔가 미덥지 않은 표정. 골똘이 생각하던 태형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소름이 돋은 요원이 움찔했다.
태형은 와인잔을 유리상에 둔다. 묘한 눈으로 와인이 잔 안에서 돌아가던 것을 보다 요원으로 눈을 돌린다.
"예뻐?"
"…예? 그건 제 전문이 아니라서요. 탄소님께는 그런 말씀 안 하시는게 나을 겁니다. 여자같은걸 싫어하시는 분이니까요."
"흐응…."
재미없다는걸 표정으로 적나라하게 나타낸 태형은 은근히 웃음기 있는 얼굴로 돌아왔다.
태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에서 달그락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머리가 어지러운 지민이 두 손에 와인잔과 와인병을 들고 나왔다. 요원이 아무말 하지 않으니 계속 되는 정적.
"어이, 요원. 코르크 마개 따먹게. 오프너 없어?"
지민은 정적을 깨고 별 쓰잘데기없는 말을 한다. 고개를 저으니 아쉬운 소리를 낸다. 태형은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는지 아무 말도 없다. 태형은 술이 취해도 나름 생각할 줄은 알았다. 그만큼 부어라 마셔라 한 건 아닌지. 술냄새는 이렇게 지독한데. 묘하게 색기를 가진 김태형은 칼을 들고 위험하게 쉭쉭 휘둘렀다.
"칼로 찔러도 돼?"
태형이 침대보 위로 푹 쑤시는 시늉을 하자 지민은 오프너를 찾아도 없는지 와인병 주둥이 부분을 탁자에 내리쳐 깨뜨렸다. 이어서 자신의 잔에 쪼르륵하고 부어 마신다. 요원과 태형. 둘의 하는 얘기를 들었는지 지민은 와인을 원 샷하고는 다 파악했다는 듯 웃었다. 굳은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요원. 태형은 탁자에 고인 와인을 검지로 훔쳐 입에 쏙 넣고 빨았다.
"농담이야. 칼로는 건들지 않을게. 얼른 보고 싶다. 오늘은 안 돼? 내려오라 그래."
"오늘은 안 됩니다."
"아쉽다."
태형과 요원을 보던 지민은 마시던 와인잔을 거꾸로 들어 남은 와인 한 방울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깨끗한 바닥을 자주색 물방울이 튀기며 더럽혔다.
지민과 요원의 눈이 마주치자 요원은 탄소가 조금 걱정되었다.
"마침 심심한데 잘 걸렸다. 좀 굴려먹어도 되지?"
왠지 모르게 흥미로워해하는 둘의 모습에 이해할 수 없었다. 허나 자고 일어난 후 탄소의 순탄하지 않을 길이 훤히 보였다. 나쁜 사람들은 아니지만 이런 환경은 그들을 모시는 나도 적응하기 어렵다. 둘의 반응에 요원은 진심으로 안쓰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크림슨 하트의 기지 맨 아래에서 살고 있는 거대한 고래의 미묘한 움직임. 울렁이는 느낌이 발 밑으로 느껴졌다. 크림슨 하트를 나타내는 고래는 항상 잠잠코 꼬리를 살랑대며 미세한 헤엄을 쳤었으나 이렇게 티나게 움직인 적은 한 번도 없는데. 기분 탓인가 하였으나 눈을 반짝이며 고래가 움직였다라고 말하는 김태형에 그저 허구된 생각이 아니라고 느꼈다. 이 창문 너머로 출렁이는 바닷 물결에 요원의 마음이 요동친다.
평화로울 때가 제일 위험한 법이라고 흘려 말한 보스가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prologue 완료.-
해양 판타지 조직물: 힐링 스릴러
Two Hearts(투 하츠)로 연재를 시작하게 된 그루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