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뚝 울음을 그치자 지민 선배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내 접시와 자신의 접시를 겹쳐 폐기함에 가져다 놓고 내가 있는 쪽으로 돌아왔다. 일어서. 재밌는 거 보러가자. 내 어깨를 잡아 일으키곤 나를 앞서 유리문을 천천히 열고 나갔다. 그는 더 이상 태형 선배와의 그 일에 대해 묻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가니 옆쪽으로 호텔을 정면으로 들이박아 찌그러진 차가 보였다. 차 뒷편으로 다가간 지민 선배는 트렁크를 열었다. 그 안에는 온갖 총기, 검이 가득했다. 받아. 지민 선배가 그 중에서 무언갈 던저주는데 그 것은 피스톨. 총의 종류중 제일 작은 총. 나같은 저격수가 사용하기 좋은 총이다. 한 손으로 받아들어 고쳐쥐니 지민 선배는 자신의 주사용무기인 검 바스타드 소드(긴 검이나 양손으로 쓰는 검)한 쌍을 꺼내 들었다. 선배는 트렁크의 문을 닫고 꽤 형태가 잘 잡힌 자세를 취했다. 칼을 쥔 두 손은 다부져보였다. 칼을 잡은 손을 한참 감을 되살릴려는지 놀리는 게 보였다. 그러다 지민 선배는 고개를 저으며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내게 어두워보이는 표정관 다르게 장난스럽게 말을 붙혔다. 오래 잡은 티도 났고. 내가 소문으로 들었는데 네가 그렇게 총을 잘 쓴다며. 저 멀리 김태형 맞춰봐. ...?잘못들은 것 같아서 지민 선배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쏴보라니. 무슨 이게 하극상인가. 고갤 돌려보니 호텔 뒷편 잔디가 얕게 깔린 언덕에 태형 선배가 장검을 들고 서서 검을 가로 뉩혀 관찰 중이었다. 처음 보는 검인데.. 카타나? 긴 검인데 얇지만 왠만한 모든 물체를 벨 수 있고 위험한 검이다. 모양이 조금 더 변형된 듯한.
"태형 선배가 허락없이는 총기소지 금지랬습니다. 그리고 쏴보라니요?"
"됐어. 내가 허락했으니까 걔도 뭐 말 못할거야. 어짜피 가기 전에 줄려고 했어. 위험한 곳이니까."
지민 선배를 쳐다보니 태형 선배가 있는 언덕 쪽으로 손을 뻗어 손모양을 총처럼 만들더니 탕- 쏘는 흉내를 냈다. 쏘란 말이야? 정말로? 한참 머뭇거리다 총을 들어 저 멀리 윗쪽에 서 있는 태형 선배를 향해 겨냥했다. 소리 없이. 순식간에 태형 선배는 날아가는 무언가를 느끼곤 칼날을 세워 자신의 쪽으로 오는 탄알을 향해 베는 듯이 칼을 허공에 휘둘렀다. 그리고 탕- 하는 소리가 뒤늦게 내가 쥔 총에서 났다. 반동에 팔을 드니 지민 선배는 씨익 웃으면서 칼을 쥔 두손으로 팔짱을 끼며 말했다. 성공이다.
...뭐가 성공이지? 하고 태형 선배쪽으로 돌아보자 붉은 햇빛이 내려와 황금빛을 띄는 그의 머리칼이 파도바람에 흔들렸다. 세로로 세운 검의 등을 받친 큰 손. 단아하고 간결한 그의 몸짓에 총알의 흔적은 사라졌다.
말도 안돼.
황금빛 잔디 위로 떨어진 태형 선배 밭 밑 탄알 반조각 두 개. 내가 날린 총알을 피해 간 사람은 없었는데. 김태형은 탄알을 갈라냈다. 정확히 반쪽으로. 한번 더 총을 쏘니 칼로 공중을 베는 선 고운 동작을 하는 태형. 마치 검무를 추는 듯 했다. 또 다시 탕- 하는 소리. 소리보다 더 빠른 총알을 벤 김태형이다. 이럴 수가 있어? 칼을 한바퀴 쉭 돌리다 한 손에 쥔 칼집으로 시원하게 넣는 선배. 언덕을 올려다 보니 백색이었던 머리카락은 햇빛을 머금고 얕게 흔들렸다. 나를 무표정으로 내려다 보던 태형 선배는 나와 부볐던 입술을 열었다.
그에 무언가 자존심이 반으로 나눠지는 느낌이 들어서 총을 꾹 쥐었다. 총만큼은 자신있었는데. 표적이 선배라 해도 맞출 생각이었는데. 지민 선배가 말한 재밌는 것이 이거였다. 가볍게 내 총알을 갈라낸 그에 총을 내렸다. 졌다. 오늘 그에게 졌다. 다시 날아오지 않는 탄알에 태형 선배는 아쉬운 듯이 칼집을 매만졌다. 물건을 가지러 간다더니 이거였나. 하기야 탄알을 잘려내는 칼이 무사할리가 없다. 특수 제작된 거 겠지. 탄알을 자를 수 있는 사람, 오직 한 사람을 위해 만들어 진 것. 평소에 조금은 만만하게 생각했었다. 지민 선배는 내 좁은 어깨에 손을 올렸다. 황금색으로 빛나보이는 태형을 흐뭇하게 올려다 보며 쌉쌀하지만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김태형은 나와 함께 패밀리로 들어온 괴물이야. 괴물도 저런 괴물이 없지. 5년 전에도 걸어다니는 비밀병기라고 불릴 만큼 대단했어. 전쟁에서 J-hope형이 자살하고 진형이 라이언하트를 따라 나간 이후로 조금 변한 것 같지만 실력은 녹슬지 않았네. 나는 믿고 따르던 사람들이 나를 배신한 사실에 견디질 못했어. 많이 방황해서 다시 그 때의 실력을 되돌리긴 조금 어렵지만 말야. 태형인 누굴 기분좋게 해주는 무언가가 있어. 놈이 내 곁에 있지 않았다면 난 아마 이 자리에 없었을지도 몰라. 김태형의 사람이 된다면 그 보다 행복한 일은 없을 거고. 무엇보다도 난 태형이를 전적으로 믿어. 아무리 걔가 화를 내도. 언젠간 다시 돌아올거란 말이지. 놈은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살아서 동료를 매몰차게 버리지 않아. 장난이 많아도 그 장난의 크기만큼 상대방을 마음에 두고 있단 뜻이니까 너무 마음에 두지 말어. 한번씩 네 마음에 상처를 내도 그런가보지하고 눈 감아주고. 돌아와서 안아줄거니까.
"항상 능글맞게 굴어도 대단하고 멋있는 놈이야. 난 꼭 태형이가 보스 물려받았으면 좋겠어."
난 보스 자질이 없거든.
씁쓸하게 웃고 호텔 안으로 들어가는 지민 선배의 뒷모습은 아까 뒤에서 봤을 때보다 더 키가 커보였다. 햇빛이 쏟아지는 언덕에 그는 나를 내려다 보다 지민 선배가 들어간 호텔의 뒷문으로 내려와 들어갔다. 혼사 서 있는 절벽 아래를 침식하는 파도 소리에 눈을 감았다. 내 안의 고요한 바다에 한 마리의 고래가 들어와 잔잔한 파동을 만들어내다 깊숙한 심해로 파고 들어갔다. 지민 선배는 자신보다 더 뛰어난 태형 선배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정말 소중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나를 능가하는 선배에 대한 놀람과 경의로움일까, 아님 열등감일까. 지민 선배가 내게 남기고 간 잔상에 전자였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라이언 하트. 태형 선배 조차 버겁다는 그 사람, 전정국. 사자가 날 갈기갈기 찢는 끔찍한 상상을 하니 바로 눈이 뜨여졌다. 잔혹한 망상관 달리 바다와 대지가 만들어내는 풍경은 장관이였다.
총을 정장자켓에 넣고 호텔의 유리문을 밀었다.
어느덧 5시는 코 앞으로 다가왔다.
*
절벽과 언덕에 서있던 사람들이 만든 여운에 호텔방으로 들어와 주섬주섬 느리게 내 짐을 꺼냈다. 큰 박스 안, 맨 밑에 깔린 검고 긴 가발. 흰 드레스와 투명한 보석이 박힌 티아라 왕관. 그리고 하얀 색 힐.
여자로 변할 시간이다. 정장을 하나 둘 씩 벗고 있으니 문을 두들기는 소리. 지민 선배였다. 보스가 나 먼저 오라니까 김태형이랑은 잘 풀고 기분좋게 와. 어우 야, 다시는 김태형이랑 차는 못타겠다. 간다. 방 문 밖, 앞에서 장난치듯 말하는 지민 선배는 부시럭 소릴 내며 자릴 떴다.
"죄송합니다. 뒤따라 가겠습니다."
5년 전 그 일에 상처가 많아보이는 지민 선배는 내 마음을 흔들었다. 태형 선배에게 사과를 해야했다. 그리고 기분을 풀려 그를 먼저 보낸 후 나는 따로 차를 타고 갈 생각이다. 혼자 오라고 한 보스의 말이 생각이 나서. 셔츠를 벗고 바지까지 다 벗은 나는 속옷차림으로 일어나 흰 드레스를 입었다. 거울 앞에 앉아 사용방법이 가물가물한 화장품들을 만졌다. 예전 크림슨에 들어오기 전, 매춘부들 사이에서 임무를 맡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매춘부들이 깔깔 거리며 내 얼굴에 화장품을 얹은 기억이 있다. 그 때의 임무는 여장을 하고 그녀들 사이에 끼어 어느 한 더러운 놈을 죽이는 것이었는데. 가슴골이 다 파인 짧은 찰랑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총을 들어 피를 튀겼었다. 그러니까 뭐..어떻게 화장했더라.
머리가 처음부터 짧게 짜른 탓에 가발을 쓰고 진짜 머리칼에 고정을 시키니 꽤 여자같았다.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는 일이다, 생각하고 그저 순서를 상기시키며 얼굴에 조금씩 덜어 바르기 시작했다. 기본 화장품을 다 골고루 바른 하얀 얼굴에 분홍색 섀도우, 아이라인,마스카라. 마지막으로 립글로즈로 입술에 생기를 줬다. 분홍끼가 도는 입술을 만들고 나서 거울을 보았다. 아, 이정도면 완벽하구나. 거울에 비치는 김태형이 준 검붉은색 속옷에 정말 여자라는 것에 실감이 왔다. 흰 드레스를 입으니 몸에 달라붙는 선에 굴곡이 예뻐보였다. 티아라를 가발 위에 쓴 후 바닥에 앉아 힐을 신고 있었다.
똑똑.
김태형. 태형 선배다. 목을 가다듬고 대답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먼저 문 틈새로 들려오는 그의 무뚝뚝한 말에 입을 닫았다. 보스가 너 데리고 오래.
아버지가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는데? 분명 나보고 혼자 오랬는데. 문 앞으로 기어가 쭈그려 앉아 벽에 등을 대고 말했다. 보스가 저 혼자 오랬는데요. 몰라. 상황이 바뀌었나보지. 나와. 여전히 감정없는 목소리에 가슴이 미어졌다. 나름대로 날 걱정하고 아껴줬을 그에게 미안한 감정이 북차올랐다. 나만 생각했다. 내 위주로 행동한 내가 잘못이었는데 괜히 그를 탓하고 밀어냈다. 내가 들어오라고 이미 문을 열어놨는데 쫓아보낸 그에게 미안했다. 내게 훅 들어와 내게 안긴 그가 너무 갑작스러운 나머지 안아주다 밀어내버리곤 당황스럽게도 선을 죽 그어버렸다. 자존심. 그것은 상대방을 견제하고 멀리하겠다는 전제를 두는 마음이었다. 이타심. 내가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가족으로써, 한 조직의 일원으로 받아주지 않을까. 그리고 내 이 이상한 감정도 어느순간 그 이유를 알게 되지 않을까. 조금은 손을 내밀어도 되지 않을까. 조용히 대답을 삼가다 침을 삼키고 문을 사이에 두고 나를 보지 않는 그에게 사과한다.
"선배. 죄송합니다. 제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뭐가. 네가 왜 미안해. 내가 너무 심하게 말한 것도 있고..마음에 걸리더라. 그리고 더이상 너한테 손 안댈게. 너한테,"
"아니요.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내게 오히려 내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는 그에 지민 선배의 말이 생각나서 슬픔이 밀려들어왔다. 내 마음에서 스스로 멀어져가는 듯한 그이에 문 가까이로 다가가 문에 두 손을 댔다.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너무 사람이 제게 가까이 온 건 처음이라 무서워서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이요. 제발 제가 말한걸 마음에 담아두시지 마세요...
김태형이 내게 말할 뒷말은 더이상 내 몸에 손대지 않을게. 가까이 가지 않을게. 예상이 되는 그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아 끊고 애타게 그에게 말을 전했다. 좀 더 가까이서 들리는 내 목소리에 그가 문으로 가까이 왔다. 진심이야? 네. 진심이요. 태형선배는 그제서야 날을 가라앉히고 나긋하게 날 받아줬다. 고마워. 먼저 숙이고 나한테 와줘서. 어제 홧김에 말한거라 네가 상처받지 않았음 좋겠어. 나 용서해주는거지? 소리없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 나는 갑갑하게 조이던 상대방에게 그은 선을 조금 물려서 숨통이 트였다. 지민선배의 말대로 그의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곁에서 오래 함께하고 싶다. 날 감싸주는 그에 하마터면 열심히 공들인 화장이 눈물에 씻겨나갈뻔했다. 그만하고 이제 가자. 갑자기 문을 열려는 그의 행동에 깜짝놀라 문고리를 잠궜다. 지금 시간 별로 안남았는데 왜 그래? 나 괜찮다니까.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다시 문을 열려고 시도하는 그에 혹시 몰라 문고릴 잡았다.
"선배.. 저 지금 나가면 안됩니다. 혼자서 가야돼요."
간절하게 문을 잡고 안열어주니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태형 선배가 머리 위로 물음표를 가득 띄운채로 말했다. 뭐가 문젠데? 같이 가든, 같이 안가든. 이걸 말해도 되나 싶어서 한숨을 푹푹 쉬며 고민하다 여자인걸 태형 선배가 아니까 알려주기로 생각했다. 저.. 여자처럼 하고 있습니다. 훤히 보이는 하얀 어깨와 맨 다리가 갑자기 민망해져왔다. 힐을 신은 다리도 한번 휘청했으나 균형을 고쳐 잡고 또각또각 소릴 내니 태형 선배가 눈치를 챈건지 문에서 멀어졌다. 차 하나밖에 없어. 혼자 갈 생각하지 말고.난 괜찮으니까 천천히 내려와. 괜히 급하게 내려오다가 바보같이 발걸려서 넘어지지 말고. 말이 끝나고 호텔복도를 걸어나가는 정장구두의 소리가 들리다가 호텔의 유리문을 여는 소릴 듣고 잠군 문고릴 풀었다. 조용한 밖. 아무도 없는 듯 쥐소리도 들리지 않아. 방 안 짐들을 깨끗이 정리한 후 지민 선배에게 받은 피스톨(총)을 드레스를 걷어 올려 다리 위 가터벨트에 끼우고 드레스를 내린다. 그제서야 문을 열고 나와 어색한 걸음걸이로 또각또각 복도를 걸었다. 저 유리문 밖 라이트를 켜놓은 새로운 검은 차에 기대 팔짱을 끼고 기다리는 태형 선배의 흰 머리카락과 뒷모습이 보였다. 난 그를 좋아한다. 어떤 의미로 좋아하는 지는 판가름 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나름 설레는 기분과 문득 그의 반응이 궁금해져 노란 빛을 띄는 호텔의 대리석 바닥을 걷는 걸음걸이을 재촉했다.
난 크림슨 하트 패밀리의 보스가 되고 싶다. 사랑이나 원망에 얽매인다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