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언 하트?"
지민은 태형의 손을 잡고서야 겨우시 훈련장의 문턱에 서있을 수 있었다. 계단을 내려오며 입은 부상에 자릴 움직이기 힘든 상태가 되었다.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기지. 일단 지민 선배의 치료부터 하기로 했다. 우선 훈련장에 있는 무전기로 의료팀에 연락한다.
-지금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응급 상황, 응급 상황. 현재 추정 사망자 200명. 부상 1명. 삐익-.
태형 선배는 무전기를 매트 위로 던졌다. 아버지. 보스가 무사하신가 걱정이 되었다. 창고가 윗쪽에 있어서 다행이지 기지 아래였으면 기지가 넘어졌을지도 모른다. 고래도 그럼 가라앉았을거다. 그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 지금 저 배도 믿을 수 없다. 어떻게 크림슨을 쳐들어온거야. 다행스럽게도 엘레베이터도 빠르게 수리되었고 이미 요원들이 출동했다는 소식이 들려 마음을 놓았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Lion Heart'라 새겨진 커다란 선박에 불안한 기운이 돈다.
가만히 매트에 누워있는 지민 선배의 감긴 눈이 부어있었다. 창문틀 밖으로 고개를 내미니 뒤로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태형 선배. 내 손목을 꽉 잡고 샤워장으로 끌려갔다. 역시나 한 손에 잡히는 내 손목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런데 요원 때완 다르게 기분이 이상하다. 유리문을 열고 빛이 많이 들어오지 않는 구석으로 몰고가는 김태형에 속수무책으로 몰렸다. 발꿈치가 벽 두 면 사이에 닿자 양 팔로 가둔다.
김태형의 몸에서 훅 끼치는 레몬향. 그 눈빛이 감당이 안 돼서 눈을 질끈 감았다. 목부근으로 얼굴을 내미는 김태형. 따뜻한 숨결이 목덜미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다음 순으로 목에 닿는 건 태형을 처음 봤을 때 말랑말랑해 보이던 입술이었다. 쪽. 깊게 빨아들이고 어중간한 거리에서 다시 살냄새를 맡는다. 목에 닿는 숨에 꿈뜰거렸다. 목 선에 닿을듯 안 닿는 스쳐가는 말랑한 감각. 내 반응에 낮게 웃는다. 목덜미에 얼굴을 기대고 낮게 웃는 선배. 밀치고 싶지만 보복이 두려워 그저 목각인형처럼 서있는다. 반응이 없는 나에 뚝 그친 웃음소리. 고개를 들고 내 코를 검지로 살짝 튕긴다. 손끝이 코에 닿은 순간 자아를 찾았다. 지금 뭐하는 거지 이게. 아무리 내가 여자인 걸 들켜도 이렇게 당하고 있으면 안 되는데.
정신머리가 들자 볼살도 튕기는 손을 내쳤다. 눈을 피하지 않고 노려보니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는 선배. 다시 내 얼굴로 손을 들이미는 선배에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옆쪽으로 뺐다. 거기에 흥미롭다는듯 약간 거리를 두고 대면하는 선배는 비죽거렸다.
"오, 앙칼진데."
"약점잡고 괴롭히지 마시죠."
"괴롭히면 어쩔건데?"
…버틸겁니다. 어떻게든 버텨낼겁니다. 자존심을 밟고 내 머리 위로 서려는 김태형. 한참동안 그는 자신이 비치는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차마 깊은 눈동자를 오래 볼 수 없었다. 나를 꿰뚫고 있는듯한 그 눈동자를. 기싸움에 지고 고개를 떨궜다. 샤워부스가 달칵거리는 소리가 바로 귀 옆에서 들린다. 촤아아악-. 머리 위로 쏟아지는 물줄기. 두피부터 축축히 젖어오는 물기. 머리칼을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에 눈을 겨우시 떠 올려다 봤다. 그림자 진 눈은 생각을 읽을 수 없게 한다. 태형 선배는 샤워기를 제일 차가운 온도로 돌려 머리 위로 쏟았다.
"너 땀 냄새난다."
흠뻑 젖어 어푸거리는 나를 보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역시 예상대로 넌 젖은 게 예뻐. 내 손에 샤워기를 쥐어준다. 미끄러운 타일의 바닥이 물로 흥건하다. 태형은 미련하나 없이 이 샤워실을 나간다.
그리고 문 밖에서 여분의 옷을 물이 닿지 않은 곳에 던진다. 샤워기를 꽂고 젖은 채로 멍하게 있으니 반투명 유리문이 열리며 바디워시 하나가 데구르르, 발치까지 굴러왔다. 그리고 선배는 군더더기 없는 말을 뱉은 후, 휙 가버렸다.
"씻고 나와."
주워 든 바디워시는 레몬향. 나는 레몬을 좋아한다.
바다를 탐내는 자들.
Two Hearts.
w. 그루잠.
2#- new face.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아 빠르게 씻고 정장으로 갈아입은 후 샤워장을 나오니 요원들이 도착해 지민 선배를 치료하고 끝난 상태였다. 문을 열고 나가는 지민 선배와 태형 선배를 따라 엘레베이터를 향해 복도를 뚜벅뚜벅 걸어간다. 여자인 걸 들킨 이후로 아무말 하지않는 태형 선배에 답답하기도 했지만 차라리 이게 낫다싶어 고개를 도리도리하고 계속 걸어갔다. 멈추는 발걸음에 엘레베이터가 열렸고 선배들을 따라 엘레베이터 안으로 몸을 실었다. 정적. 내가 안쪽으로 들어가게 되고 태형 선배는 내 앞에 지민 선배는 나처럼 구석 반대편에 몸을 기댔다. 혹시나 지민선배한테 말한건 아닌지 태형 선배의 뒤통수를 보다 지민 선배쪽으로 눈을 돌리니 조용한 공기에 '뭘 봐'란 말이 크게 들렸다.
아닙니다라고 말하는데 태형 선배가 뒤돌아 보며 내 어깨에 팔을 들어 올렸고 자신의 옆구리로 땡겨 반쯤 안은 상태로 지민에게 보이니 뭐지싶은 지민 선배의 표정에 뭔가 불안했다. 자자 우리 이제 그만 뒷끝부리고 화해좀 하자고. 언제까지 어색하게 살거야? 우리 예쁜 후배 힘들잖냐. 예쁜 후배에 악센트를 강조하는 태형 선배에 동공이 흔들렸다. 마주치는 태형 선배와의 시선. 안 그렇냐? 하는 입모양에 어색하게 박자를 맞춰주었다.
"죄송합니다."
"됐어. 그때 그냥 장난 한번 쳐본거야."
씨발...? 귀찮은 듯이 귀구멍을 새끼손가락으로 후비는 지민. 쫄았냐? 라고 힉힉대면서 웃어보이는 지민 선배는 시발스러웠다. 처음봤던 지민 선배의 이미지는 그저 가오였구나. 내가.. 내가 여기와서 2주동안 가정부노릇을 했는데..!!! 이어서 그냥 더 놀고 싶었다고 말하며 웃음을 없애는 지민 선배에 나는 태형 선배를 죽일 듯이 쳐다봤다. 더욱 꽉 옆으로 안아오는 태형 선배는 그저 어깨를 으쓱 한번 하고는 날 놓아줬다. 이게 다 계획된 거 였다니..... 날 어쨌든간에 부려먹을 계획이었다니... 개새끼.
1층입니다.
엘레베이터의 알림에 지민 선배가 먼저 빠르게 나갔고 곧이어 따라가는 태형 선배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빡하고 쳤다. 아!! 하는 소리에 지민 선배가 가다 말고 돌아봤다.
무슨 일이야? 아, 아무것도. 정말 아무 일 없단 듯 김태형은 구부렸던 허릴 꼿꼿이 세우고 아픈 옆구리를 주물렀다. 입을 부리처럼 내민 지민 선배는 다시 가던 길을 갔다. 곧바로 뒤돌아 보는 태형 선배에 쫄지 않았다.
"민탄소, 뒤질래? 지금 뭐 개기는 거야?"
"아무 것도 안했습니다."
차렷 자세로 무표정으로 대적하는 나에 어이없어하는 태형 선배는 허, 기가 찬 콧소릴 내더니 그냥 크림슨 외부로 나가는 출입구로 향해 걸어갔다. 속으로 겁나 웃어대며 그를 따라갔지만 절대로 얼굴로 웃음기를 보이지 않았다. 저번에 말했다시피 감정표현을 안하는게 몸에 익었다. 살면서 감정표현을 잘 하지 않는 나는 그게 익숙했다. 삶을 살아가는 데도 큰 도움이 됐고. 재가 나뒹구는 간판바닥에 콜록콜록 대며 크림슨 외부로 나가니 아버지가 저 멀리 난간 끝에 서 있으셨다. 그리고 경직된 지민 선배의 얼굴.
김태형은 내가 바깥빛을 쬐기도 전에 나를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상황 파악이 안되는 이 곳에 어리둥절하였으나 저 앞으로 보이는 커다란 배 한척이 보였다.
세상에. 지금 크림슨 하트 안보가 무너진거야? 어떻게 영역을 침입했는데 감지도 못한거지? 김태형의 등 뒤에서 나올려고 하는데 선배의 짐짓 무거운 말이 조용히 들렸다.
"무기도 없는게 가만히 있어."
"등 뒤에 누구시죠?"
선배는 좆됐다는 표정을 짓고 나를 모두의 앞에 보였다. 근처의 요원들은 모두 죽어나가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향해 돌아봤고 왜 올라왔냐는 듯한 얼굴로 날 본다. 항상 저 이 위기상황에도 나오는 딸 바보 근성을 어떡하리오. 요원들이 죽어있어도 아버지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너네가 알 필요 없는데, 굳이 궁금하다면 말해줄게. 김태형이 나를 자기 앞에 세우고 대 놓고 모두 앞에 소개했다. 새로운 크림슨하트 패밀리 일원. 저 멀리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뭔가 곰곰히 생각하더니 곤란하단 듯이 이마를 긁적였다. 그 옆에 난간에 아슬하게 걸터 앉아있는 사탕을 빠는 남자는 나를 보더니 잠시 빠는 것을 멈췄다. 아까 김태형이랑 있던? 뭐라하는지 잘 안들리지만 얼굴표정은 미묘하게 바꼈다. 안그래도 위로 올라간 눈썹산이 더욱 더 치켜 올라갔다.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사자같이 매섭게 생긴 남자에 주먹이 꼭 쥐어졌다. 자 그럼 됐고, 본론이 뭐야. 나를 옆으로 밀쳐내며 그는 손을 정장바지 안으로 쑤셔 넣었다. 힘 없이 밀려난 나는 속으론 발끈하였다. 이 인간이 계속 막 대하네. 저 멀리서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얼굴을 피며 난간에 기대었다.
"뭐,. 별 건 아니고! 이것만 알리려고 왔어. 바다로 돌아온 신고식 겸으로."
"김남준. 용건만 말해."
"역시 민윤기 성격 아직 안죽었어. 세월 좀 가면서 물러질 줄 알았는데."
"저 시발, 보스한테 무슨.."
무례없이 바다의 왕에게 하는 말버릇에 난간으로 가까이 가려고 하니 김태형이 딱 손목을 잡았다. 참아. 지금 아니더라도 때가 올거야. 질릴 정도로 싸우게 될거라고. 조용하게 공기를 타고 흘러오는 목소리에 몸을 뒤로 뺐다. 설마 전쟁이라도 난단 건가.. 바다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에 아버지의 마이 끝이 흔들렸다. 숨 죽이고 이어지는 기싸움에 김남준이라고 하는 라이언하트 보스를 노려보다 그 옆에 강한 기운이 느껴지기에 저절로 시선이 옮겨졌다.
아까 잠깐 본 사자를 닮은 남자는 저 멀리서 나를 대놓고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 내가 그쪽으로 보지 않았을 때도 계속 날 끈적하게 보고있을거라 예측한다. 입술 안 물고 있던 사탕을 꺼내면서 나와 눈이 마주쳤다. 혀로 입술에 묻은 녹은 사탕을 핥아내는데 태형 선배가 날 볼 때보다 더 기분나쁘게 날 하나하나 뜯어서 분석하는 것만 같은 눈빛을 쏜다. 소름이 돋는 팔을 정장마이 위로 쓸었다.
"그래 인사도 뒤로 미루자. 반갑지도 않을테니. 주제는 라이언 하트 부활과 역전. 5년 전 전쟁은 시작에 불과 했지. 이제 본 게임 시작이야."
"그래서."
"천천히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지. 날짜가 잡히는 대로 연회가 열리는 장소와 날짜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보스."
아버지는 라이언 하트의 말이 끝나고 나서 그들을 등뒤로 외면했다. 그리고 크림슨하트 기지 간판위에 나뒹구는 시체들을 훑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확인 제대로 하라했지. 안그럼 목날아간다고. 내가 손 대기도 전에 죽어버렸네. 아버지가 보인 뒷모습에 김남준이라고 하는 라이언하트 보스는 배 안으로 들어갔다.
"가자."
그를 따라 난간에 매달려있던 사탕을 빨던 남자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고 일어나 배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내 치부를 샅샅히 파헤쳐버리는 듯한 눈빛에 착잡해졌다. 그리고 내가 눈치못핸 김석진이라는 남자는 나를 한번 힐끔 보더니 태형 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태형 선배는 입모양으로 뭘 봐. 쓰레기. 라고 하자 김석진은 무시하고 배 안으로 들어갔다. 입 안의 살을 깨무는 태형 선배는 아까 전부터 말을 잃은 벙어리처럼 배 쪽으로만 처다보는 지민 선배의 어깨를 쳤다. 지민 선배는 그에 태형 선배로 돌아봤고 태형 선배는 눈을 크게뜨며 지민 선배의 어깨를 꽈악 잡았다.
"허튼 생각하지마. 김석진은 안 돌아와. 돌아올 필요도 없다."
"…알아. 아니까, 두 번 말해주지 않아도 돼."
물 속으로 잠식하는 잠수함이 멀어지는 걸 물 안 그림자로 파악하자 아버지는 요원을 불렀다. 그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요원이 크림슨 내부에서 튀어나와 보스에게 걸어갔다. 폭발로 인한 시체들을 피해 발을 디디며. 몇명이야. 총 214명입니다. 여기 애들 불러서 치우고, 안보팀 물갈이해. 안보 이딴식으로 하는 놈들 뽑으면 너도 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 네, 보스. 말을 끝내고 요원은 서둘러 기지 안으로 들어갔다. 보스는 보통 나무 높이 만한 테라스 난간 위치를 도약해서 뛰어 올라갔다. 명령을 기다리는 박지민, 김태형, 그리고 나. 보스의 방으로 향하는 문을 여는 아버지는 박지민, 김태형 들어오고 탄소는 나중에 부르기 전까지 방에서 대기하고 있어. 네, 보스. 지민 선배가 먼저 시체들을 넘어 보스의 방으로 향하는 엘레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김태형은 내 손목을 붙잡고 있던 손을 떼어 자신의 정장주머니를 휘젓더니 어떤 쪽지를 내 손에 쥐어주었다.
"꼭 가서 봐라. 안 보면 덥친다."
선배는 공기에 흩날리던 재가 묻은 내 검은 머리카락을 탈탈 털어내며 씨익 웃어주곤 몸을 돌려 시체들을 밟고 지민 선배가 타는 엘레베이터로 들어갔다. 그 자리에서 나는 쪽지를 펼쳐보았다.
언제 썼는지 모를 휘갈겨쓴 쪽지. 라이언 하트 패밀리에 대해 상세히 적혀 있었다.
1.김남준: 라이언하트의 브레인이자 보스. 감정조절을 잘함. 성급하게 생각하지 않음. 묘한 설득력강한 말솜씨와 밑바닥부터 시작한 라이언하트를 성장시킴.
한 때 크림슨하트 패밀리의 일원. 사용무기는 총과 채찍. 마주쳐봤자 네 철벽으로 무시하는게 답이다. 묘한 탐색전을 하려고 할거니깐. 예전에 패배한 라이언 하트를 우습게 봤다가는 코 베인다. 그래, 패배했다고 놈들을 무시하면 골로 가는거야. 승리한 건 그저 운 때문이었어.
2.김석진: 내 친형. 크림슨하트를 배신했다. 주로 크림슨에 있을 땐 부상치료역할을 했어. J-hope형이 죽고 나서 박지민을 혐오함. 나도 왠지는 모른다. 근데 우린 서로 적이 됐으니 사이가 안좋을 수 밖에 없어. 박지민은 J-hope 형과 친했던 김석진이 돌아오길 기다려. 예전의 크림슨을 그리워 하는 박지민은 이전까지 술독에 빠져살았고. 아마 김석진은 라이언하트가 크림슨하트를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할거야. 전부터 전정국을 잘 따랐고. 정보요원이었던 사람이니까 너에 대해서 알지 못하게 멀리해라.
3.전정국: 마지막으로 젤 위험한 놈. 크림슨 하트에 있었을 때 부터 대단히 활략하던 놈이야. 15살일 때 말이지. 패밀리에서 제일 어리지만 거의 모든 걸 잘한다고 황금 막내라 불렸어. 아마 라이언하트를 끌어 올린 장본인일거야. 김남준은 보탬이 됐겠지. 크림슨하트의 전 보스는 전정국의 아버지셨어. 지금 보스에게 자릴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긴 탓에 전쟁이 터졌고. 올해 성인이 되었고 확실하게 눈에 보이도록 큰 전정국. 나도 좀 버거운 상대. 네가 전장에서 만난다면 그냥 도망쳐라.
더 필요한게 있으면 9층 6번째 방으로 와.
쪽지를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오만가지였다. 6년 전 아버지와 연락이 끊겼던 적이 있었는데 아마 그때 전쟁이 난거였나. 그럼 이제 두번째 전쟁? 내가 오자마자 갑자기 폭풍우가 한번 크림슨을 삼키고 간 느낌이다. 나를 그렇게 처다보던 사람이 전정국이였구나. 왠지 모르게 느껴지던 야생의 눈빛에 오한이 들었다. 귀한 정보를 담긴 쪽지를 정장자켓 안 포켓에 넣는데 어라, 내 증명사진이 없다. 분명히 있었는데.. 어디다 떨어뜨렸나..? 입은 옷의 주머니란 주머니를 다 뒤졌으나 소유하고 있는건 작은 무전기와 쪽지 뿐. 뭐 누가 주워서 버리겠지.
*
방 안으로 들어가니 뭐라적힌 A4 용지와 초대장 하나가 푹신한 침대위로 올려져있었다. 누가 들어왔지. 옷을 하나 둘씩 벗으면서 내용을 읽었다.
-딸, 비밀번호가 왜이리 허술해. 0000이라니 누가 들어가면 어쩔려고! 심플하기는. 비밀번호에 딸 성격이 보인다!
읽다 중간에 물을 마시는데 뿜을 뻔했다. 아버지? 어떻게 알고 들어왔지? 세상에... 입가로 흘린 물을 닦아내고 바지를 벗으며 계속 읽어나갔다. 아버지가 어떤 표정으로 이 글을 썼을지 상상이 되는 건 딸에 대한 아버지의 관심어린 사랑때문인걸까.
이거 보고나면 아빠한테 오지마. 아빠 갑자기 바빠서요. 그리고 저번에 보냈던 요원한테 왜 아빠 선물 안봤다고 했어. 얼른 봐. 딸도 보면 좋아할거야.
cf) 라이언하트에서 연회 초대장보내왔다. 이번엔 정말 중요한 자리니까 혼자서 몰래 예쁘게 하고 와.
아 맞다 선물. 이제야 생각났네. 2주동안 그대로 침대 위에 둔 커다란 상자와 함께 잤구나.. 고개를 돌려 본 상자의 자리엔 하나 더 큰 상자가 있었다. 뭔 선물이 이리 많아요 아버지. 거슬리는 옷을 다 벗고 가슴부터 성기까지 빈틈없이 붕대로 감은 채로 침대 위로 올라가 상자를 열어보니 여자한테나 필요한 용품들이 잔뜩 들었다.
생리대는 할 수 없으니 탐폰부터 시작해서 레몬향수, 색조화장품까지. 도대체 아버지는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다니까. 그래도 뭐 나름 생각해줘서 고맙다. 탐폰이랑 레몬향수는 유용하게 쓰이겠네.
근데 왠 여성용 속옷들이 많냐고. 들춰내면 들출 수록 과감해지는 물건들에 경악을 했다. 브래지어라고 하는 이 속옷을 두 손으로 들었다. 이거 도대체 어떻게 입는거니? 나는.. 속옷을 처음부터 입지 않았다. 차라리 남자속옷 트렁크를 입긴 했지. 어쨌든 이 물건들을 다 침대에다 펼쳐둔 채로 다음 상자를 열자 흰 드레스가 짜잔하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해양 마피아보스들 중 왕이란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진 적은 첨이다. 젠장할!! 나혼자 이걸 정리하고 준비해야한다니.
조급해진 마음에 초대장을 버벅거리는 손으로 열어보니 날짜는.. 내일. 내일 밤 9시였다.
시발. 라이언하트 개새끼들. 누구 제대로 엿먹이네. 마음이 급해져서 몸을 감싼 붕대부터 풀고보자하고 둘둘 손에 감기는 붕대를 끌어내리는 점점 내 가슴과 배, 그리고 아랫부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내가 싫어하는 여자의 선. 굉장히 싫지만 급하다. 뭘 할 줄 알아야 완벽히 여자처럼 분장할거아냐! 여자가 여자처럼 분장한다니. 참 웃기다. 속옷부터 입자 싶어서 팬티인가 하는 검은 망사 물체부터 다릴 끼워넣어 입었다. 그리고.. 브래지어? 앞부분은 가슴모양에 맞춰서 나온 것 같으니까 어깨에 끈을 걸고 뒤에 후크를 잠그려고 해보니 이게 잘 안되는 거다. 낑낑 거리면서 도전을 해봤으나 죽어도 안된다.
순간 2주 전 태형선배가 만남부터 내 등을 쓸어 속옷이 있는 지 없는 지 확인했었던게 생각났다. 이걸 누구 보고 도와달라할 수도 없고. 아버지에게 도와달라하기도 좀 그런데. 내가 여자인 걸 아는 사람은 김태형밖에 없다. 창밖을 보니 벌써 어두컴컴해져서 달이 바다 위에 떴다. 이 쯤 되면 복도에 다니는 사람 없겠지..? 서둘러 흰 목욕가운을 입고 맨발로 문 밖을 나섰다. 빼꼼 내민 방 밖으로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엘레베이터를 이 꼴로 탈 수 없으니 계단을 이용하여 9층까지 성큼성큼 올라갔다.
그리고 비상구 문을 여니 엘레베이터에서 나오는 피곤해보이는 태형 선배의 얼굴이 보였다. 앞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태형 선배는 비밀번호를 열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필요할 때 오랬으니까.. 괜찮겠지. 맨발로 살금살금 복도에 깔린 뽀송뽀송한 붉은 시트를 밟고 가 태형선배의 방 문을 조용히 두들겼다.
몇번 두들겼는데도 아무 소리없는 방 주인에 방 앞에 쭈구려서 몇분을 기다렸다. 부스럭거리는 방 안의 소리에 귀를 쫑긋하고 세워 듣곤 다시 문을 두드렸다.
"..누군데."
"저 민탄소입니다."
방 문으로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에 살짝 겁을 먹었다. 환히 복도를 비추는 빛이 세어나오고 내 눈 바로 앞에 보이는 건 바지정장은 그대로 입은 채로 상의탈의한 태형 선배. 구릿빛 세세하게 보이는 근육들에 얼른 시선을 옮겨 태형 선배와 눈을 맞췄다. 언뜻 그의 몸에서 레몬향기가 나는 듯했다. 살짝 피곤해 보이는 듯한 얼굴이지만 바로 내가 온 것에 호기심이 생긴 건지 눈썹 하나를 올리면서 날 위 아래로 훑었다.
"뭐야. 목욕가운은 뭐고. 왜 이런 꼴로 왔어. 급한 거 아니면 내일 와라."
"선배, 저 좀 도와주세요."
닫힐려고 하는 문에 김태형의 팔을 붙잡고 간곡하게 말했다. 내가 부탁을 한 건 첨이라 이상한 사람을 보는 것처럼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태형 선배는 닫을려고 했던 문을 열어주었다. 슬쩍 문 사이로 본 태형 선배의 방은 깨끗한 편인거 같았다.
"들어와."
그에 나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람처럼 환한 낯빛을 띄고 태형 선배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
같은 시각. 라이언 하트.
"보스. 아까 그 새로 들어왔다는 크림슨 하트 패밀리, 그 사람도 초대했습니까?"
"음.. 아마 그럴 걸? 총 5장 보냈으니깐."
"보스도 참, 정호석 형 죽은지 오래잖습니까."
"아 그렇지. 깜빡 했네. 그럼 누구 한 명 더 오겠지 뭐."
라이언 하트 기지 안. 사탕을 부숴 먹던 전정국은 아까 새로 얼굴을 보게 된 민탄소를 생각 중이다. 남자치곤 꽤 키도 작았는데. 멀리서 봐도 놈의 눈이 예뻤다. 몸도 얄쌍한게 꼭 여자처럼. 혹시 내가 게이인가? 아까 김태형이 자신 등 뒤로 숨기는 행동부터해서 왠지 그 뉴페이스가 맘에 거슬린다. 내일 볼 수 있을까 기대하다 보스에게 여쭈니 물론 온다고 한다. 크림슨 하트 패밀리의 전통으로 패밀리의 일원이 되는 사람은 몸에 폭탄을 설치하게 된다. 보스와 패밀리에 대한 충성심과 포부테스트였나. 겁만 주는 전통으로 남는 가 싶었으나 정호석이 기록을 깼다. 전쟁 막바지중 패배로 치닫는 크림슨을 위해, 민윤기를 위해 자폭을 했었지.
5년 전 그 때 일 빼곤 한번도 자폭을 한 역사가 없는 크림슨하트.
그런 피비린내 지독한 크림슨하트 패밀리에 들어간 사람.
아, 어떤 사람일까 궁금하다.
어느 한 곶에 위치한 라이언하트의 기지 맨 꼭대기 난간에 다리를 끼우고 바다에 비친 달을 쳐다보며 사탕을 깨부수는 정국과 내일 일어날 일을 예상으로 총 정리를 하고있는 남준.
그들과 함께 올라간 간판 위, 의자에 앉아 보스와 정국의 대화를 조용히 듣던 석진은 대화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썹사이가 좁아졌다. 정호석.. 그는 읽던 책을 덮곤 아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2#- new face.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