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에는 1부 구조가 다릅니다. 인물이 취하는 태도나 대사 등등 달라집니다.
정주행하시는 분들은 유의해주세요.
퇴고 전의 글입니다.
유독 길게 느껴졌던 복도의 끝이 닿았다. 유리문을 크림슨 하트란 글자가 새겨진 오른 손으로 민다. 발의 리듬을 벗어나지 않고 또각거리며 용케 따라온 새하얀 높은 힐. 호텔 안 조명이 유리 구두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문을 밀고 나가니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하늘에 여기저기 풀어진 구름에 가려진 언덕 위 태양. 대지와 바다는 노을에 물들고 있었다.
호텔 문 바로 앞에 자갈이 깔린 마당에 차가 대기되어 있다. 차문에 기대 먼 바다를 보는 김태형. 하얀 머리가 붉은 햇빛에 적셔진다.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아름답다. 호텔을 벗어나 문 앞에 제대로 섰다. 멍하게 허공을 보던 태형은 팔짱을 풀고 나를 향해 돌아본다.딱히 특별한 어떤 반응을 바란 게 아니었다. 그래도 김태형이니까. 내가 이런 모습, 이런 기대감으로 남들 앞에 선 적 없다. 사실 기대가 됐다. 어떤 말을 해줄지. 버벅거리며 호텔문으로 연결된 발판에 선다. 길고 검은 머리가 어색하다. 떨떠름한 기분을 숨기지 못하고 머리카락은 손으로 다듬었다. 입술에 발린 복숭아색 립글로즈가 부끄러웠다. 마른 팔다리와 상온에 드러난 어깨는 움츠러들었다.
그는 조금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기웃거린다.
"괜찮아보여요?"
가슴 밑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이 닿는 탑드레스의 감촉은 부드러웠다. 말이 없는 태형에 민망해진다. 괜히 물어봤나. 대답을 섣불리 하지 않는 놈에 나는 휑한 어깨 한 쪽을 매만졌다. 유리 구두에서부터 티아라까지 천천히 훑어보더니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으로 코를 찡긋한다.
"내가 화해한 지 얼마 안 돼서 직설적으로 말하기 싫은데… 별로다. 남자가 여장한 거 같아."
내심 기대는 했는데 평소같이 심술궂은 태형의 모습에 조금 실망스러웠다. 무슨 반응을 원한건지 실망하는 내가 밉다.
내심 기대는 했는데 평소처럼 다시 돌아온 그의 모습에 조금 실망스러웠다. 무슨 반응을 원한지 실망하는 내 스스로를 자책했다. 뭘 바라니? 그저 그와 화해한 것뿐인데. 그를
잘 알지 못하는 나라서 그저 그렇구나. 저 사람은 내 바뀐 모습에도 아무런 느낌이 없구나. 그냥 나는 패밀리 중 숨어 들어온 놀리기 재밌는 여자후배 하나라고 생각하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는게 내 맘이 더 편할 것 같았다. 난 그래도 무언가가 바뀐 것 같은데. 기분이 다운돼서 머리에 얹은 티아라를 빼 손에 쥐었다. 횡한 머리 속은 부끄러웠다. 정말
뭘 바랐길래 이렇게 기분이 안좋은거니. 대충 훑어보다 휙 고개를 돌린 그는 입을 삐쭉이며 손목을 올려 시계를 보곤 늦었다며 먼저 차에 타라고 한다. 바닥을 치는 기분에 허
벅지까지 달라붙어오는 드레스의 아래 부드러운 실크 레이스를 만지작거리다 내려가기 어려운 계단을 빠르게 내려와 푹푹 자갈속에 들어가는 힐에도 불구하고 성큼성큼 가서
뒷좌석 문을 열고 쾅 닫고 들어갔다. 앉으니 발가락이 아파왔다. 너무 빨리 걸어와 충격이 하이힐코쪽으로 쏠렸나보다. 한숨을 푹 쉬고 손에 쥔 티아라를 반대쪽 구석방향으로
약하게 공중으로 던졌다. 한참 들어오지않는 선배는 내 모습이 그렇게 이상해서 보기 싫은지 한동안 차에 등을 기대 들어오지 않았다. 갑자기 쪽팔려서 드레스고 뭐고 찢어서
정장으로 갈아입고싶어졌다. 보스가, 아버지가 내린 첫번째 임무니까. 거절할 수 없었다. 잔뜩 몰려오는 피곤함에 다릴 꼬고 팔짱을 껴서 눈을 감았다.
보스에게서 온 연락은 지민이와 함께 라이언하트의 섬에서 열리는 가면무도회장 위 만찬이 열린 연회장에서 만나잔 것. 탄소만 먼저 두고오란 보스의 말에 이상함을 느꼈다.
왜? 쓸데없이 반항심이 들었다. 탄소와 관련된 일이라 더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호텔방 안에서 자신의 칼을 손수건으로 닦던 박지민한테 가 오류가 있는 보스의 명을 전했다.
싱긋 웃으며 토 달지 않고 일어선 지민은 내 느낌상 슬퍼보였다. 탄소가 많이 힘들어하더라. 왜 싸운지는 모르겠는데, 네가 선배니까 양보해줘. 내 어깨를 툭툭 쓸어내린 지민
은 호텔복도로 나갔다. 먼저 보낸 박지민의 뒷모습이 눈에 밟혀 창문으로 가 새로 온 차에 들어가 시동을 거는 것을 내려다 보았다. 지민이는 내가 아직도 화나 있다고 생각하
나본데 그렇지 않다. 이미 난 언덕에서 내려다 본 탄소의 모습에 화가 거의 풀려있었다. 꽤 어벙해 보이는 게 예뻤거든. 얼굴로 스며드는 햇빛이 탄소 얼굴의 윤곽을 비춰주는
데 눈이 예뻤다. 내 손에 잘 움직여주는 새 물건에 흥분해서 한 발 더 쏴보라 했으나 총을 내리는 탄소의 포커페이스가 무너짐을 보고 희열을 느껴서 선배 말을 따르지 않는 그
녀에게 뭐라하려다 말았다. 탄소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지민에 손 내려라하고 정색하려다 또, 또 그 슬픈데 괜찮은 척 하는 지민이의 전쟁 이후로 습관적으로 생긴 표정에 입을
다물고 호텔로 들어갔다. 그리고 높은 위치에 있는 창문으로 밖을 내려다 보니 혼자 그 쓸쓸한 자리에서 눈을 감다 들어가는 탄소를 볼 수 있었다. 갑자기 돌변해서 날 밀어낸
탄소는 명백히 잘못한 게 맞으나 나도 빡침을 참지 못하고 입밖으로 뱉어버린 잘못이 있기에 사과할려고 했다. 탄소는 영악한게 아니라 서투른 거거든. 나도 마찬가지고. 불안
감을 낮춰주고 싶었는데 갑자기 내 마음대로 해버리니 탄소도 놀랐겠지. 그래도 만지지 말래도 만질거다. 내가 그렇게 쉽게 물러날 사람은 아니라서 탄소에겐 미안하게 됐다.
탄소를 데리러 내려가니 방 안에서 우물쭈물 거리며 자기가 먼저 사과한다. 귀엽게. 마음고생 좀 했나보다. 탄소에게서 내가 큰 존재가 된 것 같아 기뻤다. 한편으론 내가 세디
스튼가 싶었다. 진심으로 미안하다며 만지지 말라며 했던 말을 취소한다는 탄소의 애절한 말에 입고리 한 쪽이 올라갔다. 진짜 말투는 무뚝뚝한데 귀여웠다. 그렇게 생각하는
내가 미친건가. 다 괜찮다며 나오라하니 문을 잠구는 수상한 탄소에 눈치챘다. 왕께서 최초로 따님을 모든 해양의 보스들 앞에 소개하려고 하는 구나. 그래서 탄소가 급하게 내
게 찾아와 속옷 입는 걸 도와달라한거고. 한발 물러서 탄소를 호텔 아래서 기다리는데 넘실거리는 바다의 깊이를 상상하며 시간을 떼우고 있자 탄소가 어기적거리며 유리문을
열고 나왔다.
대답을 기다리는 탄소의 얼굴은 기대감에 차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일부로 그녀에게 별로, 남자가 여장한 것 같다고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리고 탄소에게 고갤 돌려 딴청을
했다. 숨이 멎을 뻔 했다. 마치 결혼식을 앞두고 드레스를 입은 아내가 내 눈 앞에 나타나 감격을 받고 입을 다물 수 없는 것처럼. 하마터면 감정을 나타낼 뻔 했다. 올라가는 입
꼬릴 내리기 위해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에 뒤로 탄소가 힐을 신었는데 무식하게 걸어와 뒷좌석으로 문을 열어 들어갔다. 쾅하고 닫히는 문에 그제서야 웃을 수 있었다. 진심
으로 참지 못했으면 탄소의 손을 붙잡고 다시 호텔 안으로 끌고 들어갈 뻔 했다. 그런 욕구를 참은 나를 대견해 하며 마음껏 눈에 남은 여운을 즐겼다. 예뻤다. 머리카락은 자신
의 머리카락은 아니지만 탄소가 머리를 기른다면 그 모습일 것이다. 머리 위엔 아름답게 빛나는 티아라. 가슴골이 보이는 탑드레스는 잘록하게 들어간 탄소의 허리와 잘 빠진
골반을 감싸 딱 봐도 부드러워 보이는 질감에 손을 뻗고 싶었다. 정장바지를 입고 있어서 몰랐던 예쁘고 하얀 다리 밑으로 새하얀 힐을 딛고 있었다. 거기다 얼굴도 뽀얀데 그
위로 분홍끼가 도는 볼과 입술. 입술은 촉촉해보였다. 눈을 감을 때 마다 보이던 분홍 섀도우는 더욱 그녀가 복숭아처럼 탐스럽도록 보여줬다.
예뻤다. 눈부시도록 예뻤다. 민탄소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놀리는 재미도 쏠쏠한 그녀를 아끼다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내 품으로 안고 싶어졌다.
너무나 좋지만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소리없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다 시계를 보니 아, 늦었다. 마저 웃다 차 문을 열고 들어가니 뒤에 눈을 감고 새근새근 잠자는 공주님이 있었
다. 머리 위 빛나던 티아라는 그녀가 이유모를 화풀이로 구석에 던져져 있었다. 그걸 집어 내 자리 옆에 두고 주행할 준비를 한 차를 느리게 핸들을 돌리며 운전하기 시작했다.
혹시나 잠에서 깨어날 까봐. 유유히 호텔의 장소를 빠져 도로 안으로 들어와 늦은 시간이지만 저번 운전과 달리 천천히 운전했다. 백미러를 돌려 뒤를 보니 눈 한번 뜨지않고
잘자는 그녀가 보인다. 그녀에게 직접하지 못한 말을 마음속으로 곱씹으면서 그제서야 그녀 몰래 편안히 웃을 수 있었다.
'예쁘네.'
조용한 어두운 도로를 사이드 라이트 하나로 밝혀 달리는 차 안에선 괜히 내 심장이 뛰는 소리가 크게 들리는 듯 했다.
바다를 탐내는 자들.
Two Hearts.
w. 그루잠.
5#- 연회장으로.
반짝이고 보석이 줄줄이 달려 백색의 아름다운 샹들리에 아래 해양 마피아 보스들이 길고 거대한 식탁의 곳곳에 앉아있었다. 나는 식탁의 맨 끝, 그들의 왕의 자리에 앉아 바로
반댓편에 뻔뻔하게 앉아있는 김남준의 웃는 얼굴이 역겹지만 마주하고 있다. 이것 봐라? 크림슨 하트를 대적할 만한 놈들이 나타나자 내 아래에서 빌빌 기던 마피아보스들이
반으로 편이 나뉘어졌다. 눈에 보이게 나눠진 편수에 콧방귀가 절로 나온다. 전쟁 때 칼과 총을 겨눴던 그들은 허술했었다. 대지로 쫓겨난 그들이 이를 갈며 성장시킨 라이언
하트의 스케일에 해양의 보스들은 겁을 먹었다. 위상 떨어지게. 그와 얼굴을 멀리서라도 마주하니 별 반갑지 않은 옛 생각이 새록새록 나니 불편해졌다.
(몇 줄은 수정이 안 되네요. 2017년 퇴고때 다른 모습으로 오겠습니다.)
전대 보스가 어린 열다섯살 정국을 그의 책사인 김남준에게 맡겼었지. 신임을 많이 받던 김남준은 나와 동갑이다. 나도 그 못지 않게 보스에게 끊임없이 호출을 받았다. 그러다 갑자기 폭탄같은 유언을 남기도 돌아가셨고. 말도 안된다며 유언을 거부하고 어린 정국을 왕 위로 올리겠다며 전쟁을 선포한 장본인. 상대방을 기분 좋게도 아님 나쁘게 할 수도 있는 저 웃음을 유지했었다. 그때도. 우린 크림슨 하트의 동료이자 가족이었었다. 그러나 보스의 자리, 권력에 눈이 멀어 서로에게 남기지 못할 상처를 줬었다. 그리고 피해자, 정호석. 그는 나를 보스로 올리고자 그 잔혹한 게임에서 자신의 몸 안 핵을 폭발하시키는 자살을 택했었다. 그로 마지막으로 남은 라이언하트의 섬은 흔적도 없이 날아가버렸고 크림슨하트의 마지막으로 남은 섬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의 선택을 말리지 않은 나를 애증하는 지민이는 라이언 하트 패밀리를 마주 할 수 없어 내 대각선의 크림슨 하트 패밀리의 좌석에 앉았다 전정국을 본 순간 구역질을 하며 연회장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배신자 새끼 김석진도 결국 연회장을 나가버렸다. 김남준, 정호석이 죽을 때도 넌 그 웃음을 유지했냐고 묻고 싶다.
손을 깍지를 끼고 팔꿈치를 식탁 위로 기대 웃는 상을 보여주는 김남준의 옆자리, 굉장히 거슬리는 훤칠한 얼굴. 전정국. 그가 어렸을 땐 마냥 귀엽고 뭐든 척척 잘해내는 막내
로 기억했었다. 보스의 아들. 지금은 성인이 된 지 얼마 안됐지만 얼굴 선도 굵직하게 이미 남성의 호르몬을 풍기는 그런 어른으로 훌쩍 커버렸다. 지금은 상상 이상으로 실력
이 향상됐을 거다. 각 패밀리의 보스와 패밀리들이 모인 자리에 꽤나 꾸미고 온 여인들은 계속 흘끔흘끔 그를 훔쳐봤다. 흰 셔츠와 넥타이를 맨 전정국은 머릴 시원하게 가르마
를 타 넘겼다. 흠씬 주는 그녀들의 시선을 즐기며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와인잔을 들어 그 안 출렁거리는 붉은 와인을 흔들었다. 크림슨하트가 여자를 받아주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 이런 것 때문이지 않을까. 걸림돌이 되기 때문.
갑자기 나타나 크림슨 하트의 기지에 서프라이즈 선물로 폭탄을 터뜨린 것부터 해서 크림슨 하트의 쪽이 아닌 라이언하트 쪽에서 연회를 여는 것에 찬성한 놈들, 위협적인 라
이언 하트의 등장에 크림슨하트 패밀리의 눈치를 보다 해양 마피아 패밀리의 대다수가 찬성했다는 것. 그리고 박지민과 김태형의 부재. 모든 것이 마음에 안들었다.
중간에 있는 라이언 하트 소유지 만. 굳어진 내 표정에 패밀리 보스들의 살짝씩 긴장하는 얼굴이 눈에 띄였다. 바다의 마피아보스들 중 왕만이 앉을 수 있는 이 화려하고 무거
운 의자의 팔걸이 앞쪽 단단한 부분에 난 손끝을 부딪히기 시작했다. 양끝 테이블의 사자와 고래에 기가 눌려 분위기조차 정적이었건만 왕의 작은 소음에 눈을 딴 데로 돌리고
있던 전정국이 와인잔에서 관심을 끊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혐오하는 감정을 숨기고 무표정을 유지하며 손가락을 놀렸다. 톡톡.
그러자 김남준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폐하."
"뻔뻔하네. 대지로 쫓겨난 지 얼마됐다고 또 얼굴을 내 앞에 내밀어?"
"그러게요. 5년 밖에 안됐나요? 생각보다 짧네. 난 또 10년씩은 되는 줄 알았는데."
그간 고생한 것에 세월이 길게 느껴졌겠지. 마피아의 법도와 사건,사고처리를 맡은 마피아 로어들은 전쟁이 끝난 후 패배한 그들에게 참혹한 대가를 내렸다. 마피아 로어. 그들
은 왕의 명령으로만 움직일 수 있는 단체다. 마피아 안에서도 지켜야 될 법이 있다. 그들은 그것을 위반한 놈들을 처리하는 것이고. 나는 전쟁에서 왕의 자리를 거머쥔 후 놈들
을 대지로 쫓아보냈다. 이번에 일어날 전쟁의 끝엔 아마 두 개의 하트 패밀리 중 하나를 몰살 시킨다는 판결이 날 것이다. 내전의 끝을 내는 것이지. 5년 전 쫓겨난 그들을 난 브
로큰 하트라고 불렀으나 그들은 그들 자신 스스로 대지의 왕, 라이언 하트가 되었다. 놈들은 또 다시 전쟁을 선포하겠지. 바다의 왕인 내게. 이번 일에 내 딸이 관여될까 걱정이
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아이를 전쟁으로 데리고 가야 한다는 사실에 머리가 아파왔다. 그래서 생각해낸게 어서 결혼을 시켜 보내는 것이다. 적당하고 믿을 만한 놈에게 보내 안
전한 삶을 보낼 수 있도록. 해양의 상위 보스들과 관련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처음으로 내 딸을 소개할 것이고 눈도장을 찍을 것이다. 그들도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노
력할테고. 물론 라이언하트가 없는 자리에서 말이다. 그들에겐 절대로,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딸을 넘겨 줄 수 없다. 그들이 원하는 말이 끝난 후 자리를 벗어나면 딸이 도착
할 것이다. 잠시 서로 다른 생각을 하던 도중 라이언 하트 보스, 김남준이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오늘은 얼굴만 보고 싶어서 모두 소집한거고 별 악한 의민 없어. 아직 전쟁 얘기를 꺼내기엔 모두 평화로워보여서 말야. 마음을 준비할 기간을 주는거야."
"아,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 있어. 5년 간 라이언하트를 책임지고 이끌던 나 김남준은, 크림슨하트 전대 보스의 아들 '전정국'에게 자리를 넘기기로 했다."
5년도 길었음 길었어. 보스의 말 대로 정국이는 잘 자라줬고, 다들 예전부터 봐서 알겠지만 전정국은 누가봐도 보스의 자질을 갖춘 아이다. 이제 성인이 된 그에게 보스직을 물
려주고 그를 도와 라이언하트를 이끌도록 할 것이니 모두 그렇게 알도록. 김남준은 씨익 웃으며 그 자리를 일어났고 그의 옆에 앉아있던 전정국을 일으켜세워 자신의 자리에
앉힌 후 자신은 전정국의 자리에 앉았다. 저 새파랗게 어린 놈이 보스? 차라리 김남준이 보스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더 안정적일텐데 무슨 도박이지. 나와 마주보게 된 전정
국은 맹사자의 눈빛을 띄며 나와 눈을 맞췄다. 크림슨하트의 역사상 제일 치욕스러운 일일 것이다. 왕과 같은 위치에서 얼굴을 마주하다니. 톡톡 거리던 손을 멈추고 팔걸이를
꽈악 잡았다.
"폐하께 인사드리겠습니다. 라이언하트 2대 보스가 된 전정국입니다."
거의 의례적으로 박수를 치는 보스들의 손들을 잘라버리고 싶었다. 씨발.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됐다고 다시 일어서는 라이언하트 패밀리에 눈을 치켜떴다. 왕보다 자릴 일찍 뜨
는 새끼들. 역시나 너희는 날 보스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만 자리를 파하도록 하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다음 연회장은 크림슨하트쪽에서 열어주셨슴 좋겠
습니다. 그때 제대로 된 이야길 하도록 하죠. 그저 오늘은 저희가 바다로 돌아왔단 것,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한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끝입니다. 전통을 깨뜨리고 무례하게 이
쪽에서 연회를 연 것을 사과드립니다, 폐하. 그럼 이만... 말이 끝나자 라이언하트 패밀리는 자리에 일어나 2층인 연회장의 문을 열고 1층 가면무도회장 쪽으로 계단을 내려갔
다.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연회를 열어서 하잔 것. 그에 나도 일어나니 다른 사람들도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잠시 . 연회장으로 나가려고 하는 그들을 멈춰세우고
다시 자리로 고갯짓했다. 여인들은 다 나가주도록.
"잠시 할 일이 있다. 조금만 기다려주도록. 이 자리에서 20년동안 숨긴 내 딸을 너희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내 딸을 약혼할 상대를 구하니 많이 고려해
주길 바라."
그에 웅성웅성하는 보스들과 패밀리소속인들 사이는 시끄러워졌다. 그 사이,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민탄소, 또각또각 힐을 신고 걸어오는 곱게 치장하고 온 내 딸이었다.
생각보다 너무 예쁜 내 딸아이의 모습에 그제서야 표정을 풀고 웃으며 반길 수 있었다. 어서와, 내 딸. 하얗고 가는 딸아이의 손을 잡고 그들 앞에 나섰다. 인사해. 바다의 위대
한 보스들이야. 말로만 듣던 그들을 직접 두 눈으로 본 탄소는 긴장한게 티가 났다.
"민탄소라 합니다."
자리에 일어선 보스들은 격식을 차려 탄소에게 허리 굽혀 인사했고 굳은 탄소의 어깨를 주물렀다. 사랑하는 내 딸아 걱정하지마. 잘 될거야. 서서히 그들사이에 들어가 천천히
인사를 나누는 내 딸을 뒷모습을 보고 전정국처럼 성인이 된지 얼마안된 탄소에게서도 여성미가 느껴졌다. 세월은 정말 겉잡을 수 없이 흘러갔었구나.
남준 형은 김석진을 데리러 갔고 모두 보는 앞에서 보스가 된 후 계단을 느리게 내려가 가면무도회장의 문을 열고 차가운 공기를 마주한 나는 자리에서 없었던 김태형과 그 뉴
페이스를 찾던 도중 연회장 뒷문과 연결된 뒷계단으로 뛰어오는 두 인형을 보았다. 하늘 위로 뜬 보름달에 비친 눈에 띄게 새하얀 드레스와 흰 몸. 힐을 신은 어떤 여자와 손을
꼭 잡고 검은 정장에 흰 머리카락을 날리며 해변에서 뛰어오는 김태형. 멀리서 본 그 둘의 모습은 질투날 정도로 잘어울렸다. 근데, 저 여자 어디서 봤는데. 이상하게 뚜렷하게
보이는 그 여자의 얼굴에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건물의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겨 다가갔다. 계단 아래로. 크림슨하트 패밀리는 여자를 받지 않는데 저 여잔 어디 소속이지.
해변에서 길을 나눠지는 그 둘. 김태형은 계단을 올라가다 다시 내려와서 가면무도회장에 달려있는 화원 쪽으로 뛰어갔다. 박지민과 김석진이 연회장에서 나가 간 곳. 이미 남
준 형이 그들을 찾으러 가서 김태형을 신경쓰지 않고 순백의 그녀를 따라 계단을 끝까지 올라가 뒷문의 틈으로 안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보이는 그녀의 자세한 모습. 순수하게
아름다운 모습이 더럽히고 싶을 정도로 예뻤다. 그리고 익숙했다. 그녀의 손을 잡고 모든 보스들 앞에 선 민윤기는 자신의 딸이라 소개시켰다. 한번도 본 적 없고 들은 바로는
딸 한명이 있단 것 밖에 없었다. 민윤기는 5년 전 자신에겐 딸이 있다고 흘려 말한 적이 있었다. 곱게 미소를 지으며 티아라를 쓴 그녀는 끄덕이며 인사를 주고받았고 매끄러운
연꽃의 색을 띄는 그녀의 입술이 오물거렸다.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를 감싸면 잡혀줄 것 같이 여려보였다. 잘 뻗은 다리와 하얀 어깨. 드레스 위로 드러난 가슴골로 시작해서
훑은 가슴은 큰 편이 아니었는데도 예쁜 모양이었다. 아까 자리에 있던 나를 탐하고 싶어하던 순수하지 못한 그녀들과 달랐다. 그러다 드레스에 가려진 허벅지 안 가터벨트에
피스톨, 총기 하나가 끼워져 있는 걸 나만 눈치 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소곳한 그녀가 해맑게 웃어보인다.
그 여인의 외양을 자세히 관찰하다 드는 생각은 순수하지 못했다.
갖고 싶다.
5#- 연회장으로.(완료)